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
저녁 메뉴는 건빵과 뜨거운 물, 그리고 의료진들이 챙겨준 영양제 한 알씩이었다. 당최 요리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뭔가를 조리할 생각은 못 했고, 용팔이가 저번에 아파트 단지에서 먹은 건빵 죽을 만들려고 했다가 노인에게 뒤통수를 맞아야 했다. 하지만 시장이 반찬이라고,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가 먹는 건빵과 뜨거운 물은 생각보다 맛있었다. 그런 고요한 식사 분위기가 지속되는 와중에 용팔이가 정적을 깨며 나에게 물었다.
‘형님, 그럼 앞으로 어쩌실 생각이세요?’
식사를 하던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래, 임무는 실패했고, 거래를 하려고 했던 대상은 강도로 변했다. 물론 깔끔하게 처리하기는 했지만, 앞으로 행보를 결정해야 된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닿은 그곳에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고통을 호소하는 포로가 있었다.
읍-! 읍-!
재갈을 물린 놈의 입에서는 한껏 응축된 고통의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보아하니 두식이가 다리를 제대로 아작 낸 모양인데, 뼈가 부서진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놈은 생각보다 오래 맨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단 식사가 끝나면, 노인하고 제가 놈을 심문할 생각입니다. 여러분들은 적당히 휴식하시면서 주변 경계 좀 해 주세요. 결정은 그 뒤에 내리겠습니다.’
섣불리 판단을 내릴 사항이 아니었다. 일을 망치기는 했어도 돌아갈 길을 발견할 단초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상태, 우리는 그 단서를 제공해 줄 포로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노인의 눈빛은 날카롭게 빛났고, 일행들의 밥을 먹는 표정 또한 살벌하기 그지없다. 심문이라는 단어를 빙자한 무서운 행동.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모두가 침묵했다. 이 어둠 속에 있었던 일은 오직 홀로 떠 있던 달만이 기억할 것이다.
* * *
‘개새끼들, 이 짓거리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안쪽에 생존자들이 남아 있다는 걸 다 알았던 모양이야.’
간이 책상 위에는 놈들의 소지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노인은 놈들의 정체를 알려 줄 단서를 찾았는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나에게 말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나는 고통으로 찌든 놈의 눈빛에서 시선을 떼며 노인이 살피고 있던 소지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내 일기장 크기의 갈색 다이어리. 놈들이 가지고 있던 그곳에는 여태 거래를 진행한 사람들의 명단이 쭉 적혀 있었다.
길게는 한 달 전부터 짧게는 일주일 전까지. 밀수업자와 접촉한 것은 우리뿐만이 아니었는지, 제법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이곳에 쓰여 있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 대부분은 봉쇄지역을 빠져나가려고 했다는 것과 그 옆에는 붉은색 펜으로 빗금이 그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빗금 옆에 쓰인 단어는 처리와 작업. 이 단어들이 무슨 뜻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멍청이가 와도 짐작할 수 있었다.
피해자는 총 102명. 10명은 어떤 뜻인지 모를 파란색 빗금이 그어져 있었고, 90명은 모조리 붉은색 빗금으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직 2명만이 아무런 색 없이 또렷한 글자로 쓰여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김창식과 방송국 여자였다. 아마 내가 동행하지 않고 조금만 방심했더라면, 그 두 명은 이유조차 모르며 죽어 나갔을 것이다. 나는 그 공책 위에 검지를 탁탁 두들기며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다 죽였습니까?’
내 물음은 정확히 묶여 있는 놈에게 향했다. 놈들이 처리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은 봉쇄지역 안쪽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생존자들이었다. 이제 살 수 있다,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차 있을 사람들을 욕망과 돈이라는 이름 아래 짓밟고, 이 침울한 회색 도시 속에 영원히 버려두고 온 것이다.
다 알고 있었으면서, 이들이 얼마나 억울한 사람인지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놈들은 그 사람들의 등골과 목숨을 빼먹었다. 우리를 공격하려고 했다는 것과 별개로 나는 놈들이 부랑자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놈의 재갈을 풀어 줬다.
‘-----!’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내가 못 알아듣는 중국어와 이쪽을 향한 더러운 적의였다. 나는 조용히 불쾌한 기류를 곱씹었고, 내 뒤에 있는 노인은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놈의 죽통을 그대로 후려 버렸다.
그냥 손으로 뺨을 때린 것이 아니다. 노인의 손에는 콘크리트 조각이 들려 있었고, 그것을 통째로 들어 놈의 죽통을 날려 버린 것이다. 놈의 입에서는 이빨 조각과 함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하지만 노인은 들을 가치도 없다는 듯 놈에게 재갈을 물려 버렸다.
