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30화 (230/313)

# 230

2부 27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접선 장소로 파견 온 인원은 경욱이와 올리버, 그리고 면식이 없는 생존자 3명뿐이었다.

듣기로는 평소보다 적은 인원이라는데, 워낙 캠프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이정도 인원도 겨우 나올 수 있었던 모양.

하지만 여러 반대 속에서도 채연이는 주민들과의 신뢰를 잃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번 만남을 강하게 추진했다고 한다.

하마터면 재회하지 못했을 우리의 만남이 신뢰를 지키고 싶은 아이의 고운 마음 덕에 이뤄진 것이다.

“그만 울고 일어나, 인마.”

자기 자식처럼 키웠으니 저렇게 우는 용팔이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하지만 지금은 울면서 회포를 풀기보단 한 시간이라도 더 빨리 움직여 채연이네와 합류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를 알고 있는 노인은 조용히 웃으며 눈가가 퉁퉁 부어버린 용팔이의 뒤통수를 찰지게 때렸고 경욱이는 부끄럽기라도 한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어째 듬직하게 성장했다 싶었더니 실없이 웃는 모습이 너무나 비슷한 둘이었다.

“동윤 씨, 저희도 준비 끝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오두막 문이 열리며 올리버 중사와 함께 메리제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군인이라는 소리에 벌써 통성명을 끝내기라도 했는지 편하게 같이 서 있는 둘이었다.

이젠 사용할 일이 없을 오두막을 처리하고 우리가 이곳을 들려 지나갔다는 흔적을 깔끔하게 없앤다.

용팔이와 경욱이가 회포를 풀 동안 귀찮은 일을 도맡아 해준 메리 제인에게 나는 조용히 감사 인사를 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리는 어느 정도지?”

지금 시각은 오후 4시. 자리를 잡기에는 아쉽고 또 움직이자니 애매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캠프까지 길을 안내해줄 경욱이는 언제 울었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자신이 가지고 다니는 조잡한 지도를 나에게 내밀었다.

규격화돼 있지는 않지만 자기 나름대로 길을 기억하는 방법이 있는지 경욱이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걸어서 2시간도 안 걸려요.”

도보로 2시간. 함께 갈 주민들을 고려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캠프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더 지체할 필요 없이 옆에 세워둔 총과 가방을 둘러메고 많이 들떠 보이는 경욱이의 머리를 조용히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쑥스럽다는 듯 멋쩍게 웃는 경욱이와 기분 좋은 침묵이 감도는 오두막 안. 나는 힘차게 숨을 들이켜며 문을 열었다.

*       *       *

노인이 에덴 교관의 관점에서 우리 아이들을 평가하길 그 수준이 ‘웬만한 베테랑보다 능숙하다.’ 였다.

특수부대 소속 군인한테도 박한 평가하던 노인이 이 정도 호평할 정도라니, 나는 우리 아이들 힘든 상황에서 적응하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무뿌리나 바위를 밟으며 이동하는 경욱이의 뒷모습은 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한 생존자와 다를 게 없었다.

“아마 단체장님이 찾아오신 걸 알면 다들 깜짝 놀랄 거예요. 큰엄마랑 누나가 단체장님을 정말 보고 싶어 하셨거든요. 헤헤.”

경욱이는 캠프로 복귀하는 빠른 행군 중에도 꾀꼬리 같은 수다를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또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더글러스 군인들이 얼마나 나쁜 놈들이며 용감한 채연이가 어떤 모습을 보여줬는지 다 말해주는 경욱이의 수다는 한 시간이 지나도 끝날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 경박한 수다 속에서 경욱이가 겪었을 과거의 두려움과 서러움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나 무서웠어요, 우리 힘들었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경욱이가 자신들이 얼마나 대단하고 용감한지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정말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에게 서러운 어리광을 부리고 있는 것뿐이었다.

냉정한 세상과 잔혹한 현실 앞에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돼야 했을 아이들.

그 아이들은 진짜 어른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아이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래, 지치고 힘들어서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었을 그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를까.

