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86화 (186/313)

[186]

‘영감님!’

정적과 절망만이 가득한 밤을 깨운 것은 폭음과 함께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한 무전기들이었다. 장벽에서 밤늦게까지 지휘를 하던 나는 그 무전기가 울리자마자 중앙 건물로 뛰어가기 시작했고, 중간에 노인을 만나 야밤의 길 한가운데를 질주를 시작했다. 그리고 허겁지겁 걸음을 옮기는 노인의 뒤를 쫓으며 재빨리 불렀고, 노인은 숨을 헉헉 내뱉으며 역정을 낸다.

‘나 숨넘어가는 거 보고 싶냐, 이놈아! 왜 불러!’

진짜 질문하다가 숨넘어가게 생겼다. 나는 일단 도착해서 물어보겠다는 짧은 대답과 함께 중앙 건물로 달려갔고, 황급히 중앙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서서히 불이 켜지기 시작하는 복도를 가로질러 이미 불이 켜져 있는 회의실로 들어간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밖에서 펼쳐지는 굉음과 옅은 불꽃들을 쳐다보기 바쁘다. 나는 도착하자마자 책상 위에 아직 땀이 마르지 않은 장비를 내려놓았고, 동시에 노인을 향해 물었다.

‘저렇게 될 거라고 알고 계셨어요?’

‘어.’

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하며 망원경을 들어 올렸지만, 그 짧은 대답의 여파만큼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노인이 예상대로 2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판이 뒤집혔다. 새롭게 진화한 놈들은 우리가 아닌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 저곳까지 몰려갔고, 봉쇄지역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을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오는 놈들을 막기 위해 결국 폭격이라는 강수를 꺼내 든 것으로 예상된다.

도대체 얼마나 큰 규모기에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식은땀이 등을 흘렀고, 마른침이 연신 목구멍을 타고 넘었다.

‘- - - - - -.’

정적, 고요. 그리고 그사이에 우리를 긴장시키는 이질적이고 파괴적인 외부요소가 분위기를 감싼다. 누군가 조용히 숨을 내뱉는다. 아직도 창문 너머에는 폭격으로 인한 불꽃이 아른거렸고, 어둠을 타고 온 굉음은 공기를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놈들의 밖을 향한 진군! 물론 지금 일이 터지고 나서 생각해 본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지만, 정신없이 장벽을 방어할 때만 하더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하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절망적인 그 소식은 이곳에 갇혀 있는 우리에게 또 다른 기회로 다가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입니까!’

지금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는 재빨리 정적을 깨부수고 사람들에게 큰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은테 안경은 어딘가를 향해 빠르게 무전을 날렸고, 곧 관측을 해 주는 사람들로부터 정확한 위치를 받아 지도 위에 표시했다.

나는 주먹을 꾹 쥐며 붉은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곧 이 폭격이 봉쇄지역 외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순간 회의실 분위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저쪽에서 뚜벅뚜벅 걸어온 노인은 재빨리 내 옆으로 다가와 사람들에게 말을 씹어내듯 내뱉으며 강조했다.

‘저 새끼들이 폭격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너희들도 잘 알 거야. 망설이고 고민할 시간이 없어. 이제부터는 진짜 타이밍 싸움이야.’

사태를 은폐하고 완벽하게 상황을 진압했다는 거짓말을 한 정부다. 하지만 그 정부가 외부에서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폭격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는 것은 외곽지역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말해 주는 증거였다.

노인의 말대로 이것은 우리 목 아래까지 다가온 위기이기도 하면서, 몰려오는 파도에 탑승해 또 다른 국면을 맞을 유일한 기회이기도 했다. 꾹 잡은 주먹에 힘이 들어가고 천천히 뛰던 심장이 끝없이 투기의 피를 공급했다.

그래, 혼란스러운 장기판을 그대로 관통한다. 우리는 정부와 놈들이라는 적을 동시에 두고 정면 돌파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직면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나는 긴장감을 꾹 잡고 있는 손을 그대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오랜만에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지시를 시작했다.

‘탈출 루트는 완벽하게 숙지했습니까?’

‘네, 단체장님. 놈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고, 경계가 약하다고 판단되는 길을 4개로 좁혔습니다. 다만 대규모로 이동하면 들킬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다수입니다.’

내 물음에 저 구석에서 입술을 곱씹던 박대박이 천천히 걸어 나와 힘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박대박은 3일 밤낮으로 인질들을 괴롭히고 정보를 쥐어짰다고 한다.

그 단순하면서도 잔혹한 일을 해 줄 사람은 강단 있는 그밖에 없었기에, 나는 믿고 일을 맡겼고, 그 믿음은 지도 위에 정신없이 표시되는 네 가지 길로 보답을 받았다.

