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2부 14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그날의 기록은 어쩌면 나에게 삶이라는 의미를 재정립 시켜준 유일한 구세주였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생각하게 하고 쓰고 읽는다는 행동으로 스스로 살아 있는 인간임을 끊임없이 되새겼으며 어쩔 때는 고독과 괴로움의 사무치는 독백을 읽어 주는 유일한 친우이기도 했다.
그 일기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지옥에서 인간 곽동윤을 기록한 나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최후를 다짐한 날, 모든 것을 담담하게 써 내려간 일기 전부를 내 다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가 줬으면 하는 채연이의 키티 가방 속에 소중히 넣어주었다.
물론 그게 전 세계 사람들에게 읽힐 줄 알았으면 절대 넣지 않았을 테지만…….
뭐, 그때는 그때 나름대로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가 노인과 함께 2년간의 고립 생활을 끝마치고 회색 도시를 빠져나온 날 사람들에게 가장 처음 들은 말은 그 어떤 통상적인 질문이 아닌 ‘당신의 일기를 읽었어요!’ 라는 부끄러운 말과 수없이 많은 카메라들이었다.
채연이만 보라고 남긴 일기를 에덴 사람들과 강수련이 책으로 출판하고 만 것이다.
그 소식에 나는 비밀일기를 들킨 초등학생처럼 이불을 찼고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배꼽이 빠져라 웃은 노인은 약 보름간 나를 놀리는 재미로 살았다.
하지만 민망한 것과는 반대로 전 세계로 퍼져나간 내 기록은 각국의 연구와 서바이벌 교본의 베이스가 되었으며, 사람들의 생존율 상승과 자살률 하락의 큰 기여를 했다는 좋은 소식도 있었다.
물론 고립된 도시를 빠져나와서도 업무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을 나에게는 그런 요소들이 전혀 체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항상 나대신 호들갑을 떨던 용팔이는 2차 격변이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몸으로 실감하게 되었을 거라 말했었는데, 그게 설마 진짜였을지는 생에 처음 미국에 들어와서야 알게 되었다.
내 옆에서 꾀꼬리로 변한 메리제인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만나 뵙게 돼서 진짜 영광입니다. 그 책이요, 저희 사관학교 동기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출판이 중단된 상태라 저도 해적판밖에 없지만……. 아, 죄송합니다. 저도 가지고 싶었는데 원본은 귀해서 제 연봉으로 구할 수가 없었어요.”
“……괜찮습니다.”
나라꼴이 이러니 책을 찍는 출판사도 잠시 문을 닫은 모양이다.
그들의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 나는 열혈독자를 자청하는 그녀에게 괜찮다고 대답했지만, 메리제인은 어째서인지 조금 풀이 죽은 얼굴이었다.
그러자 내 옆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 노인이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렸다.
“사인이라도 해 주지 그러냐.”
약 오르지만 그녀가 부대로 복귀하게 되면 이미 해 주기로 약속한 상태라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리며 좋아 죽는 노인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동시에 뒤에서 나 몰래 히히 웃고 있는 용팔이를 노려봤다.
현재 시각은 아침 8시, 우리는 농담과 웃음이라는 작은 요소로 피곤을 풀며 아침 일찍 행군 길에 나섰다.
더글러스 시티까지 도보로 대략 반나절을 예상했기에 중간에 휴식 없이 바삐 걸어가면 아마 해가 지기 전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가뜩이나 피곤한 몸을 혹사시키는 촉박한 일정이었지만 하루라도 빨리 방위대 캠프와 접촉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는 중요한 순간에 고장 나 버린 트럭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며 천천히 선두에서 일행들을 이끌었다.
한국에서 목적지까지 도보로 이동한다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한 과정 중 하나였다.
수시로 막혀 있는 길들과 어둠속에 숨어서 습격할 기회만을 노리는 놈들과 변종들.
생존자들은 한 걸음, 한 걸음에 사력을 다해야 했고, 그 조심성은 당연히 시간을 잡아먹는 요소 중 하나였다.
허나 처음 와 보는 미국은 참 다른 곳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대자연 그대로를 품고 있는 넓은 숲.
