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3화(외전 5 - 終-)
변종화 판정을 받은 지도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났다.
놈들과 싸우면 싸울수록 변이 속도가 더 빨라진다고 알려 주었던 김철과 연구소 남자의 말.
물론 그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내가 4년간 지속해 온 투쟁의 역사가 말해 주었다.
지옥의 진창과 오물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이다.
누군가의 눈에는 이런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내가 놈들과 다를 바 없는 괴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런 오욕과 비난을 뒤집어쓸지라도, 내가 지키기 위해 지나쳐온 길을 절대 되돌아보지 않았다.
먼지처럼 쌓여온 인간의 정의(定義)가 강물을 거슬러 흐르는 나에게 물었다.
그 기나긴 길을 걸어 죽음과 불이 휩싸인 심연을 들여다봤구나.
그렇다면 너는 과연 인간이 맞는가?
그리고 억겁과 고난으로 점철된 내 삶이 대답해 주었다.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다.
단순히 심장이 뛰고 피를 흘려서 인간이 아닌, 인간과 어울려 울고 웃고 생각하며 바른 것이 뭔지를 고민하기에 인간이었다.
나는 성장했고, 항상 고뇌했다.
그리고 나는 회색 도시의 끝에 도달해서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눈을 뜨자 현실이 보인다.
노인이 보자마자 경악을 감추지 못했던 녀석의 등장은 도시의 기류를 한순간에 뒤집어놓기 충분했고,
나는 뜨거운 공기를 정면으로 맞으며 눈을 가늘게 뜬다.
이 모든 사태를 일으키고, 나의 삶을 거친 조류로 만들어둔 기이한 구덩이.
그리고 그 구덩이에는 불꽃에 완전히 타 버린 숯처럼 시커먼 검은 변종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놈들은 인간도 아니고, 동물도 아니다.
꼭 이 지구상 존재가 아닌 것 같은 그놈들은 여태 규정되어 있던 모든 것을 뒤집는 이레굴러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놈들에게도 유일하게 통하는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태 회색 도시를 이루어 왔던 약육강식이었다.
그리고 주변에 분포되어 있는 검은 녀석들은 진정한 포식자의 존재를 눈치챈 것인지,
곰팡이처럼 피어 있던 위치를 바꾸며 구덩이 근처에서 슬금슬금 멀어지기 시작했다.
[동윤아, 잠깐만 물러나자.]
그리고 그 순간 앞섬에 꽂아 둔 무전기가 울리며, 몹시 불안해 보이는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아직도 나를 태울 기회만을 노리며 주변 외곽을 돌고 있는지, 작은 바이크 배기음이 주변에서 울려온다.
잠깐만 물러나자는 노인의 말, 아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노인 또한 저 검은 변종의 위험성을 육감적으로 눈치챈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뇨,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오늘 여기서 구덩이를 박살 내고, 이 길고 긴 고통을 끝낸다.
물러나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내가 노인에게 단호한 뜻을 전달하자, 노인은 알겠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무전을 종료했다.
나는 허리춤에서 꺼내든 대검을 빙그르 돌렸고, 곧 정신없이 움직이는 눈동자로 놈의 몸체를 훑어보기 시작했다.
구덩이에서 기어 나와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놈은 근처에 검은 녀석들보다 3배는 커다란 변종이었다.
팔 하나는 거뜬하게 들어갈 것만 같은 눈구멍은 피부가 짜릿할 정도 살기를 뿜어냈고,
쩍 벌린 입에 박힌 이빨은 칼날을 처박아 두기라도 하듯 살벌하기 그지없다.
그리고 텅텅 빈 눈이 있는 놈의 얼굴은 분명히 칼을 들고 있는 나와 여기까지 끌고 온 리어카에 박혀 있었다.
구덩이에 넣으려고 한 것, 내가 아까부터 계속 의식 하고 있는 것.
