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2부 2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똑똑.
조잡한 판자를 덧대 만든 문에서 고요한 새벽공기를 깨는 노크 소리가 잔잔히 울려왔다.
그리고 그 노크 소리에 총기를 손질하고 있던 채연이는 기름때가 잔뜩 묻은 손수건을 조용히 내려놓으며 이른 새벽에 찾아온 손님에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방을 밝히고 있던 촛불이 은은한 바람을 따라 양옆으로 일렁인다.
“언니, 고생 많았어요.”
손질하던 총기를 옆으로 조용히 내려놓은 채연이는 이른 새벽에 찾아온 이연경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바닥에 가방을 조용히 내려놓은 이연경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채연이를 바라보며 짙은 한숨을 내쉰다.
잠시 눈 좀 붙이라고 자기가 대신 정찰을 다녀왔는데, 언제나 그렇듯 채연이는 부지런히 일어나 오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잠 좀 자라니까……. 큰어머니가 걱정하시잖니.”
모든 아이를 포용하고 사랑해주는 그들의 큰어머니 강수련.
캠프의 모든 사람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녀였지만 요즘 따라 밝고 예쁜 얼굴에 수심이 어려 있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리고 그 원인은 바로 하루가 멀다 하고 다람쥐처럼 뽈뽈 돌아다니는 채연이 때문이었다. 어느새 몰라볼 정도로 커버린 그 아이는 귀여운 보조개를 살며시 접으며 대답했다.
“히히, 제가 좀 잠이 없잖아요.”
잠이 없기는……. 이연경은 수척한 얼굴로 서투르게 거짓말을 하는 채연이를 바라보며 쓴 입맛을 다셨다.
하루가 멀다고 몰려오는 사건·사고와 점점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식량. 너무나 어린 나이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연이는 걱정 때문에 밤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허나 이연경은 추궁 대신 채연이 옆으로 조용히 다가가 앉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
아무런 말없이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채연이는 조용히 웃음을 지우며 한숨을 내쉬었고 이연경은 눈을 감으며 벽에 등을 기댄다.
모두가 힘들고 모두가 막막하다. 탈출구 없는 터널을 뛰는 기분에 캠프 모든 사람이 하루가 다르게 지쳐가고 있었다. 이연경은 그 심란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한동안 채연이 옆에서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웃음을 되찾은 채연이가 이연경을 향해 정찰 결과를 물어보았다.
“아직도 우리를 찾고 있어요?”
“……응.”
기지를 빠져나온 채연이 무리가 거처로 삼은 곳은 드넓은 트리니티 국유림의 산 중턱이었다.
워낙 크고 방대한 자연환경이었기에 숲속 깊숙이 들어오면 비행기로도 찾기 힘든 이곳. 사방에는 깨끗한 강물이 흘러 식수도 풍부했고 동물의 개체 수도 많아 식량 확보도 수월했다.
하지만 문제는 대략 2주일 전부터 출몰하기 시작한 광신도들에게 있었다.
더글러스 기지에 있을 때부터 이 북부 근방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광신도들은 처음에는 단순히 피난민들과 접촉 하거나 삐라를 뿌리는 소극적인 행동을 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폭력사건과 납치 미수 같은 과격한 행보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군인들과 총격전을 벌이는 수준까지 발전하기 이른다.
허나 방위대에 준수한 군사력은 집요하게 외곽을 공략하는 광신도들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충분했고, 광신도들은 대대적인 반격에 나선 군인들을 피해 한동안 숲속에 모습을 숨겼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잠깐뿐인 소동은 그렇게 막을 내리나 싶었다.
“……점점 좁혀오고 있어.”
하지만 숲속에 몸을 숨긴 광신도들은 자신들이 찍은 사냥감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인지, 어째서 사람을 해치고 죽이는 것인지 모를 그 미친놈들은 더글러스 기지에서 떨어져 나온 채연이 무리의 뒤를 밟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발자국을 없애고 흔적을 남기지 않는 치밀한 행동으로 자세한 위치는 들키지 않았지만, 우리의 은신처를 찾기 시작한 광신도들은 점점 그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그리고 2주일 전부터 주기적으로 정찰하러 다녀오는 미니 에덴 팀은 국유림을 돌아다니며 강 상류에 진을 치고 있는 광신도들을 발견했고 채연이의 캠프는 자원 확보에 소극적인 움직임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빗물을 받아 마신 지도 벌써 3일째, 마치 바퀴벌레처럼 숨어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스트레스는 점점 한계로 치닫고 있었다.
“사람들은 좀 어때요……?”
