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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204화 (2부) (204/313)

# 204

2부 1화 나는 아직 살아있다.

[목적지 도착 2분전, 200m 활주로까지 도보로 접근합니다.]

칙-.

볼륨을 최소로 줄여 둔 무전기에선 짧은 잡음과 함께 긴장으로 짓눌린 앳된 신병의 목소리가 울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에 맞춰 2시간동안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차 내부는 날카로운 장전소리에 함께 가슴에 품고 있던 상념을 조용히 흘려보낸다.

내 시선이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아간다.

어둠속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창밖은 노이즈 낀 흑백 화면처럼 유리에 맺히는 진득한 함박눈을 품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과 방울이 맺히듯 눅눅해지는 신경, 나는 지나가 버린 기억을 반복되는 창밖을 통해 회상하고 있었다.

아, 오늘도 그때처럼 눈이 오고 있구나.

[도착 1분전.]

막바지를 알리는 신호다.

내 손이 본능처럼 움직여 탄창을 총에 삽입한다.

찰칵하고 울리는 삽입음과 함께 난 온몸에 끼인 녹을 털어내며 노리쇠를 당겼다.

묵직하게 들려오는 장전소리, 떨림은 어깨위에 내려앉은 묵은 숨을 끄집어내었다.

그리고 나와 마주앉은 자리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긴장 되냐 ”

맞다, 내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허나 그것은 두려움에서 오는 것이 아닌, 도착선을 코앞에 마주한 1m의 성취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앞으로 한 걸음, 앞으로 한 걸음만 더.

닿을 듯 말 듯한 그 사선이 내 숨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노인에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하얀 눈이 내린 백발과 나이를 감출 수 없는 얼굴주름.

하지만 언제나 같은 눈빛으로 내 옆을 함께 걸어준 노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줄어드는 초시계를 바라보며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벗어 둔 모자를 꾹 눌러쓴다.

[30초.]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물이 끓듯 아래에서 위로 피어오르는 전의와 긴장감.

히터를 켜지 않아 차가운 내부공기는 우리가 내뱉는 뜨거운 숨으로 금방 덥혀졌다.

그리고 그 순간 노인은 옆 자리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뒤통수를 치며 언성을 높인다.

“얘는 3년 전이랑 변한 게 없어. 도착했으니까, 일어나 인마!”

덜컹거리는 차안에서 코까지 골아 가며 자던 남자.

노인에게 뒤통수를 맞고 황급히 잠에서 깨어난 용팔이는 입 옆에 흥건히 묻은 침을 닦으며 아직 잠이 덜 깬 눈으로 노인과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멍청한 얼굴과는 반대로 용팔이의 양쪽 손은 이미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총기와 장비점검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울기도 많이 울고 실수도 밥 먹듯이 하던 우리 사고뭉치.

하지만 나와 노인이 없을 때 그 누구보다 든든한 리더가 되어 준 용팔이는 어느새 도시에서 손에 꼽는 노련한 생존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재회하던 그날 하늘이 떠나가라 펑펑 울던 녀석은 기어코 원정 작전까지 따라와 노인과 나의 껌딱지를 자처했다.

노인은 그런 용팔이를 향해 질책을 하다가도 피식 웃었고, 나도 멍청하게 웃고 있는 용팔이를 향해 나와 노인이 쓰고 있는 것과 같은 모자를 씌어주었다.

그리고 찰나와 같은 30초가 지나고 차 창문 밖에서는 밝은 빛과 함께 침묵 속에서 기지개를 피는 총소리가 연신 울려오기 시작했다.

긴 이동 끝에 차가 멈춘 것이다.

“가자.”

때가 왔음을 알리는 노인의 목소리는 장작불을 점화시키는 불꽃처럼 튀어 올랐다.

뜨겁게 변한 가슴과 숨, 눈앞에서 일렁이는 입김은 마치 신기루처럼 일렁거렸고 내 손은 어느새 허상이 아닌 분명 존재하는 문을 잡고 있었다.

언제나 그럴 듯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누군가 내 등을 민다.

그것은 심장소리였다.

덜컹, 쿵-!

[팀 에덴, 팀 에덴 활주로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3팀, 5팀 화력 집중해! 마커 있는 곳에 쏟아부으라고 새끼들아!]

문을 열자 다른 세상이었다.

