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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195화 (195/313)

나는 아직 살아있다.  195화

아빠는 슈퍼맨이잖아요. 아빠는 모두를 구하는……. 슈퍼맨이잖아요. 작은 손으로 내 손가락을 꼭 잡아주던 채연이의 온기와 속삭임이 형상이 없는 내 근원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자 손끝에 감각이 생기기 시작했고, 무형을 떠돌던 내가 다시 지옥으로 발을 들인다. 눈꺼풀이 가린 칠흑의 공간이 떨린다. 이명이 울리고, 노이즈가 낀 듯 흐릿한 머리에서 작은 한 줄기 빛이 대각선을 가로지르며 나에게 내려친다.

“- - - - 단체장님!!”

커헉!

나를 부르는 거친 음성과 함께 끝없이 내리는 빗물이 얼굴을 때린다. 그 아래 가슴에는 쉼 없이 압박하는 묵직함이 느껴졌고, 동시에 죽어 있던 심장이 다시 되돌아오며 폐 안에 고여 있던 묵직한 숨을 한 번에 몰아 내쉰다.

헉……, 헉.

익숙한 고통, 팔다리를 찢어놓는 듯한 친숙한 고통이 내가 아직 살아 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어두운 하늘, 그 어둠을 가로지르며 내리는 질척한 비. 나는 다시 돌아왔고, 박대박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숨이……. 단체장님, 숨이…….”

박대박은 내 가슴 위에 올려둔 양손을 치우며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피와 흙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숨을 거칠게 내뱉는 표정만큼은 나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물들어 있었다. 살았다, 아직 살아 있다. 나는 두 눈을 뜨며 얼굴에 쏟아져 내리는 봄비를 맞았다. 그리고 이제 움직이기 시작한 심장에 반응해 본능적으로 양쪽 바닥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그 순간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형편없이 떨어져 있는 총의 손잡이가 스쳐 지나간다. 나는 망설임 없이 손잡이를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진창 속에 처박혀 있던 총의 개머리판을 끄집어낸다. 내 손에서 항상 고난을 같이 했던 친구가 잡혔다. 물론 둘 다 온몸이 피와 흙으로 엉망이 되었지만, 그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은 변함없었다.

심장이 뛴다. 숨이 쉬어진다. 나는 아직 살아가고 있었고, 지금 이 공간에 있다. 두 눈으로 보고 나서야 알았다. 죽고 나서야 알았다. 이 감정은 포기와 미련이 아닌, 현실을 살아가는 연장선이었다. 나는 바닥에 흙탕물을 내뱉으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잡히지 않는 현실의 이면 위에 확고한 선을 그었다.

“- - - - - - -!!”

“- - - - - 컹컹-!!”

내가 총을 잡음과 동시에 저 멀리서 수많은 군인이 비추는 조명과 군견들이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를 괴롭히던 포격은 멈춘 지 오래였으며,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어둠이 주변에 깔려 있다. 하지만 나는 또렷하고 맑은 정신 사이로 지금 상황을 정확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포격이 끝나면 군인들이 우리를 추격할 것이라는 노인의 예상. 그리고 지금 그 예상은 정확하게 적중했고, 우리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저 멀리 노도와 같은 파도가 몰려온다. 그 파도는 내가 그은 선을 짓뭉개고 쓸어내며 색이 바래지게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 앞에서 내 목소리와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나는 정신없이 총을 찾고 있는 박대박에게 물었다.

“제가 데려온 두 명은 살아 있습니까?”

떨림과 조류가 사라진 내 목소리는 깊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그리고 죽는다는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 거칠게 날뛰고 있던 박대박은 호수처럼 잔잔한 내 목소리에 동화되며 서서히 혼란과 두려움을 가라앉힌다. 억세게 내리기 시작한 비가 천천히 그친다. 그리고 그 어둠과 비 사이로 주황색 물감이 천천히 번지기 시작한다. 박대박은 하늘 위에 벌어지는 그 광경과 내 얼굴을 쳐다보며 넋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사하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주저앉아 있는 박대박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저 한쪽 바닥에 처박힌 채 미약한 숨을 내뱉고 있는 두 남자마저 끌어올리며 들고 있던 총을 앞으로 멘다. 멀리서 들리기 시작한 웅성거림과 빛들이 서서히 가까워진다. 군견들은 우리의 냄새를 맡았는지, 더욱 흥분하며 컹컹 짖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침착하게 노리쇠를 당기며 얼굴에 피와 흙이 묻은 박대박의 어깨를 꽉 잡아주었다.

