# 232
2부 29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햇살이 좋은 이른 아침, 캠프 중앙에 마련된 큰 공터에는 캠프에 거주하고 있는 생존자 전원이 모여 무리를 이르고 있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는 이번에 새롭게 합류하게 된 리클스 마을 주민들과 우리 일행들이 깨끗한 옷을 갈아입은 채 모여 있었다.
재회와 여독의 여파로 그날 인사를 나누지 못한 우리와 캠프 사람들, 이틀 만에 감기가 깔끔하게 나은 채연이는 나에게서 받은 검은색 에덴 모자를 꾹 눌러쓰며 사람들에게 말했다.
“저희 할아버지, 삼촌 그리고 아버지세요.”
채연이는 별다른 미사여구 없이 우리를 자신의 가족이라고 소개했다.
비록 그 가족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지만 우리 사이에 피보다 진한 끈끈함이 있다는 것은 그 어떤 사람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소개를 받은 노인과 용팔이는 채연이 캠프 사람들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고 나도 모자를 벗으며 그들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비록 아이가 이끄는 사람들이지만 한명 한명이 존중받아 마땅할 생존자들이다.
더글러스 캠프나 광신도들의 무리 대부분이 성인 어른이었던 것과는 다르게 채연이네 캠프의 구성인원은 상당히 다양했다.
일단 아이들로 보이는 무리가 한 10명쯤 있었고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도 10명 내외로 존재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나이대가 다양한 성인 남녀였는데 특이할 만큼 남녀성비가 균등해 보였는데, 하는 일에는 크게 구별을 두지 않는지 대부분 복장도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역할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대중 속에 조용히 앉아있던 우리를 향해 어떤 흑인 할머니가 조용히 읊조렸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구먼….”
이들에게 우리는 어쩌면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해준 아이들의 가족이라는 것에서 일단 적의는 사라졌고 이쪽을 쳐다보는 그들의 눈빛에서 묘한 호의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YES를 외칠 수 없듯이 그 대중 속에서 일부 경계와 적의가 느껴지는 시선도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차차 해결하기로 하고 아무 대답 없이 입을 다물며 짧은 인사를 끝냈다. 그리고 소개가 끝나자 내 옆에서 수줍게 웃은 채연이가 말을 이어갔다.
“앞으로 저희와 함께 캠프를 꾸려가는 일을 도와주실 거예요. 다방면으로 경험이 있으신 분들이니까, 어려워 말고 같이 일했으면 좋겠어요.”
에덴의 어른들을 만난 채연이는 나에게 당연하다는 듯 캠프의 통솔권을 넘기려고 했다.
평소 받고 있었을 압박감과 부담감을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예상했던 행동,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나와 노인은 재빨리 거부 의사를 밝히며 그러지 말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물론 통솔권을 받는 게 쉘터를 건축해야 하는 우리로선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캠프에서 처음 본 외부인이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껄끄러운 관계를 생성할지도 모르는 상황.
더군다나 외부인을 경계해야 하는 세상에서 이토록 좋은 호의를 보여주는데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세상 사는 게 다 그렇듯 잘 돌아가고 있는 톱니 위에 들어가고 싶다면 자신이 좋은 톱니바퀴가 되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 에덴으로 들어가던 그 날이 생각났다.
“전투에도 참여합니까?”
그리고 침묵이 감돌던 그 순간 대중 속에서 조용히 걸어 나온 한 여성이 번쩍 손을 들며 물었다.
채연이네를 따라 탈영했다는 군인 중 한 명으로 보이는 그 여성군인,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올리버 중사는 깜짝 놀라 팔을 붙잡았지만, 그 여군은 올리버에 손을 뿌리치며 대중 앞으로 걸어 나왔다.
부드러운 캘리포니아 억양에 상반되는 까칠한 어투. 나는 이 여군의 질문 속에서 묘한 경계와 함께 우리를 향한 불신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 불신은 피아구분이 아닌, 민간인처럼 보이는 우리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요.”
그리고 그 날카로운 질문에 채연이 대신 대답한 것은 나였다.
전투에도 참여하냐는 그 말, 어쩌면 이 여군이 입고 있는 군복에서 오는 자신감과 외부인을 향한 텃세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짧게 대답해주며 불퉁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 여군과 마주했다.
