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8
2부 15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옛 생각이 날 정도로 빠른 속도의 행군이었다.
순식간에 지나치는 주변광경과 미친 듯이 뛰는 심장, 입에서는 연신 단내가 뿜어져 나왔고 얼굴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하지만 나와 우리 일행들은 더글러스 시티로 향하는 행군의 속도를 늦출 생각이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주황빛 황혼과 점점 어둑하니 변하는 주변 숲들.
우리의 집념과 만나야 한다는 의지는 마치 순풍을 만난 돛처럼 천천히 속도를 더해 갔다.
호흡과 무호흡, 흔들리는 시야와 또렷한 정신이 교차한다.
그리고 발바닥에 감각이 사라질 때쯤 우리는 마지막 오르막길을 넘어 저 멀리 내리막길이 보이는 능선에 서 있었다. 저 앞에 목적지가 보였다.
“헉- 허억! 더, 더 이상 못 뛰어요……!”
그리고 이 미친 행군 속도를 용케 따라온 메리제인 중위는 능선위에서 멈춘 우리 옆으로 넘어지며 거친 숨을 골랐다.
그래도 특수부대 소속 군인이라고 다른 에덴 팀원들도 힘들어하는 속도를 따라온 메리제인 중위. 노인은 그런 그녀에게 잘 따라왔다는 짧은 격려와 함께 저 앞에 보이는 더글러스 시티를 바라보았다.
더글러스 시티는 도시라는 이름을 달기에는 조금 작은 타운이었다.
하지만 트리니티 강을 끼고 있어 식수를 구하기 쉬웠고 소방서 초입을 기점으로 사방으로 뻗어진 3개의 도로는 차량과 사람이 오고가기 쉬운 교통의 요충지였다.
캘리포니아 방위대가 왜 저곳에 캠프를 차렸는지 이해가 될 만큼 더글러스 시티는 좋은 위치에 존재한 것이다.
“……보여요 ”
그리고 천천히 자세를 숙인 나는 망원경을 들고 더글러스 시티의 외관은 관찰하는 노인에게 조용히 다가가 물었다.
충격적인 학살현장을 보고난 뒤 더 조급해진 내 마음.
마음 같아선 그 광신도이니 뭐니 하는 새끼들의 머리통을 다 터트려 버리고 싶었지만, 우리의 최우선 목표는 채연이와 사람들의 안전이었기에 애써 흥분을 참는다.
그리고 나만큼이나 마음이 조급할 노인은 바삐 망원경을 움직이며 더글러스 시티의 외부를 관찰했다.
전기를 아예 사용하지 않는지 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기지 외관과 내부, 허나 높게 세워진 방어벽과 감시탑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사람들의 형체는 기지에 사람이 거주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군인들이야.”
그리고 잠시 뒤 경계인원의 정체를 파악한 노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조용히 읊조렸다. 이 근방을 돌아다니며 미친 짓을 벌이는 광신도라는 놈들도 튼튼한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군사 캠프는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모양. 노인의 대답을 기다리며 마음을 조리고 있던 나와 용팔이는 굳었던 표정을 활짝 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나는 온몸을 감싸고 있던 긴장의 끈을 놓으며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군인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부는 아무이상이 없다는 소리.
오랜 시간과 고생 끝에 도달한 목적지는 우리를 향해 손짓하며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저 멀리 보이던 주황빛 황혼이 사라지고 주변은 서서히 어둠으로 물들었다.
고요한 바람소리와 어둑하니 변하기 시작한 앙상한 숲속이 주변에 가득하다.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 일행들을 다독이며 짐을 챙겼고 이내 내리막길을 향해 발을 디뎠다.
* * *
더글러스 시티 캠프가 전력 시설의 고장으로 연락이 두절되기 전까지만 해도 에덴 팀과 한국은 그들에게 주기적인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우리 정부의 공식적인 부탁과 펜타곤을 통한 간접적인 지원 등, 우리는 그들에게 취할 수 있는 모든 편의와 정보를 제공했으며 최대한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하지만 점점 심해져가는 현지 여론과 혼란스러운 미국 정치권은 우리가 유일하게 연락을 전할 수 있는 핫라인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해가 불가능한 미 사령부의 움직임은 결국 캘리포니아 일부지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설상가상으로 수리장비를 가져다주기로 했던 메리제인 중위의 헬리콥터마저 광신도들의 공격으로 추락해 버렸다.
말 그대로 레인저들과 접촉하지 못한 방위대는 셋으로 이루어진 에덴 팀이 미국으로 원정을 왔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다.
당당하게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간 총알에 맞아 벌집이 될지도 모르는 곤란한 상황, 하지만 그 문제는 정말 우연치 않게 우리와 합류한 메리제인 중위가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다.
“쏘지 마십쇼! SOAR 소속 메리제인 중위입니다!”
