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2부 18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용팔이는 이쪽으로 오지말고 남쪽에서 퇴로 확보해 줘. 나는 그쪽으로 곧 합류하마.]
설명을 들은 노인과 용팔이는 묵직한 침묵을 지키며 나와 아픈 감정을 공유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일 뿐, 모든 상황을 파악한 노인은 용팔이에게 퇴로를 확보해 달라는 지시를 내렸고 곧 합류하겠다는 말과 함께 무전을 끝냈다.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는 노인의 목소리, 나는 그 속에서 살얼음 같은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 - - - -.”
날카로운 바람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볼륨을 줄인 무전기를 갈무리하며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어둠이 깔린 창밖을 통해 천천히 시간을 계산했다.
해가 뜨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시간 남짓, 그전에 체연이네와 관련된 모든 단서를 찾아내 하루라도 빨리 그 뒤를 쫓아야 했다.
나는 일단 기절시킨 장교의 손발과 입을 묶은 뒤 침대 아래로 던져 놓았고, 잔뜩 긴장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메리제인과 함께 내가 들어왔던 창문을 다시 한 번 넘었다.
아까와는 달리 확연하게 밝아진 밖과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뒤척임.
이제 1시간만 있으면 저 멀리 보이는 여명이 하늘위로 떠오를 것이다.
“제 등만 보고 따라오세요.”
해가 뜨기 전에 단서를 찾으려면 최대한 빨리 소방서 건물로 향해야만 했다.
나는 뒤에 서 있는 메리제인 중위에게 내 등만 따라오라는 단순한 지시를 내렸고, 그녀는 알겠다는 듯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권총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인기척, 나는 여명이 몰아내려는 어둠을 따라 재빨리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경계인원 대부분이 철조망과 정문에 집중되어서 그런지 방위대가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소방서의 경계는 그렇게 삼엄하지 않았다.
나는 가로수 뒤쪽에 조용히 몸을 숨기며 건물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 두 명을 확인했고, 이내 최대한 들키지 않는 방향으로 진입하기 위해 건물을 빙 돌아 소방서 뒤쪽을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초병의 눈을 피해 소방서 뒤쪽으로 다가가자 사람 하나가 충분히 넘을 수 있는 작은 담이 시야에 들어왔다.
철조망을 점검하며 돌아다니는 경계인원들에게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완벽한 사각지대, 숨고 뛰기를 반복하는 20분의 고군분투 끝에 소방서에 도착한 나와 메리제인은 그제야 거칠게 숨을 고르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저기 2층이요.”
그리고 숨을 고르는 동안 바쁘게 건물을 살펴본 메리제인은 2층 한 창문을 검지로 가리키며 조용히 자세를 숙였다.
2층 오른쪽 맨 끝 방. 모든 창문은 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그녀가 가리킨 창문만은 오직 열려 있었고, 방 내부에 촛불을 켜두었는지 창틀 사이로 은은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나는 권총을 홀더에 넣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먼저 올라갈게요.”
2층이라고는 하나 건물지대가 비교적 낮아 사람이 충분히 올라갈 수 있는 높이였다.
나는 발을 가볍게 디디며 1층 난간을 붙잡았고, 이내 실외기와 창틀에 발을 올리며 재빨리 2층 창문을 향해 접근했다.
입체적으로 싸워야 했던 시가지의 경험 덕분일까, 나는 20초도 지나지 않아 목표로 한 창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고 이내 불이 들어오는 창틀에 힐끔 머리를 내밀었다.
“- - - -.”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방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나는 밑에서 주변을 살펴보는 메리제인에게 올라오라는 수신호를 보냈고, 거침없이 몸을 움직여 방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커피냄새와 담배연기, 책상위에는 아직도 김이 솔솔 올라오는 커피 한 잔이 올라와 있었다.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직감했다.
“……캐비닛은 제가 뒤져볼 테니, 책상을 부탁해요.”
그리고 내 뒤를 따라 재빨리 방안으로 들어온 메리제인은 한쪽에 빼곡한 캐비닛을 향해 다가가 서류를 파헤치며 나에게 말했다.
1분 1초가 다급한 상황, 나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따뜻한 커피가 올라가 있는 책상 서랍을 전부 열어젖혔다.
체류기간이 긴만큼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영문 서류들.
