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28화 (228/313)

# 228

2부 25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어떻게 기억해냈지?’

스스로 되물어 볼 만큼 그 희미한 기억은 수많은 모래알 속에 파묻혀 있던 찾기 힘든 조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카메라를 발견한 순간 모래알 속에서도 숨어있던 기억의 단편을 떠올릴 수 있었고 소녀가 목에 매고 있는 저것이 강수련의 물건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리고 내 몸과 손은 어느새 벌벌 떨고 있는 소녀에게로 향했으며 그 주변에서 겁에 질린 채 앉아있던 마을 사람들은 얼굴이 사색이 된 채 내 얼굴을 바라봤다.

“동윤아.”

그리고 그 행동에 제동을 걸어준 것은 언제나 그렇듯 뒤에서 내 이름을 조용히 불러주는 노인이었다. 조심히 어깨를 잡으며 침착하라는 듯 나를 다독이는 노인.

나는 그 부름에 재빨리 정신을 차렸고 겁에 질린 마을 사람들에게 너무 섣부르게 다가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캠프장에 가라앉은 불편한 침묵. 나는 소녀를 향해 뻗었던 손을 조용히 거두며 마을 사람들 앞에서 자세를 바로 했다.

“……혹시 그 카메라, 누구한테 받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이쯤 되면 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용팔이와 노인도 대충 눈치를 챘을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된 강수련의 물건. 노인이 예상한 대로 이 마을 사람들은 채연이네와 접촉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제발, 제발. 나는 숨 쉬는 것조차 까먹은 채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나올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겁에 질린 채 입을 다문 어른들이 아닌 나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그 소녀였다.

“특별한 거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저한테 꼭 간직해달라고…….”

용기를 낸 소녀는 그렇게 속삭이며 말끝을 조용히 흐렸다.

그리고 소녀가 대답을 마친 순간 금방이라도 터질 듯 차오르던 일행들의 분위기는 마치 녹아내리는 눈처럼 사르르 흘러내렸다.

비록 앞과 뒤를 모두 잘라낸 어수룩한 대답이었지만 용기를 낸 소녀는 우리가 원하는 바를 알려준 것이다.

에덴에서 우리의 모습을 찍던 강수련의 카메라, 나는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어 자세를 숙였고 이내 나를 무서워하는 소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들며 소녀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혹시, 이렇게 생긴 사람이었니?”

아이들은 이미 많이 커버렸기에 어릴 적 사진과 비교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항상 밝은 얼굴과 수줍은 표정이 공존하는 강수련의 얼굴은 내가 처음 만났던 그때와 변함이 없었다.

나는 분명히 이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기억이 있는 사진을 다이어리에서 꺼내며 소녀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와 둘이 남긴 유일한 사진 한 장. 나는 떨리는 손과 입술을 주체할 수 없었다.

“네…….”

그리고 내가 내민 사진을 보며 입술을 오물오물 씹던 소녀는 사진 속 사람과 카메라의 주인이 일치한다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러자 저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과 거칠게 타오르는 숨, 내 뒤에서 소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노인은 눈을 감으며 후련한 숨을 내뱉었고 용팔이는 기쁨의 비명을 삼키며 나처럼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       *       *

“조심하세요.”

능선을 넘음과 동시에 숨을 거칠게 내뱉은 메리제인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주민들을 하나둘 챙기며 대열이 흐트러지지 않게 주의했다.

인적이 드문 산답게 길은 경사가 높고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체력이 되는 나와 일행들은 능숙하게 그 길을 건넜지만, 계곡에서부터 우리와 동행하게 된 마을 주민들은 조금 힘겨운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나와 일행들은 늦어지는 행렬에 짜증은커녕 걷기가 힘겨워 보이는 사람들을 한명한명 도와줘 가며 행군의 속도를 붙였다.

식량까지 아낌없이 털어 주민들의 배를 불러준 우리, 그리고 저 멀리서는 용팔이가 강수련의 얼굴을 알아본 소녀를 등에 업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파인! 암 파인! 오케이?”

걷기가 힘든 소녀를 다른 사람을 대신해 업어준 용팔이.

물론 그 소녀의 어머니는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발을 동동 굴렀지만, 용팔이는 배움이 짧은 영어까지 외쳐가며 괜찮다는 얼굴로 그녀를 달랬다.

모두가 힘을 합쳐 움직이는 훈훈한 광경만큼이나 행군 분위기가 좋았고 처음에는 불안해하던 주민들도 우리와 서서히 말을 트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선생님.”