저 옆길에는 맑은 물을 머금은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어디에도 위협적인 놈들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는 곳에 놈들이 모인다는 간단한 법칙이 299번 도로에 이질적인 평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항상 치열한 전장과 모든 것이 죽어가는 참혹한 광경만을 지켜봐야 했던 우리에게 정말 오래간만에 펼쳐진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은 삭막해 있던 가슴 어딘가를 먹먹하게 만드는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맑은 공기와 비가 오고 난 뒤 풍겨지는 은은한 흙냄새.
노인은 마치 마실 나가는 할아버지처럼 뒷짐을 지었고 용팔이는 크게 하품하며 기지개를 핀다.
“저, 그런데 동윤 씨.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왜 미국에는 세 분만…….”
터프하고 묵직한 그녀의 첫인상은 이미 기억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다.
메리제인은 유일하게 영어를 할 수 있는 나에게 붙어 열혈독자로서 그간 궁금했던 것을 모두 물어보기 시작했고 나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심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 여자, 상당한 투머치토커다.
* * *
“여기서 잠시만 멈추자.”
정신없이 걸음을 옮기는 도중 후미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노인이 이마에 땀을 닦으며 말했다. 불이 붙은 듯 뜨거운 발바닥과 온몸을 적신 땀, 나는 많이 지쳐 보이는 일행들을 둘러보며 노인의 의견에 동의했고 이내 적당한 자리를 찾아 몸을 숨기듯 자리에 앉았다.
사방이 그늘이 자욱한 숲길이니 선선한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우리는 약 9시간을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지속되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걸었다.
물론 중간에 떼를 지어 몰려다니는 놈들을 피해 가느라 시간이 더 소모되었지만 이 정도는 예상했던 과정이기에 우리가 예상했던 시간 내로 더글러스 시티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버릇처럼 지도를 꺼내들어 현재의 위치를 다시 한 번 확인했고, 도로 왼쪽으로 흐르는 트리니티 강을 보며 우리가 목적지 근방까지 제대로 도착했음을 확신한다.
아까와는 달리 도로 중간마다 드문드문 보이는 집들과 건물들, 이대로 도로를 쭉 타고 걸어가면 30분 내로 더글러스 시티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휴식을 취하는 틈틈이 수분과 영양분을 섭취하고 숨을 돌린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한지라 귀중한 휴식시간에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침묵을 깬 사람은 나무밑동에 조용히 앉아 있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용팔이었다.
용팔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더니 이내 내 쪽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형님, 어디서 썩은내 안 나요 ”
썩은 내 나는 그 물음에 권총 홀더에 오른손을 올리며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쪽에서 열심히 초콜릿을 까먹고 있던 노인과 메리제인도 다급히 무기를 잡았다.
휴식을 취하는 분위기에 갑자기 끼얹어진 차가운 긴장감.
평소 촐랑거리기는 해도 이런 걸로 장난을 칠 용팔이가 아니었기에 우리는 주변을 경계하며 조용히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난다.”
물에 젖은 흙냄새, 풀냄새, 강물냄새, 나무냄새. 비가 온 뒤에 숲은 갖가지 냄새가 섞여 있는 복잡함에 혼합체였다.
하지만 후각에 신경을 잘 집중시켜 보면 용팔이가 맡았다는 썩은 내가 분명 혼합체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권총을 꺼내며 침을 삼켰고, 노인은 총을 견착한 채 이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느껴지는 거 있냐 ”
“……아뇨, 근처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가장 먼저 의심해야 하는 건 역시 놈들의 존재 유무였다.
하지만 머리귀신 사건 이후로 더 신뢰성이 높아진 내 감각에는 놈들의 존재가 전혀 잡히지 않았고 결국 이 썩은 내에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는 빠른 결론이 나왔다.
노인은 냅다 실탄을 장전하며 일행들에게 말했다.
“동윤아, 구역 확보하고 이동하자.”
허나 뒤에 정체모를 흔적을 남기고 움직이기에는 무언가 꺼림칙했다.
노인은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확인하고 움직이자는 제안을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수신호를 보냈다.
메리제인이 말했던 광신도라는 단체도 신경 쓰이고 더군다나 이 근방이 더글러스 시티인 것을 감안한다면 구역을 완전히 확보하고 움직이는 것이 맞았다.
킁킁.
짐을 챙긴 우리는 서둘러 앞서 걸어가는 용팔이를 쫓았다.
