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일기를 쓰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바빴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이 일기는 장벽이 공격받은 이후, 일주일 뒤에 작성된 것이다.]
* * *
‘단체장님. 현장에 그만 나가셔야 됩니다.’
내가 피를 뽑기 위해 걷은 소매를 내리고 있는데, 저 한구석 병실 침대에서 무표정으로 앉아있던 김 철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당부했다. 물론 근처에서 검사결과를 보고 침울함을 유지하고 있는 연구소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부에는 슬픔과 부탁이라는 감정이 오묘하게 섞여 있었지만, 내가 왜 이러는지를 알기에 그의 슬픔은 더욱더 크게 느껴졌다. 나는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소매를 단정하게 내렸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동안 경과가 말해 주고 있어요. 단체장님이 놈들이랑 싸우고 접촉할수록 변이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단체장님도 그게 우연 아니라는 거, 스스로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대답이 없자, 김 철은 다시 한 번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재촉은 자리를 일어나며 코트를 입는 나의 행동으로 인해 멈추고 말았다. 오늘은 하루에 한 번씩 하는 피검사. 에덴이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내 상태를 봐 주는 둘의 고생이 참 많았다.
그리고 불과 얼마 전 변이속도가 느리다는 희소식을 이야기해 주던 그들의 얼굴은 내가 하루가 멀다고 싸우기 시작할 때부터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놈들이 거대한 파도를 이끌고 몰려온 이후로 우리가 알고 있던 도시의 법칙은 한순간 역변해 버리고 말았다. 포기를 모르는 지독한 놈들은 하루가 멀다고 장벽을 공격했으며, 에덴의 사람들은 모든 생업을 멈추고 살기 위해 장벽 방어에 매달려야 했다.
거기 있는 거 알아, 우리가 기필코 먹을 거야.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이렇게 울부짖는 것 같은 놈들 때문에 장벽 밖으로 나가는 것은커녕 밤에 잠조차 편하게 자지 못했다. 그렇게 고된 하루가 지나가기를 벌써 일주일.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고, 더 떨어질 곳이 없는 나락을 향해 끝없이, 또 끝없이 떨어져 간다. 사람들의 눈에는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내가 장벽으로 갈 때마다 사람들은 힘을 내며 투지를 불태웠고, 부상자들은 자신의 상처조차 돌보지 않으며 장벽에서 조잡한 창을 내질렀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도망치지 않는다. 내가 장벽 안쪽에 소중한 이들을 품고 있듯이, 그들도 나와 같은 동기와 사명으로 끝없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나는 그 전쟁 속에 온몸을 던졌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검은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손에 놈들은 끊임없이 죽어 나갔지만, 그와 반대로 나의 변이 속도는 떨어지는 희망처럼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괴물을 상대하려는 자, 스스로 괴물이 되지 않게 조심하라. 어쩌면 나는 그 격언마저 망각한 채 놈들을 상대하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살릴수록 내가 죽어간다, 그 생각에 속이 아리고 머리가 먹먹해졌다.
‘내일부터 저를 검사하는 스케줄은 빼 주세요.’
‘단체장님!’
‘동윤 씨!!’
내 단호한 대답에 연구소 남자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 철은 드물게 내 이름을 직접 부르며 항의했다. 항상 정당한 지시에 수긍하고 잘 따라와 주는 그들이었지만, 이 지시만큼은 따르지 못하겠는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힌다. 하지만 나는 재차 고개를 흔들며 항명을 함구했다. 왜냐하면, 나의 몸 상태는 꼭 검사를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내가 시간을 인지하는 공간은 점점 넓어졌다. 그리고 심지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놈들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쏘면, 죽고. 쏘면, 없어진다. 총알이 빗나가는 일은 없었으며 내 완력은 대검 손잡이로 놈들의 대가리를 부실만큼 괴이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끔은 정신을 잃은 채로 놈들을 죽이기도 하는 날이면……. 손에서 검은 피가 마르지 않았다. 그래, 꼭 변종 놈들처럼 말이다. 나는 표정이 굳은 그 둘을 향해 조용히 대답했다.
‘사람이 많이 모자랍니다. 저한테 1시간 이상 투자하는 스케줄조차 아까워요. 연구소에선 이 현상에 대해서 계속 연구해 주시고, 병원 측에선 다친 부상자들 잘 부탁드립니다.’
