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
2부 23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아야….”
“아픈 줄 아는 놈이 그 지랄을 왜 해?”
목 상처에 소독약이 닿자 알싸한 고통이 찌르르 울려왔다. 출혈이 그치고 상처는 이미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2차 감염을 막기 위해선 주기적인 소독은 필수였다.
그리고 나대신 소독을 해준 노인은 아프다고 목을 빼는 내 뒤통수를 갈기며 오늘도 어김없이 잔소리를 내뱉었다.
꼼꼼하게 감기는 새로운 붕대와 사방에서 울리는 듣기 좋은 새소리, 우리는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여명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이 정도면 되겠죠?”
그리고 어젯밤 담뱃불 발견이라는 큰 공훈을 세운 용팔이는 육중한 험비 위에 나뭇가지와 초록색 도포를 뒤집어씌우며 나에게 물었다.
풀숲에 그 거대한 몸을 숨긴 험비.
용팔이가 발견한 담뱃불의 정체가 불분명한 이상 큰소리를 동반하는 험비는 더 이상 끌고 다닐 수가 없었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험비와 잠시 작별하며 훗날을 도모했다.
그리고 짧은 순간 모든 준비를 끝낸 나와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끝없이 펼쳐진 대자연을 바라봤다.
“이야, 경치 봐라. 존나게 고생하게 생겼네.”
고개를 돌리자 밤에는 알아보지 못한 국유림의 광활한 자연풍경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인간의 손때가 묻지 않은 푸른 숲과 깨끗한 물이 흐르는 거대한 산.
처음 원정에 왔을 때랑은 또 다른 기분에 우리는 한동안 할 일을 멈추고 그 풍경을 구경했다.
비가 그친 뒤 맡아지는 기분 좋은 풀 내음, 나는 숨을 한껏 들이켜며 어젯밤 표시해둔 국유림의 지도를 꺼내 들었다.
용팔이가 어젯밤 발견한 담뱃불의 위치는 서쪽으로 200~300m 근방.
물론 산과 숲이 빽빽한 지형에선 짧은 거리라는 의미가 없었지만, 추적술에 능한 노인에게 있어 그 작은 단서는 거의 자물쇠 앞에 열쇠꾸러미를 던져준 것과 다름이 없었다.
용팔이가 발견한 담뱃불은 도대체 누구의 것일까, 그리고 국유림으로 도망친 채연이네는 과연 어디에 캠프를 만들었을까.
알아내야 할 것은 많았지만 주어진 시간은 촉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괜히 일을 그르치기 싫은 나는 조급한 심정을 달래며 마음을 다잡았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움직여 차근차근 흔적들을 쫓아가자. 아이는 분명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생각을 정리한 그 순간 시원한 살랑바람이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한곳에 모인 일행들과 그 앞에서 검은색 모자를 조용히 눌러쓰는 노인. 오늘의 일과를 시작하는 마지막 브리핑이 노인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담뱃불을 발견한 방향을 기점으로 차근차근 사람의 흔적을 찾을 거다. 움직이는 대열은 뭐……. 이제 알아서 할 수 있잖아, 그치? 그리고 적이 있다는 가정하에 움직일 거니까, 항상 탄약 장전해두는 거 잊지 말고. 그럼 조금만 더 수고하자.”
광신도라는 무리가 캘리포니아 북부 근방을 돌아다닌다는 것은 이미 확인이 된 상태다.
그리고 우리가 깽판을 쳐놓고 온 더글러스 캠프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이 국유림에서 우리의 아군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은 채연이 캠프가 유일한 것이다.
어쩌면 또 다른 교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탄창을 확인했고 이내 노인의 등을 바라보며 가방을 챙긴다.
“이동하자.”
그리고 잔뜩 가라앉은 노인의 말을 출발신호 삼아 우리는 밤 동안 머물렀던 산장에서 서서히 멀어진다.
담뱃불이 처음 발견되었던 서쪽, 대열 후방에서 뒤를 맡은 나는 채연이가 어릴 적 자주 불렀던 상어 노래를 읊조리며 용팔이가 내민 모자를 눌러쓴다.
밤사이 맹렬했던 비바람이 지나가자 너무나 밝은 햇살이 우리를 내리쬐고 있었다.
* * *
수색이 시작된 지 2시간째, 우리는 용팔이가 불을 발견했다는 장소에서 피다만 담배꽁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용팔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라 진짜 이 근방을 돌아다니고 있는 누군가를 찾았다는 소리였다.
긴가민가했던 흔적은 실체를 드러냈고 아침부터 시작한 수색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노인은 타지에 와서도 그 실력이 죽지 않았는지, 고개를 숙일 때마다 흔적을 발견해내며 메리제인을 깜짝 놀라게 했다.
