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2부 4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귀한 식량까지 나눠 주시고…….”
자신을 지역 경찰이라고 소개한 잭슨은 나와 노인에게 악수를 청해 오며 살짝 눈가를 붉혔다.
나보다 적어도 10cm는 클 것 같은 거대한 신체와 근육질의 몸매.
허나 겉모습과는 다르게 온화하고 감정적인 얼굴은 언밸러스하면서도 묘한 친근감을 불러왔다.
그리고 가볍게 악수를 받은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그에게 대답했다.
“숙박비라고 생각하세요.”
마을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영양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일행들과 짧은 상의 끝에 부피를 많이 차지하고 있던 식량을 마을주민들에게 나눠 주었다.
워낙 먹을 것이 귀한 시대긴 하지만 식량 조달에 도가 튼 나와 노인이기에 할 수 있는 호의 중 하나였다.
허나 그걸 알 리가 없는 마을 주민들은 정말 오랜만에 받아 보는 타지인의 호의 앞에 감동한 듯 창고 문 앞에 미어캣처럼 모여들었다.
물기가 묻어나는 눈동자와 연신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얼굴은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순수함이란 감정이었다.
그리고 한참을 감사인사만 전하던 잭슨은 우리의 얼굴과 복장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그런데 혹시 외국에서 오셨습니까 ”
영어를 못하는 노인과 용팔이. 그리고 통역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한 나.
잭슨은 이 요상한 조합에서 오는 이질감을 진즉에 눈치챘는지 나를 향해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 물음에 조용히 뒷머리를 북북 긁은 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마을 주민들과 눈을 마주쳤고 잠시 뒤 노인에게 동의를 구한 후 대답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이쪽에 잠시 볼일이 있어서요.”
자세히 설명해 줄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국적과 대략적인 목적만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대답을 들은 잭슨은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아 보였지만 자세히 말기를 꺼리는 내 의중을 눈치챘는지,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허나 잭슨과는 다르게 우리 앞에 모여 있는 마을주민들 사이에선 이상하리만큼 묘한 열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국 Korea
가만히 서 있는 우리의 귀를 살살 간지럽히는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와 노인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어깨를 으쓱이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지켜본 잭슨은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지만 차마 나서지는 못하는 이 묘한 분위기.
그리고 얼떨결에 돌린 내 시선에는 책을 꼭 끌어안고 있는 한 아이가 있었다.
“…….”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진한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녹색 책.
표지는 이미 많이 벗겨져 책의 이름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양 볼이 붉은 귀여운 아이는 그게 보물이라도 된다는 듯 꼭 끌어안으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잠, 잠시만요!”
그리고 내가 아이에게 의문을 표하려는 그 순간 주민들이 모여 있는 행렬 뒤에서 한 청년의 외침이 들려왔다.
마치 바람을 맞은 풀벌레처럼 한순간 멈춰 버린 주민들의 웅성거림과 청년을 몰리는 시선.
특히 나와 노인은 뜬금없이 들려온 한국어에 저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한, 한국……. 한국에서 오셨어요 ”
첨탑에서 빛신호를 보내던 그 동양인 청년은 서둘러 첨탑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더니, 주민들 사이를 지나며 나를 향해 다급하게 물어왔다.
어설프게 배워서 말하는 것이 아닌 100% 토종 한국어.
먼 타지에 있는 시골마을에 설마 한국인이 있을 줄은 몰랐던 우리는 묘한 반가움이 몰려와 통성명을 나누려고 했다.
“한국 상황은 어떻습니까 서울은요 ”
허나 다급해 보이는 청년은 무릎을 꿇을 기세로 달려와 한국의 상황을 물어보았다.
눈치를 보아하니 유학이나 여행을 위해 잠시 미국으로 온 것 같은데, 서울에 가족이 남아 있기라도 한 모양.
창백한 얼굴과 굉장히 절박해 보이는 청년의 눈동자를 발견한 나는 인사를 위해 내민 손을 그대로 물리며 뒤통수를 긁었다.
“쑥대밭이지. 뭐, 그래도 이쪽보단 상황이 괜찮아.
그리고 청년의 물음에 노인이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한국이 전 세계에 몇 없는 안전지대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였다.
파탄이 나 버린 경제와 기반 시설들.
식량은 이미 배급제를 실시한 지 오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생겨나고 있는 구덩이를 막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이 한국인 청년의 가족과 지인들이 무사하다고 확실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얼굴이 창백해진 청년도 그 점을 충분히 알고 있는지 체념이라는 감정을 담고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지푸라기를 잡아보고 싶은 심정도 있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에는 현실은 너무나 냉혹했으니까.