‘한국말 할 줄 아는 거 다 알아, 새끼야.’
노인은 확신에 차 있었다. 아까부터 우리가 하는 말에 하나하나 반응하던 놈, 자신이 중국말을 하면 대답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괜한 배짱을 부린다. 하지만 상대는 나와 노인이다. 악랄하고 거지 같은 부랑자들의 입을 열어본 적이 있는 우리에겐 놈의 발악이 어린아이가 부리는 재롱처럼 보였다. 노인이 놈의 머리채를 잡고 조용히 읊조렸다.
‘솜씨 좋은 의사 선생님 하나를 알고 있거든? 정말 착하신 분이라 네가 허무하게 죽게 내버려 두지는 않으실 거다.’
우리에겐 백의 입은 천사, 놈에게는 백의 입은 악마. 그 간극은 우리가 놈에게 무슨 짓을 하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놈은 역시 한국말을 할 줄 알았는지 심하게 눈동자를 떨며 우리를 바라봤고, 입과 볼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옅은 신음을 흘린다.
나는 조용히 대검을 뽑아 놈에게 다가갔다. 그 옆에 있던 노인은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쇠꼬챙이를 콘크리트 바닥에 긁으며 조용히 놈에게 질문했다.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
과거의 우리가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과연 무슨 말을 할까. 어쩌면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이세요? 어떻게 사람을 고문할 생각을 하세요? 모든 윤리의 틀은 당연히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만, 생각보다 변화는 짧으면서도 직접 다가왔다. 노인은 이런 일을 할 때면 나에게 항상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죄책감이 들고, 스스로가 무서워진다면 그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해야 할 때가 생긴다면, 차라리 쉽게 인정해라.
이건 살아가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 * *
‘형님! 식사하세요!’
누군가 나를 흔드는 느낌에 떠지지 않는 눈을 힘겹게 뜬다. 그러자 눈앞에서는 용팔이가 신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이상하게도 굉장히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수련이가 여길 오기라도 한 걸까? 아침밥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절대 우리 일행들 손에서 만들어질 냄새가 아니었다. 나는 의문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옆에서 총기를 손질하는 노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일이래요?’
‘어, 일어났냐? 그 여자가 아침부터 뭘 만들더라.’
여자? 아, 그 방송국 여자? 노인이 무심하게 말하는 것 치고는 냄새가 아주 좋다. 나는 어젯밤 늦게 잠든 여파를 고스란히 느끼며 거칠게 얼굴을 비볐고, 용팔이가 손수 챙겨주는 물을 꿀꺽꿀꺽 넘겼다. 피곤하고 배고프다.
몸의 컨디션을 그 자리에서 점검하며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어제랑은 달리 활기차 보이는 방송국 여자가 버너 앞에서 무언가를 끓이고 있었다.
긴 머리는 질끈 묶고, 뜨거운 버너 앞에서 입김을 호호 내뱉는 것이 어제의 불안한 모습과는 상반된다. 그리고 김창식도 그 옆에서 열심히 잔심부름을 하며 우리가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이쪽으로 완전히 마음이 기운 모습. 나는 조용히 입맛을 다시며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에 우리 일행이 아닌 타인이 해주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완성된 것은 인스턴트 스프와 삶은 계란. 당최 우리가 챙겨온 식재료가 아니었기에 어디서 가져왔냐고 물으니 박대박이 놈들 텐트에서 가져온 것이라 했다. 다량의 현물들과 기타 장부들은 우리가 가져서 나쁠 것이 없는 물품들이었다. 우리는 따뜻한 스프에 건빵을 녹여 먹으며 든든한 아침 식사를 시작했고, 어제보다 더 밝아진 모습으로 조용히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식사가 끝나갈 무렵 나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어젯밤, 심문을 끝냈습니다.’
일행들과 방송국 무리들은 심문을 진행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지, 그 자세한 과정과 결론은 모른다. 모두가 공통으로 궁금해하는 것, 하지만 어제 심문을 마친 우리가 어떤 얼굴로 복귀했는지 알기에 섣불리 물어보지 못하며 나의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말을 꺼내자 일행들은 수저를 내려놓고 모든 시선을 나에게 집중했다. 나는 그런 일행들을 보며 어젯밤 우리가 들었던 내용은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일단 놈들이 사람들을 빼돌리는 루트는 다른 집단을 한 번 더 걸치는 이중계약 형식이었다. 놈이 말하길 이미 상당수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서는 대대적인 피난 행렬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물론 국가전복까지는 아니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부의 보호가 닿지 않는 곳은 분명히 있을 것이고, 살기 위해 한국으로 넘어오는 난민 또한 존재할 것이다.