메리제인과는 다르게 사병으로 보이는 그 여군은 고집이 느껴지는 얼굴과 마치 복숭아처럼 붉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내 대답에 삐죽 입을 열어 말을 이어 가려가는 그 순간 사람들 사이에서 재빨리 걸어 나온 올리버 중사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클로에 병장, 당장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우리를 향한 무례한 태도에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올리버 중사와 다른 일행으로 보이는 남자 신병 하나가 어찌할 줄 몰라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올리버 중사에 서슬 퍼런 명령에도 클로에라고 불리는 이 여군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나를 노려봤고 이내 미간을 작게 찡그린다.
얼굴만 봐도 불만이 잔뜩 서려 있는 클로에 병장은 어째 우리의 등장이 반갑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10초라는 짧은 시간이 지나자 클로에는 나와 노인을 향해 투덜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중사님,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뒤를 맡깁니까? 거기다 이 사람들 민간인 아닙니까.”
클로에 병장은 올리버 중사에게 대답하고 있었지만, 마주 보고 있는 눈은 결코 내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 미군에서 병장계급에 의미를 생각해본다면 그녀는 결코 햇병아리가 아니다. 그리고 햇병아리가 아니기에 오는 프라이드는 클로에 병장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용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 에덴에 처음 들어왔을 때 느낌이 난다고 했더니 그 예감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 나는 도끼눈을 뜨려는 채연이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주며 클로에 병장에게 대답해주었다.
“걱정하지 마십쇼, 저희는 일행들끼리만 움직이겠습니다.”
여기서 서로 얼굴 붉히고 상대를 찍어 눌러 봤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적보다 무능한 아군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호흡이 맞지 않은 사람과 움직이는 건 이쪽에서도 사양이었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 병장은 설마 이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작은 이채가 어린 눈을 빛내며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순간 점잖게 가라앉은 분위기, 저 뒤에선 올리버 중사가 살며시 눈을 감으며 감사 인사를 보냈다.
“…그러길 바랍니다.”
방해하지 않겠다는데, 더 할 말이 있을까.
내 명확한 대답에 클로에 병장은 조용히 입을 우물거리며 대답했고 나와 노인은 작게 콧방귀를 내뱉으며 웃었다.
이런 일이 어디 한두 번 있는 줄 아는가? 나와 우리 일행들은 다른 의미로 병아리인 클로에 병장의 창창한 앞날을 좋은 마음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양보로 들끓을 것 같던 분위기는 듣기 좋은 새소리처럼 가라앉았고 한쪽에서 벼르고 있던 채연이가 귀엽게 입을 삐죽이며 클로에 병장에게 물었다.
“병장님, 더 문제 있을까요?”
“아니요, 없습니다.”
앙증맞은 뱁새의 위협이었지만 클로에 병장은 순순히 눈을 깔며 얼굴에 붙어있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재빨리 지웠다.
까다로운 성격이긴 해도 아무한테나 들이박는 유형은 아닌 모양이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나무들 사이에서 내리쬐는 밝은 햇살은 캠프 공터에 천천히 내려앉았고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난 주민들과의 인사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지금 시각은 오전 8시,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일 시간이었다.
* * *
“뒤만 따라간다? follow?”
“그래, 그래. 따라간다.”
메리제인과 노인은 완전히 무장한 상태로 풀숲에 앉아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한쪽은 한국어, 또 한쪽은 영어였기에 이야기가 통하지는 않지만, 유난히 우리 일행들에게 적극적인 메리제인은 그 짧은 시간 동안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큰 노력을 했다.
그리고 그 덕분인지 그녀는 노인이 하는 짧은 명령 정도는 눈치껏 알아들을 수 있게 되었고 나에게 지금 공부를 해서 되겠냐고 구박하던 노인도 늘그막에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다시 모자를 눌러쓰며 용팔이가 내미는 소총과 권총 탄약을 받아들며 총기에 실탄을 장전하고 조정 간의 위치를 안전으로 바꿔놓았다.
“나도 같이 갈래.”
그리고 아까만 해도 공손하게 존댓말을 하며 다 커버린 딸을 흉내 내던 채연이는 어느새 내 팔에 찰싹 달라붙어 1시간째 칭얼거리고 있었다.
뒤에서 곤란한 얼굴을 한 채 서 있는 강수련과 절대 안 된다는 얼굴로 다시 한 번 고개를 젓는 나. 에덴에서 늘 하던 칭얼거림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나는 권총을 허벅지 홀더에 끼워 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별별 애교를 다 부리는 채연이의 이마를 검지로 딱 쳤다.
“엄마랑 같이 집에 있어.”
받아주면 캠프 출구까지 따라올 아이다.
