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3
2부 10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언제나 그렇듯 아침 해가 밝고 따뜻한 햇볕이 창문을 통해 비춰 들어온다.
그리고 자신을 제160특수작전항공연대 소속 헬기조종사 메리제인 중위라고 소개한 그 여군은 우리가 먹기 위해 만든 아침식사를 허겁지겁 퍼먹으며 배를 채우기 바빴다.
아침식사 메뉴는 썬빌리 주민들이 준 말린 옥수수알과 분말 스프, 그리고 초콜릿과 에너지 바라는 괴상한 조합을 넣고 끓인 용팔이 표 특제 꿀꿀이죽이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 식탁 앞에 앉은 노인이 왜 냄비를 용팔이에게 맡겼냐고 노발대발 날뛰었지만 만들어진 음식을 버릴 수는 없었기에 우리는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식탁 앞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후우.”
허나 시장이 반찬이라고 큼지막한 철 수저를 받아든 메리제인은 그 꿀꿀이죽을 열성적으로 퍼먹기 시작했다.
이틀 동안이나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데, 그런 빈속에 저런 괴랄한 음식을 막 넣어도 되는지 참 궁금했다.
괜히 아침밥을 망친 용팔이만 으쓱해지는 상황.
적당히 영양을 섭취한 나와 노인은 결국 수저를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꺽.”
한 그릇, 두 그릇, 세 그릇. 결국 냄비째 죽을 퍼먹은 메리제인은 우리가 먹기를 포기한 남은 죽까지 전부 흡입했고 마지막으로 짙은 트림을 하며 입을 닦았다.
그리고 그녀는 배가 채워지자 흐릿했던 정신이 돌아오는지 조용히 우리의 눈치를 살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짧게 자른 금발머리와 주근깨 가득한 흰색 피부.
화장을 안 한 것 치고는 준수한 외모였지만 종말의 풍파를 온몸으로 겪은 듯한 그녀의 얼굴 이곳저곳에는 상처와 고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우리와 그녀 사이에 한동안 이어지는 불편한 침묵을 조용히 씹으며 그녀를 향해 본격적인 화두를 꺼내 들었다.
“저희는 한국에서 온 외부인입니다. 미 정부에 공식적으로 허가를 받고 파견 온 것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부대로 돌아가서 연락을 취해 보세요.”
그녀를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었던 나는 혹시 몰라 챙겨온 공식 문서를 보여 주며 명목상 한국 군인인 원정 에덴 팀의 정체를 설명해 주었다.
적어도 우리는 당신의 적이 아니고, 당신도 우리의 적이 아니다.
입바른 말보단 행동으로 움직여 목숨을 구해 줬으니,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는 그녀도 대략적인 사태파악은 되었을 것이다.
“……확인했습니다.”
메리제인은 우리의 가명과 협의내용이 적힌 공식문서를 천천히 살펴보다 이내 확인이 되었다는 읊조림과 함께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또 다시 이어지는 침묵.
용팔이는 자리가 불편했는지 천천히 몸을 움직이며 냄비와 수저를 치우기 시작했고 노인은 빈 담배를 입에 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허나 그것도 잠시 결국 입을 열기로 선택한 메리제인은 우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인저 대원들을 목적지까지 수송시켜 주는 것이 제 임무였습니다. 저랑 부조종사를 포함해서 8명 정도 되는 인원이었는데, 단순 정찰 임무라 다들 긴장을 놓았죠. 그런데 3일전 목적지 부근을 저공비행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고 불시착했습니다.”
놈들이 빠른 속도로 진화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헬기를 떨어트릴 능력은 없다.
그렇다는 것은 메리제인을 포함한 레인저들이 정체불명의 무장집단에게 대공 공격을 받았다는 것인데, 정황상 그 공격자들은 우리가 죽인 이들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내 추측이 맞기라도 했는지 메리제인은 독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놈들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산악지역이라 불시착은 위험했습니다. 4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저를 포함해서 대원 4명만 살아남았죠. 그러다 공격을 당했는데…… 숫자가 정말 많아서 3일 밤낮으로 도망만 다녀야 했어요. 탈진하고, 총에 맞고. 출혈로 죽고……. 이 시발 광신도 개새끼들 때문에!”
그녀는 광신도라는 단어를 뱉자 그날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움과 분노가 오물처럼 점철돼 있는 복잡한 기억과 감정.