“……늦은 밤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비록 한국어지만 눈치껏 대화내용을 이해한 잭슨이 바닥에 주저앉은 한국인 청년의 어깨를 잡아 주며 조용히 우리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청년의 슬픔을 알기라도 한 걸까, 아까와는 달리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은 마을 사람들은 문 앞을 이루고 있던 대열은 천천히 흩뜨리며 내일 있을 바쁜 아침을 위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sir, 저……. 그런데 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가 끝난 나와 노인이 다시 창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 순간 한국인 청년을 제자리로 돌려보낸 잭슨이 서둘러 이쪽으로 걸어오며 우리를 불렀다.
아까와는 달리 작고 소심한 목소리로 물어오는 그.
내가 말없이 고개를 돌리자 잭슨은 조용히 말을 이어왔다.
“먼 곳으로 이동하시는 거 같은데, 혹시 차량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
차량 당연히 필요하다.
수송기에서 내린 우리가 가장 먼저 확보하려고 한 것은 연료와 차량이었다.
하지만 멀쩡한 대다수의 차량과 연료는 이미 군에서 징발을 해 갔는지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고 우리는 결국 도보로 이곳까지 걸어와야 했다.
“얘 지금 차량이라고 말한 거냐 ”
띄엄띄엄한 단어로 의미를 대충 알아들은 노인이 나를 향해 재빨리 물어왔다.
먼 곳으로 이동을 위한 차량, 우리가 그토록 찾던 물건이었기에 나는 노인은 향해 빠르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빠르게 잭슨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차량이 있습니까 ”
고장 나지 않은 차량과 충분한 연료만 있다면 이동시간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다급한 얼굴에 ‘역시 필요했구나.’라는 표정을 지은 잭슨은 어두운 마을 밖으로 나가는 길을 가리키며 조용히 대답해 주었다.
“농장 창고에 숨겨 둔 트럭이 한 대 있습니다. 꾸준하게 정비를 해서 상태도 괜찮고 비축해 둔 연료도 꽤 많고요. 다만 문제가 하나 있어서…….”
문제라는 말과 함께 순간 어두워지는 잭슨의 얼굴.
허나 그 얼굴과 반대로 나와 노인이 보내는 무언의 재촉은 더 강렬해져만 갔다.
채연이네와 하루라도 더 빨리 접촉할 수 있다면 어떤 문제라도 개박살을 내줄 생각이다.
그리고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내 눈빛에 조금 당황한 잭슨은 말을 더듬으며 마지막 문장을 이어갔다.
“최근에 저쪽 숲 근처에서 변종이 한 마리 발견됐습니다. 그런데 놈이 이상하게도 창고 주위를 계속 맴돌고 있어서 한 달 전부터 수확한 식량을 못 가져오고 있는 상태입니다. 물론 차량과 연료도 전부 그곳에 있고요.”
넓은 농자부지 치고는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어쩌면 최악의 순간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영리한 최고의 수를 꺼내든 잭슨.
그는 차량과 연료를 우리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농장 창고를 확보하고 싶다는 거래를 대놓고 제안한 것이다.
“마음에 드는 친구야.”
하지만 나에게 통역을 전해들은 노인은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잭슨에게 악수를 청했다.
영리하지만 영악하지는 않은 이 남자.
비록 호의가 아닌 거래로 끝날 관계지만 의심스럽지 않다는 점에서 이 제안이 더 마음에 들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나눠 가져간다.
말 그대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
노인과 악수를 나눈 잭슨은 처음 보는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6시간 뒤면 해가 뜰 교회 밖을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싸울 수 있는 주민들을 전부 준비시켜 두겠습니다. 저 그리고…….”
덩치는 곰처럼 크지만, 마음만큼은 소녀처럼 감성적인 남자 잭슨.
그는 곧 치열하게 변할 아침을 기약하며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 양반 왜 이렇게 감정이 철철 넘쳐 나는 꼭 옛날에 나와 일행들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잭슨은 내가 웃거나 말거나 나와 노인의 손을 꼭 잡으며 마지막 말을 장식했다.
“희망을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생소하면서도 소중하고, 비웃음 당하면서도 필요하다.
누군가는 그것을 형태가 없는 마약이라고 말하겠지만, 위기와 고통을 넘어 살아남은 자들에게 희망은 손에 잡고 싶은 빛과 같은 것이었다.
어디에도 없으면서 어디에도 있는 것.