그리고 그 상황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는 채연이는 슬픈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조심히 캠프 사람들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살지만, 자신에게는 항상 괜찮다고 말해주는 캠프 사람들. 허나 이런 대치상황을 계속해서 버텨야 하는 그들의 상태는 절대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연경은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뻗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점점 커갈수록 그분을 닮아가는 우리의 작은 대장. 허나 가끔 보여주는 이런 모습은 이연경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충분했다.
먹먹한 가슴과 마치 떠오르는 여명의 이슬처럼 촉촉해지는 눈가.
조그마한 천막 안에서 한동안 침묵을 지킨 그 시간은 누군가가 여정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그 순간까지도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 * *
마치 전등에 스위치를 올리듯 번쩍하고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스위치를 올린 것은 누군가의 행동이 아닌 코끝을 찌르는 고소한 음식의 냄새였다.
눈을 뜨는 순간 온몸에 느껴지는 격한 통증과 갈증. 나와 같이 잠에서 깨어난 배는 연신 격한 소리를 내며 음식을 먹어달라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눈을 뜨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내 옆에서는 작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냄비 안에는 건빵과 부재료들로 만든 수프가 맛있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이곳이 오래되었지만 아늑한 산장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내가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거지? 밖이 어두컴컴하니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 일어났냐?”
그리고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 순간 냄비 앞에서 수프를 끓이고 있던 노인이 피식 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불렀고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적재함을 총으로 맞히는 순간 팍하고 끊긴 기억.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산장에 있었고 온몸에는 깨끗한 붕대가 이곳저곳에 감겨 있었다.
나는 수프를 휘젓는 노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지났어요?”
아마 출혈로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다.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나는 노인에게 기절한 시간을 물었고 노인은 조용히 수프의 간을 보며 손가락을 펼쳐 보인다.
펼쳐진 손가락은 정확히 5개 하고도 2개. 나는 기억이 끊긴 이후로 무려 7시간이나 잠자리에 들어있었다. 가뜩이나 시간이 부족한데…….
자신을 자책하며 주변으로 시선을 옮긴다.
용팔이는 어디 정찰이라도 나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메리제인은 산장 밖에서 우리가 끌고 온 험비를 열심히 점검하고 있었다.
주변은 빽빽한 숲만이 가득한 아늑한 산장, 주변에는 바람 부는 소리와 한밤중에 고요한 무음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방향을 바라보자 노인이 다 끓인 수프 그릇을 나에게 내밀며 자리에 털썩 앉고 있었다.
“미친놈, 이젠 무서운 게 없냐?”
그리고 내가 숟가락을 드는 순간 노인은 어김없이 잔소리하며 혀를 찼다.
총알이 쉴 틈 없이 날아오는 상황에서 밖으로 고개를 내민 일촉즉발의 상황.
아마 내 몸을 아래로 당기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어깨가 아닌 머리가 터졌을 거라고 노인은 말했다.
허나 나는 잔소리를 하건 말건 수프 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음식을 먹기 바빴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아슬아슬한 낭떠러지에서 시도한 도박.
아마 내가 무리하게 고개를 내밀어 적재함을 쏘지 않았다면 날아온 대전차 탄에 험비가 전복되고 말았을 것이다.
물론 노인도 그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는지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잔소리를 멈추며 내 수프 그릇에 건빵으로 만든 수프를 가득 부어주었다.
소총탄에 어깨와 허벅지를 관통당하고 크고 작은 파편이 등판에 박혔었다.
그리고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치고 지나간 총탄은 조금만 더 안쪽으로 지나갔어도 출혈로 죽고 말았을 것이다.
의사와 병원도 없는 상태에서 입은 심각한 중상,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변종의 피는 온몸에 입은 부상을 빠르게 회복시켜주었다.
“상황은요?”
살아서 이곳에 들어온 것을 보니 추격을 피해 잘 빠져나온 모양.
나는 내 몫에 식사를 3분 만에 해치우고 현재 상황을 노인에게 물어봤다. 몸에 입은 부상은 회복되고 있는 상태고 나름 멀쩡해 보이는 험비를 보아 당장 수색을 시작해도 괜찮아 보인다.
그리고 내 다급한 물음에 노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책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트레킹 가이드라고 쓰여 있는 낡은 영문책자, 그곳에는 국유림의 지도가 고스란히 들어있었다.
“연료가 반밖에 안 남아서 큼직한 산길만 험비로 올라야겠다. 그래도 대충 어디 숨어있을지 짐작이 가니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채연이네가 놈들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산속으로 숨어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냥 아이들과 하는 숨바꼭질로 느껴졌다.
노인이 금방 찾는다고 장담한 이상, 이 긴 여정도 막바지에 도달한 것이 분명하다.
