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78화 (178/313)

[178]

요새 채연이와 같이 있어 주는 시간이 적었다. 물론 일찍 철이든 아이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왜 자신과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지 잘 알고 있었고, 어느 샌가부터 투정도 고집도 부리지 않았다.

그저 내가 잠들 때 다가와 품에 안기거나, 일을 나갈 때면 조용히 아래쪽으로 다가와 다리를 힘껏 끌어안고 인사를 해 올뿐이었다. 한참 어리광부리고 떼를 쓸 나이, 하지만 채연이와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너무 빨리 이해해 버렸다.

‘채연이는 화가가 되려나 봐요.’

나는 잠든 아이를 이불 위에 올려놓고 조용히 방을 나왔다. 그러자 방문 앞에는 앞치마를 입은 강수련이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예전 모습을 되찾아가는 강수련. 다친 상처는 대부분 회복되었고, 이제는 그날의 고통스럽던 기억도 모두 희석되었는지 웃는 얼굴이 한없이 아름답기만 했다. 나는 힘든 고통을 모두 극복해 준 그녀가 너무나 고마웠다.

‘선생님들이 칭찬을 많이 해요.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고…….’

‘정말요? 그 정도예요?’

그리고 채연이와 관련된 말이 나오자 우리의 얼굴은 한없이 풀어졌다. 나는 늦은 밤, 그녀와 함께 복도를 걸으며, 오랜만에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비록 비정한 현실과 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가 인간이 가지는 감정을 꾹꾹 눌러놓고는 있지만, 우리는 이제 알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말이다. 나는 조용히 그녀와 손을 맞잡았고, 그녀도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복도를 지나 숙소 밖으로 걸음을 옮겼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보며 정적이라는 차분함을 가슴속에 담았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던 그녀는 몹시 거칠게 변한 내 손을 어루만지며 작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주었다.

‘동윤 씨…….’

동윤 씨, 그녀의 그 짧은 한마디에는 수십 가지가 넘는 감정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힘들었던 과거를 생각하는 듯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그녀가 하지 못한 뒷말을 듣기 위해 물었다.

‘네?’

치익-.

[단체장님, 잠시 여기로 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급해요.]

하지만 뜸을 들이는 그녀의 말문을 막은 것은, 내 앞주머니에 꽂혀 있는 무전기 소리였다. 무전기에서는 장벽 경계를 맡고 있는 박대박이 불안함이 담겨있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고, 그의 흔치 않은 연락에 나는 무언가 사단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강수련을 쳐다봤다. 그러자 그녀는 어서 가 보라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나와 입을 마주쳤다.

‘급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고 다녀와요.’

‘정말 미안해요. 다녀와서 이야기해요.’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말하려고 했던 그 여운은 지금 뛰어가는 어둠 속으로 아지랑이처럼 사라졌고, 나의 상념과 입술 위에 남아 있는 감촉 또한 천천히 메말라갔다. 나는 아무도 없는 길가를 가로질러 박대박이 호출했던 장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뜀박질을 시작했다.

* * *

딱!! 따닥-!!

내가 장벽에 도착해서 가장 놀란 점은 에덴에 자주 들리지 않았던 총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소음기를 부착했다고 하지만 총을 밤에 사용하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적이 온 걸까? 하지만 만약 급박한 상황이라면 박대박은 내가 아닌 팀을 먼저 호출했을 것이다.

총소리는 2~3번씩 주기적으로 울려왔고, 나는 빛들이 모여 있는 장벽 아래로 황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나보다 먼저 도착한 노인이 완전무장을 갖춘 채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내가 소리를 치자 노인이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동윤아!’

따악-!

그리고 노인의 대답과 함께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총소리. 분명 경비 탑 위에서 누군가 장벽 밖을 향해 사격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라 주변을 훑어봤고, 곧 이곳을 향해 모여드는 경비들과 우리 일행들을 볼 수 있었다. 다들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도착해 있던 노인은 이쪽을 향해 다가오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아까부터 놈들이 장벽 근처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었어. 일단 숫자가 적어서 빨리 잘라내고 있기는 한데, 움직임이 영 심상치 않아.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어떤 위협이 있어도 얼음장처럼 대처하던 노인도 갑작스러운 현상 앞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아까 전부터 울리기 시작한 총소리는 다행히 점점 줄어들고 있었지만, 아닌 밤중에 공격 앞에 우리는 작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를 찌르고 들어오는 한 가지 의문. 난 필터 없이 그 의문을 내뱉으며 노인에게 물었다.

