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06화 (206/313)

# 206

2부 3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간혹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느낄 때가 있었다.

건물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의 결. 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의 발소리. 어둠속에 숨어 우리를 노려보는 놈들과 속안에 적의를 삼키는 조용한 파동이 느껴진다.

제3의 공간, 허공에 매달린 다른 감각.

나는 항상 놈들과 공간을 공유하듯 이 모든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래, 마치 내가 이 환경에 한 조각인 것처럼 말이다.

- - -끄그그극- -

몸이 시키는 대로, 본능이 이끄는 방향으로. 찰나의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위로 추켜올렸다. 그러자 내 눈 앞에는 어느새 대검에 머리가 꿰뚫린 놈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죽어가고 있었다.

대검 날과 손잡이를 타고 흘러내리는 검은 피, 나는 그대로 놈의 배를 발로 차 대검을 회수하고 깔끔한 마무리를 지었다.

“땅이 넓어서 그런가, 뭔가 숫자가 적다 ”

그리고 방금 마지막 놈의 머리를 터트린 노인이 조용히 탄창을 교체하며 중얼거렸다.

한국과는 다르게 탁 트인 지형과 낮은 건물들.

진화와 진화를 거듭해 많이 강해진 놈들이지만 이 정도 밀집도면 상대하지 못할 것도 없다.

낯선 땅을 지나갈 것을 생각해 잔뜩 긴장해서 준비한 것 치고는 초라한 결과라는 생각이 들 무렵 용팔이가 정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형님, 저쪽에서 다시 신호 보내는데요.”

서부에 도착하고 나서는 정말 하루 종일 걷기만 했다. 그러다 해가 지기 전 우연치 않게 발견한 곳이 지도상 외곽에 위치한 글렌 마을이었는데 곳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발견되었지만 이상하게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 유령마을이었다.

그래도 밤을 지새우려면 어쩔 수 없이 빈집이라도 찾아 들어가야 했다.

나와 일행은 근처에 뜨문뜨문 모여 있는 놈들을 하나둘 처치하며 구역을 확보했고, 이내 어두운 마을 안쪽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하지만 마무리가 되어 가는 그 순간 전혀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교회 첨탑에서 보내온 신호는 적당한 자리를 찾고 있던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들기 충분했다.

반짝, 반짝. 불규칙적으로 꺼졌다 켜지는 작은 빛.

처음은 첨탑에서 놈들이 있다, 돌아서 자나가라. 라는 호의적인 신호를 보내길래 괜찮다 혹시 빈방이 있냐. 라는 가벼운 신호로 대답했다.

하지만 첨탑 쪽에서 한참을 대답이 없다가, 나와 일행들이 다가오는 떨거지 놈들을 전부 처리하자 다급함이 느껴지는 신호를 다시 한 번 전해 왔다.

“please 아, 자기들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묻는데요 필요한 건 전부 다 줄 수 있다고.”

그리고 나는 신호를 읽지 못하는 노인과 용팔이를 대신해 교신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해 주었다.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줄 수 있는 건 전부 다 주겠다는 처절한 구조신호.

눈치를 보아하니 마을 근방을 어슬렁거리는 놈들에게 고립이라도 당한 모양이었다.

대충이나마 사태파악이 된다.

용팔이는 결정을 기다리겠다는 듯 잠시 자리에 쭈그리고 앉았고, 나는 조용히 노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가장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에게 결정권을 넘기는 무언의 제스처. 그리고 노인도 잠시 고민을 하다 이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가 보자, 만나 보면 알겠지.”

놈들이 있으니 피해가라.

본인들이 고립된 상황에서 남의 위험을 신경 써 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윤리와 양심을 포기하라고 윽박지르는 시대에서 인간성이라는 보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반짝, 반짝.

반짝, 반짝.

노인이 결정을 내리자 나는 첨탑을 향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신호를 받은 저쪽에서도 무언가 상의를 나누기라도 하는지 상당한 숫자의 그림자가 첨탑 꼭대기에서 일렁인다.

허나 그것도 잠시, 마지막 빛 신호는 교회 정문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오랜만에 지붕 아래서 자겠구나.”

크게 기지개를 피는 노인과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난 용팔이.

우리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교회로 향했다. 하늘에 가득한 별과 서로에게 반짝이며 보내는 빛 신호들.

너무나 맑은 은하수에 어디가 하늘인지 어디가 땅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허나 이 하늘 아래 너무나 보고 싶은 채연이와 강수련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 * *

사각 사각.

일렁이는 촛불 위로 내 몽땅 연필이 쓰이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를 자장가삼아 옆에서 잠이든 용팔이가 조용히 뒤척인다.