놈은 너무나 영리 하게도 리어카 안에 있는 물체가 자신들에게 위험하다는 것을 감지한 듯 보였다.
따뜻한 봄바람 사이로 차가운 분위기가 지나간다.
나는 천천히 대검을 들어 올리며, 내 앞에 있는 리어카를 향해 천천히 접근했다.
그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린 녀석은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흘리기 시작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심장이 뛰고 등골 사이로 땀 한 방울이 조용히 흘러내린다.
“- - - -끼이이익!!!!”
그리고 놈의 입에서 수백 개의 철근을 비트는 듯한 소름 끼치는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그것을 출발선의 신호탄 삼아 앞을 향해 뛰쳐나갔고, 곧 손으로 리어카를 밀며 구덩이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놈은 나를 잡기 위해 육중한 발소리를 내며 뛰어오기 시작한다.
완전히 부서진 바닥을 울리는 진동과 살기.
나는 정면에서 터져 나오는 기괴한 울부짖음과 역한 냄새를 정면으로 맞이했다.
“- - - - - - -.”
이명이 울리고 시간이 느려진다.
공간이 좁아지고, 나는 모든 요소를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내 판단은 놈을 죽이기보단, 이 폭탄을 구덩이에 처넣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러자 신경은 그 물음에 착실하게 대답하며 내가 죽지 않는 움직임과 폭탄을 무사히 밀어 넣을 방법을 제시한다.
그리고 나는 그 궤적을 따라 충실하게 움직였다.
눈앞에 검은 그림자가 보인다.
가공한 속도와 위력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공격, 나는 놈의 날카로운 발톱과 팔을 마주 보며 그대로 리어카를 옆으로 밀어 버린다.
그러자 그 자리에는 콘크리트에 홈이 파일만큼 강렬한 공격이 떨어져 내렸고,
나는 느리게 흐르는 시간 사이로 종이 한 장의 차이로 공격을 피해 낸다.
“- - 끼끼기기이이익!!!!”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날카로운 손톱.
하지만 결국 그 공격은 빗나갔고, 놈은 당혹스러움과 분노가 묻어나오는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아마 내가 말할 힘이 있었다면 놈에게 ‘소리 지를 시간이 있어?’라고 물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삼키고 행동을 우선시 삼은 나는 공격이 빗나가자마자 거대한 다리 옆으로 황급히 뛰어 가며 놈의 무릎 관절에 대검을 찔러 넣었다.
대검이 통과한 놈의 무릎 관절은 마치 튼튼한 강철을 고무로 여러 번 묶어놓은 강한 저항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온몸에 있는 힘과 신경을 집중시킨 오른팔은 꽉 잡은 대검에 힘을 아낌없이 불어넣는다.
그리고 놈이 살면서 처음으로 고통을 느낀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울부짖음이 울려 퍼졌고, 나는 그대로 몸을 날려 두 번째 후속타를 피해낸다.
“동윤아!!!!!”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배기음과 함께 노인이 목 놓아 나를 부른다.
그래,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위기를 같이 넘겨온 노인의 목소리는 그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전달해 준다.
나는 바닥에 몸을 구르며 그대로 반대쪽을 향해 자리를 박찼고,
곧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향해 뻗어오는 노인의 손을 붙잡으며 바이크 뒷자리에 착석했다.
시야가 순식간에 반전한다.
노인이 통쾌함을 담으며 엑셀을 거침없이 당긴다.
부아아아앙-!!!!
애지중지하며 자식을 키우듯 고쳐갔던 바이크는 그 오랜 노고에 보답하듯 힘찬 배기음을 내며 앞을 향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몸에서 느껴지는 속도감, 순식간에 차오르는 최고속도에 불시의 공격을 당한 놈은 미친 듯이 우리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놈이 울부짖는 소리가 배기음에 묻힌다.
그리고 나는 그대로 허벅지와 발에 힘을 주며, 등에 메고 있던 활을 꺼내 들었다.