붉은 선, 우리의 삶을 이어 주는 연장선. 나는 내 결단에 흔들림이 없는 희망의 선을 덧칠했고 마음에 확고함을 담았다. 그 순간 지도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며 절망과 피곤으로 멈춰 있던 머리가 가속한다.

‘봉쇄지역에 도착하면 일반 주민들하고 애들을 섞어서 두 무리로 나누자. 그리고 가장 안전한 길로 보내는 거야. 그러면 노출되는 사람의 숫자도 최대한 줄어들겠지.’

나는 내 옆에서 말하는 노인의 말을 듣고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 대부분은 소중한 이를 지킨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에 모인 것이다. 스스로가 아닌 남을 위한 투쟁. 그것은 가장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함에도 망설이지 않는 용기를 주었다. 나는 정신없이 지도 위에 정보를 표기하며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하는 회의 내용에 종착점을 찍었다.

‘준비 기간은 하루로 잡겠습니다. 최대한 짧은 시간 내에 도착한다는 것을 목표로 잡고, 식량과 화기만 적당하게 챙겨주세요. 서류에 적힌 대로 모든 인원이 다 있는지, 그리고 변동사항은 없는지 확인해 주시고……. 에덴에 있는 전원을 데리고 나갑니다.’

여기까지 잘 버텨 왔다. 죽으라고 윽박지르며 우리의 목을 조르는 세상과 맞서 정말 잘 걸어온 것이다. 눈을 뜨고 있음에도, 그간 겪었던 기억들이 눈 앞을 가린다. 초라한 고시원 건물에서 시작해서, 모든 생존자를 이끌고 있는 이 위치까지.

뿌듯함과 걱정은 없었지만, 어깨를 묵직하게 누르는 부담감만큼은 나에게 첨가물을 넣듯 서서히 퍼져나간다. 하지만 나는 그러면 그럴수록 어깨를 당당하게 펴고 천천히 뛰는 심장을 다잡는다.

‘꼭 살아서 나갑시다.’

놈들의 목적은 우리를 먹는 것에 있었다. 정부의 목적은 우리를 숨기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태까지 살아남은 것에는 무슨 목적이 있었을까? 그 물음은 지금 심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원초적인 근원에 있었다.

살고, 살리고, 살자. 오직 생존만을 위해 달려온 유대감은 우리를 한곳으로 묶었고, 저 위험을 직면할 용기를 주었다. 삶을 정확히 관통하는 그 한마디에 일행들을 내 근처로 모여들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노인과 우리가 예상한 대로 아침 해가 밝아오자 놈들의 공격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로 넘어갈 때쯤에는 장벽 근처에는 놈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밤새 계속되던 폭격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며 그 범위를 서서히 넓혀갔다. 놈들 모두가 저 큰소리를 쫓아 몰려간 것이다. 지금은 일주일하고도 3일이 더 흐른 시각, 드디어 에덴은 놈들의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 - - - - -.’

단체장실 창문 밖으로 사람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분주함이 들려온다. 하루아침에 내려온 탈출명령. 주민들은 당연히 당황했지만, 간부들의 노력으로 몸만큼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고성을 지르며 사람들을 지휘하는 직원과 창백한 얼굴로 그 지시를 따르는 사람들.

어떤 이는 겁에 질렸고, 또 어떤 이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그간 우리를 엮어 왔던 동질감은 비틀거리는 그들을 모두 이끌고 있었다.

‘단체장님, 데려왔습니다.’

상념에 빠진 그 순간 단체장실의 문이 열리며 피곤해 보이는 은테 안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방송국 직원 두 명이 잔뜩 굳은 얼굴로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마주 보며 고개를 숙였고, 곧 은테 안경에게 나가보라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의자에 착석했다. 그 둘은 내 앞으로 서서히 다가오며 내가 조용히 마련해 준 의자 위에 천천히 앉는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나는 조금 굳은 것 같은 그들의 표정을 풀어 주기 위해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말을 건넸다. 그러자 그 둘은 긴장이 풀렸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나와 눈을 마주치며 따라 웃는다. 중단된 프로젝트, 곧 밖으로 나갈 것 같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휘말려 우리와 같이 고립되고 말았다.

하지만 침울해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이 두 명은 캠코더와 사진기를 들고 에덴의 사람들과 현장의 실상을 전부 취재하러 다니고 있었다.