처음 구출될 때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주민들의 대표를 자처한 흑인 남자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착실하게 안내하며 나를 향해 공손히 ‘Sir’이라는 존칭을 붙였다.

유난히 돋보이는 그 남자의 흰 이빨과 비굴하지 않은 환한 미소. 나는 그 흑인 남성이 가리키는 숲길을 따라 열심히 걸음을 옮겼고 이내 끝없이 펼쳐진 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저 멀리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흠뻑 젖은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 -.”

군대에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피난민들에게 있어 트리니티 국유림은 어쩌면 최고의 피난지였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적은 놈들의 숫자와 은신처 하나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는 빽빽한 숲. 그리고 아직 보존되어있는 자연은 어떻게 활용하냐에 따라 좋은 자원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마을 사람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이들 중 하나였는지 대략 반년 전부터 호수 근처 빈 마을에 터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고 한다.

놈들의 눈을 피해 몸을 숨기고 자연과 교류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마을 사람들. 하지만 그 한적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고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건이 겨울이 오기 두 달 전부터 발생하고 말았다.

바로 마을 사람들의 사냥대상이었던 야생동물들이 무언가를 피해 도망치듯 이 근방 산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 식량을 비축해둔 창고에 불까지 나버리고 한 달 전부터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 들의 직접적인 위협까지 이어졌다.

20명이 넘어가는 주민들이 굶주림과 죽음의 위협을 동시에 느끼며 하루하루 죽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구원해준 것은 목 놓아 기도하던 신이 아닌 우연히 만난 한 평범한 아이들이었다.

아니, 이제 아이들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커버린 그들은 처음 만나는 마을 주민들에게 선뜻 식량을 나눠주었고 척박한 겨울을 날 기회를 되찾아 주었다.

봉쇄된 장벽 안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람을 돕는 법, 마을 주민들을 도와준 그들은 바로 에덴팀이 해왔던 행보를 그대로 밟고 있는 채연이와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태생이 선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기 직전 받은 그 도움을 절대 잊지 않았고 열심히 채집과 사냥에 집중하며 채연이네 캠프와 꾸준히 교류를 이어왔다.

그리고 시간은 노도와 같이 흘러 우리를 만나기 일주일 전. 운명의 장난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린 주민들은 채연이네와 다시 접선하기로 한 날짜를 삼 일 앞두고 광신도들의 습격을 받고 만 것이다.

“걸을 만하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미국에 도착한 뒤로 온갖 개고생만 한 우리에게 처음으로 풀린 실타래가 눈앞에 뚝 떨어졌다.

채연이네의 존재는 물론이고 정해진 날짜에 맞춰 접선 장소까지 알고 있는 마을 주민들. 고된 여정 중 사상 처음으로 맛보는 순탄한 전개에 나와 어깨를 마주하던 노인이 여유로운 얼굴로 안부를 물어왔다.

하지만 나는 그 물음에 질문으로 대신 대답하며 품에 넣어둔 국유림의 지도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안내를 자처한 남성이 우리에게 알려준 대략적인 거리는 27km. 직선거리로 따지면 금방 도착할 수 있는 거리지만 이곳이 산이 많은 국유림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내 물음에 조용히 눈을 감은 노인은 한동안 무언가를 계산하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주변에 빽빽하게 보이는 나무와 산들을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앞으로 4시간? 지도상에서는 중간부터 길이 끊긴다고 나오니까, 오늘 내로 도착하기는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약속날짜는 내일이니까, 하루 여유가 있어.”

2시간을 내리 걸어왔으니, 앞으로 4시간만 더 걸어가면 된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해는 벌써 산꼭대기 아래로 내려와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쉼 없이 뛰어가는 시곗바늘은 곧 이곳에 해가 지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어찌 산 정상까지 올라간다고 해도 오늘 내로 접선 장소까지 이동하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모양, 미리 도착해 아이를 기다리려고 나는 아쉬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보던 노인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으며 저 앞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먹어.”

아까부터 주민들을 살갑게 대하던 메리 제인은 자신의 옆에서 정신없이 죽을 퍼먹는 소녀의 그릇에 자신의 몫을 듬뿍 덜어주며 말했다.

임시로 세운 캠프 사이로 보이는 작은 모닥불들. 그리고 그곳에 모인 일행과 주민들은 궁둥이를 붙이고 옹기종기 모여 이곳저곳 때려 부어 만든 꿀꿀이죽들을 사이좋게 나눠 먹고 있었다.