따뜻한 음식과 안전한 교회 내부, 별빛을 받아 조용히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왠지 나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 - - - - - ]

그리고 밤과 침묵이 내려앉은 그 시각.

잘 보이는 곳에 내려놓은 위성 전화기 화면에 불이 들어오며 신호를 보내왔다.

항상 이 시간마다 켜 두기로 약속했던 에덴과의 약속.

나는 조용히 연필과 공책을 내려놓으며 전화기를 들었다.

[잘 도착하셨습니까 ]

첫 안부를 전해온 사람은 강 형사였다. 헤어지기 직전 변종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기억에 선명하던 강 형사.

그는 온정이 묻어나는 따뜻한 목소리로 미국 원정팀의 소식을 가장 먼저 물어봐 주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온 뒤로 잠시나마 여유가 생긴 나는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대며 한숨과 함께 대답한다.

“원래 계획한 곳이랑은 좀 떨어진 곳으로 온 것 같지만, 그래도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서울 상황은 괜찮습니까 ”

원래라면 강동구 방어선에서 현장 팀을 진두지휘해야 했었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로 에덴 주요 인물들을 전부 데리고 왔으니, 서울에 남은 강 형사와 나머지 일행들의 고충이 말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미안한 기색이 묻어나는 내 물음에 강 형사는 작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하하, 괜찮습니다! 서울 전선은 대충 정리가 된 상태라, 이제 인천과 부산지역 난민 문제만 해결하면 되거든요. 동윤 씨는 걱정마시고 그저 몸성히 다녀만 오십쇼.]

강 형사의 목소리에는 나를 향한 짙은 신뢰와 걱정이 느껴졌다.

하지만 하루 통화가능한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기에, 우리는 간단한 안부와 의례적인 절차보고만을 주고받았고 곧 다음 통화를 기약하며 위성 전화기를 종료했다.

아마 내일 이 시간쯤 다시 한 번 전화가 올 텐데, 그 전에 채연이가 있는 지역 근처까지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갔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그리고 조용히 위성 전화기를 가방에 넣은 나는 내려둔 공책과 몽땅 연필을 들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너무 오래되어 기억도 나지 않는 영어회화 책.

취업 준비생 시절 들고 다니던 이걸 새치가 나기 시작한 나이에 다시 보게 될 줄을 몰랐다.

허나 그 상념도 잠시. 나는 공책을 지렁이처럼 지나가는 영단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동윤아.”

그리고 한 삼십 분가량 지났을까, 교회 근방을 둘러보고 온 노인이 조용히 문을 열며 나를 불렀다.

지금 시각은 미국 기준으로 밤 10시.

손목시계를 확인한 나는 조용히 공책을 내려놓으며 노인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얌마, 네가 그렇게 공부를 한다고 채연이처럼 영어를 하겠냐 ”

그리고 내가 마련해 준 자리에 털썩 앉으며 모자를 벗은 노인은 내가 요즘 꾸준히 하고 있는 늦은 공부에 괜한 장난을 걸었다.

허나 말은 그렇게 해도 우리 셋 중 그나마 영어로 회화가 가능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에 노인은 가끔 내 대신 불침번을 서 주며 영어 공부할 시간을 만들어주는 배려를 해 주었다.

“뭐, 통역도 하고 그냥 겸사겸사죠.”

똑똑한 딸이랑 영어로 대화하려고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팔불출 아빠라니.

딱히 부정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괜히 말을 돌리며 멋쩍게 웃었다.

뭐 덕분에 통역사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지 않은가 그리고 멋쩍어하는 내 모습에 노인은 소리 내서 웃어 버렸다.

“…….”

허나 잠깐뿐인 시간이 지나자 좁은 창고 내부에 만연했던 웃음기는 천천히 지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 아까와는 다르게 조용히 표정을 굳힌 노인은 내려놓은 가방에서 크기가 상당한 지도 하나를 꺼내 바닥에 펼쳐 놓았다.

“이 속도로 걸어가면 이 주일은 더 걸리겠지.”

지도에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한 이동경로가 그려져 있었다.

어제 우리가 착륙한 활주로에서 빨간색 마크가 여러 번 쳐져 있는 중요지역까지.

그 검은색 선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까지 최단 경로로 지정한 것이었다.

처음가보는 지형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놈들의 숫자.

그래, 아마 이동하는 내내 수많은 위험과 변수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치고 죽는 한이 있어도 저 붉은색 마크에 도착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미국을 아직 빠져나오지 못한 채연이와 강수련, 그리고 에덴의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1년 2개월 전 회색 도시에서 벌인 마지막 혈투를 끝으로 노인과 나는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찾아온 에덴 팀과 그들을 이끄는 용팔이.

