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205화 (205/313)

# 205

2부 2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삼촌, 곽동윤은 사람들하고 다시 만났을까요 ”

두꺼운 책이 덮이자, 조용히 입술을 오물거린 백인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벌써 21번째 읽어 주는 똑같은 책과, 21번째 물어보는 조카의 물음.

하지만 이 귀여운 아이의 삼촌인 빌리는 지겨운 기색 하나 없이 멋진 미소를 보이며 대답해 주었다.

“샘, 저번에 길 건너 오웬 아주머니랑 교환한 서바이벌 라디오 기억하니 혹시 해적방송에서 Mr.곽의 소식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집에 돌아가면 꼭 확인해 보자, 알았지 ”

이곳과 불과 3블록 떨어진 곳에 위치한 20평의 낡은 주택.

그곳은 빌리가 오래전부터 살고 있는 집이자, 놈들에게 죽은 누이와 처형의 아들인 샘과 같이 몸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비록 급하게 나오느라 많은 짐을 챙기지 못했지만, 그 집에는 분명 손으로 돌려서 충전시키는 서바이벌 라디오가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용케 기억해 낸 샘은 복슬 거리는 붉은 머리와 앙증맞은 주근깨가 붙어 있는 귀여운 얼굴을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우울한 분위기에 아까까지만 해도 울상이던 샘은 삼촌의 노력 덕분인지 고립되었다는 두려움이 한결 가신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것은 저 앞쪽에서 잔뜩 화가 난 잭슨의 숨죽인 질책이었다.

“목소리 낮춰 빌리……!”

씻지 못해 더러움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얼굴과 꼬질꼬질한 수염.

땀이 잔뜩 절어 있는 경찰 모자를 쓴 채 커다란 구형 샷건을 들고 있는 경찰관 잭슨은 연신 커튼 사이 창밖을 바라보며 불안한 듯 발을 떨었다.

그리고 그 질책에 빌리는 순순히 응하며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취해 보였다.

모두가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 공간과 시간, 하지만 빌리는 억지로라도 밝은 미소를 지으며 표정이 어두워진 샘의 손을 꼭 잡고 속삭여 주었다.

“샘, 곧 나갈 수 있을 거야. 삼촌 믿지 ”

잠시 밝아질 수 있었던 분위기는 윽박을 지른 잭슨으로 인해 다시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교회에 모여 있는 마을사람들 중 그를 탓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잭슨은 그저 다 같이 살기 위한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

“…….”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이틀 전 벌어진 놈들의 공격과 한 없이 지속되고 있는 고립.

급한 대로 살아있는 마을사람들은 전부 모아 교회로 도망쳤지만 마을을 점거한 놈들은 무언가를 찾기라도 하는지 다른 곳으로 향할 기색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식수와 완전히 떨어진 식량.

하지만 그것보다 더 걱정인 것은 벌레처럼 희망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무채색의 절망이었다.

마을 이곳저곳에 보이는 검은색 그림자와 황량한 바람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소름끼치는 놈들의 울음소리.

상황은 이미 끝을 치닫고 있었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직 되지 않았다.

저 멀리 보이는 황혼과 점점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시계바늘이 묘하게 들어맞는다.

추위, 어둠, 두려움.

아마 이대로 저 해가 진다면 또 악몽 같은 3일째 밤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 모여 있는 20명의 마을 사람들은 오직 어둠뿐인 미래를 향해 눈을 질끈 감으며 짙은 떨림이 섞인 입김을 후욱 내뱉었다.

“이게 마지막이에요, 천천히 아껴 드세요.”

그리고 주황빛 황혼이 막바지에 들어서자, 한쪽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챙기던 젊은 여성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비스킷 조각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해 주기 시작했다.

눅눅한 곳에 박혀 있어 이상한 냄새가 나는 비스킷.

하지만 빌리를 포함한 모든 마을사람들은 그것이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양손으로 천천히 받아들었다.

“입안에 넣고 천천히 녹여먹으렴.”

그리고 빌리는 자신의 몫을 샘의 입으로 넣어 주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

가뜩이나 고립되기 전에도 부족하던 식량, 거기다 교회에 갇혀 있으니 음식으로 배가 부른다는 것은 바랄수도 없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배부른 샘은 자신의 몫을 기꺼이 삼촌 입에 넣어 주며 히죽 웃었다.