나는 이제 우리한테 맡기라는 말을 조용히 삼키며 이제 아이들의 기둥이 되어주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걸음을 옮긴 지 2시간이 좀 넘었을까, 저 산 중턱에는 주황색으로 빛나는 해가 걸리고 차갑게 불어오는 바람이 곧 황혼이 지나 어둠이 찾아온다는 신호를 보내오고 있었다.

하지만 때마침 우리의 행군도 막바지에 도달했는지 용팔이 곁에서 걷고 있던 경욱이가 이곳에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나무가 빽빽한 주변을 둘러보았다.

“- - - - - -.”

이런 오지에 진짜 캠프가 있는 걸까? 평지도 아니고 경사가 급한 산기슭인데, 왜 이런 곳에 터를 잡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이 끝나기도 전에 앞서 걸어간 경욱이가 입술을 오므리며 휘파람을 불었고 이내 숲속에는 고요한 산새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찌르르……. 마치 메아리가 치듯 이곳저곳으로 퍼져나가는 산새 소리. 나와 노인은 그것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신호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경욱이의 신호와 똑같은 산새 소리가 숲속에서 울려 퍼지더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나무 위에서 온몸을 나뭇잎으로 위장한 여성 한 명이 바닥으로 착지했다.

마치 살쾡이를 연상케 하는 잽싼 움직임과 금방이라도 총을 발사할 듯 살벌한 눈빛을 한 앳된 여성.

하지만 그 여성은 나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말을 더듬더니 경욱이와 마찬가지로 단체장이라는 칭호를 내뱉었다.

“단, 단체장님? 진짜 단체장님 맞으세요?”

단체장님? 아, 우리 아이 중 하나인가? 나는 눈가를 파르르 떨고 있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위장크림으로 가려진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

20대 초반으로 보이고 온몸에는 단련한 흔적이 보이는 그 앳된 여자는 굉장히 능숙한 여전사의 포스를 풍기고 있었다. 내가 저런 아이를 알고 있었나? 나는 멍청하게 뒷머리를 긁적이며 옆에 서 있는 노인과 용팔이를 마주 봤고 마지막으로 실실 웃고 있는 경욱이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기억에 입에서는 탄성과 함께 그녀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이연경?”

맙소사, 진짜 이연경? 나는 나이를 먹어 이제는 성숙한 여자가 되어버린 이연경과 눈을 마주치며 할 말을 잃었다.

부랑자에게 쫓기는 고등학생 이연경과 그녀의 어린 동생을 구해 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완전한 어른이 되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이름을 기억해내 그 순간 환한 웃음을 머금은 이연경은 이쪽을 향해 잽싸게 달려와 나에게 안겼고 이내 노인과 용팔이에게도 기쁨의 포옹을 하며 작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래,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연경은 우리 아이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였다.

하지만 그때 당시 또래 아이보다 작았던 이연경을 생각해본다면 세월의 차이는 우리가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큰 어색함을 가지고 왔다.

볼륨감이 상당한 이연경에게 안겨 딱딱하게 굳어버린 우리. 하지만 그 어색함도 찰나의 순간일 뿐, 우리는 다시 만난 이연경과 재회의 기쁨을 같이 나누며 지나가 버린 세월을 미련 없이 흘려보냈다.

“참, 내 정신 좀 봐! 혹시 식사는 하셨어요? 빨리 안으로 들어가요.”

그리고 우리가 회포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어두컴컴해지는 하늘. 한참을 우리에게 안겨있던 이연경은 언제 그랬냐는 듯 퉁퉁 부은 눈을 비비며 흘러내린 코를 삼켰다.

그리고 일행들과 주변에서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을 둘러보며 물었고 이내 깊은 숲속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채연이와 강수련이 기다리고 있을 캠프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은 깊은 숲속, 하지만 이연경과 경욱이는 그곳이 마치 자기 앞마당이라도 되는 듯 능숙하게 우리를 이끌었고 이내 절벽이 짙은 한 계곡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높은 경사와 으스스함이 느껴지는 음지, 왜 이런 곳에 캠프를 차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무렵 우리 눈앞에는 거대한 자연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쪽이에요.”