놈의 속도가 빠르다.
하지만 얌전히 잡혀 줄 생각은 없었다.
끼끼긱-.
허벅지와 발로 자세를 고정하고 상체를 뒤로 튼다.
재빨리 움직인 손은 어느새 화살 한 개를 꽉 잡고 있었고, 털보가 작성한 교본에 쓰여 있는 대로 정확히 활을 먹인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와 네발로 우리를 쫓아오는 검은 변종.
나는 초원을 달려가는 한 명의 스키타이족처럼 상체를 튼 상태로 중심을 잡았고, 가공할 신체 능력은 그것을 성공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궤적을 쫓아 정확히 날아간 화살은 놈의 텅 빈 눈동자에 그대로 박혀 들어간다.
“돌아서, 다시 구덩이로 가요!”
“- - - - -!!!”
화살을 정통으로 맞은 놈이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노인의 귀 옆에 고함을 내지르며 구덩이 건너편에 처량하게 놓여 있는 리어카를 가리켰다.
이 모든 것을 시작하고 끝낼 폭발의 신호탄.
우리는 도망간 게 아니라, 두보 전진을 위한 디딤발을 짚은 것이다.
그리고 내 고함을 들은 노인은 미친 듯한 운전 솜씨를 뽐내며 바이크의 앞길을 막는 놈들을 요리조리 피했고,
곧 저 앞에 보이는 리어카를 향해 엑셀을 밟았다.
“오른쪽 뒤!!”
하지만 지독한 집착을 놓지 못한 그 녀석은 머리통에 화살이 꿰뚫리고도 우리를 향한 적의를 내려놓지 않았다.
박살 난 콘크리트에서 나온 먼지는 사방에 자욱했고, 그사이에 보이는 백미러를 통해 네발로 기어오는 놈의 모습이 잡힌다.
녀석은 제대로 화가 났는지, 리어카를 향해 다가가는 우리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구덩이에 접근할수록 불안전한 지반, 나는 수차례 활을 쏴 보려고 했지만, 흔들리는 동체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따라잡혀요!”
내가 놈의 위치를 확인하며 다급하게 외치자, 운전하던 노인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았는지, 쓰고 있던 헬멧을 뒤로 벗어던졌다.
백미러를 통해 서서히 접근하는 녀석의 몸체가 보인다.
이대로 가다간 구덩이의 폭발은커녕 우리의 목숨이 위험할 지경이다.
놈에게 도망쳐 꽤 멀리 도망 왔기에 구덩이 둘레를 반쯤 돌아야 리어카가 있는 곳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놈을 저지하기도, 그렇다고 시간을 앞당길 수도 없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노인이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엑셀을 당기며 외친다.
“에라이, 시발! 꽉 잡아! 뛰어넘는다!”
뭐라고요? 미쳤어요? 내가 잠깐의 여유가 있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노인은 작정한 지 오래였고, 난 대답 대신 노인의 허리를 꽉 잡으며 급변하는 시야를 지켜볼 뿐이었다.
노인은 그대로 동체를 돌려 구덩이를 한 바퀴 도는 대신 가운데를 뛰어넘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우리를 쫓아오는 놈은 그러거나 말거나 거대한 울부짖음을 내뱉는다.
가능할까? 불가능할까? 뛰어넘기에는 너무 멀고, 아니라고 단정 짓기에는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 여부를 넘어선 그 애매함은 나를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우리는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구덩이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노인은 최대한 위로 솟구치는 지반을 빠르게 찾아내 방향을 돌렸고 마지막 힘을 쥐어짜듯 액셀을 당겼다.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몸이 최고 속도를 내고 있다는 느낌.
급변하는 시야와 불안한 감정이 점철되는 와중에 나는 분명 노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노인은 꼭 내일 은퇴하는 평범한 할아버지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말년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냐…….”
조금 미안해졌다.
부아아아앙-!!!!
