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9
2부 26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 - - - - -.”
저 멀리서 들려오는 고요한 새 지저귐. 항상 소름 끼치는 비명과 총성만을 듣다 정말 오랜만에 숲이 품은 고요한 음악을 들어본다.
그리고 하늘은 오랜 고생 끝에 만나는 우리를 축복이라도 해주려는지 밤새 끼어있는 먹구름을 치워주며 너무나 밝은 아침 햇살을 내려주었다.
마치 성당 창문을 채운 글라스의 빛처럼 형용하기 어려운 햇살이 듬성듬성 나 있는 나뭇잎 사이로 비춰 들어왔다.
그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나와 일행들은 빛의 줄기가 이곳저곳에서 새겨진 아름다운 숲속의 광경을 한동안 감상했다.
“선생님, 이쪽입니다.”
그리고 길 안내를 자처한 흑인 남성은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능숙하게 우리를 접선 장소까지 안내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걸음을 옮긴 지도 벌써 2시간째, 피난민들과 동행한 나와 일행들은 산 중턱과 깊은 협곡을 지나 그 근방에 있는 평평한 지대로 향했고 이내 경사가 없는 빽빽한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이 순수한 공간은 왠지 채연이와 아이들이 뛰어놀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강 형사한테 연락은 했냐?”
그리고 잠시 용팔이와 자리를 교체한 노인은 선두에 서서 대열을 이끄는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며 남들이 듣지 못하게 조용히 물었다.
되도록 12시간 간격으로 연락을 취하기를 원하는 에덴팀, 물론 최근에 벌어진 일 때문에 자주 연락은 못 해줬지만, 채연이네의 정확한 위치와 접선 날짜까지 잡은 지금은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해줬다.
왜냐하면, 하와이에서 대기하고 있는 수송기가 우리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쪽은 축제 분위기던데요.”
나는 어젯밤 들었던 사람들의 환호성을 기억하며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다.
한국의 모든 전문가와 군인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던 미국 원정. 누군가는 전력 이탈을 우려했으며 또 누군가는 우리의 목숨을 걱정했다.
하지만 나와 일행들은 성공률이 불과 10%밖에 되지 않는다고 말하던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재회의 순간을 눈앞에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을 기다리며 조용히 숨죽이고 있던 에덴 팀원들은 위성 전화기 너머로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고 동시에 모두가 바삐 움직이며 우리를 다시 한국으로 데려올 준비를 시작했다.
아마 채연이네를 무사히 확보했다는 소식이 에덴으로 전해지는 순간 하와이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송기가 캘리포니아 서부로 날아와 우리를 태우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만남까지 대략 보름이 넘게 걸리리라 예측했던 임무를 무려 3분의 1까지 단축해낸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던 강 형사의 통화를 마지막으로 기억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길잡이를 해주는 흑인 남성의 말에 의하면 보통 접선하는 날에는 사전에 약속을 두고 만난다고 한다.
그 약속은 바로 정확한 날짜에 도착해 해가 지기 전까지 상대를 기다려주는 것, 마땅한 연락수단이 없던 그들은 이런 식으로 교류와 물물교환을 해왔으며 이것이 벌써 3번째 만남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운 좋게도 이들이 마지막으로 잡은 날짜는 마침 오늘이었다.
오랜만에 불침번과 악몽 없이 밤을 보내서 그런지 온몸이 가볍기 그지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깔끔하게 민 수염과 빗으로 멋있게 정리한 머리. 나는 빠르게 재생하고 있는 목 상처를 조용히 긁으며 노인이 아침에 챙겨준 깨끗한 임무 복을 손으로 탁탁 털었다.
그리고 가벼운 몸만큼이나 가벼운 가슴을 품에 안고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저기 보이는 오두막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방해 없이 이어진 순탄한 행군길은 채연이네와 만나기로 했던 약속장소까지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위협을 피해 빽빽한 나무에 몸을 숨긴 일행들과 그런 나를 바라보며 정면을 향해 검지를 들어 올리는 흑인 남성.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한 낡은 오두막이 숲속 한가운데 초연히 서 있었다.