빽빽한 숲속에 위치해, 정찰기로도 발견하기 힘들 것 같은 동굴의 입구. 하지만 이연경과 경욱이는 여기가 캠프 입구가 맞다는 말과 함께 익숙한 얼굴로 우리에게 손짓했다.

주변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우리 뒤를 따라오는 주민들은 불안한 듯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고 용팔이와 노인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아 보이는 얼굴로 점점 멀어져가는 경욱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자.”

하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는 일행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며 가방에서 조용히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비록 습한 동굴이라는 곳이 장시간 캠프로 활용하기에는 부족한 장소일지도 모르나, 아이들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어 이곳에 터를 잡았을 것이다.

나는 손전등을 앞으로 비추며 이미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경욱이와 이연경의 뒤를 따라갔다.

차박, 차박.

바닥에 고여서 흐르는 물과 서늘한 공기, 천장에는 커다란 종유석이 맺혀있었고 손전등이 비추는 곳은 눈이 빛나는 박쥐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고 손전등을 꺼내든 일행들은 동굴 이곳저곳을 비추며 내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꽤 긴 동굴을 지나 마지막 커브를 돌아갈 때쯤 우리는 동굴 끝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멈춰선 이연경과 경욱이가 해맑게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도착했어요.”

도착해? 여기가? 사방은 짙은 어둠과 막다른 길뿐이었다.

나는 한동안 아이들의 뜻을 알 수 없어 가만히 서 있었고 노인 또한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아이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연경과 경욱이는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몸을 돌리더니 막다른 동굴 벽에 손을 짚고 힘껏 밀었다.

그러자 우리가 지나왔던 길에서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 - - -.”

마치 막혀있던 터널이 뚫리듯 입구에서부터 맹렬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돌풍 같은 바람에 동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습한 공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우리가 품었던 의문도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사르르 녹아내리고 말았다.

덜컹, 끼이이이익-!

막다른 골목이라고 생각한 동굴 끝은 사실 검은색 페인트로 칠해진 거대한 철문이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철문에 힘을 주자 문은 거친 소리를 내며 미닫이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베일에 휩싸여있던 채연이의 캠프가 우리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노인이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으며 손전등을 내렸다.

“동굴이 아니라……, 통로였구나.”

동굴에 터를 잡았다고 생각한 건 우리의 착각이었다.

거대한 철문이 열리는 순간 통로 반대편에는 조그마한 분지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은 넋 놓고 서 있는 우리를 온몸은 강타했다.

사방은 드높은 절벽이고 그 절벽 위에는 길게 자란 나무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분지 한가운데 빼곡하게 서 있는 조잡한 오두막과 수많은 횃불은 이곳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연경은 통로 출구에 설치된 횃불을 살며시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만든 에덴이에요.”

*       *       *

일부 난민들만을 데리고 만든 소규모 캠프일 줄 알았다.

하지만 사방에 보이는 수많은 오두막과 캠프들은 이곳에 상주하고 있는 인원이 80명이 훌쩍 넘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고 체계가 잡힌 생존자들은 각자 할 일을 캠프 생활에 집중하고 있었다.

조용하지만 묘한 활기가 느껴지는 채연이네의 캠프는 여태 미국에서 봐왔던 생존자들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다.

“- - - - - -.”

그리고 우리가 캠프 안으로 들어서자 주변에서 각자 할 일을 하던 생존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이쪽을 향해 조심조심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철장 안에 동물이 된 듯 사방에서 느껴지는 그들의 시선, 캠프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찾아온 외지인을 바라보며 수군수군 떠들기 시작했지만,

그 눈빛 속에는 작은 경계심만이 있을 뿐 적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자자, 리클스 주민분들은 이쪽으로 오시고…….”

캠프 중앙으로 이동할수록 행렬을 따라오던 사람들은 경욱이가 배정해주는 장소로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를 호위해주던 올리브 중사와 생존자들도 어느새 다른 곳으로 가버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연경의 뒤를 따라가고 있는 건 오직 나와 우리 일행들뿐이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용팔아, 우리는 밥부터 좀 먹을까?”