놈이 말한 그 집단은 돈을 받고 해외난민을 한국으로 들여보내 주는 브로커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죽인 밀수업자들은 그곳에 잠시 편승해 봉쇄지역 안쪽 사람들을 난민인 척 밖으로 빼주는 장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와서는 쓰레기 양아치 짓으로 변질되었지만,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그럴싸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리고 나와 노인은 놈으로부터 난민을 불법적으로 빼주는 단체의 이름과 위치, 그리고 전화번호까지 받아낼 수 있었다. 놈은 끔찍한 고문 끝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마지막까지 살기 위한 구걸을 했었다. 자신이 안내해 주겠다고, 살려만 준다면 저 두 명을 책임지고 내보내 주겠다고. 그리고 그에 대한 답변은 이미 어젯밤 바람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놈은 자신들이 그토록 우습게 생각하던 생존자들과 똑같은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일행들은 꽤나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주며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였고, 방송국 직원 두 명도 앓는 이가 빠진 마냥 후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리고 우리 질문대장 용팔이는 여전히 궁금한 게 있는지 나에게 손을 들어 물어봤다.
‘그럼 두 분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 같이 나갈 수 있어요?’
계약을 하는 주체가 소매상에서 도매상으로 바뀐 격이다. 그렇다는 것은 비교적 소수가 아닌 많은 사람들을 빼낼 수 있다는 것. 노인과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던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놈에게 탈출이 가능한 숫자를 물어봤지만, 들려온 대답은 깔끔하게 생각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노인은 나 대신 용팔이와 일행들에게 대답해 주었다.
‘전부가 아니면 의미 없어.’
아마 우리 일행들은 현물만 준비된다면 충분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에덴에 남아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들까지 편승하기에는 방주가 너무나 작았다. 그리고 우리만 탈출해 보면 어떨까 라는 못된 생각. 일기를 쓰면서도 역겨운 그 생각은 나와 노인은 물론이고 일행들조차 고려하기도 싫은 방법이었다. 나는 에덴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이 이야기는 꼭 비밀로 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일단 에덴에서 재보급하고, 날짜를 다시 잡아봅시다.’
이젠 정말 시간이 없다. 재정비 시간을 하루로 잡고, 그 단체와도 최대한 빨리 접선해 볼 생각이었다. 목표는 변경되었지만, 목적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재빨리 끝내고,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흔적을 인멸했다. 그리고 모든 준비를 마치고 에덴으로 출발하려는 직전, 노인은 나와 일행들에게 작은 제안 하나를 했다.
놈들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90명이 전부 이 근방에 버려졌다. 놈들은 사람을 묻을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그대로 길가에 방치했고, 사망자 전부는 뼈 한 조각조차 남기지 못하며 괴물들의 먹이가 되었다. 이름도 모르고 얼굴조차 모르는 그들. 이 지옥에서 살아가려고 했던 생존자들의 작별인사는 이제는 희미해진 우리의 묵념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30초란 짧은 시간이 불어오는 바람에 휩쓸려 저곳까지 닿았으면 좋겠다.
* * *
4시간이 걸려 도착한 에덴. 나는 일행들을 해산시키고 재빨리 장비와 짐을 풀었다. 나는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모든 간부들을 소집했고, 하루 전 시행했던 작전의 실패를 알렸다. 하지만 간부진들은 작전이 실패했다는 소식보다 우리 일행들이 괜찮은지에 대해 더 궁금해 보였다. 그 모습에 내가 웃으며 사상자는 없다고 하자 간부들을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훈훈한 분위기와 좋은 기류,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우리가 얻어온 새로운 방안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소곤소곤 이야기를 하던 사무실 내부는 금세 시끄러운 회의장으로 변했고, 간부들은 내가 가져온 정보들을 정신없이 종합하며 재빠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대략적인 틀이 나오게 되자 해가 진 저녁이 되었다. 나는 어느새 어두워진 밖을 바라보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르겠다. 눈을 뜨고 회의실에 있으면 금세 지나가는 시간과 해는 이제 지겹게만 느껴졌다. 나는 노도와 같이 흐르는 시간을 조용히 곱씹으며, 오늘의 마지막을 장식할 위성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놈에게 번호와 위치는 정확하게 넘겨받았다. 하루라도 빨리 일을 시행하기 위해 간부들이 있는 이 자리에서 연락을 취할 생각이었다.