나는 머리가 터져라 그 영어들을 읽으며 채연이네와 관련된 정보를 찾기 시작했고, 캐비닛을 뒤지는 메리제인도 다급히 서류를 파헤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1분, 2분, 3분.
심장에 박힌 초시계는 똑딱똑딱 소리를 내며 시간이 흘러감을 알려 준다.
허나 몰려오는 조급함과는 반대로 우리가 찾는 정보는 보이지 않았다.
“젠장!”
그리고 벌써 두 번째 캐비닛을 뒤지고 있는 메리제인은 작게 신경질을 부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생각보다 많은 서류 량과 혹시 폐기했으면 어쩌나하는 불안한 마음.
나는 이마와 콧등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재빨리 닦아내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조급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인질이라도 잡아서 물어봐야 할까? 온다던 노인은 어디쯤 왔을까?
나는 바쁘게 손과 눈을 움직이면서도 짙은 상념에 빠져 마른침을 삼켰다.
목이 마르다. 나는 본능적으로 갈증을 느끼며 책상위에 올라가 있는 커피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단순히 목이 마르단 본능에서 나온 행동.
찰나의 시선에서 확인한 커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나는 그것을 단숨에 마셔 버릴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그 순간 커피 잔 뒤로 보이는 한 종이박스에 조급함으로 지친 시선과 정신이 날아가 꽂혔다.
“- - - - -.”
내가 왜 그곳에 시선을 던졌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날의 우연은 꼭 신이 만들어 준 기적처럼 내 시선을 빼앗았고, 나는 천천히 그 종이박스를 향해 걸어갔다.
낡은 갈색 종이 박스 안에 가득 쌓여 있는 잡다한 물건들, 평소라면 쳐다보지도 않았을 물건들이지만 그때는 이상하리만큼 신경이 쓰였다.
그리고 나는 종이 박스 안에서 봐달라는 듯 살며시 삐져나와 있는 가방 하나를 발견했다.
유아용으로 보이는 그 가방은 몹시 낡아 분홍색 표면이 다 해져 있었고, 심지어 오른쪽 끈 한쪽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하지만 가방 표면에 반쯤 지워진 채 붙어 있는 고양이 키티 캐릭터는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가지 기억을 불러와 주었다.
“- - - -!”
나는 넘어지듯 그쪽을 향하며 재빨리 손을 뻗었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키티 가방을 잡은 순간 과거의 거울이 다가와 현실이 되었다.
내가 고시원에서 뛰쳐나온 순간부터 죽기를 각오한날 이 가방에 일기를 집어넣었던 그 기억까지.
아프면서도 너무 아련한 그 추억들은 주마등이 지나가듯 눈앞을 맴돌며 먹먹함이라는 감정이 닿는다. 종이 박스 안에 있는 이 물건들은 급하게 떠난 채연이의 물건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었구나.
4년이라는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키티 가방은 왠지 아이들이 무사히 있다고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물건들을 뒤적이던 나는 가방 안에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지퍼를 열어 내용물을 뒤졌다.
그러자 가방 한쪽에는 손때가 많이 묻어 있는 한 다이어리가 은밀한 모습으로 숨겨져 있었다.
특별한 점 없는 평범한 외관이었지만 주인의 손길을 많이 탄 듯 연한 갈색으로 되어 있는 그 다이어리.
내가 떨리는 손으로 꺼내든 다이어리 표지에는 분명 이채연이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순간 다급히 다이어리를 열어 한글로 빼곡히 기록된 글자들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찾으셨어요?!”
그리고 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들고 있자, 한쪽에서 땀을 뻘뻘 흘리던 메리제인이 다급히 이쪽으로 달려와 물었다.
하지만 나는 채연이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일기를 정신없이 읽느라 그녀에게 대답해 줄 겨를이 없었다.
급박한 순간에도 글자가 뇌리에 박히듯 읽혀지고 다이어리를 잡고 있는 내 손 떨림은 서서히 멎었다.
* * *
x월x일, 날씨 흐림.
이곳은 온통 거짓말투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남을 모함한다. 그리고 그것을 방관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현실이며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입이 마르도록 말했다. 하지만 아빠는 나에게 늘 말씀하셨다. 네가 포기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이 곧 우리의 에덴이라고. 흐린 눈으로 흐린 세상을 살아가는 저들이 한심하면서도 불쌍했다.
x월x일, 날씨 좋음.