“어? 왜요? 지금 채연이 만나러 가는 거 아니에요?”

“새끼가 눈치가 없어.”

그리고 나를 향해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노인은 주변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용팔이의 어깨를 잡아끌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내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순간을 위해 잠시 자리를 피해 주는 모습.

눈치 없이 자기도 따라가겠다고 버티던 용팔이는 머리채를 잡히고 나서야 노인의 의도를 알았는지 멋쩍게 웃었고 나를 안내해주던 이연경은 입을 가리며 조용히 웃었다.

“저는 여기까지만 갈게요. 단체장님은 저기 보이는 오두막에 들어가시면 돼요.”

우리를 여기까지 안내해준 이연경은 저 앞에 초연이 서 있는 한 오두막을 가리키며 나에게 횃불을 건넸다.

그리고 곧 용팔이에게 헤드록을 거는 노인에게 걸어가며 이른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식당으로 그 둘을 안내한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웅성거림은 곧 절벽 위 숲에서 들려오는 고요한 풀벌레 소리로 바뀌었고 타닥타닥 불타는 횃불은 잔잔히 떨리는 내 마음만큼이나 어둠을 따라 일렁이고 있었다.

“- - - -.”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홀로 서 있는 오두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파르르 떨려오는 눈가.

만약 내 얼굴을 잊었으면 어쩌지? 아니, 내가 너무 달라져서 못 알아보면 어쩌지? 몰려오는 걱정과 함께 지나간 세월의 그리움이 물밀 듯 눈 아래로 몰려왔다.

장벽 안에서 이뤄졌던 이별을 마지막으로 다시 만나게 된 내 소중한 이들. 나는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흐릿한 눈가를 닦아내고 오두막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두었다.

끼이이익-.

기름칠이 안 된 뻑뻑한 경첩에서 거친 소음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문을 열자 훈훈한 공기와 함께 맡아지는 익숙한 사람의 향기는 마치 매캐한 연기처럼 내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눈물로 범벅이 된 시야를 가까스로 들어 올리자 그곳에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내 아이와 그 옆 침대에서 뜨개질하는 나의 여인이 있었다.

“아아…….”

힘들었다.

눈물, 후회, 죄책감, 고독, 이 모든 것으로 점철된 가시밭길은 비틀거리는 내 발목을 부여잡았다.

고통에 넘어지고 스스로 넘어졌던 지난날들, 내 발밑은 흘러내린 피와 상처로 가득했고 빠져나갈 수 없는 진창은 인간 곽동윤을 절망 그 자체로 만들어내었다.

포기하고 싶었다, 정말 죽고 싶었다. 그만큼 나는 지쳐있었다.

양손에 흘러내린 피를 보라, 그것은 내가 죽여야 했던 수많은 이들의 원죄였고 나를 공허의 늪으로 끌어당기는 인간성의 정체였다.

내가 과연 사람일까, 이토록 진창에 빠져 허우적대는 인간 곽동윤이 과연 사람일까.

나는 고시원보다 더 차가웠던 굴레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발버둥 쳤고 나의 정체성을 대답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끝없이 되물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먼 곳을 돌고 돌아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 굳건하기만 하던 다리에 힘이 풀린다.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은 인내의 시간만큼이나 자욱하게 가려져 있었다. 무거워서 들 수 없는 고개와 드디어 목도한 나의 심장.

그토록 맡고 싶었던 희망의 냄새는 서서히 다가와 내 품에 안겨들었다. 물음에 대답은 과연 누가 해줄 수 있을까.

나는 내 품에 들어온 아이를 힘껏 끌어안으며 영혼에서 터져 나오는 울음을 힘껏 터트렸다.

그리고 그 순간 들을 수 없었던 그 대답은 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 내 손을 조용히 잡아주었다.

대답은 없었다. 왜냐하면, 고시원 창문을 뛰쳐나올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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