물론 밤새 내린 비 때문에 담배꽁초를 버린 그자의 발자국은 전부 흐릿해졌지만 뚜렷하게 남아있는 큰 흔적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길을 만들기 위해 풀을 가지들을 잘라낸 흔적이나 사람이 잠시 쉬었다 간 자리 등등. 노인은 인기척이 묻었다 싶은 흔적을 전부 찾아내며 우리의 행로를 이끌었다.
그리고 노인의 뒤를 열심히 따라가던 용팔이가 고개를 숙여 잡아 낸 한 덩어리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엥, 이건 무슨 똥이에요?”
“곰 똥.”
“역시 미국.”
이 방대한 자연은 사람 말고도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움직이는 물체는 모든 잡아먹는 놈들 때문에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야생동물들, 하지만 놈들의 밀도가 적은 이곳에는 아직도 야생동물들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집은 것이 곰 똥이란 것을 들은 용팔이는 작은 감탄사를 내뱉으며 딱딱하게 굳은 똥을 조용히 챙겨 넣었다. 기념품으로 참 이상한 것을 고른다.
“…….”
그나저나 힘든 행군에 혼자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메리제인은 조금 적적해 보이는 눈치였다.
조용히 용팔이의 뒤를 따라 걸으며 알 수 없는 콧노래를 부르는 메리제인. 때마침 할 말이 있었던 나는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중위님은 이대로 괜찮으십니까? 군인 신분이시잖아요.”
평범한 민간인이 아닌 임무를 가지고 현장에 투입된 군인이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했는지 메리 제인은 더글러스 캠프와 접촉하는 순간 그 목적의 본질을 잃어버렸고 우리와 이렇게 동행하고 있었다.
나야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아군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사정이 있는 그녀는 또 다르지 않은가? 그리고 내 물음에 선글라스를 쓰고 있던 메리 제인이 황급히 땀을 닦아내며 내 쪽을 돌아보았다.
“……혹시 방해되나요?”
그리고 즐거워 보이는 아까와는 달리 내 질문을 받은 메리 제인은 순간 시무룩한 얼굴로 나에게 되물었다.
혹시 방해되느냐고? 나는 그 질문에 정확한 의도를 몰라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점점 꺼멓게 변하는 그녀 때문에 나는 당황스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고 결국 얼떨떨한 대답을 대신하며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래, 확실히 도움이 된다. 유능한 조종사이자 기초적인 특수훈련을 받은 SOAR 소속의 메리 제인 중위는 총을 다루는 실력도 수준급이고 기본적인 인지능력도 상당하다.
더군다나 헬리콥터 조종사답게 여러 미군기기에 능숙했으며 심지어 험비 같은 수송 차량도 정비할 수 있었다.
여태 보여준 능력보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상황에서 메리 제인의 합류는 우리에게 결코 나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이토록 궁금한 것은 왜 고생할 필요가 없는 그녀가 죽을 뻔한 위기를 수차례 넘기며 우리를 따라오냐였다.
“여태 보셨다시피 많이 위험한 일입니다. 합류하기 전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지금 부대로 복귀하시는 편이 더 안전할지 몰라요.”
내가 아무리 뻔뻔하다고 해도 생판 모르는 남에게 목숨을 걸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미국에 도착해서도 마치 운명처럼 다가오는 위기의 순간들. 그리고 우리와 우연히 함께하게 된 메리제인도 당연히 죽을 뻔한 순간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망치기는커녕 유난히 호의적인 태도로 나를 대했고 최근에는 더듬더듬 한국말을 따라 하는 등 일행들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저, 저도 이상하게 보일 거라는 거 알아요. 그런데요, 그게….”
그리고 메리제인 자신도 우리와의 관계가 남들에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지 말을 연신 더듬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무언가 말하기 부끄럽기라도 한 듯 뒷머리를 벅벅 긁고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녀. 분명한 이유가 있어 보였지만 조금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은 그녀를 보며 나는 조용히 대답을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말문을 틀어막은 것은 선두에서 흔적을 찾아 나서다 갑자기 자리에 멈추는 노인이었다.
“쉿.”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쇳소리.
순간 분위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았고 담소를 나누던 우리는 재빠르게 자세를 숙였다.
저 수신호는 노인이 무언가를 발견했거나 들었다는 신호. 수색을 시작한지 4시간 만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꼬리를 잡은 것이다.
나는 방아쇠 위에 천천히 검지를 올려놓으며 모든 감각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숲속은 고요의 소음을 담은 그 자체였다. 바람 부는 소리와 돌풍이 나뭇가지를 스쳐 지나가는 소리.
모든 것이 자유롭게 생성된 오르골 같았고 나는 그 속에서 노인이 들은 이질적인 존재를 찾아 헤맸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맡아지는 진한 강물 냄새, 멀지 않은 곳에 계곡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귀에 들리는 건 물소리가 아닌 어떤 남성의 비명이었다.