[-------.]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시도하자 다행히 신호는 걸린다. 수화기 너머로 미세하게 들려오는 그 연결 음은 회의실 내부에 있는 간부 전원을 입 다물게 하기에 충분했고, 긴장감 가득한 분위기가 회의실 내부를 장악했다.
밀수업자들의 변절, 그것은 거래대상이 언제고 적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충고하듯 날카롭게 빛나는 노인과 눈을 마주하며 조용히 상대측에 응답을 기다렸다.
[----후.]
연결되었다. 분명 연결 음 끝으로 사람이 내뱉는 한숨 소리가 들렸다. 나는 조용히 표정을 굳히며 대답을 기다렸지만, 상대측은 내가 말을 꺼낼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겠다는 듯 숨소리만을 내며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1분이라는 시간이 지나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
‘남자, 여자. 총 두 명.’
무슨 일이 있어도 내보내야 했다. 이제는 유일한 길인 놈들에게 매달려야 하는 입장이었지만, 나는 결코 조급해하지 않았다. 숨을 고르고,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킨다. 그리고 난 회의실 상석에서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 밖으로는 어둠이 고요하게 가라앉는 에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너 누구야? 번호를 아는 새끼는 두 명밖에 없는데, 어째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네?]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여자 목소리였다. 그리고 여자는 목소리와는 상반되는 걸쭉한 어투로 나에게 강한 적의를 쏟아냈다. 번호를 아는 놈은 2명이 전부, 하지만 거래대상이 아닌 자의 연락은 놈들에게 경계심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들을 일일이 설명할 생각이 없었고, 단호한 문장을 다시 읊어준다.
‘남자, 여자. 총 두 명.’
[……뭐 하는 새끼인지는 모르겠는데, 우리는 초면인 놈들이랑은 거래 안 해. 뒤지기 싫으면 전화 끊고 딴 곳 알아봐.]
여자가 내뱉는 걸쭉한 욕설이 내 귀를 강타한다. 하지만 그 욕설과 거절을 들은 나는 표정 변화 없이 손가락을 까닥였고, 시작부터 어긋난 분위기 앞에 입맛을 다셨다. 이놈들, 우리 쪽에서 밀수업자들을 죽여 버린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적의가 가득 묻어나는 그 목소리와 더 이상 정상적인 거래를 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네들 위치를 알아.’
절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놈의 손가락 3개를 끊고 알아낸 것이다. 봉쇄지역 밖에 하나, 그리고 봉쇄지역 안에 하나. 놈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본거지를 두 개나 두고 있었고, 그중 한곳의 위치는 내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상대측에 마지막은 한 말은 정말 순수한 협박이었다. 너희들 위치를 알고 있다, 그 말은 거래하지 않겠다면 언제고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단순한 허세가 아니다.
그 여자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리고 곧 내가 한 말이 협박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포복절도를 하며 꺄르르 웃기 시작했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잠자코 들으며 상대측의 대답을 기다렸다. 손끝 신경이 날카롭게 저려 오고, 놈의 손가락을 끊었던 어젯밤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온다.
[미친 새끼! 너 뭐 하는 새끼야? 양아치 몇 명 죽였다고, 눈앞에 뵈는 게 없지?]
여자는 한순간 웃음을 멈추고 정색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한 협박에 충실하게 반응해 주며 나를 죽일 듯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천천히 숨을 들이켜며 폐부를 부풀렸다. 예상은 했지만 참 순탄치 않은 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다른 길은 없기에 난 거침없이 앞으로 걸어가려고 한다.
[왜 대답이 없어, 이 쪼다 새끼야! 네가 우리 위치를 알면 어쩔…….]
‘내일.’
나는 여자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대답했다.
어쩌면 우리가 밀수업자들을 죽인 순간부터 이들과의 거래 관계는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나름 놈들과 동종업자인 그들은 우리와 적대하며 거래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나는 긴 고민 없이 깔끔하게 평화적인 방법을 포기했다.
하지만 나는 악수를 포기했지, 칼날을 놓은 것은 아니다. 낭떠러지인 뒤로 도망칠 생각은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저 두 명을 밖으로 내보내야 했고, 유일한 길을 저놈들이 가지고 있다. 주지 않겠다면 우리가 알아내러 갈 것이다. 나는 놈들이 적어도 밀수업자들보단 말꼬리가 짧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거기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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