하지만 노인에게 사과를 전하기도 전에 우리를 태운 바이크는 최고속도로 달려가 무너진 지반을 지나쳐 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아니, 구덩이를 뛰어넘었다.
마치 TV에서 넋 놓고 보았던 액션 영화처럼 말이다.
내 신경과 머리는 이게 죽음의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인식했는지 시간을 느려지게 만들었다.
흩날리는 노인의 백발, 온몸에 느껴지는 부유감.
나는 조용히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침을 삼켰다.
어둡다.
그와 동시에 붉다.
마치 빛 한 점 없는 우주에 불꽃이 폭발하는 것처럼 구덩이는 붉은 섬광이 번쩍거리고 있었다.
시체 썩는 냄새와 피부를 아릿하게 울려오는 뜨거움.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 놈들이 기어 올라온 구덩이를 잠깐이나마 지켜볼 수 있었다.
백미러를 보자 미련하게 우리를 따라 구덩이를 뛰어넘은 녀석이 입을 쩍 벌리며 손을 뻗고 있었다.
하지만 녀석은 이미 중력의 법칙을 충실하게 따르며 바닥에 떨어지고 있었고,
우리의 바이크 는 E.T의 나오는 자전거처럼 하늘로, 그리고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폭발할 듯 뛰는 심장, 성공하고 말았다는 쾌감이 발끝에서 시작해 머리를 찌르고 오른다.
나는 노인의 허리를 잡고 있는 손을 그대로 놓으며 눈을 번쩍 떴다.
두쿵, 두쿵.
심장 소리에 맞춰 공간이 진동한다.
나는 느려진 시간 속에서 우리가 구덩이로 밀어 넣어야 할 리어카를 포착했고, 바이크가 길 위에 떨어지며 속도가 줄어들 순간을 기다린다.
0.1초, 0.2초?
계산이 안 된다.
하지만 내 몸은 그 순간에 충실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구덩이를 뛰어넘은 우리의 바이크가 바닥에 닿는 순간, 나는 몸을 뒤로 돌려 폭탄이 실린 리어카를 발로 차 넣었다.
놈이 지르는 울부짖음과 공중에 두둥실 떠오른 리어카.
나는 기폭장치를 손으로 잽싸게 낚아채며 길게 숨을 내뱉는다.
부아아아앙-!!!!
시간이 다시 빠르게 흐른다.
기폭장치와 연결된 선은 폭탄을 따라 구덩이 밑으로 하염없이 떨어졌고, 곡예를 하듯 매달려 있는 나를 노인이 손을 뒤로 뻗어 꽉 붙잡아 준다.
그리고 바이크가 다시 속도를 낸다.
저 멀리 주황색 황혼이 걸려 있고, 나는 멀어지기 시작하는 구덩이를 보며 이 전쟁의 마지막을 알리는 박수를 폭탄에 전달한다.
- - - - -꾸르릉 - - !
마치 용이 포효하기 직전에 숨을 삼키듯, 폭발을 내포한 소리가 구덩이에서 터져 나왔다.
폭발력이 그대로 전달되어 흔들리는 지반과 대기.
주변에 갯강구처럼 모여 있는 놈들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소름 끼치는 비명을 뒤늦게 내질렀고,
우리는 그와 반대로 유유자적하게 지옥을 빠져나간다.
나는 조용히 기폭장치를 뒤로 던지며 자세를 바르게 했다.
- - - -쾅!!!!!!!!!!!!!
그리고 다시금 가공할 폭발 소리와 함께 수만 마리의 놈들이 내지르는 단말마가 구덩이 안에서 울려 퍼진다.
반쯤 박살 난 지반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했고,
위태롭게 구덩이를 유지하고 있던 흙과 콘크리트가 주변의 건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며 지옥의 아가리를 틀어막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장면을 미련 없이 뒤로 하며 끝없이 뻗어 있는 회색 도시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집에 갈 시간이다.