“- - - - - -!!”
그와 동시에 우리 일행들을 사방으로 순식간에 흩어지며 짙은 숲속에 몸을 숨겼다.
입을 막히기라도 했는지 무언가 억눌린 남자의 비명. 하지만 얼마나 크게 지르는지 입이 막혔음에도 이곳까지 들리고 있었다.
우리는 자세를 잔뜩 움츠린 상태에서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고 이내 깨끗한 물이 흐르는 옅은 계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빠른 속도로 흐르는 계곡물과 그 주변에 포진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 그리고 그 강변 옆으로 진을 치고 있는 수많은 텐트는 우리의 시선을 뺏기에, 충분했다.
혹시 채연이네 캠프가 아닐까 하는 기대에 시야를 돋궈봤지만, 캠프 중앙에 몰려있는 사람들과 그 주변 광경을 발견한 순간 우리는 조정 간을 안전에서 단발로 변경하며 숨을 삼켰다.
마치 토템처럼 캠프 이곳저곳에 세워져 있는 피 묻은 십자가들과 그곳에 매달려있는 사람의 사체.
그 끔찍하고 역겨운 광경만 보더라도 이곳에 진을 치고 있는 저들의 정체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광신도들, 우리의 예상대로 그들은 생존자들을 찾아 이 깊은 숲속까지 무리를 이뤄 들어온 것이다. 노인이 나에게 망원경을 내밀며 말했다.
“저 구석에 사람들 보여?”
나는 노인의 말에 재빨리 망원경을 받아들며 검지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는지 규칙적인 대열을 이루고 몰려있는 광신도 무리,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일반 생존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밧줄로 팔다리가 묶인 채 벌벌 떨고 있었다.
일반인과 광신도들을 구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광신도 대부분은 누군가의 피로 추정되는 붉은 액체를 옷과 얼굴에 빼곡하게 바르고 있었으니까.
“포로네요.”
그리고 그 광경을 목격한 순간 더글러스 캠프에 진입하기 전 발견했던 끔찍한 학살현장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이유인지 모를 만큼 잔인하고 엽기적인 살인 행각을 벌이는 광신도들. 그리고 그 행위는 일부가 벌인 일탈이 아닌지 캠프 곳곳에는 학살현장에서 발견했던 ‘인간’ 토템 들이 이곳저곳에 걸려있었다.
아마 저곳에 묶여있는 생존자들도 시간이 지나면 저런 꼴이 돼버릴 게 분명한 상황.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시며 분주히 망원경을 움직였고 이내 떨고 있는 포로들의 얼굴을 확인하며 그중에 아는 얼굴이 없다는 것에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죽기 전에 구하자.”
그리고 그 순간 내 귀를 의심하는 의견이 노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지금 저곳에 보이는 광신도들의 숫자만 해도 20명이 넘는다.
당장 섬멸하자고 해도 힘든 상황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들을 구하자? 밤에 야습하거나 한두 명씩 밖으로 유인을 해 그들을 처리할 생각이었던 나는 성급한 노인의 의견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어 망원경을 내렸다.
하지만 노인은 결코 허언이 아니라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간다.
“저 사람들을 어디서 잡아 왔겠냐?”
저 사람들을 어디서 잡아 왔냐고? 순간 정적이 감도는 묵직한 공간 속에서 나는 노인의 짧은 물음을 곱씹으며 조용히 상념에 빠졌다.
이 북부 근방은 전부 숲으로 빼곡한 국유림 천지다. 그렇다는 것은 대도시와의 거리가 상당히 멀다는 것인데 차량이 존재하지 않는 저들이 과연 어디서 사람을 잡아 왔을까? 나는 마치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에 얼떨떨한 얼굴로 노인과 눈을 마주쳤다.
아! 그리고 그 순간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포로를 잡은 채 먼 거리를 도보로 다니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아마 광신도들은 이곳 근방을 수색하면서 국유림으로 도망친 생존자들이나 중턱 부근에 존재하는 작은 마을에서 사람들을 잡아 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정말 유감스럽게도 채연이가 몸을 맡긴 장소도 이곳, 트리니티 국유림. 어쩌면 저 8명의 포로 중에 채연이네를 알거나 혹은 소속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로 노인이 구출 작전을 제의했는지 이해가 가는 순간이었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녹진한 분노와 누군가 더러운 손으로 내 영역을 만진 것 같은 불쾌한 기분.
나는 얼굴에 붉은칠을 한 광신도를 뚫어지라 쳐다보며 조용히 총을 쥐었다.
이 국유림에서 처음 만난 사람이 우리 아이들이 아니란 것에 슬픔을 느꼈지만 동시에 채연이네를 위협할지 모르는 적들을 내가 먼저 만난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하늘 위로는 기다렸다는 듯 먹구름이 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