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2부 16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더글러스 군사 캠프의 방어시설은 준수한 편이었다.
타운 전체를 빙 두른 이중 철조망들과 가파른 진입로, 그리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마다 높은 방벽과 감시탑이 세워져 있었다.
물론 수천 마리의 놈들이 몰려온다면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겠지만 놈들의 분포 밀도가 옅은 이곳에선 이 정도가 적당했다.
물론 적당하다는 말은 통상적인 결론일 뿐이지, 서울 전선의 구축 과정을 함께한 우리 입장에선 빈틈투성이일 뿐이었다.
얼굴에 칠한 까만 위장크림과 온몸을 가린 검은색 옷.
가뜩이나 밝은 조명을 사용할 수 없었던 그들은 우리를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고, 나와 일행들은 하나의 어둠이 되어 시선과 감시망을 능숙하게 피해 내었다.
마치 검은색 먹을 머금고 흘러가는 것 같은 트리니티 강.
우리는 강변길을 조용히 가로질러 입구와 멀리 떨어진 시티 외곽으로 걸음을 옮겼고 더글러스 시티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능선에 바짝 엎드려 철조망과 감시탑을 어슬렁거리는 경계인원을 관찰했다. 정문이 아닌 외곽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꽤 삼엄한 경비.
노인은 머리를 긁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봐줄 만하네.”
빈 공간이 생기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경비 인원과 3명이서 짝지어 다니는 돌아다니는 체계적인 시스템.
그래도 나름 군인이라고 경계를 서는 인원 대부분은 철저한 중무장과 함께 진지한 얼굴로 경계임무를 서고 있었다.
허나 우리의 길은 정면 돌파가 아니었기에 별 상관이 없었다.
노인은 우리를 향해 조용히 속삭이며 바닥에 앉았다.
“싸우려고 들어가는 거 아니야, 알지 ”
말 안 해도 안다.
나와 일행들은 움직임에 방해가 되는 장비와 AR들을 적당한 위치에 숨겨 두고 낙엽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옷가지만을 걸친 맨몸에 검은색으로 칠한 대검과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챙기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입의 목적은 기지로 숨어들어 캠프 인원을 해치려는 것이 아닌, 채연이네와 접촉해 신변의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것에 있었다.
왜냐하면 유난히 적대적이던 저들의 태도에서 우리를 절대 안으로 들여보내지 않을 거라는 단호함을 읽었기 때문이니까.
그러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채연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그 후 행동은 그때 가서 판단하기로 했다.
물론 그 결과가 그들과의 협상이든 충돌이든 나는 모든 것을 감내해 줄 생각이 있었다.
깊은 새벽, 가장 선두에 서서 잠입을 지휘할 노인은 순식간에 강물을 향해 뛰쳐나가며 조용히 속삭였고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 복창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 * *
모든 수로는 큰물로 모이고, 그 길은 언제나 마을과 이어진다.
지도를 펼친 지 1분 만에 더글러스 시티내부 오토캠핑장에서 강으로 흘러나오는 배수로가 있다는 것을 파악한 노인은 허리까지 오는 트리니티 강을 거침없이 가로지르며 수로의 입구가 있는 곳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차가운 강물과 생각보다 빠른 물살. 마치 검은색 먹을 머금은 것 같은 트리니티의 강물은 앞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연신 밀어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몸을 밀어주며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최선을 다해 강물을 헤쳐 나간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기를 3분, 갑자기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을 멈춘 노인은 물이 옅은 지역을 향해 천천히 우리를 이끌었다.
그리고 배수로의 입구로 보이는 수풀 한 곳을 가리키며 나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이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밤, 노인은 오로지 경험과 지혜만으로 수풀에 가려진 배수로 입구를 찾아낸 것이다.
하지만 캠프로 통하는 배수로는 당연히 콘크리트 틀과 철근으로 만들어진 쇠창슬로 막혀 있었는데 그 입구는 철근을 뜯어내지 않는 이상 안으로 들어가지 못할 만큼 간격이 좁았다.
웬만한 절단기로는 끊을 수도 없어 보이는 튼튼한 철근, 만약 이곳을 뚫기 위해 전문적인 장비를 사용한다면 소음이나 빛 때문에 들킬 것이 분명했다.
“동윤아, 힘 좀 쓰자.”
하지만 노인은 이런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다는 얼굴로 배수로 입구를 가리고 있는 수풀을 재빨리 치운다. 그리고 나를 향해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항상 힘들거나 곤란한 일을 시킬 때 지어 보이는 저 특유의 웃음.
나는 이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고 이내 배수로 입구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후우.
숨을 들이키자 강물만큼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쿵쿵 소리를 내며 뛰는 심장과 평소와는 다른 힘이 가해지는 근육.