단호한 내 대답에 울상을 지은 채연이는 검지로 맞은 이마를 슥슥 문질렀고 이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강수련은 천천히 다가와 아이를 안아주었다.
우리가 캠프에 도착한 지 이틀째, 아직 수송기는 출발하지 못했고 짧은 시간 동안 파악한 캠프의 물자는 "억!" 소리가 나올 정도로 부족했다.
물론 외부로 나가는 인원이 물자가 있을 만한 곳을 수색하고는 있다지만 영 어설픈 게 썩 믿음이 가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쉘터 건설을 위해 가장 처음으로 해야 하는 건 물자의 확보였고 나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동윤아, 우리 먼저 간다.”
내가 한참 아이와 실랑이를 하는 사이, 수월하게 준비를 끝낸 노인은 험비의 운전과 정비를 도맡아 할 메리제인과 함께 길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가 숨겨둔 험비를 확보하고 이 근방 산 중턱을 모두 돌아다닐 노인팀, 그리고 이 가까운 곳을 돌아다니며 가장 급한 식량을 확보해올 곽동윤 두 팀으로 나뉘어 오늘 하루바삐 움직이기로 했다.
“저…. 동윤 씨, 연경이는 데려가도 되지 않을까요?”
연실 투덜거리는 채연이를 품속에 가둬둔 강수련은 겨우 둘씩 움직이는 우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 아이 중 유일한 성인인 이연경을 언급하며 같이 가는 건 어떠냐는 권유를 해왔다.
하지만 나는 강수련 품속에 갇혀 볼이 잔뜩 부어오른 채연이와 눈이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물론 처음 이연경이 보여줬던 움직임과 단련이 된 몸은 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지만 노인의 차후 계획을 들은 나는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쪽에서 시계를 확인하는 용팔이와 어느새 저 멀리 사라져가는 노인과 메리제인.
나는 출발할 시간임을 깨닫고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강수련과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토록 하고 싶었던 출발 전 포옹을 진하게 하고 캠프 출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 * *
우리와 따로 움직이기로 한 올리버 팀의 출발을 마지막으로 굳건한 캠프 문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리고 나는 캠프 입구 근처에 존재하는 나무 위에 조용히 앉아 모든 게 막막한 지도를 살펴보며 노인이 떠나기 전 해주었던 마지막 말을 머릿속에서 상기시킨다.
‘보이는 건 뭐든지 기록해.’
정말 말 그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가 별로 없었다.
처음 에덴에서 활동할 때야 종말이 터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남긴 기록에 신뢰성이 있다고 하지만 지금 이곳은 종말이 터진지 몇 년이나 지난 타국의 땅이다.
낡아 보이는 예전 지도로는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판가름하기도 힘든 상황, 결국 노인은 나이게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으로 ‘에덴 판’ 지도를 다시 만들어보자는 말을 했다.
그리고 나침판과 태양을 한동안 바라보던 나는 아래서 앉아있는 용팔이에게 물었다.
“용팔아, 너 훈제할 줄 아냐?”
그리고 두 번째 문제는 바로 식량이었다.
물론 채연이가 기지를 빠져나올 때 받아온 식량과 몰래 빼돌린 물자가 아직 남아있는 상태지만, 늘어난 생존자들을 전부 먹여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량.
지역 전체가 피난을 가버린 상황에 물자를 도시나 마을에서 수급한다는 기대는 버린 지 오래였고 결국 우리는 자연이 숨 쉬는 이 국유림에서 가장 중요한 식량을 사냥, 채집해야만 했다.
그리고 내 물음에 아래서 껌을 질겅거리던 용팔이가 대답했다.
“훈제요? 할 줄은 아는데, 연기가 나서 괜찮겠어요?”
“해가 지고 나서 조금씩 하지 뭐.”
캠프가 분지에 있는 곳이니 아마 달이 흐린 밤에 하나씩 훈제처리하면 될 것이다.
나는 정육점 아들 출신 용팔이에게 훈제를 위해 필요한 준비물이 무엇인지 물어봤고 이내 나무에서 내려오며 크게 기지개를 핀다. 그래, 고기는 훈제하거나 말리기로 하고…. 그럼 채소 같은 음식은 어디서 구하지? 나는 크게 하품하는 용팔이를 잡아 일으키며 천천히 머리를 굴렸다.
머리 아프게 생각할 것은 많았지만 이상하리만큼 가벼운 마음, 나는 가슴팍에 아직도 남아있는 아이의 체온을 느끼며 저 멀리 펼쳐진 숲을 향해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