나는 조용히 지도위를 쓰다듬으며 노인이 짐작된다고 집어둔 위치에 조용히 손가락을 올려두었다.
차가운 지도위에는 이상하게도 온기가 남아있었다.
“형님?”
그리고 그 순간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산장 문이 열리더니 용팔이가 문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내 예상대로 어디 정찰이라도 다녀왔는지 얼굴에 까만 구두약을 바르고 있는 용팔이. 그리고 그 뒤로는 험비 정비를 끝마친 메리제인이 밝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시간에 맞춰 일을 끝낸 내 일행들, 나는 조용히 덮고 있던 담요를 치우며 그 둘에게 밥부터 먹고 하라는 몸짓을 취했다.
“괜, 괜찮으신 거죠? 부상이 매우 심했는데…….”
그리고 가장 먼저 벽난로 앞에 앉은 메리제인은 손에 묻은 기름때를 황급히 닦아내며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멋들어진 선글라스를 쓰고 미친 듯이 험비를 몰던 메리제인 중위.
그녀는 내가 쓰러지고 난 뒤로 많이 놀라기라도 했는지 붕대가 감긴 내 상처를 꼼꼼히 쳐다보았다.
일반적인 몸이라면 모를까, 이 정도 상처로는 괜찮다.
설명하기 귀찮았던 나는 그렇게 심하지 않다고 대충 둘러대며 용팔이와 그녀에게 그릇과 음식을 내밀며 입을 막아버렸다.
고생 또 고생 끝에 다시 한자리에 모여 시작되는 식사.
진즉에 두 그릇을 해치운 나는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일행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내가 깨어났다는 안도와 따뜻한 식사 속에 긴장으로 얼룩져있던 우리의 마음은 서서히 풀어지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이어지는 침묵의 식사. 오늘 밤은 비가 올 모양인지, 밖에서 고요한 빗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용히 식사를 마친 노인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며 용팔이에게 물었다.
“뭐 본 거 없냐?”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잠시 정찰을 다녀온 용팔이.
물론 많이 지친 상태였기에 장거리 정찰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근방은 돌아보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 노인의 물음에 수프를 마시고 있던 용팔이는 아! 하는 탄성과 함께 황급히 그릇을 내려놓았다.
표정에는 딱 봐도 말하는 걸 까먹고 있었다는 민망함이 담겨있었다.
“산속이라 그런가, 진짜 아무것도 없어요. 놈들도 한두 마리 돌아다니는 건 말고는 보이지 않고요. 아! 그리고……. 확실치는 않은데 오줌을 싸고 지나가다 언뜻 본 게 있거든요? 근데 그게 잘못 본 건지 아니면 진짜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 한 그릇 더 주세요.”
역시 예상대로 별 이상이 없었…. 아니, 있었다.
용팔이는 말을 하다말고 자신이 무언가를 발견했다는 이상한 사족을 달았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건빵 수프 한 그릇을 더 요구하며 태연하게 숟가락을 놀린다.
하지만 태연하게 수프를 먹는 용팔이와는 다르게 우리는 순간 움직임을 멈추며 그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무언가를 봤다? 현장을 구를 대로 구른 용팔이가 헛것을 볼 확률과 진짜 그곳에 무언가 있을 확률, 그 둘 중 어느 것이 더 높을까?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노인은 그대로 숟가락을 들어 올려 탐스러운 용팔이의 이마를 빡 하고 때렸다.
“지금 그게 넘어가냐? 도대체 뭘 봤는데?”
오우. 메리제인은 빠악! 하고 엄청난 소리가 난 일격에 자신이 맞기라도 한 듯 눈가를 찡그렸다.
그리고 이마에 숟가락을 제대로 맞은 용팔이는 붉은 숟가락 자국이 남은 부분을 연신 문지르며 끙끙 우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나는 평소처럼 용팔이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진짜 맞을 짓 했으니까.
“그, 그…. 엄청 멀리서 콩알만 한 불 하나가 1번 정도 깜빡이다가 허공으로 흩어지면서 사라졌어요. 그것도 제가 고개를 돌리자마자 바로 사라져서 당연히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저 뭐 잘못했어요?”
콩알만 한 빛이 1번 깜박이다 흩어지며 사라졌다. 이 어둠뿐인 산속에서 그걸 발견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싶을 정도로 좋은 집중력이었다.
이마를 빡빡 문지르며 우리의 눈치를 보는 용팔이와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해 두리번거리기만 하는 메리제인.
갑작스런 침묵이 찾아온 그 순간 나와 노인만은 눈을 마주치며 한 가지 단어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담뱃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