광신도 놈들에게서 되찾은 군복을 깔끔하게 세탁해서 입은 메리제인 중위는 더글러스 시티로 들어가는 입구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양손을 번쩍 들었다.
그리고 완전히 무장해제한 우리도 그 뒤를 천천히 따라가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행동을 취한다.
“…….”
생각보다 튼튼한 입구와 2중으로 쳐져 있는 튼튼한 철조망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리고 메리제인의 웅장한 고함과 함께 감시탑과 높은 방벽 뒤에서 군인들로 추정되는 이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긴장감이 조용히 뒷목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혹시 날아올지 모르는 총알에 잔뜩 긴장하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철컥-!
그리고 그 순간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묵직한 장전음과 함께 내 생존본능이 미약한 반응을 보인다.
지독한 살의는 아니지만 분명 내 머리를 향하고 있는 총구와 방아쇠위에 올라가있는 손가락.
적어도 10명은 되는 인원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리고 억겁 같은 30초가 지나자 저 감시탑 위에서 걸걸한 군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보고 들은 적 없습니다. SOAR소속이 여긴 왜 옵니까 ”
역시나 돌아온 대답은 경계심 가득한 의문이었다.
금방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듯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는 군인들.
방위대 치고는 훈련 상태도 좋아 보였고, 개인마다 들고 있는 AR은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행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저 감시탑 안에는 분명 경기관총으로 예상되는 중화기가 숨겨져 있었다.
“……전력 시설 망가졌잖습니까. 그걸 수리할 장비를 수송하다가 불시착했습니다. 증명이 가능하니 당신들 상관을 불러 주십쇼.”
주변이 워낙 어두워 상대측 계급장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허나 주방위대는 미 육군 베테랑 출신들이 많았기에 메리제인은 끝까지 예의를 지켜 가며 대답했고 쓸데없는 도발을 자제하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한동안 이어지는 웅성거림은 우리의 귓가를 간지럽혔고 그들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손전등 불빛이 우리로 향했다.
“…….”
진위여부를 확인하는지 메리제인의 계급장과 소속마크에 한동안 머무는 손전등 불빛들이 바닥 주변을 뱅뱅 돌아 나와 일행들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가 무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걸걸한 목소리의 군인은 다시 한 번 총구를 겨누며 그녀에게 외쳤다.
“저들은 누굽니까.”
올 것이 왔다. 우리는 군복을 입은 것도 아니고 소속 마크가 달린 것도 아니다.
물론 저들의 상관에게 자세한 설명을 한다면 우리의 신변을 보장할 수 있겠지만, 총이 언제 발사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한국 에덴 팀을 구구절절 설명할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메리제인도 충분히 그 점을 알고 있는지 일단 진정하라는 듯 군인에게 대답했다.
“한국에서 오신 에덴 팀들입니다! 공식적인 서류가 있으니 상관을 불러서 확인해 주십쇼.”
급박한 순간에 어울리는 최고의 대답이었다.
짧고 간단명료하게 말을 끝낸 메리제인은 조용히 자세를 숙이며 다시 한 번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몸짓을 취했고, 그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우리도 그녀의 행동을 따라하며 천천히 따라하며 숨을 뱉었다.
그리고 메리제인의 대답을 끝으로 더 이상 고함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감시탑에서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던 그들은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라도 하는지 끊임없이 웅성거렸고, 이내 상관을 부르려고 하는 것인지 한 군인이 감시탑에서 내려오며 기지 내부로 뛰어 들어간다.
1분, 2분, 3분.
차가운 맨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우리는 초조한 마음으로 그들의 대답을 기다렸다.
상관이 도착이라도 했는지 계속해서 들려오는 웅성거림과 뭉개진 말소리.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느리게만 느껴지는 이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5분이라는 시간이 지난 그 순간, 감시탑에서 그 군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그쪽만 들어오십쇼.”
그쪽. 그 군인의 손전등은 분명 메리제인을 향하고 있었다.
우리 전부가 아닌 오직 그녀만을 가리키는 명백한 대답에 성질이 급한 용팔이는 순간 발을 움찔거렸고 노인은 황급히 눈을 빛내며 그런 용팔이를 나무랐다.
그리고 지목을 당한 메리제인은 한동안 당황하다 이내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을 손전등으로 비추는 군인에게 대답했다.
“비무장 상태로 방벽 밖에 위치하면 위험합니다. 적어도 안쪽에 들여보내 주십쇼.”
일이 수틀렸다는 걸 피부로 직감한 그녀는 최대한 우리를 가까운 곳에 두기 위해 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자존심을 버린 설득에도 총구를 이쪽으로 겨눈 군인은 번복은 없다는 얼굴로 천천히 노리쇠를 당겼다.