도시 아래에서 다시 만나게 된 우리는 기나긴 고독만큼이나 진했던 재회의 달콤함을 맛보며 같이 기쁜 울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 세계 뉴스에는 나와 노인의 생존소식이 도배되었고, 잠시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을 피해 안전한 미국으로 피신을 가 있던 채연이와 강수련은 내가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서둘러 한국으로 귀국하기 위한 비행기를 수소문했다.

허나 모든 것을 지켜본 운명의 신은 잠깐뿐인 내 행복을 언짢아하기라도 하듯 나와 아이 사이에 남아 있는 끈을 다시 한 번 끊어내 버렸다.

서울행 비행기가 출발하기 하루 전 전 세계에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대지진과 2차 격변.

지진판 옆에 있던 미국 서부는 순식간에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고 나와 채연이의 재회는 비극이라는 고통이 한순간에 앗아가 버리고 말았다.

주요 군사 강대국들이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고 있는 와중에 예고도 없이 움직인 각 대륙과 해양의 지진대는 1년 전 일어난 첫 격변보다 더 큰 혼란을 몰고 올 수밖에 없었다.

대지진의 여파로 많은 시설들이 파괴돼 버린 국가들과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수많은 구덩이를 만들어 내며 지상으로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놈들.

인류가 천천히 이겨 내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예상치 못한 변수가 판을 뒤집혀 버리고 만 것이다.

당연히 내가 있던 한국도 그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우리는 전국 팔도에 예고도 없이 생겨난 싱크홀과 그 구멍에서 끊임없이 기어 나오는 끔찍한 변종들과의 전쟁을 시작해야만 했다.

통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민간인 피해와 빠르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경제.

허나 비교적 지진피해가 적은 한국은 재빨리 이성을 되찾았을 수 있었고 준수한 화력의 현대식 무기와 군인들을 앞세워 차근차근 안전지대를 구축해 나갔다.

그리고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 선두에는 팀 에덴이 있었다.

놈들을 피부로 겪었던 풍부한 경험과 특정 상황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투력.

과한 화력을 집중시킬 수 없는 원자력 발전소나 민간인 지역에서의 변종 전투는 대부분 팀 에덴이 책임지고 처리했다.

그리고 마치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가는 군과의 협동작전은 1년이라는 시간 만에 모든 구덩이를 틀어막는 기염을 토해 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한국이 완전한 안전지대로 거듭나자, 내 조급한 시선은 당연히 미국에 있는 채연이를 향했다.

물론 한국 정부의 정식 부탁으로 캘리포니아 주방위대 기지에 무사히 지내고 있는 아이들이었지만, 상황이 언제 악화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2년, 그리고 1년.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통화를 한 채연이는 외적, 그리고 내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미국은 연방군 투입을 계속해서 반려했고 결국 2개월이 지난 지금, 채연이와 아이들을 데려오기 위한 에덴 원정팀이 미국행 수송기에 몸을 싣게 된 것이다.

“단축할 방법이 있을까요 ”

그리고 나는 조용히 위성 전화기를 만지며 노인에게 물어봤다.

현지 상황이 딱히 좋지만은 않은지 채연이와의 통화 주기는 벌써 한 달가량 벌어져 있는 상태다.

내 입장에선 채연이와 강수련, 그리고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 데려오고 싶었지만 목적지 근방은 수송기와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 없는 지형인 것이 문제.

결국 도보를 이용해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었는데, 그러기엔 지도상 위치나 거리가 너무 멀어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하지만 노인은 대답대신 손을 들며 내 뭉친 어깨를 힘껏 주물러주었다.

그리고 나의 조급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나지막이 충고를 곁들였다.

“내가 평소에 뭐라고 했지 ”

“……급한 일은 다시 한 번 생각해라.”

심장은 뜨겁게, 또 머리는 차갑게.

증오와 분노로 점철된 이 시대에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이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괜히 급하게 움직였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노인의 충고는 한순간 조급함으로 물들 뻔했던 내 정신을 조용히 다독여 준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손 떨림.

나는 입에서 빠져나온 한숨과 함께 조용히 벽에 등을 기댔다.

똑 똑.

그리고 마지막 점검을 마치고 내일 아침 있을 이동을 위해 휴식을 취하려는 순간, 창고 문에서 조용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sir. 잠, 잠시 이야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

노크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걸걸한 백인 남성의 목소리였다.

아마 이 교회 창고를 내어준 잭슨이라는 사내 같았는데, 아무래도 우리와 따로 할 말이 있는 모양.

물론 그들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던 나는 흔쾌히 대답하며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또랑또랑한 눈으로 나와 일행들을 쳐다보고 있는 20명의 마을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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