“이보게, 잭슨……. 이제 해가 지기 시작하는데, 아직도 연락이 없나 ”

그리고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마지막 식량을 나눠먹는 그 순간,

저 멀리 보이는 황혼을 의식한 한 남성이 잭슨을 향해 다가가며 불안한 듯 물었다.

놈들이 근처에 있는데, 해가 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는 생존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직 없어요.”

초반에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놈들을 밀어내던 주 방위군과는 ‘대지진’ 이후로 연락이 끊긴 지 오래였다.

완전히 버려졌다는 소문만이 들려오는 서부 일부 지역과 집안에 있으라는 반복 방송만 내보내고 있는 라디오.

사람들은 방위군이 자신을 지켜 줄 수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는지 결국 살기 위해 마을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미국이라 가능한 수많은 민간용 총기와 자급자족이 가능한 넓은 땅과 모종.

그 장점들을 적절하게 활용한 생존자들은 놈들과 투쟁하며 1년 2개월이라는 세월을 하염없이 보내왔다.

그리고 지금 이곳, 글렌 마을은 경찰관 잭슨을 중심으로 50명의 마을사람들이 뭉쳐 살고 있는 화목한 생존자 캠프 중 하나였다.

그래, 적어도 괴물들이 공격하기 전까지.

“빌어먹을 놈들, 내가 믿는 게 아니었는데.”

잭슨은 이틀 전 벌어진 참상을 떠올리며 죄책감이 진하게 묻어나는 분노를 터트렸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생존자는 뭉쳐야 한다.

협동이 기본 철칙인 이 바닥에서 잭슨은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기본적인 소통을 중시하며 마을을 운영해 왔었다.

그리고 주민들과의 적절한 상의를 통해 다른 마을과의 교류도 꾸준히 이어오고 있었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물자를 잠시 빌려주기도 하는 그런 파트너와 같은 관계를 근방에 존재하는 마을과 맺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4일 전 자신들에게 연락해 무리한 동정을 호소한 건너편 마을사람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건너편 마을은 기본적으로 비 전투인원이 많아 항상 방어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동정한 잭슨은 자기 마을과 합류하라고 매번 권유 했지만, 그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해서 합류를 거부하며 위태로운 생존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점이 터진 것은 불과 4일 전, 일출직전 건너편 마을에서 갑작스럽게 보내온 지원요청이 시발점이었다.

그 무전의 내용은 바로 건너편 마을에서 조성한 1차 방어선 뚫리고 완전히 고립된 상태라는 것.

당연히 비 전투인원이 많은 건너편 마을의 전멸은 예상된 결과였고 잭슨이 이끄는 글렌 마을은 패닉에 빠지고 말았다.

인간성이냐 아니면 생존이냐.

울면서 지원을 요청하는 건너편 마을 사람들의 목소리와 한때 웃으며 인간성을 교류하던 이타심이 끊임없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만약 지원을 간다면 글렌 마을도 많은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한 사실.

하지만 순진한 시골 사람들임과 동시에 이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당연히 무기를 들고 마을 밖으로 나섰다.

허나 누구나 인간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글렌 마을 사람들이 도착한 현장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을 이웃을 위해 포기하지 않은 그들은 최선을 다해 놈들을 몰아내고 공격했다.

그렇게 반나절동안 이어진 혈투, 숫자가 생각한 것보다 적었지만 워낙 흉포한 놈들이었기에 싸움은 비등비등하게 흘러가는 듯 했다.

아니, 적어도 건너편 마을에서 문을 잠그기 전까지는.

“지미…….”

그리고 그날의 광경을 다시 한 번 회상한 잭슨은 놈들에게 물어 뜯겨 죽은 경찰관 동료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원을 왔지만 그 어떠한 호응도 해 주지 않은 건너편 마을.

그들은 도리어 문까지 굳게 걸어 잠그며 우리가 도망갈 장소조차 마련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글렌 마을사람들은 그렇게 길가에서 죽어갔다.

타인을 겁 없이 믿은 그 작은 실수는 마을 사람들의 반절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과를 초래했고, 잭슨은 황급히 나머지 사람들을 이끈 채 마을로 도망쳤다.

하지만 놈들은 도망치는 그들의 뒤를 따라 그대로 글렌 마을을 습격했고, 평화롭던 캠프는 지옥도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 어쩌면 이것이 건너편 마을 놈들이 원했던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살기 위해 타인의 죽음을 선택한 생존자들.