“군견 때문에 서로 찢어져서 도망가야 해요. 나는 오른쪽으로 달릴 테니까, 당신은 이 두 사람 데리고 뒤쪽으로 달려요. 후방에 도착하면 영감님이 분명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 소식 꼭 전해 주고요. 도착하면 우리 다 살아서 만날 수 있어요.”

이대로 도망가면 군견과 놈들한테 우리는 물론이고 후방 인원들까지 따라잡힌다. 다 같이 살아서 만나요, 나는 어쩌면 거짓말일지 모르는 그 문장을 가슴속에 심었고, 더 이상 피와 죽음은 없어야 한다는 단호함을 눈에 담는다.

내가 어깨를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자 박대박은 눈가와 입술을 파르르 떨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컹컹하고 개가 짖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군견이 뛰어오는 게 시야에 들어왔다. 수없이 많은 불빛과 그림자들은 내 손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게 한다.

이것이 마지막 대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박대박을 잠시 망설이게 한다. 하지만 내 입에서 다시 한 번 터져 나오는 고함 소리에 박대박은 울부짖음과 같은 소리를 내며 쓰러져 있는 두 사람을 짊어지고 후방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멀어진다. 그리고 나는 노리쇠를 당긴 총을 앞으로 들며 조정간을 천천히 위로 향하게 한다. 얼굴을 따라 흐르는 땀과 크게 뜨인 두 눈.

딸칵, 딸칵.

들려오는 소리에 시곗바늘처럼 심장이 뛴다.

내가 결심을 한 것을 알기라도 하는지 비가 그친다. 저 멀리서는 어둠을 몰아내는 여명이 보이기 시작했고, 내 마음처럼 잔잔한 주황빛 구름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심장이 느리게 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이 지옥 같던 공간은 과거의 아픔으로 밀려나 버린다.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모든 것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프고 힘들고, 그런데도 행복하고 좋았던 순간들이 나를 이루고 요소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후회가 없다. 미련도 없다. 난 곽동윤은 비로소 완성되었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발을 박차며 박대박과 약속했던 오른쪽이 아닌 군인들과 군견들이 뛰어오는 앞을 향해 뛰기 시작한다.

타당-! 탕!

소음기를 제거한 총구에서 오랜만에 시원한 총성이 울려 퍼진다. 총소리와 더불어 뻥 뚫리는 내 마음은 후련할 정도로 머리를 맑게 만들었다. 그리고 총알이 대기를 가로지르는 소리와 함께 나는 공간의 연장선을 갈랐고, 박대박을 쫓아가는 군견이 깨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엎어진다. 순간 웅성거림과 군인들이 내지르는 고함은 내가 바꾼 기류에 파묻혀 조용해진다. 바람이 속삭인다, 여기 내가 있다.

가속한다, 빨라진다. 놈들을 향해 전진한다. 사방에서 쏟아져 나오는 불빛은 내가 나아가려는 여명에 파묻혀 아무런 존재감을 보이지 못하고 있었다. 겪었던 고통이 뼈가 된다. 머리를 꿰뚫던 고뇌가 살이 된다. 흘렸던 눈물은 피가 되었고, 이젠 노도의 파도마저 내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에 불과했다.

고시원을 뛰쳐나온 뜀박질, 아이를 살리려 발악했던 뜀박질,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뛰어가는 뜀박질. 나는 알을 깨부수고 비로소 새장을 뛰쳐나온다. 몸이 가볍다. 항상 뛰기만 했던 내 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몸을 구속하고 있던 모든 족쇄가 풀려나간다.

방아쇠는 당겨지고 눈앞에서 총구가 번쩍인다. 군인들이 엄폐물에 황급히 몸을 숨길 때마다 시선은 뒤쪽이 아닌 나에게 고정되었다. 이쪽을 봐라, 나만을 봐라! 내 총알은 군인을 쓰러트리는 목적이 아닌, 시선을 돌리기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총알을 피해 엄폐물로 숨어든 군인들은 머리만을 내민 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패잔병을 바라보는 시선과 불타오르는 적의가 담겨 있었다.