산과 산 그리고 수많은 협곡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행군, 거기다 체력 상태가 좋지 않은 민간인들을 동행하고 있으니 이동시간은 자연스럽게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온갖 위험이 득실거리는 숲의 밤을 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산 정상에서 임시 캠프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추운 바람. 나는 덮고 있던 담요를 조용히 뒤집어쓰며 하루 동안 소모한 체력을 빠르게 회복했다.

“오늘은 불침번에서 빼줄 테니까, 푹 쉬어라.”

“괜찮아요.”

남들이 편안하게 식사할 동안 주변 정찰이라는 귀찮은 일을 끝마친 노인은 모닥불과 동떨어져 있는 내 옆에 털썩 앉으며 따뜻한 김이 솔솔 올라오는 커피를 입으로 가져갔다.

모닥불 쪽에서 도란도란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배가 부르다는 하룻밤의 기쁨. 나는 훈훈한 그 광경에서 오랜만에 그리운 기억을 읽었는지 내려가 있던 입꼬리를 천천히 올려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감정 위에 어김없이 찬물을 던지며 나를 타박했다.

“지랄, 빼준다고 할 때 쉬어. 채연이 만나자마자 쓰러지지 말고.”

보통 사람이었으면 진즉에 쓰러져 죽었을 것이다.

그 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 노인은 창백한 내 얼굴에 혀를 쯧쯧 차며 다시 한 번 상처를 소독해주었다.

온몸에 몰려오는 격한 고통과 부상에서 전해지는 짙은 피곤. 눈앞에 여정의 종착점이 보이자 그동안 꾹 참고 있던 몸에서 이제 한계가 왔다는 신호를 어김없이 보내왔다.

나는 길게 하품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노인에게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자리에 누워 달콤한 잠을 취했다.

*       *       *

‘우리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나는 회색 도시가 그대로 내려다보이는 고층 옥상에 걸터앉아 옆에서 뻑뻑 담배를 피우는 노인에게 물었다.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우리 에덴 팀들과 중무장한 군인들, 오늘도 어김없이 서울 한 지역을 수복하고 집까지 태워다줄 차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뜬금없는 물음에 길게 하품한 노인은 그대로 난간에 몸을 기대며 꽁초를 휙 던졌다.

‘왜, 그리워?’

간혹 치열한 삶을 이어갈 때면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망각하고는 한다.

죽이고 싸우고 상처 입고, 매일 반복되는 이 과정에 나는 기계처럼 익숙해지고 만 것이다.

하지만 일과가 끝나고 채연이와 짧은 통화를 하고 날 때면 나는 마치 아침에 눈을 뜨듯 깨닫고는 했다.

세상은 원래 이러지 않았잖아? 그래, 한때 평화로운 아침이 찾아올 때가 있었어.

그리고 그리우냐는 질문에 나는 웃음을 머금으며 검은색 피가 젖은 대검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 - - - - -.”

하지만 대검을 내려놓은 내 오른쪽 손은 아직도 미세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변종과의 전투가 끝났음에도 아직 그 여운을 잊지 못해 뜨거운 열기를 품고 있는 양쪽 손.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그 오른손을 말없이 꽉 쥐며 황혼을 끄집어내고 있는 회색 도시를 시야 가득 담았다.

매일 같은 광경, 매일 같은 시간. 변해버린 건 어쩌면 세상이 아니라 우리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노인에게 말했다.

‘내 아이들은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온몸에 가득한 흉터와 그 흉터만큼이나 가슴속에 새겨진 아픔의 기억. 많은 사람이 내 눈앞에서 죽어야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언제쯤 이 싸움이 끝이 날까? 많은 이들이 스스로 되묻지만 뚜렷한 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우리는 멈출 수 없었다. 목적지가 보이지 않은 안개 속일지라도, 비록 위치를 알 수 없는 등대가 보이는 바다 위일지라도 우리는 아직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가자.’

그리고 내 읊조림에 노인은 실없이 웃으며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내 어깨를 툭툭 쳐주었고 이내 여운을 남기듯 총과 장비를 챙겨 나와 저 멀리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불어오는 바람 사이로 코끝을 자극한 알싸한 음식의 향기가 맡아졌다.

‘형님! 밥! 밥!’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맛있는 김치찌개가 담겨있는 냄비를 들고 허겁지겁 뛰어오는 용팔이와 두식이가 보였다.

피로 얼룩진 몸이지만 그 위에 피어있는 밝은 미소. 그것은 마치 검은색 도화지에 그려진 흰색 웃음 같았다.

나는 모자를 꾹 눌러쓰고 1분이면 사라질 김치찌개를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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