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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220화 (220/313)

# 220

2부 17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메리제인 중위.”

내가 창문을 넘어 이름을 부르자 메리제인은 흠칫 몸을 떨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얼떨떨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이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입을 뻐끔뻐끔 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여기에?

하지만 나는 그녀가 목소리를 내기 전에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취하며 천천히 그녀에게 접근했다.

메리제인 중위의 오른쪽 손은 바닥에 고정되어 있는 철제 침대와 수갑으로 연결이 되어 있었다.

허나 손이 묶인 와중에도 그녀는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인 발버둥을 쳤는지 주변 가구들 대부분 박살이 나 있었고 심지어 잠겨 있는 문짝은 수없이 많은 군화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주머니에서 락픽 도구를 꺼내들었다.

찰칵.

지금은 완전히 성인이 된 다혜한테 쉬는 시간마다 배운 락픽 기술.

현지에서 큰 소음 없이 보급품을 구하려면 이 락픽 기술이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몸이나 가방에 항상 도구를 소지하고는 했다.

그리고 내가 바쁘게 손을 움직인 지 채 10초도 되지 않아 메리제인의 오른쪽 손목을 속박하고 있던 수갑이 찰칵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

그리고 수갑을 풀고 있는 동안 거칠게 오른 숨을 가라앉힌 메리제인은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어루만지며 묻고 싶은 것이 많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용히 나와 눈을 마주친 그녀는 어디서부터 어떤 것을 말해야 할지 감을 못 잡는 중이었고, 그 복잡한 심정은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우린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혹시 아이들 위치를 알고 있습니까?”

그녀가 이곳에 감금당한 것에는 복잡한 사정과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실타래를 음미해 가며 하나하나 뜯어 보기에는 시간이 몹시 촉박했고, 나는 무언가를 알고 있어 보이는 그녀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채연이네가 있는 위치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오는 동안 우리의 사정을 전해 들어 질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있을 메리제인은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한 달 전에 무리를 이뤄서 이곳을 떠났어요.”

그녀는 참담함과 죄책감이 묻어나는 표정을 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순간 현실을 잊기 위해 감겨지는 눈, 그리고 내 심장은 떨어지는 눈꺼풀과 함께 바닥으로 쿵 내려앉았다.

무리를 이뤄서 떠났다 라는 말에 입에서 터져 나오는 뜨거운 숨결과 속에서 응어리진 분노가 가슴을 헤집어 놓는다.

나는 어느새 떨리는 오른손을 반대쪽 손으로 꽉 붙잡은 채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한 무언가를 속으로 씹어내고 있었다.

한 달 전만 해도 나와 웃으며 통화를 했던 채연이와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던 강수련.

허나 한 달이라는 시간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이곳에 도착했음에도 소중한 이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왜 떠나야 했을까, 안전한 곳을 내버려두고 채연이네는 왜 이곳을 떠나야만 했을까.

나는 메리제인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내보낸 겁니까?”

입에서 터져 나오는 목소리에는 짙은 노기와 함께 분노가 절절 끓고 있었다.

약육강식, 적자생존. 약한 사람은 죽고 강한 사람은 살아남는다.

철혈과 오직 본능만이 남은 이 시대는 싸울 수 없는 것을 무능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에 충실하게 따른 일부 생존자들은 스스로 약자를 걸러내며 집단의 효율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그 거름의 과정은 내가 수없이 목격했던 인간성의 변화였고, 이제는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버린 비극의 단편이었다.

그렇기에 나와 에덴 팀은 어쩌면 약자라고 볼 수 있는 채연이네가 이곳에서 무사히 지낼 수 있게 그들이 요구하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고작 한 달이다. 안전하게 지내고 있어야 할 채연이네가 우리와 연락이 끊긴 지 고작 한 달 만에 이곳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리고 내 떨리는 목소리에 메리제인은 자신이 갇히기 전 찾은 기록들을 슬픈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아니요, 자발적으로 떠났어요. 쫓겨나는 피난민 전부를 데리고요…….”

몰려오는 피난민으로 인해 더글러스 군사캠프의 수용시설은 점점 부족해지고 있었다.