나는 용팔이가 건네주는 두꺼운 천으로 철근을 감싸고 그것을 힘껏 부여잡았다.
목표는 부식이 가장 심하게 된 가운데 철근이다. 나는 마치 역기를 드는 선수처럼 천천히 호흡을 골랐고 이내 한순간 숨을 멈췄다.
- - - - !
손에 모든 힘을 집중시키자 콘크리트 틀이 부서지는 느낌과 함께 찌르르 울리는 여운이 손끝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작은 소음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 저 뒤로 흐르는 강물소리에 묻혀 사라져버린다.
진화한 완력을 사용해 장비 없이 통로를 만드는 무식한 방법.
나는 콘크리트 틀에서 때어난 철근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지친 숨을 훅 내뱉었다.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로와 방법으로 만들어 낸 새로운 통로다.
이곳을 통해 잠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나올 때도 똑같이 빠져나온다면 저들은 밤새 우리가 다녀갔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고생했다는 듯 내 어깨를 툭 쳐 주는 노인과 양쪽엄지를 들어 올리는 용팔이.
나는 피식 웃으며 배수로 안쪽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배수로의 길이는 대략 80m. 바닥에는 얕게 물이 흐르고 있었고, 위쪽은 촘촘한 거름망과 디딤판으로 막혀 있었지만 일행 3명이 충분히 기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그렇게 나를 선두로 바퀴벌레처럼 배수로를 기어간 우리는 이중으로 이루어진 철조망과 경계인원을 가볍게 지나쳐 더글러스 시티 내부로 들어왔다.
그리고 배수로 끝에 도달해 밖으로 빠져나오자 오른쪽에는 캠핑카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오토캠피장이 시야에 펼쳐졌다.
전력시설이 망가진 탓에 마을 내부는 몹시 어둡고 조용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의 운신 폭은 상당히 넓어졌고, 어둠속에선 들킬 염려 없이 마음껏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오토 캠핌장에 길게 늘어져 있는 캠핑카들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기척.
마을이 좁기는 해도 거주하는 민간인들이 워낙 많다고 하니 이런 곳에도 숙소를 차린 모양이다.
일단 가장 먼저 파악해야 하는 건 채연이네가 거주하고 있는 건물의 위치다.
허나 이곳의 지형조차 모르는 우리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곳을 손수 찾아다녀야 했고, 어디서부터 찾아야 하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까지 남은 시간은 불과 3시간, 조용히 자리에 멈춰 머리를 굴린 나는 결국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찢어집시다. 무전기 챙겨요.”
저들이 군사훈련을 받은 군인들이라지만 나는 우리 일행들이 그들에게 능력으로 뒤쳐질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랜 현장 경험과 수많은 죽음을 뛰어넘은 순간에서 오는 판단능력, 장담컨대 어느 나라를 뒤져봐도 이 둘만큼 뛰어난 동료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찢어져 행동하더라도 임무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에덴에서 최정예 인원을 데리고 왔으니 최고의 효율을 만들어 내보자.
내 빠른 판단과 망설임 없는 지시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인 노인과 용팔이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어둠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용팔이는 서쪽, 노인은 북쪽. 배수로와 캠핑장이 있는 남쪽과 정문이 있는 동쪽은 내가 확인한다.
가장 먼저 채연이네를 발견한 사람이 연락을 주고 우리가 들어온 배수로에서 합류해 밖으로 빠져나간다.
나는 급조한 작전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며 서서히 멀어지는 그 둘을 마지막으로 재빨리 캠핑장으로 스며들었다.
해외영화에서나 보던 캠핑카들이 줄지어 서 있는 이곳은 대부분 피난을 온 민간인들의 거주지역인지 곳곳에는 생활 쓰레기들과 맥주병들이 굴러다녔고, 바닥에는 심한 악취와 함께 오물들이 널려 있었다.
좋지 않은 위생 상태와 시설, 나는 표정을 굳힌 채 캠핑카들의 창문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혹시 있을지 모를 채연이네를 찾아다녔다.
빛이 없는 늦은 밤이라 그런지 캠핑장은 간혹 들려오는 웅성거림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이 지역을 수월하게 수색한 나는 1시간에 걸쳐 모든 캠핑카를 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오토캠핑장에서는 채연이네를 찾을 수 없었고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이쪽에는 없습니다. 바로 동쪽으로 이동할게요.”
1시간을 소비했으니 남은 시간은 2시간뿐이다.
나는 무전기를 꺼내들고 노인과 용팔이를 향해 남쪽 캠핑장에는 채연이네가 없다는 무전을 보냈다.