장벽은 매일 같은 투쟁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들과 싸우지 않는 장벽 안쪽이 괜찮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우리가 놈들과의 전쟁을 벌일 동안, 장벽 안쪽에 비전투 인원들은 우리를 뒤받쳐 주고 지원해 주기 위해 지금도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었다.
놈들에게 당한 부상자들은 신속하게 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장벽에서 소모되는 자원들을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합심해서 옮기고 분배된다. 아마 우리가 전념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그들이 없었더라면, 장벽을 지키는 인원들은 진작 지쳐 떨어져 나가 리타이어 하거나 놈들에게 당해 목숨을 잃는 자들이 속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모든 인력을 총동원 하고 있는 것은 병원과 연구소도 마찬가지였다. 벌써 3일째 철야를 지속하는 연구소와 1시간에 수십 명씩 환자가 몰려오는 병원들은 장벽에서 싸우는 우리들만큼이나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그들에게 휴식 시간은 주지 못할망정, 1시간이나 나에게 할애하는 짓은 시킬 수가 없었다.
[동윤아, 잠시 이쪽으로 와 줘야겠다.]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이 둘을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앞섬에 꽂아둔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리며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담하지만 내 지시와 도움을 기다린다는 노인의 요청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반발하고 있는 이 두 명도 천천히 한숨을 내뱉으며 내가 나갈 수 있게 길을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애써 그들과 시선을 피하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고, 곧 나간다는 대답과 함께 병실 문을 열었다.
‘동윤 씨.’
하지만 그 순간, 병실 문을 닫으려는 내 손을 붙잡은 것은 힘이 하나도 없는 김 철의 목소리였다. 짙은 슬픔과 피곤이 담겨있는 그 목소리를 나는 차마 외면하지 못하며 문을 닫으려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 곧 다크서클이 짙게 내린 김 철을 쳐다보며 피곤함으로 마른 입술을 핥는다. 나를 힘없이 부른 김 철은 이렇게 말했다.
‘물론 병원에 다쳐서 오신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서 병원을 찾고 있어요. 정신착란, 트라우마, 환각, 환청, PTSD……. 다 나열하기도 어려울 만큼 정신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은 이유는 단체장이 건재하셔서 그런 거예요.’
짙은 짐과 부담감이 내 어깨를 짓누른다. 지금 뛰고 있는 심장 소리 하나에도 반응하며 공명하는 여러 유대감이 내 근원 위에 농축되어 올라간다. 장벽을 올라갈 때마다 나를 쳐다보는 사람들의 눈빛, 숙소로 돌아갈 때마다 들려오는 나에 대한 소리. 나는 그 누구보다 김 철이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그들에게 등만을 보여 줘야 하는 이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아직까지 장벽 위로 올라가게 하는 원동력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저도 개인적으로……. 단체장님이 아프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에덴으로 들어와 지금까지 내 몸과 정신을 책임져 주던 주치의 김 철. 그는 마지막까지 나에게 의사로서 해야 할 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쓰고 있던 돋보기안경을 조용히 벗었다. 젊게만 보이던 그의 머리는 어느새 스트레스로 인한 새치가 한두 가닥 보이기 시작했고, 안경을 벗은 눈가에는 짙은 그림자가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그 눈빛만큼은 처음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 * *
‘동윤아.’
내가 부상자들이 신음하는 병원을 나오자마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다가와 내 총과 대검을 챙겨 주었다. 난 노인이 내미는 장비를 받아 챙기며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역한 탄내를 훅 들이킨다. 장벽에서 끊임없이 올라오는 검은 연기와 이제는 평온이 사라진 에덴의 길가. 나는 피와 탄피가 굴러다니는 바닥을 발로 밟으며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린 사람들이 내 주변으로 몰려든다.
‘화기는 얼마나 남았습니까?’
나는 가장 먼저 때가 꼬질꼬질하게 묻어있는 서류 더미를 뒤적이는 은테 안경에게 물었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그 물음만을 기다렸다는 듯 나에게 복잡한 계산들이 쓰여 있는 이면지 내밀었고, 목소리 안에 남아 있는 침울함을 애써 숨기며 대답했다.
‘과거 에덴에서 소비한 화기보다 최근 일주일 동안 소비한 화기가 더 많습니다. 계속 지금처럼 사용한다면 3일 정도밖에 버틸 수가 없어요.’