거기다 설상가상 유일한 동아줄인 공중 보급의 주기는 점점 길어졌고, 소모품인 연료와 탄약의 부족은 방어시설의 축소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상황은 계속해서 악화되었고, 희망은 점점 사라져 간다.

마치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절망적인 하루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내일.

스스로를 철장 속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어김없이 노출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살기 위해 움켜잡은 희망도 재기도 아닌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불특정의 증오였다.

‘저들은 쓸모가 없다.’

이성을 잃은 대중의 첫 번째 목표는 부모를 잃은 고아들과 보호자가 없는 노약자들이었다.

힘이 없어 캠프 내 잡일밖에 하지 못하지만 꼬박꼬박 배급을 받아먹는 그들은 이성을 잃은 대중들에게는 그저 기생충들과 다를 게 없었고, 자신들이 정한 거름망에 가장 먼저 걸러져야 할 인간들이었다.

저들은 쓸모가 없다. 우리의 식량을 축내기 전에 밖으로 쫓아내라!

살기 위해 인간성을 버려야하는 미친 세상이 드디어 이 군사 캠프에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아무리 틀린 것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옳다 외치며 그것은 옳은 것으로 변한다.

마침 수용시설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캘리포니아 방위대는 겉으로는 중재를 하는 척하며 이기심에 사로잡힌 시민들의 지지를 모았다.

그리고 제2시설이라는 위선적인 방안을 만들어 고아들과 노약자들을 다른 캠프로 이관하는 작업을 실시한다.

물론 제2시설은 이름만 그럴싸할 뿐 방어인력과 시설조차 없는 빛 좋은 개살구였다.

식량은 딱 일주일치밖에 준비되지 않은 넓은 관, 그것은 이관이라는 이름을 한 살인이었던 것이다. 모두가 알고 모두가 이기적이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자들은 소리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무기력한 몸을 이리저리 휘둘려야만 했다. 왜냐하면 힘이 없다는 잘못은 저 수많은 군중들에게는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원죄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선 게 선생님의 따님이세요.”

한참 쉼 없이 말을 이어가던 메리제인은 떨리는 목소리로 사건의 결말을 장식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말에 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로 찌르르 울리는 신경과 눈을 애써 감는다.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서 오는 노도의 감정과 그 어린 아이에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이 만든 이들을 향한 분노가 일직선으로 교차했다.

우리의 노력으로 가장 좋은 음식을 먹으며 가장 좋은 곳에서 지냈을 채연이네는 이곳에서 쫓겨날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저 부정을 잠시 외면하고 입을 다문 채 몇 달 뒤면 자신을 데리러와 줄 나를 기다렸으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저 사람들하고 같이 가겠어요.’

채연이는 회색도시에서 배운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모두가 사는 길을 선택하고 인간성을 버리지 않는 현실, 다수가 틀린 것을 옳다고 할 때 혼자서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선한 사람이 되기보단 그저 인간이 되기를 선택한 그 단순한 신념은 평화로운 일상이 뒤집힐지도 모르는 두려움에서도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한 아이의 무기가 되어 준 것이다.

그리고 그날 채연이는 자신의 가족들과 떠나기를 선택한 피난민들을 데리고 이곳을 벗어났다.

언제나 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조그마한 아이가 나와 우리에게서 배운 가치관을 심장에 품고 저 멀고도 험난한 길을 두 발로 걸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 모든 것을 이해한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어디로,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원망스럽지만 탓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커 버려 내 품을 벗어난 아이가 미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그리웠다.

허나 이 복잡한 감정은 당장 아이들의 뒤를 쫓아야한다는 판단으로 모여들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냉정의 야성이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차가운 분노가 새겨진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도 거짓말처럼 조용히 가라앉았다.

“본, 본부에서 서류를 찾다가 붙잡혔어요. 분명 거기에 가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 소방서 건물 2층……. 제가 길을 알아요.”

그리고 내 차가운 얼굴을 마주한 메리제인은 횡설수설하며 말을 더듬다가도 일에 중요함을 아는지 다급히 단서가 될 만한 실마리를 나에게 던져 주었다.

정문 근처에 있는 소방서 건물.

인질을 잡아서 묻자니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리스크가 컸고 차라리 기록으로 남은 서류를 찾아 챙겨 가는 게 더 좋은 방법일지 모른다는 판단이 섰다.