마치 떠오르는 여명처럼 잔잔한 흐름의 변화는 사람들의 숨소리를 타고 다시 이곳에 쏟아져 내렸다.
“커어어억-!”
하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밥을 먹자마자 잠이든 용팔이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코를 골았다.
진지한 분위기에 한순간 울려 퍼진 웃음의 하모니.
나와 잭슨은 서로를 마주보며 하하 웃었고 노인은 창고로 돌아가 누우며 용팔이의 코를 틀어막았다.
* * *
“쉿.”
숨소리조차 크게 들리는 공간이 한 소녀가 내뱉은 침묵의 노크는 인해 멈춰 버렸다.
그리고 골목 옆에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던 사람들은 행렬 선두에 서 있는 소녀가 보내는 신호에 재빨리 바닥에 엎드렸고 이내 황급히 주변을 살피며 숨을 죽였다.
“끄그윽…….”
그러자 골목 뒤로 이상한 괴음을 내뱉은 괴물 한 마리가 그림자처럼 스윽 지나갔다.
소녀의 감지와 경고가 없었다면 그래도 습격을 받았을 위급한 상황.
허나 능숙하게 위험을 넘긴 소녀는 자신을 따라오는 사람들을 향해 다시 손짓하며 천천히 앞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멸종을 품고 있는 서늘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간다.
발에 밟히는 먼지와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바닥.
그리고 사방에 무너져 내린 고층 빌딩들은 인간이 내세운 문명의 결말을 알려 주는 풍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꽤 예전 일인 듯 무너져 내린 도시를 가로지르는 소녀와 사람들은 무심하게 종말의 파편을 지나쳤다.
“- - - - -!”
그리고 그 순간 짧은 휘파람소리와 함께 자유분방한 복장과 살벌한 무장을 갖춘 다른 한 팀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소녀무리를 향해 서둘러 합류했다.
효율적인 장비와 손때, 그리고 경험이 느껴지는 갖가지 무기들은 그들이 노련한 생존자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허나 이상하게도 그 무리의 대부분은 앳된 청소년들로 이뤄져 있었다.
조용한 바람이 부는 도시 한가운데 굉장히 이질적인 조합.
그리고 합류한 무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소년이 일행을 이끄는 소녀를 조용히 불렀다.
“채연아.”
채연아. 그 부름에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던 소녀가 스카프를 천천히 내리며 찰랑거리는 단발머리를 쓸어 올렸다.
자신을 따라오는 피난민들과 에덴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생존 팀을 이끄는 리더는 바로 몰라볼 정도로 커 버린 채연이었던 것이다.
언제나 품에 쏙 들어올 것 같은 작은 아이이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희망의 천사.
허나 지나간 세월은 그런 천사마저 노련한 생존자로 탈바꿈시켰고, 꼭 곽동윤을 작게 축소시켜둔 것만 같은 뒷모습이 채연이에게서 강하게 투영되었다.
한쪽 허벅지에는 날카로운 정글 도를, 그리고 또 다른 한쪽 허벅지에는 9mm 권총을 차고 있는 채연이는 천천히 자세를 숙이며 생존 팀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이제는 어엿한 남자가 된 용팔이의 조카, 최경욱에게 나지막이 경과를 물어봤다.
“도보로 이동할 길은 ”
나이가 어리다고 무시하면 큰코다친다. 회색 도시에서 살아남은 경험과 수많은 변종을 도륙한 곽동윤 밑에서 자란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나이가 차기 시작하자 웬만한 생존자 집단으로는 비교하기 힘든 미니 에덴 팀으로 재탄생 한 것이다.
“확보했어. 아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거야.”
그리고 경욱은 주머니에서 재빨리 지도를 꺼내며 피난민들을 데리고 이동할 경로를 자세히 보여 주었다.
노련함과 경험이 묻어나오는 최적의 이동경로.
한참을 지도만 쳐다보던 채연은 그 경로에 만족했는지 제 아빠를 똑 닮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가자.”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생존 팀과 피난민들.
그들은 사라져 버린 길을 걸으며 저 멀리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선두에서 무너져 버린 도시를 바라보던 채연은 미련이 남은 얼굴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한 달 전 충전을 하지 못해 방전되어 버린 위성 전화기였다.
아빠와 통화가 가능한 유일한 전화기를 망가트리고 나서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허나 다부진 입술을 꾹 다물고 흘러내리는 콧물을 훔친 채연은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 속에 품었다.
그리고 앞을 향해 나아가는 힘찬 발걸음을 디디며 오늘도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바람,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발걸음.
결국 돌고 돌아 만나는 접점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