결국 혼자만 살아남은 메리제인 중위는 결국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서 광신도라는 놈들이 누군데 집단이야 ”
허나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노인은 중요한 요점만을 탁 잡으며 그녀에게 물었고 나는 그 질문을 동의하며 빠르게 통역해 주었다.
그러자 메리제인 중위는 떨리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보며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반쯤 체념한 얼굴로 대답했다.
“반년 전부터인가, 네바다 주랑 애리조나 주 민간인들 사이에서 저 괴물 놈들을 숭배하는 한 집단이 있다는 괴담이 돌았습니다. 드디어 멸망이 온 것이고, 심판이 내려졌다는 뭐……. 그런 흔한 소문이요. 물론 처음에는 지역 치안을 위해 주의만 주고 말았는데, 문제는 두 달 전부터 일어났습니다.”
말을 하다말고 조용히 침을 삼킨 메리제인은 목이 마르기라도 한지 간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눈빛을 받은 나는 한껏 차오른 그녀의 템포도 낮춰 줄 겸, 짐을 정리하고 있는 용팔이에게 커피를 부탁했다.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한국의 믹스커피, 우리는 햇볕이 잘 드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이야기를 이어갔다.
“생존자 캠프에서 나무 십자가에 사람을 산채로 매달아 불에 태우는 살인사건이 연쇄적으로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범인은 금방 잡혔는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 소행이 아닌 여러 사람의 소행이었어요. 심지어 남녀불문 나이불문 패턴이 불특정한 사람들로요.”
집단의 소행이라고 의심해 볼 만했다. 하나 같이 똑같은 방법과 똑같은 구호로 자신들의 정체를 숨기지 않는 그 정체불명의 무리들.
당연히 피해를 받은 애리조나 주는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대응을 보여 주어야 했었다.
허나 가뜩이나 빡빡한 상황에 한 명의 군인조차 아쉬웠던 애리조나 주정부는 때마침 서부진격을 위해 체류하고 있던 미 육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소극적인 움직임을 취하던 미연방은 광신도 집단의 진위여부만을 가리고자 소규모 인원을 파견한 것이다.
그리고 정찰 임무를 위해 캘리포니아 북부로 파견된 메리제인 중위와 레인저 대원들.
하지만 놈들의 무장 상황을 몰랐던 그들은 상부의 안일한 대처와 판단 때문에 사실상 전멸해 버리고 만 것이다.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노인은 머리를 긁으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좆된 거네.”
통역 안 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끝낸 메리제인은 깊은 한숨과 함께 남은 커피를 입안에 털어 넣고 나에게서 어젯밤 사망한 흑인 군인의 군번줄을 건네받았다.
그 남자의 시체는 땅속 깊게 파묻고 표식을 해 뒀으니 나중에 충분히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일어나마.”
이야기가 끝나자 노인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한쪽에서 조용히 커피를 마시던 용팔이도 서둘러 노인을 따라 짐을 챙겼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는지 넋을 놓은 눈동자로 빈 커피 잔을 바라보는 메리제인에게 말했다.
“놈들이 가져온 차량과 무기는 가지세요. 식량도 충분히 나눠 드릴 테니 부대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으실 겁니다.”
그녀와 레인저 대원들에게 일어난 일은 참 비극이었다. 허나 내 감상은 딱 거기까지.
우리는 그저 그 광신도 집단이라는 놈들을 경계하고 원래 계획대로 채연이와 일행들과 함께 한국으로 떠나면 되는 것이다.
비정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일의 우선순위가 있는 우리에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대로 돌아가면 늦습니다. 놈들 영역에 있는 군사 캠프에 미리 알려 줘야 해요.”
허나 자신의 안위보다 임무를 우선순위에 둔 메리제인 중위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자신들이 타고 온 헬기는 불시착으로 파괴되어 사용하지 못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육로를 통해 부대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귀환길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예측조차 힘들었다.
말 그대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랫입술을 꽉 깨문 채 눈을 감고 있는 메리제인도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한동안 침묵을 지키며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짐을 챙긴 뒤 먼저 떠나겠다는 말을 할 무렵,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난 메리제인은 애절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북쪽에 있는 군사 캠프는 그곳이 유일해서 표적이 될 민간인이 많습니다.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먼저 경고를 해 줘야 해요.”
결국 그녀가 도움을 청할 곳은 군인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뿐이었다.
허나 우리는 미군소속이 아닌 저 멀리서온 외부인.