에덴을 만든 예전 단체장이 훗날을 위해 일개미처럼 움직여 모아둔 화기들이었다. 하지만 당최 수량이 그다지 많지 않은 화기들은 최근 사용이 급격하게 늘어난 시점부터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장벽을 향해 배급되는 탄창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보급을 책임지고 있는 은테 안경의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어두워졌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하며 서류를 다시 은테 안경에게 넘겼다. 그리고 예전에 지시해 둔 것을 물었다.
‘크로스 보우는 생산 중입니까?’
‘네, 털보 씨가 생산 팀과 같이 제작 중입니다. 다만, 재료가 많이 부족해서…….’
자동 설비와 수작업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아무리 많이 동원된다고 해도 하루 장벽에서 소비되는 볼트 양을 따라잡을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계속해서 몰려오는 부정적인 생각에 미간을 찡그렸고, 곧 최선을 다하자는 대답과 함께 다음 안건으로 화두를 돌렸다. 길가 한복판에서 이어지는 바쁜 회의는 여러 분야에서 내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를 10분, 드디어 나를 호출한 노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어디 장벽이에요?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빨리 갑시다.’
하루가 멀다고 놈들이 장벽을 공격한다. 어떨 때는 소규모, 그리고 또 어떨 때는 수백 마리가 넘는 놈들이 불규칙적이고 가늠할 수 없는 공격을 우리에게 가해 온다. 그러니 에덴은 어쩔 수 없이 장벽 근처에 방어 인원들을 항시 대기시켜 위태로운 하루를 넘기고 있었다.
전투경험이 적은 사람들과 경비들을 위해 우리 구조팀은 뿔뿔이 흩어져 각 장벽을 담당하는 팀장들이 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나는 노인과 항시 무장한 상태로 내무를 담당하며 도움이 필요하다고 예상되는 장벽을 향해 지원을 나가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일인가 싶어 서둘러 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노인은 평소와는 다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 어깨를 꾹 잡았다. 노인의 얼굴은 이상하게 침울해 보였다.
‘동윤아, 나랑 같이 어디 좀 가야겠다.’
노인은 장벽에서 온 지원요청을 위해 나를 호출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시시각각 전해 오는 전투보고가 지금만큼은 조용하다. 아마 드물게 있는 놈들의 공백기가 찾아온 모양인데, 그렇다면 한창 바쁠 노인이 나를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묻기 전에 반쯤 슬픔으로 가라앉아 있는 노인의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눈동자 속에서 지금만큼은 조용히 따라가야 한다는 의도를 읽어낸다. 노인은 내 어깨를 툭툭 치며 몸을 휙 돌렸고, 나는 아무 말 없이 노인의 뒤를 밟으며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에덴의 길가를 걸어갔다.
* * *
내가 도착한 곳은 에덴 초창기에 우리가 머문 기억이 있는 주거단지였다. 물론 모두가 장벽 방어를 위해 힘쓰는 지금 당연히 주거단지는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빈 공간이 되었고, 가끔 남아 있는 급한 취사 냄새만이 내 코끝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도착한 노인은 능숙하게 좁은 골목을 지나 조금은 허름한 빌라로 나를 인도했다. 차갑게 몰려오는 이상한 기분, 나는 3층을 향해 오르는 빌라계단에서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리고 3층에 도착한 나는 문이 열려있는 한 현관 앞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직원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이곳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깔끔한 옷과 흰 장갑을 끼고 있었고 무언가가 들어 있는 작은 종이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들고 있는 직원의 얼굴은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는 노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고했어, 들고 가 봐.’
조용히 눈을 감은 노인은 상자를 들고 있는 직원에게 지시했고, 언젠가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직원은 나에게 꾸벅 숙여 보이며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뚜벅, 뚜벅.