종말 전부터 그곳에 서 있었는지 연식이 꽤 되어 보이는 작은 오두막, 하지만 그 오두막은 버려진 곳이 아닌지 외관과 마당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모습, 나는 마을 주민들과 흑인 남성의 말이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한동안 수풀에 앉아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은 고요한 오두막을 관찰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근방을 정찰하고 온 노인과 용팔이가 내 뒤로 재빨리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가 먼저 온 모양이다.”
혹시 몰라 주변을 정찰하고 온 노인과 용팔이는 오두막 근방에서 별다른 흔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혹시 채연이네가 먼저 도착해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섣불리 접근해 오해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나는 그 보고를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 숨죽이고 있던 일행과 주민들에게 수신호를 보내며 저 앞에 보이는 오두막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단순히 만나는 장소입니까?”
접선 장소라고 말하길래 어둡고 은밀한 장소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이 만나기로 한 곳은 생각 외로 너무나 평화롭고 아담한 오두막이었다.
한 13평쯤 돼 보이는 넉넉한 공간과 가끔 와서 하룻밤 지내도 될 만큼 튼튼한 벽.
오두막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뒤를 따라오는 흑인 남성에게 넌지시 물었고 긴장이 많이 풀린 그는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만나면 저곳에서 같이 차를 마시거나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기도 했습니다. 다들 좋은 분들이시라 저희한테는 몇 번 없는 휴식시간이었죠.”
테이블에 도란도란 앉아 웃고 떠들고 있을 아이들의 모습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회상과 함께 걸음을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앞에는 아담한 오두막이 모습을 드러냈고 일행들은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자신들을 뒤따라오는 주민들을 챙긴다.
별다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오두막 내부. 나는 습관처럼 오두막 문에 노크했고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문을 열자 낡은 경첩에서 내지르는 비명이 나지막이 들려왔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앞을 향하는 권총과 손전등.
하지만 오두막 내부는 창문 사이로 햇빛으로 인해 이미 훤히 보였기에 나는 손전등을 아래로 내리며 오두막 내부를 조용히 둘러봤다.
먼지가 살짝 쌓여있는 가구들과 불어오는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얇은 하얀색 커튼. 마치 다른 세상에 동떨어진 듯한 오두막의 내부는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나는 한쪽에 먼지와 함께 쌓여있는 의자와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 벽난로의 회색 재들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을 일행들에게 들어오라고 말했다.
“- - - - - - -.”
아니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누군가 내 명치를 강하게 치기라도 한 듯 폐부에서 몰려오는 숨 막힘은 벌려진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나는 입안에 맴도는 말을 황급히 삼키며 느려지기 시작한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절대 허투루 오지 않는 이 감각과 공간. 나는 찰나의 시간 속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었던 머릿속에 본능이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바로 내 옆에서.
후웅! 탁-!
함정이었나? 나는 사각지대에서 급소를 정확히 노리고 들어오는 대검을 그대로 피해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바로 코앞에서 지나가는 날카로운 칼날, 그것은 분명 목숨을 끊기 위해 내지른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그리고 온몸에서 팽창하는 수많은 근육을 부여잡은 나는 손가락이 움찔거림과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는 권총을 고개와 함께 옆으로 돌렸다.
“- - - - -!”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확장하는 동공. 순식간에 시선을 돌린 그곳에는 얼굴에 경악이 서린 채 나를 바라보는 한 백인 남성이 있었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과 눈가에 세로로 그어진 흉터, 그리고 그 남자가 입고 있는 군복은 그가 기척을 숨길만큼 노련한 군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군인이 왜 이곳에? 허나 내 몸은 의문보다 한발 앞서있었다.
딱-! 따닥!
권총을 순식간에 파지하고 손잡이를 내 아래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에게 기습을 날렸던 군인의 복부를 향해 거침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소음기에서 터져 나오는 억눌린 총성! 하지만 내 반격을 받은 그 군인은 이를 악물며 권총 총구를 옆으로 밀어내었고 가까스로 총격을 피해내었다.
1초도 되지 않아 주고받은 단 두수. 나는 군인의 실력에 깜짝 놀라면서도 두 눈에 이채가 서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걸 피해?
“- - - - -!”
공격을 피해낸 남자는 재빨리 손을 뻗어 내 오른손을 부여잡는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자신을 향하는 권총 총구를 위로 밀어내며 능숙하게 근접전을 걸어왔다.