뚜벅, 뚜벅, 뚜벅.

“- - - - - -!”

그리고 내가 짧은 상념에 빠져 있는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갑작스런 발소리에 메리제인은 깜짝 놀라며 몸을 흠칫 떨었다.

이야기가 끝날 때쯤 타이밍 좋게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 하나.

메리제인은 설마 지금 이 시간에 누군가 찾아올 줄을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로 나에게 숨으라고 다급히 속삭인다.

“후…….”

하지만 나는 그 속삭임을 귓등으로 흘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폐부에 가득 쌓인 묵은 숨을 훅 내뱉고 마치 행동이 정해진 기계처럼 허벅지에 꽂혀 있는 대검 손잡이로 오른손을 가져간다.

오늘따라 유난히 차가운 피부 위 감촉이 온몸을 싸늘하게 굳혔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머릿속에 정리되자 슬픔으로 날아갔던 탈력감이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이봐 중위, 계속 이러면 자네나 우리나 피곤한건 매한가지야. 문 열고 들어갈 테니까, 제발 아까처럼 발로 차지는 말아 줘.”

그리고 잠시 뒤 문 앞에 선 누군가가 조용히 노크 소리를 내며 방안에 있는 메리제인을 향해 말했다.

그녀를 회유하려는지 은근한 어투를 담고 있는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겨 있는 문이 열렸고 메리제인은 일촉즉발에 상황에서 마른침을 조용히 삼킨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 감겨 있던 내 눈도 열렸다.

“어때, 생각은 해 봤……. 어?”

문을 열고 들어온 상대는 한 백인 장교였다.

그는 자신들에게 크게 반발하던 메리제인을 구슬리려고 왔는지 한쪽 손에는 쉽게 구하기 힘든 기호품을 잔뜩 들고 있었고 재수 없는 얼굴에는 능글능글한 웃음을 매달고 있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는 수갑에서 풀려나 있는 메리제인과 문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나를 발견했는지 흠칫 몸을 떨며 행동을 멈추었다.

“……Shit!”

하지만 꼴에 군인이라고 재빨리 상황판단을 한 그는 권총 홀더를 향해 재빨리 손을 옮겼다.

나를 침입자라고 판단했는지 놈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거친 욕설, 그러나 나는 놈이 권총을 뽑을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 - - - -컥!”

순식간에 접근하는 빠른 발걸음과 놈의 울대를 치는 정확한 일격.

주먹으로 울대를 맞은 놈은 순간 숨을 컥 내뱉으며 비틀거렸고, 나는 그대로 권총을 뽑으려는 놈의 오른쪽 손을 막았다.

마치 기계처럼 이어지는 연속 동작과 내 움직임에 맞춰 뿜어져 나오는 날숨.

이내 반대쪽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이 번개처럼 움직이며 놈의 관자노리를 손잡이로 내려찍는다.

털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관자놀이에 직격하는 일격.

놈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흰자위를 드러내며 기절했고, 이내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한 명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4초, 나는 놈이 가지고 있던 권총을 뺏어 들어 넋 놓고 이곳을 바라보는 메리제인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의사를 물어보는 물음을 그녀에게 던진다.

“장소만 알려 주세요. 이곳에 계서도 탓하지는 않겠습니다.”

독립적인 방위대라고 하나 어쨌거나 이들은 미국이라는 국가에 소속된 군인이다.

나는 지금 그 군인을 해친 것이고 앞으로도 앞길을 막는다면 목숨까지 뺏을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미군소속인 메리제인이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한다면 추후 상부로부터 징계를 받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 권유에도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권총을 받아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들은 군인이 아닙니다. 저도 같이 갈게요.”

시민을 버린 저들은 군인이 아니다.

단순히 임무를 위해 여기까지 맨몸으로 달려온 그녀다운 대답이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검을 집어넣었고, 이내 앞주머니에 꽂아 둔 무전기를 꺼내들어 북쪽과 서쪽에서 바삐 움직이고 있을 일행들을 불렀다.

채연아, 금방 갈게.

마음속에서 속삭인 그 한마디를 끝으로 내 손 떨림은 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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