나는 재빨리 엄폐물로 달려가 몸을 숨긴다. 그러자 내 물음에 화답하듯 군인들은 총구를 들어 올리며 나에게 증오가 묻어나오는 사격을 거침없이 때려 박는다. 자신들의 전우를 죽인 끔찍한 변종, 이 땅에 침범한 더러운 빨갱이들. 내가 어떤 이름으로 그들에게 기억될지는 몰랐지만,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나는 그저 그들의 발목을 추잡하게 물어뜯는 한 마리의 개새끼였으니까.

나는 그대로 하늘을 향해 총구를 들어 올리며 연주황색으로 물드는 하늘을 향해 미련 없이 잔탄을 쏟아부었다. 갑자기 날아온 사격에 고개를 내밀고 있던 군인들은 황급히 엄폐물 속으로 머리를 숙였고, 내가 발사한 총알은 의미 없이 허공을 가른다.

달칵, 달칵.

발사, 발사, 발사.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아쇠를 당겼지만, 이 잔혹한 드라마의 결말은 이미 대본 위에 써진 지 오래였다. 내가 검지를 움직이지만 빈 공이는 허공을 칠뿐이었다. 나는 그 순간 미련 없이 총을 내려놓았고, 들고 있는 가방마저 내려놓았다. 그리고 몸을 재빨리 돌려 박대박이 도망친 방향과 정반대인 왼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왼쪽을 향해 뛰는 순간, 장교로 보이는 한 군인이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며 나를 가리킨다. 그러자 군인들은 이쪽을 향해 사격하거나 엄폐물에서 벗어나 나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고함을 삼키며 터지기 직전인 숨을 내뱉었다. 패잔병은 나뿐이다, 여기서 졌지만 지지 않은 패잔병은 나뿐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일한 패잔병인 나를 따라 어둠이 물러나고 있는 풀숲을 달리고 있었다.

나를 쫓아오는 노도가 이제는 죽어가는 내 머릿속에 경종을 미약하게 울린다. 머리 위로 총알이 지나가고 뒤에서는 군견들이 내 짖는 울음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온다. 하지만 나는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고, 오직 앞을 향해 뛰어간다. 공간이 좁아진다. 나는 숲을 완전히 빠져나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넓은 공터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터에 들어서자 저 멀리서 내가 모든 것을 놓고 왔던 회색의 도시가 보인다. 하늘에선 여명이 지나 밝은 해가 뜨고 있었고, 빛을 머금은 구름은 내 위로 잔잔히 흘러간다. 나는 달리는 와중에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왼쪽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두근두근하며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게 손아귀에 느껴졌다. 나는 알고 있다. 나를 옭매던 피와 진창도, 나를 붙잡던 족쇄와 고통도 모두 달리는 다리 밑으로 떨어져 나간 것이다.

눈앞에 회색 도시가 보이자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저 거대한 도시 안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 친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아마 사람들은 무사할 것이다. 채연이와 아이들은 일상이라는 행복을 만끽하며 다른 이들과 같이 착하고 예쁜 아이로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모든 상상이 내 고통과 아픔을 대변하며 보상으로 찾아왔다.

나는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도시는 미약한 나의 존재를 무시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몽롱한 해와 바람을 선사한다. 무슨 일이 있었어? 아니, 아마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아. 그래, 그러니까 이곳으로 와. 여기가 네 자리야.

내 귀에 속삭이는 바람 소리에 나는 그제야 자유를 찾는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아이의 손. 당장 고개를 돌리면 보일 것 같은 일행들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그러자 내 떨리는 손과 입에선 그들의 체온을 맞잡은 따뜻함이 느껴졌다.

이제 안개 낀 길은 없었다. 앞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꿈꿔 왔던 길을 달리고 있었다. 조류가 멈추고, 잔잔한 하류가 보인다. 이제 차가운 겨울이 지나 따뜻한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이제 마지막. 비록 찰나의 순간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과거의 단편들을 심장에 꽂아 넣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오직 우리만이 공유하고 있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이도, 사람들도 저곳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약속한 대로 밤이 물러가고 찾아오는 아침이다. 나는 그 아침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가슴이 뜨겁고, 눈물이 더러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하지만 나는 그 순간 웃고 있었다.

기억해라.

잊지 마라.

너는 지금 이 순간을 절대로 잊지 마라.

그래,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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