‘약품은요? 연구소에서 약품 안 가져다줬어요?’

연구소에서 놈들을 쫓아내는 약품을 개발한 뒤로 사실상 괴물들의 위협은 변종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오가고, 에덴의 장벽이 놈들의 공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 그것은 바로 주기적으로 배분하고 살포하는 변종 약품에 있었다. 그런 의문이 가득한 내 질문에는 이 장벽을 지키고 있던 경비장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아, 아닙니다! 분명, 오늘 오후 7시에 중앙본부에서 배급받은 약품을 어제랑 똑같이 살포를 했습니다! 수량도, 시간도 전부 예전과 똑같았습니다!’

지나치게 굳어 있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약품을 똑같이 살포했음에도, 예전과는 다른 현상. 이유와 원인은 모르겠지만 무언가 근원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일단 일행들과 경비들에게 우리가 사살한 놈들의 시체를 확보하게 했고, 그 표본들을 연구소에 보내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놈들은 부산스러운 움직임만을 취했지, 본격적인 공격을 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란스러웠던 것 치고는 빠르게 정리되는 상황. 조용하기만 했던 이 근방은 손전등을 들고 몰려온 경비들로 인해 북적거렸고, 몇 발 울리지 않은 총소리는 밤중의 악몽처럼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야 하는 일행들은 끝까지 경비들과 장벽을 돌아다니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이 친구 덕분에 빨리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간은 오후 11시 50분. 나는 복잡한 심경을 안고 상황이 정리된 장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경비 탑에서 놈들을 사살하던 박대박이 한 앳된 청년을 데리고 나에게 다가왔다.

박대박이 나에게 보내는 은근한 눈빛과 특정 대상을 칭찬해달라는 말. 보아하니 박대박 옆에서 걸어오는 청년에게 어떤 말이라도 해달라는 눈치였다. 나에게 고정되어 있는 청년의 눈빛을 의식한 나는 그쪽을 향해 몸을 돌린다.

이곳은 정문과는 정반대에 위치한지라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하는 4번 장벽이다. 어쩌면 안일하고 소홀해질 수도 있는 구역. 하지만 이곳을 담당하는 경비들을 제때 놈들을 발견하고 우리에게 신속한 보고를 해 왔었다. 예전 에덴의 경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 나는 의외로 잘해 주는 경비대를 보며 안심하고 맡겨도 되겠다는 신뢰가 쌓이는 걸 느꼈다.

‘훌륭합니다, 고마워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것 같은 앳됨이 청년의 얼굴에서 묻어나왔다. 하지만 무엇이 그를 이렇게 든든하게 만들어 줬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얼굴에는 비장함과 책임감이 잔뜩 묻어나오고 있었다. 참 주책없는 감정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렇게 열심히 해 주는 청년이 참 기특했다. 그리고 내 짧은 한마디에 청년은 눈동자를 천천히 떨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야이 새끼들아! 아주 놈들한테 어서 오시라고 홍보를 하지 그러냐!’

그리고 장벽 아래에서 우리를 향해 잔소리를 하는 노인의 말을 끝으로 아닌 밤중의 소란은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내일 출발해야 할 임무를 위해 빨리 숙소로 돌아가 잠을 청했지만, 이상하게 눈을 감고 있음에도 쉽사리 잠이 들지 못했다.

* * *

‘형님, 근데 우리가 가겠다! 하고 가면 걔들이 준비하고 있지 않을까요?’

이틀 연장으로 임무에 투입돼서 그런지 용팔이가 노인 몰래 투덜거렸다. 하지만 도망과 위험의 연속이었던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 이 투덜거림도 작은 어리광에 불과했다. 내가 행군이 지겨워 보이는 용팔이의 등등 툭툭 쳐주고 다시 걷는데, 그 뒤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다혜가 용팔이를 향해 독설을 쏘아붙인다.

‘멍청아! 대장님이랑 할아버지가 같이 가는데 무슨 걱정이야.’

그러자 용팔이는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그걸 말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는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리고 자신을 얄밉게 쏘아붙인 박다혜를 잡기 위해 뛰어갔지만, 박다혜는 이미 김혜정의 등 뒤로 도망친 지 오래였다. 날다람쥐 같은 도주 능력을 보여 주는 아이를 보며 용팔이는 얄미워 죽겠다는 얼굴로 빼액 소리를 친다.

‘너, 오빠한테 멍청이가 뭐냐! 존댓말 하라고!’

