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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231화 (231/313)

# 231

2부 2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2부 028화

‘- - - -아빠, 여기!’

눈을 뜨자 햇살의 오로라가 펼쳐진 숲속이 눈앞에 펼쳐졌다. 풀냄새를 풍기며 흔들리는 나무와 푹신한 풀들이 바닥에 즐비한 이곳.

만약 에덴이 존재한다면 이런 곳이지 않을까 하는 무의식이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선을 돌리자 어린 시절의 채연이와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숲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이 지나고 따뜻한 봄이 찾아온 생명의 숲속.

이곳은 그 어떤 공포와 두려움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직 희망이라는 동화의 단편만이 따뜻한 햇볕과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까르르 웃으며 숲속 한가운데를 돌아다니는 아이들은 내가 그리워함과 동시에 그토록 바라던 모습이기도 했다.

몽롱하고 나른하다. 그리고 무심결에 고개를 내리자 나는 왜인지 맨발이었다.

발에 묻어 있던 피가 전부 씻겨 나가고 흉측하게 빠져 버린 발톱도 전부 제자리를 찾은 모습. 깨끗한 흰색 옷과 흰색 바지, 그리고 온몸에 남겨졌던 흉터는 내가 흘려보낸 진창처럼 깨끗해져 있었다.

마치 모든 원죄에 대한 용서를 받은 이 기분에 나는 떨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그동안 내뱉지 못했던 후련한 숨을 크게 내뱉는다.

‘- - - - -.’

“동윤 씨.”

검은 화면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잠자코 누워 있던 무의식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그리고 필라멘트가 켜지듯 번쩍 눈을 뜨자 변함없이 웃고 있는 강수련의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얼굴에 남은 흉측한 흉터를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웃고 있는 강수련의 존재는 분명 꿈이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살 내음과 품 안에 안겨 있는 채연이의 따뜻한 체온.

나는 그 요소들을 전부 느끼고서야 힘든 여정의 끝에 도달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강수련은 아직도 눈물기가 남아 있는 눈을 살며시 비비며 내 앞머리를 넘겨주었다.

“배고프죠? 어서 일어나요.”

그래, 우리는 어제 다시 만났다. 다리 힘이 풀려 문 앞에 주저앉은 나에게 안겨 울음을 터트린 채연이와 한쪽에서 말없이 입을 막고 울고 있던 강수련의 얼굴이 뇌리에 박히기라도 한 듯 잊히지 않는다.

꿈처럼 행복했지만 꿈이 아닌 현실, 우리는 몇 년 만에 만났지만 입 밖으로 그 어떠한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저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과 울음만이 그간의 설움을 대변해 줄 뿐이었다.

나는 내 품에 잠들어 색색 숨을 내뱉는 채연이를 내려다봤다.

이제 아이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로 커 버린 채연이.

노인이 장난삼아 사춘기가 올 텐데 어찌하냐는 말을 하고는 했는데, 지금 보니 그런 걱정이 들 만했다.

부모를 잃은 충격으로 유아 퇴행증과 짙은 트라우마를 겪었던 채연이는 이제 어엿한 소녀가 되어 하루가 멀다 하고 커가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손을 뻗어 퉁퉁 부어 버린 아이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아이가 깨지 않게 살며시 몸을 일으키며 웃고 있는 강수련에게 물었다.

“몇 시예요?”

몇 시냐고 물어보는 것뿐인데 목소리가 살며시 떨린다.

세월이라는 장애물이 남기고 떠난 묘한 어색함, 하지만 그것은 불편함이 아닌 정말 오랜만에 찾은 행복에서 오는 떨림이었다. 그리고 강수련도 나와 같은 기분인지 처음에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는지 귀여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눈을 몇 번 감았다 뜬 강수련은 내가 에덴에서 기억하던 그 환한 미소를 지어 주며 대답했다.

“벌써 점심이에요. 할아버님하고 용팔 씨는 벌써 일어나셨고요.”

만나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았지만, 정작 우리가 밤새 나눈 건 서로를 끌어안고 흘려낸 짙은 눈물뿐이었다.

몸은 괜찮냐, 어디 아픈 곳은 없냐, 그런 사소한 안부조차 묻지 못한 채 울다 지쳐 잠이 들어 버린 우리.

강수련이 타이르듯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떠보니 시간은 벌써 점심이었다. 밖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웅성거림과 인기척들은 우리가 얼마나 늦게 일어났는지 타박하는 것 같았다.

“아, 아빠….”

그리고 그 순간 침대 위에서 꿈틀거리던 채연이가 내 이름을 부르며 이리저리 팔을 뻗었다.