‘그간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나에게 이 두 명은 처음으로 우리와 협력해 준 바깥사람들이었다. 모두가 우리를 은폐하고 죽이려고 했지만, 이 둘만큼은 외면하지 않고 에덴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훗날 밝혀질 진실을 알리기 위해 언론인이라는 본분을 버리지 않고 있는 이 두 명. 나는 천천히 눈을 감고 서랍에 넣어 둔 서류가방 하나를 꺼내 그 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 두 명은 이게 무엇인지 아는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다.

‘제가 더 이상 가지고 있을 물건이 아니더군요.’

‘단, 단체장님…….’

낡은 서류가방에는 그날 방송국에서 긁어 모아온 기밀서류들이 전부 담겨 있었다. 살려 주는 것을 대가로 이 두 명에게서 받은 물건. 하지만 에덴을 떠나기 전날 나는 이 서류가방을 그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그리고 눈앞에 서류가방을 본 김창식은 목소리를 떨며 말을 더듬었고, 그 옆에 방송국 여자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결국 고개를 푹 숙여 버린다. 나는 그런 그들을 향해 당부했다.

‘꼭 가지고 나가주십시오. 아마 이게 필요할 겁니다.’

봉쇄지역 밖으로 나가는 순간 풍전등화에 놓일 힘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서류가방 안에 담겨 있는 이 종이와 자료들은 위기의 순간에 정부를 찌를 칼이자 우리가 유일하게 휘두를 수 있는 협상 카드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무기를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그 둘에게 서류가방을 맡긴다. 김창식은 떨리는 손으로 서류가방의 손잡이를 꾹 잡았고, 그동안 사람들과 정이 많이 든 것 같은 여자는 결국 눈물 한 방울을 뚝 흘렸다.

*       *       *

후우-.

나는 길게 숨을 내뱉으며 쌀쌀한 초봄 날씨를 온몸으로 만끽했다. 내 입에서는 담배 연기처럼 입김이 쏟아져 나왔고, 온몸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는다. 하지만 내 어깨 위로 올라온 노인의 손은 여태 쌓아온 모든 절망과 슬픔을 털어내며 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었다.

뿌드득.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손에 힘을 주고 앞에 내려놓은 총을 들어 올린다. 그 순간 내 뒤에서 바람이 불어와 이제 출발의 때라는 것을 알려 준다.

‘출발합니다.’

내 짧은 그 한마디에 무전기는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고, 사방에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경비와 일행들이 크게 따라 외치며 복창한다. 내 눈앞에는 언제나 우리를 단단히 지켜주던 에덴의 정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정문을 여는 경비들은 오늘만큼은 탈출의 편도를 끊고, 서둘러 장벽 아래로 내려와 우리 무리와 합류한다.

드드드득.

정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나는 잠시 고개를 돌려 내 뒤에 서 있는 수많은 사람을 쳐다봤다.

에덴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 전원이 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다들 우리가 지시한 대로 최대한 따뜻한 옷과 움직임에 무리가 없는 최소한의 짐을 들고 있었다. 그 뒤로는 박대박이 지휘하는 리어카 팀이 우리가 이동 내내 사용할 물품을 끌고 있었고, 그 행렬 근처에는 완전히 중무장한 경비와 일행들이 바쁘게 뛰어다니며 사람들을 캐어하고 있었다. 비록 하루뿐인 촉박한 시간이었지만, 유능한 에덴의 간부들은 이 무모한 작전에 디딤돌을 완벽하게 놓는다.

심장이 뛴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는 우리가 수없이 죽인 놈들이 즐비했고, 그 한가운데 우리가 향할 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좋다, 아무것도 없다. 타이밍 싸움이라는 노인의 말이 정답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우리를 고립시키는 육편의 파도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이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시간이 유일한 기회라는 것은 회색 도시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알려 주는 질문과 답이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 인생에서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거대한 행렬의 선두. 이 자리가 어떤 출발보다 무섭고 두려웠다. 하지만 저 뒤에 있을 내 아이와 일행들을 생각하니 온몸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에덴의 정문은 완전히 열렸다. 걸음을 떼자 주마등처럼 그간의 기억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걸으면서 크게 손을 들어 올렸고, 사람들이 내뱉는 숨을 온몸으로 만끽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에 발소리가 들려온다. 좁은 새장에서 빠져나와 날아오르려는 새처럼, 드디어 세상 밖으로 첫발을 뗀 낙원. 나는 천천히 정면을 향해 총구를 들어 올렸다.

내 앞에는 이제껏 겪었던 것처럼 수많은 거짓과 두려움이 즐비할 것이다. 그것은 아무리 부정해 봐도 떨어지지 않는 진창과 같았고, 절대 변하지 않는 미래였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가 걸어온 길은 진실과 용기만이 가득했던 후회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저 앞에 가시밭길을 내가 걸어온 길로 만들 때다.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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