오직 정적만이 감도는 이 공간에 직원이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려왔다. 나는 본능처럼 고개를 돌려 익숙한 냄새가 풍겨오는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분명 문이 열린 곳이 없는데 바람이 불어온다. 그 바람은 밖에 찾아온 봄바람과는 다르게 아직도 겨울처럼 차갑고 진득한 절망을 내포하고 있었다. 10평 12평? 허름한 빌라의 방안은 비록 좁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는 증거들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예쁜 옷, 아이들의 장난감. 아직도 풍겨오는 아이의 분유 냄새. 그리고 나는 안방 중앙에 걸려있는 작은 가족사진을 발견했고, 동시에 그 아래서 무언가 쌓여 있는 비닐포대 2개를 발견했다.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었고, 사람의 형체를 가리고 있는 비닐포대 2개를 살짝만 걷어 그 안에 있는 시체를 확인했다. 그곳에는 갓 엄마가 된 듯 앳된 여자와 이제 돌을 갓 지났을 것 같은 어린 아기가 잠이 든 것처럼 누워 있었다. 포대를 잡은 내 손은 조용히 떨려왔다. 그리고 이쪽으로 어느새 다가온 노인이 그 포대를 다시 덮어 주며 속삭였다.
‘오늘 아침에 신고가 들어와서 발견했어. 어젯밤에 자살한 거야.’
‘……왜요?’
왜요? 나는 분명 노인에게 물었지만, 스스로가 충분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이제 갓 돌이 지난 아이를 가진 엄마가 자살했어야 하는 이유. 스스로가 여태까지 살아남으면서 지금 이 순간 아이의 목숨을 끊었어야 하는 이유. 나는 가슴이 시키는 감정을 충분히 받아들이며 그들을 향한 원망과 동정이 아닌 진창이 된 참혹함을 느꼈다. 노인이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먹먹한 숨을 훅 들이켠다.
‘남편이 정문 장벽에서 일하는 경비야. 그리고 3일 전에 놈들하고 싸우다가 발을 헛디뎌서 바깥 장벽으로 떨어졌어.’
노인은 그 긴 문장을 완성하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바깥 장벽으로 떨어진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노인과 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체는 찾았을까? 아니, 모든 것을 찢어 삼키는 놈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진 남자의 모습은 그곳이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노인에게 되지도 않는 억지를 부리며 스스로에게 화를 냈다. 목소리가 끊임없이 흔들렸고, 수천 마리 놈들과 마주해도 떨리지 않던 심장이 죄책감을 머금었다.
‘우리가, 우리가 충분히 도와줄 수 있잖아요. 먹을 것도 주고……. 애도 대신 맡아서 길러주고……. 잘 곳도, 씻을 곳도……. 다 해 줄 수 있는데, 왜…….’
‘동윤아’
횡설수설 억지를 내뱉은 나는 끝내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노인은 그 화를 조용히 들어 주었고, 끝내 포대를 잡은 내 손을 꽉 잡아 주며 냉혹한 세상이 해야 할 사과를 대신 해 주었다.
‘정말 미안하다.’
자살. 놈들에게 참혹히 찢겨 죽는 죽음보다 더 진하고 무섭게 나에게 다가왔다. 낭떠러지에 밀려 떨어진 것이 아닌, 스스로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몸을 던진다는 것. 에덴으로 와서 처음 겪어본 죽음 앞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냥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공적으로 놈들을 막아 내고, 일행들과 에덴의 주민들에게 충분히 배부를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하면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를 좀먹고 있는 것은 굶주림과 피곤함이 아닌 당장 내일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함과 보이지 않는 희망이었다. 스스로 몸을 던지는 죽음이 과연 이것으로 끝일까?
희망이 필요하다. 부담감이 내 몸을 짓누른다. 지옥에서 휘날리는 불꽃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심장을 까맣게 불태우고 밀어 넣었다. 억겁의 고통이 신이 아니고 영웅도 아닌 나에게 시련이 섞인 끝없는 질문을 던졌다.
차갑게 식은 작은 아이의 손과 송장으로 변한 애 엄마의 모습이 내 일행들과 아이들의 얼굴과 끝없이 오버랩 된다.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지켜야 한다는 회상이 나에게 막힌 길 위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비닐 포대를 쓸어내렸고, 그와 반대로 다른 손은 차가운 총을 꾹 잡고 있었다.
나는 노인을 향해 말했다.
‘……해가 지면 최소인원만 제외하고 간부, 구조팀 전부 회의실로 불러 주세요.’
일주일 동안 이뤄진 긴 싸움은 인간의 모든 것을 마비시켰다. 우리가 한참 진행하던 프로젝트는 막혀 버린 길로 인해 중단되었고, 끝없이 몰려오는 놈들은 어떤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 우리를 끊임없이 몰아쳤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티기만 하던 나는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시체를 마주함으로써 이 문제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기분이다. 나는 한동안 잊고 있었던 고난의 길과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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