사방에선 눈이 부신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밝히고 있었고, 하늘에는 시끄러운 소음을 내는 헬리콥터들이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빛을 쏘아 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우리의 시선을 독차지한 것은 저 멀리서 넘실거리는 놈들의 파도와 그런 그들을 막고 있는 수많은 군인들이었다.

어둠속에 밝은 실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총알과 쉴 틈 없이 불꽃을 뿜어 대는 중화기들.

절대로 막지 못할 거라 생각한 파도는 형광 빛으로 반짝이는 마커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차 반대 방향에서 황급히 뛰어온 군인이 우리를 향해 말했다.

“빨리 가셔야 합니다!”

공항과 활주로를 점거한 군인들은 몰려오는 놈들을 능숙하게 막아 내고 있었지만 가뜩이나 부족한 탄약은 곧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여유부릴 시간이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뜀박질을 시작했고, 노인과 용팔이는 언제나 그렇듯 내 뒤를 따라왔다.

[움직인다! 빨리 빨리 길 터 줘!!!]

그리고 우리가 움직이자 주변을 자욱하게 감싸고 있던 공기가 돌변했다.

마치 날선 비수처럼 내 이마를 스쳐 지나가는 헬기 바람.

앞주머니에 꽂아 둔 무전기에선 지휘관의 것으로 주청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가 달려가야 할 방향으로 모든 화력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바람, 고함, 총성, 어둠속에서 일렁이는 놈들의 그림자.

모든 소음과 공포의 요소가 함축되어 마치 빛이 켜진 터널을 달리듯 눈앞을 어지럽힌다.

하지만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군인들은 그런 요소들을 필사적으로 뚫어내며 우리를 수송기로 안내했다.

한때 목숨을 걸어가며 서로에게 총을 발사하던 두 단체가 이제는 생존과 본능을 초월하는 이상을 위해 힘을 합치게 되었다.

허나 이 모든 광경은 나에게는 익숙하기만 했다.

1년 2개월간 보여 주었던 또 다른 투쟁의 역사.

종의 피라미드가 역전될 뻔했던 순간 모두가 손을 잡고 흘렸던 필사의 핏방울은 몸 위에 남은 흉터처럼 지워지지 않은 유대감으로 재탄생했다.

장벽을 세우고 생존자들은 집결한다.

우리는 기나긴 밤이 지나서야 해를 보게 된 것이다.

“저희는 여기까지입니다! 꼭 무사히 돌아오십쇼.”

그리고 이곳까지 우리를 안내해 준 군인들은, 어둠속에서 몰려오는 놈들을 향해 화망을 집중하며 짧은 작별인사를 건넸다.

놈들의 육탄공격에 저항하며 이리저리 몸을 던지는 군인들.

단지 사람 3명을 수송기에 태우기 위해 많은 이들이 땀을 흘리고 있었다.

- - 웅- - - 우우웅- -!

그리고 우리가 활주로에 도착하자마자 어둠뿐이던 활주로는 공항에서 터져 나온 조명으로 인해 환하게 밝혀졌다.

그와 동시에 활주로 가운데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수송기의 터보 프롭 엔진은 기다렸다는 듯 웅 웅 소리를 내며 그 위용을 드러냈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곳으로 향해 뜀박질을 시작하며 경로가 그려지는 직선을 쫓는다.

무전기에서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고함과, 눈앞을 어지럽히는 숨.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모든 것을 수식하며 조급한 우리의 마음을 채찍질했다.

허나 그 순간 일이 쉽게 풀리면 아쉽기라도 하는지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내 신경이 짜릿하게 울려왔다.

[12시 방향 뚫렸습니다! 변종! 변종 사일런스, 수송기 앞 쪽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앞주머니에 꽂아 둔 무전기에선 변종이 이쪽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다급한 무전이 울려왔다.

변종! 그간 진화와 진화를 거듭하며 통제구역의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는 상위개체. 놈들은 장벽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적이자, 이 길고 긴 전쟁을 아직까지 이어가게 만들고 있는 끔찍한 놈들이었다.

변종을 만들어 내던 최태식은 분명 내 손에 죽었지만, 놈들의 구덩이는 꼭 학습을 하기라도 하는지 계속해서 자신들이 만든 새로운 변종을 뿜어내었다.