잭슨은 죽어간 마을 사람들에게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샷건 총구를 자신에게 돌리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온몸에 새겨진 상처, 아니 그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심장이 아리는 배신감과 잘못된 선택을 한 순간의 죄책감이었다.

신이시여 나를 용서하세요, 눈앞에 아른거리는 동료의 눈동자는 죽어서도 잊지 못할 흉터로 남는다.

“잭, 잭슨! 누군가 와요!”

하지만 그 순간 죽고 싶은 죄책감의 시간을 방해한 것은 교회 첨탑에서 주변을 경계하던 동양인 청년이었다.

조용히 사다리 아래로 얼굴을 내리며 다급히 잭슨을 부르는 청년.

절망과 숨죽임만이 가득하던 교회 내부는 청년의 외침에 놀람과 흥분으로 가득차기 시작했다.

“어디 ! 몇 명이나 오고 있어!”

교회에 고립된 첫날부터 근방을 향해 계속해서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비록 누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 공허함의 외침이었지만, 혹시 누군가 자신들을 구해 줄지 모른다는 희망은 고립된 이들을 버티게 해 주는 지푸라기와도 같았다.

하지만 격한 사람들의 반응에 얼굴이 창백하게 변한 청년은 조용히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며 잭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꼭 자신이 죄인인 사람인 것처럼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3명이요.”

3명. 그 대답에 여기저기서 김빠지는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구조대거나 다른 마을에서 지원을 왔을지 모른다는 기대.

하지만 청년이 내뱉은 3명이라는 숫자는 그 가능성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너무 적은 숫자였다.

잭슨은 허탈함이 섞인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린다.

“그냥 떠돌이……. 하, 이쪽은 위험하니까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신호 보내.”

서부에는 수많은 난민과 떠돌이들이 하루하루 연명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물론 평소의 글렌이라면 상태를 보고 호의적으로 대하겠지만, 온 마을이 놈들로 득실거리는 지금은 인사조차 어려운 형국이었다.

그리고 잭슨은 마지막 양심을 잃지 않은 채 지시를 내리며 제자리로 돌아갔고 동양인 청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첨탑위로 올라갔다.

황혼이 지기 직전 주변은 어둑했다.

아마 저 멀리서 걸어오는 떠돌이 3명도 밤을 보낼 장소를 찾는 것 같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곳은 위험한 곳이다.

교회 첨탑으로 조용히 올라간 청년은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내들었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그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놈들이 있어요, 다른 곳으로 돌아가세요.]

반짝 반짝. 불규칙적으로 깜빡이며 그들을 향해 보내는 마지막 신호.

그리고 저쪽에서도 이 신호를 발견했는지, 길 위를 걷는 인영들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래요, 돌아가세요.’

신호를 보낸 청년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조용히 바닥에 주저앉는다.

언제까지 고립되어 있어야 할까 과연 구조나 지원이 오기는 할까

1차, 2차 격변이 터지고 살기 위해 아등바등 거린 지가 5년.

돌고 돌아 이 글렌 마을에 정착했지만 지구상에 더 이상 안전한곳은 없어 보였다. 청년은 꾹 눈물을 참으며 얼굴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딱-! 따닥-!

그 순간 청년의 입에서 멍청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딱, 딱! 무슨 소리지 마치 무언가 커다란 소리가 억제기에 막혀 잔뜩 억눌린 소리가 길가에서 들려온다.

분명 들어본 적 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절대로 들리지 말아야할 소리.

그것은 성능 좋은 소음기를 장착하고 있는 총기의 총성이었다.

청년은 순간 다리에 힘이 들어감을 느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치 없이 밝은 별밤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총소리가 들릴 때마다 픽픽 쓰러지는 놈들과 능숙하게 대형을 이루고 마을로 접근하고 있는 떠돌이 3명.

정체불명의 그들은 보통 베테랑이 아닌지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정확히 한 놈씩 머리를 터트리고 있었다.

넋이 나가 차가운 바람만이 스쳐 지나가는 청년의 눈가. 그리고 시야가 닿은 그 자리에는 길가 한가운데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한 남자가 있었다.

[혹시 빈방 있습니까 ]

그는 너무나 정중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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