끝없는 실전으로 단련해 왔는지 순식간에 내 급소를 공격해오는 그 남자, 일반인이었다면 반응조차 하지 못했을 그 치명적인 공격에 남자는 이제 끝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나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잡고 있던 권총을 놓으며 순식간에 비어있는 왼쪽 손을 뻗었다.
변종조차 느려 보이는 공간에서 뻗어간 나의 왼손은 공간을 역행하듯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컥-!”
그대로 울대에 직격하는 일격. 남자는 경악이라는 반응조차 하지 못한 채 일격을 허용했고 입에서 거친 숨을 컥컥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오른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손이 저절로 풀린다.
나는 자유로워진 오른손을 그대로 허리춤으로 가져가 남자의 숨통을 끊기 위해 숨을 훅 내뱉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대검 손잡이가 오른손에 잡힌다.
그리고 느려진 공간은 다시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 나는 오른손에 쥔 대검을 앞으로 내질렀다.
“잠, 잠시만요!!!”
우뚝.
대검이 목을 뚫고 들어가려는 그 순간 작은 오두막에서 터져 나온 한 소년의 외침. 나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멈췄고 대검 날이 닿은 목에서는 작은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그대로 목을 뚫렸을 남자.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가를 부르르 떨었고 뒤늦게 오두막으로 들이닥친 노인과 용팔이는 깜짝 놀라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 혼란스러운 순간에도 내 청각은 오로지 마지막 공격을 멈추게 했던 소년의 목소리에 몰려있었다.
항상 채연이와 영상통화를 할 때면 주변에서 깐족거리던 한 소년. 제 삼촌을 닮아 갈수록 얄미워지면서도 하루가 다르게 듬직하게 커가는 그 소년.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어느새 체격이 용팔이만큼 커버린 경욱이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허어어엉……. 삼촌!”
“형님, 얘 키 좀 봐요! 벌써 나만큼 컸어. 흐어엉!”
어렸을 때는 잘 몰랐는데, 경욱이가 아빠가 아닌 삼촌을 닮은 모양이다.
붕어빵처럼 똑같이 생긴 경욱이와 용팔이는 서로를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고 나와 노인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먼저 도착했을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선객이 있었던 모양이다. 노인은 붉어진 눈가를 감추고 싶었는지 흠흠 헛기침을 하며 문으로 나가버렸고 나는 울고불고 난리 난 두 명을 방해하기 싫어 조금 떨어진 의자에 털썩 앉았다.
아마 채연이와 강수련이 이곳에 있었으면 나도 용팔이만큼이나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하지만 채연이와 다른 아이들은 하필 그날 생긴 다른 용무 때문에 이곳에 오지 못했고 그나마 주민들과 안면이 있는 경욱이만이 캠프 인원과 함께 이곳에 온 것이다.
물론 채연이와는 오늘 내로 만날 수 있겠지만 몰려오는 아쉬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들이 전부 무사하다는 소식에 만족하기로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접근하기에 저도 모르게 반응해서…….”
한참 상념에 빠져 있다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진한 커피 향이 맡아지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따뜻한 김이 솔솔 올라오는 커피와 함께 아까 나와 격투를 벌였던 군인이 사과를 전해오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올리버. 처음에는 방위대 군복을 입고 있어서 경계했지만, 그는 우리의 적이 아니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커피를 받으며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이야기는 다 전해 들었습니다. 일행들을 대표해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모든 인간이 악하지 않듯 사람이 몰려있는 방위대에도 양심적인 군인이 남아있었다.
올리버 중사와 그의 동료들은 그런 선한 사람 중 하나였고 평소 채연이네와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더글러스 캠프를 떠나는 채연이를 돕기 위해 탈영이라는 힘든 선택까지 하며 여태까지 물심양면 아이들을 도와준 것이다.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선택을 한 올리버와 그의 동료들. 비록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었지만 나는 짙은 고마움과 함께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저희는 그저 좋은 리더를 따라갔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와 악수를 한 올리버는 진지한 얼굴로 채연이를 좋은 리더라고 칭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농담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진심이 느껴지는 그의 얼굴.
올리버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조용히 웃음을 머금었고 나는 떨리는 눈가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보살펴주지 못했음에도 어느덧 이만큼 커버린 아이.
나는 미안함과 대견함을 동시에 느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