그러자 통신을 받은 반대쪽 무전기에선 작은 잡음과 함께 숨을 죽인 노인과 용팔이의 대답이 들려온다.
[북쪽에 있는 학교에 도착했는데, 그냥 교실마다 민간인 천지다. 확인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거 같으니까 조금 빠듯하게 다녀보자.]
[저도 도착하고 돌아다니는 중이에요. 이쪽은 죄다 창고밖에 없는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하고 할아버지랑 합류할게요.]
잠입과 수색은 들키지 않고 차근차근 진행 중이었다.
나는 조심하라는 대답과 함께 무전기 볼륨을 줄였고, 이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숨을 골랐다.
조급함과 긴장감에서 몰려오는 거친 숨과 온몸에 느껴지는 한기.
하지만 나는 재빨리 부정적인 요소를 떨쳐내며 정문과 군인들이 몰려 있는 동쪽을 향해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 * *
정문이 있는 동쪽에는 이 작은 마을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번화가가 있었다.
물론 번화가치고는 굉장히 협소했지만, 식료품점과 우체국 그리고 술집으로 보이는 펍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나름 중심가인 모양.
물론 군인들과 중요 자원들은 전부 이곳에 몰려 있었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경계인원은 다른 지역보다 두 배는 더 많아 보였다.
“- - - - - -하하.”
그리고 번화가 거리 한복판에는 작은 모닥불을 피운 군인들이 웃으며 모여 있는 것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불침번을 서기 전 이곳에 모여 카드 게임이라도 하는지, 여기저기서 들여오는 작은 웃음소리들.
그 때문에 운신 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건물 골목 사이를 숨어들며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모든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한 걸음, 한 걸음에 사력을 다한다.
눈앞에 보이는 시각과 귀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심지어 피부에서 느껴지는 기류는 내가 주변을 돌아다니는 군인들에게 몸을 숨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하지만 그 주기는 점점 좁혀 오고 있었고, 촉박한 시간은 덧없이 흘러만 갔다.
채연아, 도대체 어디 있는 거니 나는 답답함이 묻어나오는 한숨을 훅 내뱉었다.
쿵-! 쿵쿵!
“- - - - -!”
그리고 내가 한 건물의 창문을 들여다보는 그 순간 바로 뒤쪽에서 침묵을 깨우는 커다란 소음이 쿵쿵거리는 소리와 함께 울려왔다.
유난히 조용한 밤이었기에 더욱 크게 들렸던 그 소음.
나는 깜짝 놀라 재빨리 바닥에 엎드리며 몸을 숨겼고 이내 쿵쿵 거리는 소음의 발원지인 뒤쪽 건물을 향해 시선을 집중시켰다.
쿵!! 쿵 쿵-!
“- - - - fucker!”
나무재질의 무언가를 두드리는 소리, 그것은 아마 문을 힘껏 두드리는 소리가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그 소음은 아까보다 더욱 크게 울리며 어떤 여성의 목소리를 동반했는데, 이상하게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군인들은 이 소음이 익숙하기만 한지 잠깐의 시선만을 줄뿐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은 채 슥 지나가 버렸다.
무언가 이상하다. 이 한밤중에 여자가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는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그래, 마치 이 광경이 익숙한 듯 말이다.
나는 엎드렸던 바닥에 천천히 일어나 소음이 들리는 건물로 걸어갔고, 이내 작은 불빛이 새어나오는 2층 창문을 바라보았다.
실내에 촛불을 켜 두기라도 했는지, 붉은색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는 2층 창문.
지대가 낮은 건물이기에 충분히 기어 올라갈 수 있게 다는 생각을 한 나는 조용히 난관과 실외기를 붙잡고 건물을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쿵쿵 거리는 소음과 한 여성의 고함이 들려왔는데, 왠지 그 목소리가 익숙했다.
“열어! 열라고, 이 개새끼들아-!”
걸걸하고 터프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그곳에는 수갑으로 한쪽 손이 묶인 메리제인 중위가 온몸을 버둥거리며 잠긴 문을 발로차고 있었다.
산발이 된 머리와 흘린 땀으로 인해 흠뻑 젖은 얼굴.
수갑을 차고 있는 그녀의 오른쪽 손목은 수갑에서 빠져나오려고 심한 발버둥을 쳤는지 찡긴 상처로 가득했다.
우리를 꼭 들여보내주겠다고 약속한 메리제인 중위는 안 나온 것이 아닌 그들에게 감금되어 못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자세한 사정을 알고 있을지 모르는 메리제인 중위, 나는 잔뜩 힘이 들어간 주먹을 꽉 쥐고 일행들에게 무전을 보낼 틈도 없이 재빨리 창문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