매번 이렇게 싸우는 걸 보니 이젠 둘이 친남매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나는 박다혜와 용팔이의 장난으로 풀어진 긴장감을 보며 휴식을 취할 적당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곧 일행들을 향해 힘 빠진 지시를 내리며 어깨 위에 뭉친 긴장을 잠깐이나 풀어내었다. 2시간 동안 쉼 없이 강행군을 유지하던 일행들은 거친 숨과 함께 짐을 내려놓으며 적당한 자리를 찾아 앉는다.

‘용팔이 말도 틀린 건 아니야.’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옆에서 들려오는 노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팀의 전투 주축인 노인과 강 형사, 그리고 박대박이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적당히 불어오는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 덕에 잠시 잊고 있었지만,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임무가 결코 가벼운 내용이 아닌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들을 향해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도착하면 일단 상황부터 지켜봅시다.’

현재 우리가 가진 정보는 그다지 많지 않다. 그냥 놈들이 우리가 처리한 밀수업자와 같은 불법조직이고, 단체 규모가 더 크다는 정도? 우리는 놈들이 가지고 있는 노하우와 능력이 필요했지만, 동종업자 놈들이 부랑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는 것을 본 뒤로 대화와 거래의 여부는 이미 저 멀리 떠나가 버린 지 오래였다.

‘대화할 가치가 없는 놈들입니다. 동윤 씨의 행동이 백번 옳아요.’

그리고 유난히 불법 조직에 강한 적의를 드러내던 강 형사는 내가 대책 없이 내뱉은 선전포고를 적극 지지하고 있었다. 물론 밀수업자들의 진상을 본 다른 일행들도 크게 반대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임무 진행 방향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전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살아 있는 놈들에게 얻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작전은 섬멸의 개념보다는 무력화를 시킨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다시금 일행들에게 전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 더 이상 기회는 없으니까, 신속 정확하게 끝내자고.’

노인이 주름 가득한 얼굴을 굳히며 우리에게 말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 마지막이라는 묵직한 단어가 일행들 마음에 들어찬 순간, 풀어진 긴장감을 다시 한 번 옥죄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슨 일이 있어서 길을 뚫어 그 두 명을 내보내야 한다. 비록 먼 길을 돌아오기는 했지만 우리는 분명 앞을 향해 걷고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박대박의 마지막 외침은 이 오랜 임무의 끝을 장식할 구호가 되어주었다.

‘개 박살을 내주죠.’

일행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 * *

죽기 직전 밀수업자 입에서 나온 놈들의 위치는 다행히 거짓말이 아니었다. 놈들의 위치는 인적과 건물이 적은 산골. 그곳은 개나리 골이라고 불리는 청계산 근처의 작은 산 중턱이었다. 근처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있었고, 방송국 여자가 표시해 준 봉쇄지역과도 크게 멀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2시간을 더 행군한 끝에 이 멀리 떨어진 놈들의 본거지까지 찾아올 수 있었고, 나는 나무에 몸을 숨기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움직임이 보입니다.’

놈들은 사람이 떠난 작은 마을 전체를 본거지화 시켰다. 주변에는 나무로 만든 바리케이드와 경비를 서는 놈들이 즐비했는데, 촘촘한 경계에는 생각보다 큰 허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 어제 내가 당당히 내뱉은 선전포고를 꽤나 의식한 모양이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무전기에서 들려오는 일행들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노인의 무전.

[어, 이쪽에서도 확인했다. 뭐라고 씨불이기는 하는데, 중국말하고 한국말이 섞여서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박대박의 무전.

[이쪽도 확인했습니다. 이 새끼들 마을 규모가 생각보다 큰데요? 그리고 민간인 몇 명도 보이는 것 같은데, 전부 가족 규모입니다.]

우리 일행들을 셋으로 찢어져 마을 전체를 아울러 보고 있었다. 전체적인 놈들의 숫자로만 따진다면 40~50명. 통화를 하던 여자가 자신만만하게 욕설을 내뱉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겁을 먹기보다는 손목시계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고, 나와 같이 있는 용팔이 형제에게 주변을 경계하고 있으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무전기를 꺼내 들어 사방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일행들에게 말했다.

‘난민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있으니, 절대 먼저 사격하지 마세요. 우리 쪽에서 먼저 접근해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신호 보내겠습니다.’

알겠다는 대답을 끝으로 나는 무전기 볼륨을 천천히 줄였다. 그리고 내 근처에서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용팔이 형제와 함께 천천히 산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고, 곧 산길에서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사람 몇몇이 언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허리춤에 꽂혀있는 대검을 천천히 뽑으며 숨을 훅 내뱉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