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76화 (176/313)

[176]

밤에 잠이 오지 않을 때면 간혹 이런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 몸속에 흐른다는 괴물 놈의 피. 그것은 스스로가 인간 곽동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과 함께,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힘들다, 고통스럽다. 만약 자신의 근원을 송두리째 부정당한다면, 사람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하지만 생각보다 그 변화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왜, 왜 이러세요! 저희가 더 챙겨 올 테니까…….’

아직도 상황파악이 힘들어? 나는 겁에 질려 애원하는 여자에게 그리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판단이 틀어막았다.

끓어오르는 피가 좁은 혈관을 통과해 거친 조류로 변한다. 노도와 같이 몰려가는 피들, 그리고 그 피들은 아드레날린은 미친 듯이 분비시킨다. 시간은 느리게 흐르고 세상이 점멸했다.

이건 함정이다. 분명 검은색 텐트 안에는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있었으며, 꼭 무언가를 노리듯이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눈치채자 놈들은 기다렸다는 듯 무기를 꺼내 들며 텐트에서 쏟아져 나왔다.

회칼, 쇠파이프, 야구방망이. 하나같이 옅은 달빛에 투영되어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숫자는 총 12명, 생각보다 많이 준비된 인원은 이 짓을 위해 작정했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일기장에 적기 시작한 이 내용을 나는 3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이해하고 상흔을 새겼다. 어느새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대검은 살벌한 소리를 내며 내 손에 잡혔고, 모두가 보내는 시선과 행동, 그리고 공기의 흐름마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100% 집중한다. 나는 재빨리 손을 휘둘러 가장 앞에서 무기를 뽑으려는 밀수업자 놈의 목에 칼을 던져 넣었다.

대검이 어둠을 가르고 달빛을 투영시키는 일직선을 긋는다. 그것은 한순간 사람의 목숨을 가져가기에, 충분한 선 긋기였다. 목에 칼날이 들어간 놈은 황급히 목을 움켜잡았지만,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피를 전부 막기에는 힘들게 보였다. 여자가 비명을 지르고, 김창식이 재빨리 여자를 숨긴다. 사방에서 당황스러움과 함께 누군가를 부르는 중국어 고함이 터져 나왔다.

‘----!!!’

이유가 뭘까? 나는 달려오는 그놈들의 인영을 직시하며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그동안 봐 왔던 놈들의 시선과 표정에서 그 해답을 알아낼 수가 있었다. 욕망의 얼굴, 그리고 아까부터 여자가 들고 있던 가방에 꽂혀 있던 시선들.

아마 놈들은 우리가 들고 있는 현물과 더 많은 황금알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의 배 안을 탐내고 있었던 모양이다. 쯧, 난 작게 혀를 찼다. 그저 빨리 거래를 했으면 하는 마음에 너무 패를 많이 보여 준 모양이다.

‘죽어, 이 시발 새끼야!!’

내가 목을 꿰뚫어 준 남자와 친한 사이였는지, 가장 빠르게 뛰어온 대머리가 회칼을 내 배 쪽으로 찔러 넣었다. 그동안 상대해 온 어중이떠중이들과는 다르게 망설임도 없었고, 칼끝이 떨리지도 않았다.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다.

그렇다는 것은 저 둘과 같은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여 왔다는 소리겠지. 난 그대로 허리를 뒤틀어 놈의 찌르기 공격을 피해 냈다.

내 겨드랑이 아래를 지나가는 찌르기, 놈은 그대로 무게중심이 무너졌고, 얼떨결에 나를 올려보게 되었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 나는 또르르 눈동자를 내려 놈을 바라봤다. 더러운 문신, 담배 찐 내와 독한 고량주 냄새.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흐르고 나는 역겨운 놈의 팔을 겨드랑이에 꼈다. 그리고 온몸에 힘을 줘 꺾이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팔을 돌려 버린다.

끄드득.

간혹 일기장에 표현하기 힘든 소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데도 표현해 보자면 사람의 청각부터 시작해 손끝 신경 하나하나까지 소름이 일어나게 하는 소리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나는 기역 자로 꺾인 팔을 그대로 놓고 곧 소리를 지를 놈의 목 옆에 대검을 찔러 넣으며 한 합을 마무리했다. 어둠 속에 흐르는 피는 생각보다 붉지 않았다.

‘------!’