* * *
아이들을 태운 노란색 스쿨버스는 너무나 한가한 북미의 시골길을 달리고 있었다.
끝없이 널려있는 밀들과 흙먼지를 일으키는 비포장도로. 하지만 끝없이 이어진 길은 과거의 아픔을 잊고 너무나 평화로운 분위기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스쿨버스 안에는 하교하는 아이들이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란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한 소녀가 보인다.
예쁜 원피스를 입고 있지만, 처량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금발의 소녀.
그리고 그 금발 위로 아무렇게 구겨진 종이가 날아와 아이를 맞춘다.
아프지는 않지만 조롱당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인 그것, 하지만 종이를 맞고 있는 소녀는 저항하기는커녕 닭똥 같은 눈물을 뚝 뚝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풍경에 조용히 끼어 든 아이가 있었다.
분홍색 키티 가방을 안은 채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채연이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금발의 아이에게 유창한 영어로 묻는다.
“왜 널 괴롭히는 거야?”
한참 철이 없는 아이들은 버스 앞자리에 앉아, 낄낄 웃으며 소녀를 향해 종이를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던 채연이는 금발 소녀에게 물으며 조용히 키티 가방을 둘러멘다.
그러자 금발 소녀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 주는 채연이를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더듬는다.
“부, 부모님이 없다고…….”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본다면 학을 뗄 이유지만,
철없는 아이들 사이에선 이런 억울한 상황이 괴롭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금발의 피해자와 그 옆자리에 채연이뿐,
아이들 대부분이 왕따에 동조하거나 침묵하고 있었다.
스쿨버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길 위를 달렸고,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
하지만 채연이는 그 와중에도 궁금한 게 있는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질문을 소녀에게 한다.
“어디서 돌아가셨는데?”
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지옥의 피해자는 많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사태로 인해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 중 이 금발의 소녀도 포함이 되는지,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돌아가셨던 엄마와 아빠를 회상했다.
“플로리다에서……. 나 때문에……, 흑.”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구덩이가 열리고, 놈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론 사태의 심각성을 빠르게 포착한 주 방위군이 도착하긴 했지만, 이미 아이의 엄마와 아빠는 자녀들을 지키기 위해 생을 마감한 지 오래.
그리고 이제 혼자 남게 된 금발 소녀는 상실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철없는 아이로 인해 이런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대단한 분이셨구나.”
하지만 그 순간, 금발 소녀를 향해 아무도 해 주지 않았던 말이 아직은 어린 채연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대단한 분이셨구나, 너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신 영웅이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픔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던 이야기.
채연이는 금발 소녀에게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영웅이 모두에게 해 주었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그러자 금발 소녀는 멍한 얼굴로 채연이를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이 동양인 소녀도 이곳에 있는 아이들과 나이가 같을 터인데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그 모습은 저 철없는 무리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채연이는 마치 아침 햇살처럼 환한 미소를 마지막으로 금발 소녀를 꼭 안아주었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며 멈춘 스쿨버스의 문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하지만 버스 앞자리에서 괴롭힘을 주도했던 남자아이 하나가 껄렁거리는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채연이의 앞길을 막아섰다.
채연 이보다 배는 커 보이는 몸짓과 얼굴.
그 아이는 자신이 주도하는 일에 찬물을 뿌리는 채연이가 짜증 났는지, 온갖 욕설을 중얼거리며 스쿨버스의 통로를 막았다.
하지만 채연이는 그러거나 말거나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아이를 올려다봤다.
“뭘 봐, 이 원숭이 새끼야!”
그리고 남자아이는 어디서 배웠는지 모를 저열할 인종차별을 덧붙이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채연 이를 조롱했다.
그러자 근처에서 소년과 어울리며 놀던 아이들이 그 인종차별에 호응하며 역겨운 원숭이 소리를 끼끼 내뱉는다.