그리고 수백 번, 아니 수천 번이고 변종의 숨통을 끊어 놓은 우리는 무전을 듣자마자 자동반사적으로 총구를 들어올렸다.

“동윤아.”

어째 순순히 보내준다고 했다.

나는 노인의 침착한 부름에 고개를 끄덕이며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었다.

그리고 목줄이 풀린 신경과 강한 대기의 파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속에 숨어 미친 듯이 달려오는 변종 사일런스가 시야에 들어왔다.

뛰고 있음에도 소리와 기척이 들리지 않는 변종 사일런스.

저 한 놈 때문에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 말인가

증오와 같은 상념이 머리에 남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달려오는 변종을 빠르게 포착한 나는 놈이 있는 방향을 향해 레이저 포인트를 조준해 주었다.

그러자 나와 시선을 공유한 노인과 용팔이가 그 선을 쫓아 재빨리 총구를 옮겼다.

1분 1초가 급한 일촉즉발의 상황. 우리가 시간을 지체하면 이곳에 있는 군인들이 힘들어진다.

하지만 수송기를 향해 달려오는 놈의 눈동자는 결코 쉽게 죽어 줄 기세가 아니었기에 방아쇠위에 올려둔 내 검지가 조급함과 짜증을 담고 연신 움찔거렸다.

200m, 100m.

순식간에 줄어드는 간격과 마치 초시계처럼 똑딱거리는 심장.

노인과 용팔이는 내가 보낼 최적의 신호를 기다리며 조준간을 흐릿한 놈의 몸체위로 조준했다.

긴장감과 끓어오르는 전의 나는 느려지는 시간 속에서 방아쇠를 당기려는 고함을 지르려고 했다.

- - - -두 두 두 - -!

허나 그 순간, 내 입에서 터져 나온 고함을 틀어막은 것은 수송기 반대편에서 이쪽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였다.

그리고 하강비행을 하는 헬리콥터의 밝은 조명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는 변종을 정확하게 비추고 있었다.

[안부 꼭 전해주십쇼.]

그리고 얼떨결에 총구를 내린 우리의 시야에는 헬리콥터 탑승석에서 무전을 보내는 강 형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멋들어진 선글라스와 우리가 같은 모양의 모자를 쓰고 있는 강 형사.

정신을 차려보니 활주로 주변은 어느새 다가온 팀 에덴이 우리의 여행길을 엄호해 주고 있었다.

“가자!”

그리고 시원한 밤공기를 훅 들이마신 노인은 재빨리 총을 갈무리하며 나와 용팔이의 걸음을 재촉했다.

금방이라도 출발할 듯 더운 공기를 내뿜는 수송기 엔진과 더욱 바빠진 뜀박질.

그리고 우리가 수송기에 탑승한 것을 확인한 강 형사는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거치대에 놓여있는 기관총을 양손으로 꾹 잡았다.

- 투투투투투투투투-!

사방에서 들려오는 거친 총성과 함께 노도와 같은 총알이 놈을 향해 쏟아져 내렸다.

마치 장대비처럼 내리는 빛과 총성의 향연.

우리를 꼭 잡고야 말겠다는 기세로 달려오던 놈은 집중사격을 맞으며 그래도 바닥에 엎어졌고, 수송기에 탑승한 우리는 재빨리 자리에 착석했다.

“후우…….”

내 입에서 숨과 함께 뜨거운 입김이 터져 나왔다.

어두컴컴한 수송기 내부, 창밖을 향해 보이는 수많은 불빛을 마치 우리를 배웅해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짙은 떨림과 함께 돌아가기 시작한 터포 프롭 엔진은 온몸에 느껴지는 속도감을 더해 주었다.

활주로에서 들려오던 총성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송기가 무사히 떠올랐는지 속도감과 함께 부유감이 느껴진다.

사라지는 빛과, 그 빈자리를 채우는 어두운 밤하늘.

내 옆에 앉은 노인은 아련한 눈으로 멀어지는 활주로를 바라보았고, 긴장한 기색이 가득한 용팔이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숨을 고른다.

총성이 완전히 사라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공항은 더 이상 보이지 않기 시작했고, 시끄럽게 울리던 무전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그리고 먼 여행길의 시작을 알리는 마지막 무전이 잡음밖에 남지 않은 수송기 내부에 조용히 울려왔다.

[작전 종료, 즐거운 여행되시길 바랍니다.]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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