밤새 눈물을 흘리느라 퉁퉁 부어 버린 눈과 새벽 늦게 잠들어 비몽사몽 한 얼굴, 하지만 채연이는 제정신이 아닌 순간에도 내가 누워 있던 자리를 훑으며 침대에서 사라진 나를 찾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혼절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들 정도로 펑펑 울던 채연이는 몸만 컸지 속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였다.

내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앞머리를 넘겨주자 채연이는 다시 편안하게 숨을 내뱉으며 얼굴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에 빠져들었다.

“채연이가 요즘 잠을 통 못 자서요. 이렇게 늦잠 자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강수련은 살며시 내 옆에 앉으며 속삭였다.

통통하던 젖살이 다 빠져 버려서 그런지 더 수척해 보였던 채연이.

이 나이에 받았을 스트레스와 압박감을 생각한다면 항시 달고 살았을 불면증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같이 이야기 나누며 하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나는 오랜만에 푹 잠이든 아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켜 주기로 했다.

나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아이에게 조용히 덮어 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고프죠?”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강수련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팔에 느껴지는 이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이 감촉.

사람과의 신체접촉이 어색했던 나는 팔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와 마주 보며 경직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 낀 팔짱에 힘을 주며 천천히 오두막 밖으로 나섰다.

*       *       *

채연이는 나와 재회하자마자 거짓말처럼 감기에 걸려 앓아누웠다.

강수련이 말하길 어쩌면 참고 있던 병이 나를 보자마자 안심해서 터진 것 같다는데,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입안에 고인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캠프에는 충분한 약품과 감기 정도는 진단할 수 있는 산부인과 의사가 있다는 것이었다.

“미안해요, 아빠….”

얼굴이 미열로 붉어진 채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리고 있던 채연이가 조용히 울상을 짓는다.

자기가 어떤 일을 하고 또 어떤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전부 보여 주고 싶은 눈치지만 몸 상태가 이러니 한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마음을 전부 이해한다는 듯 말없이 웃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아이의 앞머리를 옆으로 조용히 넘겨주었다.

젊은 산부인과 의사가 말하길 약 먹고 며칠 푹 쉬면 금방 나을 수 있다는데,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캠프에 도착한 내 일과는 감기에 걸린 아이를 병간호해 주는 것으로 시작했고 채연이와 조용히 시작한 대화는 순식간에 지나간 하루가 모자랄 만큼 길고 깊었다. 그리고 한참을 나와 떠들던 채연이가 잠든 조용한 저녁, 오두막 문이 살며시 열리며 오랜만에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노인이 나를 불렀다.

“동윤아.”

다른 일행들에게 조금 미안하지만, 나는 캠프에 도착해서도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종일 채연이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대신해 상황을 정리한 노인은 밥을 든든히 먹자마자 용팔이와 함께 주변을 돌아다녔고 이내 무언가 어설픈 캠프 상황을 지적하며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가 바쁜 시간이 지나 어느덧 저녁.

오두막으로 찾아온 노인은 문 사이로 위성전화기가 잡혀 있는 오른손을 흔들며 나에게 잠시 시간을 내 달라고 요구했다.

“연락 왔어요?”

그리고 위성전화기의 존재를 확인한 나는 채연이가 완전히 잠든 것을 확인하자마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어두컴컴한 오두막 밖으로 노인을 따라 나왔다.

해가 떨어지자 일찍 숙소로 돌아갔는지 웅성거림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캠프. 그리고 오두막 벽에 조용히 기대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인은 불똥을 휴대 재떨이에 털어내며 전화기를 내밀었다.

“오늘 낮에 강 형사한테서 왔다.”

채연이네와 무사히 재회한 우리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한국에서 목 빠지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에덴팀에게 연락한 것이다. 하지만 어제는 웬일인지 신호음이 들렸지만 강 형사는 노인이 아무리 통신을 시도해도 수신을 받지 않았고 별다른 일을 전해 들은 적이 없었던 우리는 당연히 의아해하며 울리지 않는 전화기만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두절도 오래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노인은 오늘 낮 강 형사가 연락을 걸어왔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미국 놈들이 수송기를 보내는데 갑자기 딴지를 건 모양이야. 덕분에 하와이에서 대기 중인 수송편이 그대로 발이 묶였다.”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인의 표정이 좋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소식이 전해지는 즉시 북서부 해안가로 날아왔을 대한민국의 수송기, 하지만 육군을 움직일 때부터 영 이해 못할 행동을 보여 주던 미국은 뜬금없이 우리의 수송기 접근을 불허하며 애매한 화법과 함께 대화를 회피했다고 한다.