한순간 얼어붙는 분위기, 그리고 왕따를 주도한 남자아이는 이 분위기에 만족하는지 흐뭇한 얼굴로 동양인 소녀가 흘릴 눈물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이의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채연이의 눈물이 아닌 한순간 번쩍이는 별이었다.
빡-!
전광석화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신속한 움직임.
분홍색 키티 가방이 흔들리고 앙증맞은 원피스가 펄럭인다.
채연이는 자신의 아빠를 쏙 빼다 닮은 움직임으로 원숭이 소리를 내고 있는 아이 얼굴에 하이킥을 날렸다.
털썩.
얼굴에 정통으로 킥을 맞은 남자아이는 그대로 스쿨버스 복도에 쓰러졌고,
의자에 앉아 있는 아이와 운전사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채연이를 바라봤다.
귀여운 얼굴과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움직임.
자기보다 2배는 큰 남자아이를 한 방에 보내 버리는 킥.
채연이를 놀리던 동조자들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저 뒤에 있던 금발 소녀는 입을 헤 벌린다.
그리고 나쁜 아이 한 명을 녹다운시킨 채연이는 너무나 개운한 얼굴로 스쿨버스에서 내려 자신의 집으로 걸어갔다.
아이가 걸어가는 길에 바람이 분다.
주황빛 햇빛이 다시 찾아온 평화로운 시대를 축복해 준다.
그가 그토록 바랐던 일상이 아이에게 되돌아온 것이다.
“엄마!”
앙증맞은 단발과, 붉은 기가 감도는 볼.
곽동윤이 애지중지하던 작은 아이는 어느새 많이 성장해 어여쁜 숙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 채연이는 올바른 학교생활을 끝마치고 자신의 엄마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담한 마을과 아담한 집.
풀벌레가 울고 깨끗한 잔디에는 아이들이 타고 놀 수 있는 그네가 위치하고 있었다.
채연이는 그런 집을 익숙하다는 듯 바라보며 연신 엄마를 부른다.
그리고 채연이는 깨끗하게 포장되어 있는 돌담길을 지나쳐 우리들의 보금자리인 집으로 들어가 엄마가 매일 챙겨주는 우유 잔을 꾹 잡는다.
“엄마, 나왔어!”
자신의 예쁜 엄마.
채연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웠고, 거실에서 조용히 서 있는 강수련을 부른다.
하지만 매번 자신을 반갑게 반겨주던 강수련은 웬일인지 시끄럽게 떠드는 TV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갑자기 왜 그러지? 평소 그러지 않던 엄마한테 의문을 느낀 채연이는 우유를 크게 원샷하고 의자 위에 키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만히 TV를 보고 있는 강수련에게 다가가 물었다.
“엄마 나 왔어! 왜 그렇게……. 응? 울어?”
그냥 넋 놓고 TV를 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수련은 한 손으로 입을 막은 채 TV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큰 눈물이 그렁그렁 매달려 있었다.
매일 환하게 웃어주던 엄마가 오늘은 운다.
채연이는 잔뜩 당황하면서도 강수련이 시선을 고정해 두고 있는 TV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린다.
속보, 전 세계, 한국, 봉쇄지역, 책, 그, 영웅.
TV에는 재미없는 드라마 대신 잔뜩 흥분한 아나운서가 긴급 속보를 내보내고 있었다.
그곳에는 친숙한 한국의 모습과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군인들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군인들 사이에는 자신에게 매번 편지를 써주는 용팔이 삼촌이 자신의 엄마와 똑같은 얼굴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뉴스 내용을 천천히 듣던 채연이는 화면 속에 잡히는 얼굴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마지막에 자신의 아빠와 약속했던 환한 미소를 그리운 이들을 향해 보여 주었다.
볼에 가득한 눈물이 환한 미소를 따라 떨어져 내린다.
화면에는 4년 만에 돌아온 남자 둘이 허겁지겁 김치찌개를 먹고 있었다.
- 외전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