에덴 팀 탐지견들을 모두 실직견으로 만든 용팔이는 개코라는 별명에 걸맞게 연신 코를 킁킁거리며 흔적을 쫓았고, 나와 노인은 점점 짙어지는 썩은 내를 따라 긴장감이 감도는 침을 삼켰다.
휙 휙 지나가는 풍경과 먹구름으로 인해 어둑하니 변한 하늘.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지 코끝을 진동하는 썩은 내는 분명 더글러스 시티로 향하는 길과 동일했다.
그 때문일까
흔적을 쫓을수록 을씨년스럽게 변하는 풍경은 우리의 신경과 조급함을 점점 자극했고, 결국 뛰다시피 해진 발걸음은 채 5분도 지나지 않아 흔적의 종착점에 당도하게 했다.
까악-!
때 마침 울리는 까마귀 울음소리.
코를 연신 킁킁 거리던 용팔이는 재빨리 자리에서 멈추며 코를 움켜잡았고, 그런 용팔이를 따라가던 우리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며 지독한 썩은 내를 풍기는 정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저 뒤에서 가장 늦게 도착한 메리제인 중위가 바닥에 헛구역질을 하며 경악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도대체 무슨……. 웩!”
군인인 그녀도 여태까지 볼꼴 못 볼꼴 다 보면서 살아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인간이 예상할 수 있는 참혹함을 가볍게 뛰어넘는 인외의 광경이었다.
둘째 날 사냥했던 머리귀신의 둥지정도가 이와 비견될까
노인은 천천히 총구를 내리며 헛웃음을 지었고, 용팔이는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분명 인간의 손을 탄 것처럼 보이는 조잡한 십자가들이 죽어 버린 나무를 기점으로 울타리처럼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하나같이 끔찍한 모습으로 죽은 시체들이 못과 쇠사슬로 십자가에 박혀 있었는데, 마치 사이코패스의 손길이 닿은 듯 성한 시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신체 일부를 도려내고 잘라내는 것은 기본이며 내장과 살을 헤집어 내어 그 안에 고인의 물품을 넣어두는 참혹한 모욕까지 해 놨다.
겉으로 보기만 했을 뿐인데 피부가 아파 올만큼 느껴지는 광기의 현장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얼굴에 묻은 땀을 천천히 닦아 내리며 천천히 그 참혹한 현장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파리들과 썩은 살에 달라붙어 꾸물거리는 구더기.
시체들은 하나같이 고문을 당하다 죽었는지 두려움과 고통에 젖어 있었고, 그로테스크한 방향으로 꺾인 팔 다리에선 그들이 어떤 고통을 받으며 죽었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새 옆으로 다가와 시체를 확인하던 노인이 나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여기 총상이랑 자상 보여 이거 시발, 사람 짓이야.”
일부 변종들이 사람 시체를 모아 장식하는 기이한 습성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정도로 입체적이지는 못한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우리처럼 숨을 쉬는 인간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인데, 노인이 발견한 상처부위는 그 믿을 수 없는 그 가설을 진실로 만들어 주었다.
흉부를 관통한 총상과 복부를 가로지르는 저 자상은 분명 인간의 짓이었다.
“형님, 여기요.”
항상 주변을 경계하고 살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넋을 놓았다.
하지만 의외로 이성을 지킨 용팔이는 내가 넋을 놓고 있는 와중에도 현장을 조사하고 있었는지 한 시체를 가리키며 우리를 불렀다.
그리고 그 부름에 나는 애써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 사람 이마요.”
용팔이는 조심스럽게 살덩이들을 수습하며 한 남성 시체의 이마를 내 쪽으로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쓰여 있다는 개념보다 칼로 그었다는 말이 맞는 붉은색 자상이 말라붙은 피를 덕지덕지 매단 채 남성의 이마에서 그 존재감을 발휘한다. 영어가 분명한 짧은 문장. 나와 메리제인은 천천히 시선을 옮겨 그 단어들을 읽었다.
[더러운 이교도]
“작, 작전 실패만 안 했어도…….”
메리제인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며 자책했다.
남자의 이마 위에 상흔처럼 박혀 있는 한 문장, 우리는 이 한 문장만으로 이 미친 광경을 만들어낸 자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학살 현장이 채연이네가 있는 더글러스 시티 근방에서 발견된 이상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더글러스 시티로 이동합니다.”
분노와 이성이 교차하자, 그 어떤 감정보다 녹진한 목소리가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