물론 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에덴과 정부로선 속이 터질 지경. 막바지에 와서 생긴 장애물에 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리며 노인을 바라봤다.

“강 형사가 다들 발 벗고 움직이고 있다고 하니까,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아이들 지키는 데 집중하자.”

그리고 내 표정을 확인한 노인이 담배를 비벼 끄며 말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걸어온 길에 이 정도 고난이면 거의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현실적인 노인의 말대로 우리가 채연이네와 접촉해 무사히 보호하고 있다는 것이 훨씬 중요했다.

항상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서포트해 주는 에덴팀을 믿고 우리는 수송기가 올 때까지 한껏 몸을 웅크리고 있어야 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밤이 자욱하게 깔린 캠프를 돌아보며 물었다.

“캠프 상태는 좀 어때요? 사람들은요.”

종일 가족들과 붙어 있었던지라 주변에 소홀한 감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충분히 이해해 준 노인은 나 대신 온종일 주변 정찰과 캠프 점검에 힘썼고 우리가 가장 먼저 무엇을 고쳐야 하고 공급해야 하는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왔다.

비록 임시 캠프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방위대와 광신도라는 미지의 적이 있는 이상 방비를 해 둬서 나쁠 건 없었다.

“군인이 몇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괜찮아. 그리고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어른들 하는 걸 보고 자라서 그런지 체계 자체도 에덴이랑 비슷하고. 다만….”

이런 것도 조기교육이라고 해야 하나? 어른들과 힘을 합친 아이들은 에덴에서 우리가 해 왔던 행보를 그대로 밟으며 생존자들과 함께 캠프를 꾸려 갔다.

겉으로만 봐도 80명이 넘어 보이는 캠프 인원과 그런데도 질서가 느껴지는 분위기.

깐깐한 노인도 그런 아이들의 노력을 아는지 제법 후한 평가를 해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을 하다 말고 주름이 가득한 이마를 긁는 노인은 천천히 말을 흐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당연히 부족할 것이다.

“물자 공급이 너무 주먹구구식이야. 물론 식량이 부족한 것도 있지만 개인의 양심에 맡기는 부분이 너무 많아. 뭐, 화기는 말 안 해도 알 거고 방어시설은 없다시피 하지. 고쳐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라…. 아마 내일부터 네가 좀 나와야겠다.”

채연이가 이 냉정한 평가를 들었으면 아마 울상을 지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캠프 내부, 하지만 생존과 직결된 문제는 노력이라는 결과로 만족 못하는 게 당연하다. 살아남기 위해선 완벽이 되어야 하고, 완벽이 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나는 교과서 대신 총을 잡게 해야 한다는 교육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바뀐 세상에 적응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굳게 마음을 먹었다. 해가 뜨는 내일이면 아마 많은 게 바뀔 것이다.

“내일 메리제인을 데려가서 숨겨둔 험비를 끌고 와 주세요. 그리고 오는 길에 주변에 물자를 확보할 장소가 있나 확인 좀 해 주시고요. 그동안 저는 급한 불부터 끄고 있을게요.”

쉘터를 건축한다는 것은 하나부터 끝까지 일인 힘든 행위다.

나는 한국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미국판 에덴을 만들자는 생각을 굳혔고 노인을 향해 장거리 정찰을 부탁했다.

찌르르 울리는 풀벌레 소리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는 은하수.

노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하품했고 나도 마른세수를 하며 내일 있을 피곤을 미리 털어 냈다. 하지만 그 순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려던 노인이 나를 불러 세우며 말했다.

“아, 그리고 동윤아. 여기 경치 하나는 참 좋더라.”

뜬금없이 경치는 왜? 다시 오두막으로 들어가려던 나는 피식 웃고 있는 노인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봤다. 하지만 노인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아무 말 없이 내 뒤쪽을 향해 조용히 턱짓했고 이내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자욱하니 낀 어둠 사이로 천천히 사라졌다.

“- - - -.”

뒤에 누가 있나? 의문을 품은 내 고개는 노인이 턱짓한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중하게 아끼고 있었을 와인을 품에 안고 있는 강수련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핫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 오른쪽 손에 든 두 개의 머그잔은 아껴둔 와인을 누군가와 마시고 싶은지를 알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친 내 얼굴에는 조용히 웃음이 맺혔고 노인이 경치가 좋다고 말했던 장소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저 밤하늘 은하수에는 채연이를 태운 그리움의 고래가 신나게 헤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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