오늘 연경이 언니가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배급이 공평하지 않다는 증거를 찾아내었다. 하지만 기지에 아무리 성토를 해보아도 그들은 우리를 귀찮은 취급할 뿐, 말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 만약 아빠가 없었다면 우리도 저 피난민들과 다를 게 없는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 않으니까.
x월x일, 날씨 흐림.
난민 구역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나 10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군인들은 가차 없이 그들은 진압했고 언제나 똑같은 말로 피난민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공포와 두려움이 이곳에 자욱하니 가라앉는다. 생기를 잃은 사람들과 희망이 없는 내일, 우리는 마치 심장이 뛰는 기계처럼 천천히 녹슬어가고 있었다.
x월x일, 날씨 비.
근처에 적당한 장소와 수레를 끌 수 있는 안전한 길을 찾았다. 그곳은 강이 근처에 있어 식수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주변을 빽빽하게 둘러싼 우거진 숲은 부랑자들과 놈들로부터 우리를 숨겨줄 것이다. 오빠와 언니들은 만장일치로 내 의견에 동의했으며 엄마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준다는 말과 함께 나를 꼭 끌어안아주셨다. 아빠도 보고 싶었다.
x월x일, 날씨 비.
상황은 점점 나빠지자 나는 ‘그때’ 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군인들이 압수한 무기를 오랜 시간 공들여 하나 둘 빼돌렸으며 최대한 아낀 식량은 땅에 묻어놓고 우리가 끌고 갈 수레에 옮길 준비를 했다. 밖에서 성난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온다. 저들이 광기에 완전히 먹히는 그 때가 우리가 이곳을 나가는 날이 될 것이다.
* * *
채연이는 결코 충동적이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를 닮아 그렇게 꼼꼼한지 아이는 자신이 찾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았고, 또 어떤 날은 은신처로 사용할 장소에 몰래 가 보는 과감함까지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직 서투르고 부족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강수련과 다른 형제들 덕에 허술한 부분은 조금씩 채워졌다.
그리고 한 달이라는 시간이 걸린 그 과정은 연필로 꾹 꾹 눌러쓴 귀여운 글자로 이 일기장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비록 공식적인 서류는 아니지만 생생한 경로와 아이의 생각이 진하게 묻어 있는 이 일기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던 것이다. 나는 일기 중앙에 꽂혀 있는 한 지도조각을 꺼내들어 붉은색 펜으로 표시되어 있는 지역의 이름을 읽었다.
샤스타 – 트리니티 국유림.
채연이네는 지금 저곳에 있었다.
“……찾았습니다.”
나는 아이의 일기를 조용히 집어넣으며 겉이 다 해진 키티 가방을 소중하게 챙겼다.
그리고 뒤쪽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메리제인에게 기록을 찾았다는 말을 남기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어느새 해가 뜨기 직전인지 여명이 맺혀 있었고, 어두운 길가는 백색 햇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가방을 챙기며 메리제인에게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마음 같아선 방위대고 뭐고 다 엿을 먹여 주고 싶었지만 그보다 급한 것은 채연이네와의 합류다.
어차피 미 육군이 움직인 이상 이들은 자신의 할 일에 대한 대가를 받을게 분명한 일, 나는 미련을 가볍게 떨쳐내며 천천히 창틀을 밟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아까 울렸어야 할 무전기 소음이 귀를 찌르며 다급한 노인의 목소리가 전해 왔다.
[거기서 빠져나와!]
땡- 땡- 땡- 땡- 땡-!
그리고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정문 방향에서 요란한 경보 종소리가 울렸고, 채 10초도 되지 않아 소란스러운 고함소리가 캠프 사방으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간 고개를 쳐들며 일어나는 위험신호와 빠져나오라는 다급한 노인의 경고소리.
어디서 꼬리가 잡힌 건지는 모르겠지만 캠프 내부에 너무 오래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로 갔는지 찾았어요! 바로 남쪽으로 갈게요!”
일단 나는 원하는 것을 찾았다는 무전을 빠르게 보내고 그대로 메리제인과 창틀을 뛰어넘으며 아래로 내려왔다.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과 마치 위험의 순간을 경고하듯 폐부에 차오르는 거친 숨.
난 사방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숨을 크게 들이키며 홀더에 넣어둔 권총을 꺼내들었다.
그러자 마치 용암과 같은 녹진한 감각이 검지 끝에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