메리제인의 말은 목숨을 걸어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무리한 부탁에 불과했다. 그리고 자신도 무리한 부탁이란 것을 알고 있는지 메리제인은 우리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한숨과 함께 마지막으로 대답해 주었다.
“유감입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내가 잡을 수 있는 손은 한정되어 있다.
나는 그녀의 부탁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고개를 숙였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는 말과 함께 식당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출발하기 전 문 옆에서 조용히 담배를 피고 있던 노인이 갑자기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나를 향해 다급하게 물었다.
“방금 저 여자가 북쪽이라 했냐 캘리포니아 북쪽 말하는 거 맞지 ”
맞다. 북쪽에 있는 군사 캠프.
그곳에는 민간인이 많아서 광신도 놈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그녀가 분명히 말했다.
그리고 내가 노인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잠깐 동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며 주먹에 힘을 주게 만들었다.
한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눈동자를 떠는 노인. 나는 비명 같은 탄성을 내뱉으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캠프 이름이 뭡니까. 아니, 거기를 방어중인 부대 이름이 뭡니까 ”
멍청한 놈! 나는 한순간 중요한 것을 까먹은 나를 자책하며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물었다. 그러자 의자에 주저앉아있던 메리제인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고 이내 내 고함과 같은 물음에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캘, 캘리포니아 주방위대입니다. 얼마 전에 전기 설비가 고장 나서 무전은 먹통이지만 그래도 아직 무사히 있는 걸 공군에서 확인을…….”
“용팔아!!! 시동 걸어라!”
캘리포니아 주방위대라는 이름이 나온 순간 노인은 총기와 가방을 챙기고 식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용팔이는 허겁지겁 차문을 열었고 식당에 감돌고 있던 잔잔한 기류는 순식간에 뒤바뀌며 다급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에서 황급히 지도를 꺼내 붉은 펜이 칠해진 자리를 메리제인에게 보여 주었다.
“캠프 위치가 여기 맞습니까 ”
“아, 아니요. 여기서 북쪽으로 더 올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위치는 역시나 틀린 장소였다.
하지만 부대에서 자세한 브리핑을 받은 메리제인은 방위대 캠프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곳으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까지 알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지도를 갈무리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짐이랑 총 챙기세요. 같이 갑시다.”
네 네 그녀는 갑작스러운 우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멍청한 소리를 내뱉으며 되물었다.
하지만 밖에서는 이미 시동을 걸었는지 거친 엔진 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식당 문을 박차며 안 따라오고 뭐하냐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시가 급했고 우리의 발에는 힘이 실렸다.
* * *
강수련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던 채연이가 잠에서 깨어나며 조용히 뒤척였다.
그리고 무슨 좋은 꿈이라도 꿨는지 기쁨이 묻어나오는 은은한 웃음을 머금은 채연이는 뜨개질을 하고 있는 강수련에게 연신 어리광을 부리며 달라붙는다.
그리고 뜨개질을 하던 강수련은 자신에게 달라붙는 채연이의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주며 살며시 입 꼬리를 올렸다.
몸과 마음이 많이 컸지만 언제나 한결 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신의 아이.
강수련은 그런 채연이 옆에 살며시 누우며 물었다.
“우리 채연이가 왜 이럴까. 무슨 좋은 꿈이라도 꿨니 ”
항상 피곤과 고통에 힘겨워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무나 평온한 얼굴로 잠이 들어 밤새 꾸던 악몽도 잊었는지 얼굴이 밝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강수련의 물음에 채연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빠 꿈.”
위성 전화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된 뒤로 곽동윤을 향한 채연이의 그리움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것을 절대 겉으로 티내지 않은 대견한 아이를 보며 강수련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부쩍 성장해 버린 채연이. 나이와 맞지 않게 생각이 깊은 아이였지만 가끔은 힘들다고 말해 줬으면 하는 것이 엄마의 바람이었다.
“……채연아, 사람들 다 모였어.”
허나 잠깐뿐인 휴식은 채연이를 부르는 소리로 끝이 났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이연경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연이는 자신을 옆에서 바라보는 강수련에게 살며시 볼 뽀뽀를 하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녀오렴.”
그리고 조용히 인사를 받아준 강수련은 얼굴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장비와 옷을 챙기고 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채연이.
그 뒷모습을 바라본 강수련은 나지막이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뒷모습이 정말로 그이를 닮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