그리고 내가 의도한 잔혹성은 의외로 잘 먹혔는지, 이쪽을 향해 뛰어오던 놈들은 주춤거리며 사방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총 같은 건 없는 모양이지? 놈들은 우리가 도망갈 방향을 틀어막기 시작하며 잠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며 남자와 여자를 내 등 뒤로 보낸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달빛이 어렴풋이 보이는 지금, 나는 달 맞은편에서 큰 건물이 만들어 내는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손, 손전등 켤까요?!’

순식간에 사방이 어두워진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겁에 질린 김창식은 아까 들고 있던 손전등을 켜려고 했지만, 나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천천히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말하고 있었다. 바람에서 느껴지는 친숙한 기운이 가만히 있으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마른 입술을 핥으며 놈이 우리를 찾기 위해 손전등을 켜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놈들이 켠 손전등 불빛이 퇴로가 없는 우리를 비춘다.

‘동윤 씨!’

여자는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절망이 섞인 비명을 내질렀고, 김창식은 붙잡은 팔을 흔들며 애타게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내가 딱히 그들에게 해 줄 말이나 행동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을 나의 아군들이 분명 이쪽을 보고 있을 테니까. 바람이 불고 흐름이 바뀐다. 대기를 찢는 기류.

딱!

그 순간 총성이 소음기를 비집고 나오는 소리가 내 믿음에 호응해 주었다.

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아무 기척도 없이 들려온 그 소리는 가장 앞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남자의 머리를 꿰뚫었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두개골이 터지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뇌수들이 바닥에 줄줄 흐른다.

총을 맞은 건 방금 죽은 놈이지만, 사고를 정지한 것은 그 주위에 있는 다른 이들이었다.

후우-.

내가 묶은 숨을 내뱉자 노인과 강 형사의 총성이 하모니를 이루기 시작했다.

딱! 딱!

피아구별이 힘든 밤. 노인과 내가 했던 약속은 절묘하게 들어맞았고, 손전등을 들고 있는 놈들은 한순간에 바닥에 픽픽 쓰러진다. 밤 도깨비들이 사람을 죽이기 시작했다. 놈들은 소리 없이 날아온 이것이 총알이라는 것을 깨달을 순간, 사방으로 도망가거나 본능적으로 엄폐물을 찾았다. 하지만 정확히 숨통을 노리고 쏘는 노인과 강 형사의 사격은 피할 수가 없었다.

11명이던 인원은 순식간에 줄기 시작했고, 바닥에 엎드리거나 비명을 지르는 놈들을 제외하면 더 이상 도망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무감각한 얼굴로 남아 있는 놈들의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살아 있는 사람은 정확히 5명. 대부분은 손전등을 들고 있지 않아 운 좋게 살아남은 놈들이다.

놈들 대부분은 아직도 상황파악을 못 하고 있는지 엎어진 몸은 일으킬 생각이 없어 보였고, 더군다나 바닥에 쓰러져 움직임을 멈춘 두 명은 총상을 입었는지 신음과 함께 피를 흘리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검지와 중지를 입으로 가져가 찢어지는 휘파람을 길게 불렀다. 그 순간 사격은 끝이 났고,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주세요.’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자, 내 입에서 가장 처음 나온 목소리는 김창식이 들고 있는 손전등을 달라는 말이었다. 입이 떡 벌어진 김창식은 나에게 뺏기다시피 하며 손전등을 건네줬고, 여자는 어느새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무신경한 잔기침을 하며 총상을 입지 않아 멀쩡한 3명을 향해 걸어갔다. 멀쩡? 아, 수정하자면 전의를 상실한 게 맞는 것이다.

‘너, 너……. 사, 살려…….’

넋이 나가 있던 밀수업자는 나를 향해 삿대질하며 눈동자를 떨었다. 두려움, 공포.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이 우수수 무너져 내릴 때 놈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부랑자들이랑 크게 다를 바 없는 놈들. 나는 그대로 천천히 걸어가 놈의 머리를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뼈가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놈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진다.

나머지 놈들은 반항할 생각조차 못 하며 언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어둠을 미친 듯이 돌아보았다. 마무리된 상황. 내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아닌 일이 제대로 꼬여 버렸다는 듯 한탄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부른다.

‘동윤아, 다친 곳은 없냐?’