무거운 분위기를 담은 묘한 대치.
성질이 급한 용팔이는 튀어나가기 직전이었고 노인도 별다른 수가 없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들어가 보세요.”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온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초반에 에덴이라는 이름을 밝혔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는 방위대 군인들은 살벌한 총구를 여전히 우리에게 겨누고 있었다.
비무장 상태에다 무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에서 결국 나는 메리제인에게 조용히 속삭이며 혼자 안으로 들어가 볼 것을 권유했다.
“…….”
그러자 메리제인은 융통성 없는 저들을 말없이 노려보며 흙을 움켜잡았고, 이내 억지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굳게 닫혀 있는 캠프의 입구는 육중한 소리를 내면서 열리기 시작했고, 나는 메리제인에게 정부와 미국 펜타곤이 서약한 공식 서류를 살며시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눈을 꼭 감으며 말했다.
“……금방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해 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그래, 서류를 가지고 안으로 들어간 그녀가 우리의 신변을 열심히 변호해 줄 것이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고 이내 다시 비무장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메리제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답답함이 묻어나오는 숨을 내뱉었다.
끼이익- 쿵!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서둘러 문을 닫는 방위대 군인들.
용팔이는 무언가 분하기라도 한 듯 입술을 꽉 깨물었고 노인은 어떠한 감정이 묻어나오지 않는 얼굴로 방벽과 감시탑을 조용히 관찰했다.
그리고 그녀가 안으로 들어가고 30분 뒤 방벽위로 다시 올라온 군인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영역 밖으로 물러나십쇼.”
“시발새끼들, 진짜 가지가지 하네.”
참다 참다 결국 빡이친 용팔이는 한국말로 욕설을 내뱉으며 이를 갈았다.
허나 그 욕설을 알아들을 리 없는 방벽 위에 군인들은 표정 변화 없이 우리를 쳐다보았고, 물러나지 않으면 총을 쏘겠다는 기세로 총구를 이쪽을 향해 들이밀었다.
금방이라도 감시탑 안에 숨겨져 있는 경기관총을 꺼낼 것만 같은 낌새. 나는 지금은 물러날 때임을 직감했다.
“……천천히 물러나요.”
분하다. 우리가 에덴소속이것을 확인했을 텐데, 갑자기 태도의 변화를 가지는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총구는 말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고, 저들은 위협이 아닌 경고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심장을 뚫고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분노를 애써 삼키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나와 같은 심정인 일행들을 이끌고 그들의 사정권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나오겠지, 그래 그녀가 설명하러 들어갔으니 곧 군인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시티 입구와 200m 떨어진 수풀에 숨어 손목시계 속 시간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옆에서 흐르는 강물과 더불어 점점 흘러가는 시간이 덧없이 지나갔다.
1시간, 2시간, 3시간, 4시간.
서늘한 밤공기에 싸늘하게 식어 가는 피부와 몸.
뜨겁게 달아오르는 인내로 점철된 5시간이 지났지만 정문은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아예 못을 박기로 작정했는지 우리의 접근 자체를 불허하겠다는 듯 방벽에 인원을 더 추가하는 모습까지 보여 주었다.
아, 입에서 답답한 숨과 함께 탄식이 터져 나온다.
“진짜 쏠 것 같았지 ”
그리고 아까부터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며 말했다.
화끈하기로 유명한 노인답지 않게 조용한 모습.
허나 그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는지 노인은 방벽에서 주변을 경계하는 군인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네.”
부정하고 싶지만 저들은 물러나지 않으면 진짜 방아쇠를 당길 것처럼 보였다.
무언가 반발을 하거나 앞으로 걸어간다면 당장이라도 총알이 날아올 것이라고 말하던 생존본능, 그들은 무언가를 숨기고 있기라도 한지 우리를 완전히 배척하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도 그 점을 충분히 느꼈는지 최대한 이성을 지키며 뒤로 물러나는 선택에 동의했던 것이다.
이어지는 침묵이 숲속에 자욱한 어둠처럼 무겁게 가라앉는다.
저들이 우리를 적대하는 이유와 메리제인 중위만을 들여보낸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 말을 나누지 않았음에도 무언가 일이 수틀렸음을 눈치챘다.
머리에 수많은 로직과 경우의 수가 맴돈다. 하지만 뚜렷한 실마리가 보이지 않기에 쉽사리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용팔아, 위장크림 꺼내라.”
그러나 오랜 경험과 본능이 이대로 멈춰있다가는 죽도 밥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조용히 심장이 뛴다.
그리고 찰나의 시간이 흘러 결국 결정을 내린 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쳤고 용팔이는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뒤적였다.
동여매는 신발 끈과 다시 한 번 손에 끼워지는 검은색 가죽 장갑. 주변에 자욱한 어둠이 우리의 등을 천천히 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