갑자기 상황이 급변해 소리가 듣지 못하는 노인과 강 형사가 당황할 법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은 이런 상황 따위는 변수 축에도 안 끼는지 굉장히 침착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화약 냄새, 여운을 느낄 찰나도 없이 끝나 버린 싸움이었다. 나는 노인에게 걱정 말라는 듯 대답했다.

‘네, 괜찮아요.’

이쪽으로 다가온 강 형사는 익숙한 몸짓으로 죽어가는 놈들을 치우고, 살아 있는 놈들은 신속히 무력화를 시켰다. 그리고 노인은 아직도 넋이 빠져 있는 김창식과 여자에게 다가가 특유의 틱틱 거리는 태도로 정신 차리라 일갈했고, 다리에 힘이 풀린 그 둘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었다. 하여튼, 다 해 주면서 괜히 심술을 부리는 노인이다.

‘히익-!’

하지만 일이 다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한 그 순간, 우리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한 놈이 벌떡 일어나 반대편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시체인 줄 알았는데, 총상을 맞은 척하고 도망갈 기회를 잡고 있었던 모양. 우리 셋은 그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았고, 노인이 만족했다는 말투로 말했다.

‘좋아, 아주 팔팔하네. 강 형사, 저놈 빼고 다 죽여.’

아무도 도망가는 놈을 쫓을 생각을 안 했다. 우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바닥에 쓰러진 놈들의 숨통을 끊고, 시체를 처리했다. 그리고 바닥에 남은 핏자국마저 지워 버리면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 비록 일이 꼬여 버렸지만, 그 꼬인 실타래는 우리의 방식대로 풀어 버리면 된다. 난 천천히 고개를 들어 놈이 도망치고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끄아아아악!!!’

우리가 자신을 쫓지 않자 신나게 도망가던 놈은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튀어나온 두식이에게 붙잡혀 그대로 다리가 아작이 나 버린다. 그리고 그 뒤로는 두시기이를 쫄래쫄래 따라오는 용팔이와 나머지 일행들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일행들이 소음기 소리를 듣자마자 후발주자로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다. 나는 놈들의 몸을 뒤져 대검과 소지품들을 회수하고, 노인에게 말했다.

‘일단 베이스캠프로 가요.’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강 형사와 일행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일행들은 놈들의 시체를 보란 듯이 길가에 늘어트리며 피곤함이 섞인 하품을 내뱉는다. 시체를 묻거나 감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차마 약품 때문에 다가오지 못하는 놈들이 우리가 자리를 비켜 줄 때를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는 죽은 사람처럼 얼굴이 창백해진 방송국 두 명을 끌다시피 데려와 베이스캠프로 복귀했다.

* * *

‘문 열어!’

베이스캠프를 지키고 있던 박대박은 베이스캠프로 복귀하는 우리를 발견했다.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린 그는 이쪽에 무언가 변고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지만, 다친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는지, 성급하게 상황을 물어보지는 않았다.

나는 박대박과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 갈 때와 똑같은 인원을 그대로 이끌며 지하 주차장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가 잠시 접선을 하러 간 동안 박대박은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주차장 내부는 나름 베이스캠프로서의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밤사이 불어올 칼바람을 막아 줄 조잡한 칸막이와 그 안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침낭들. 또 간단한 취식을 할 수 있게 구비된 버너는 아낌없이 활활 타오르며 물을 끓이고 있었다. 나는 얼굴을 치고 오는 훈훈한 공기를 만끽하며 장비들을 바닥에 놓기 시작했다.

‘죄. 죄송……, 죄송해요, 아저씨. 저희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유난히 몸을 떨던 여자는 우리를 향해 사과를 해 왔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김창식도 여자와 똑같이 얼굴이 창백해져서는 몸 둘 바를 모르고 있었다. 죄송하다고? 아, 이 둘은 아마 일이 틀어지고 싸움을 하게 된 원인이 모두 자기들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단순한 접선 루트만을 주선했던 이 둘이 잘못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저런 놈들을 만나게 했다는 것과 중요한 임무에 실패했다는 것에서 우리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본인들이 필요한 임무가 실패한 이상 을과 짐이라는 입장이 돼 버린 그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본 노인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고, 용팔이는 왜 사과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인다.

그리고 나는 이쯤에서 불안해하고 있는 그 둘에게 한 번 정도는 알려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천천히 목소리를 가다듬고 바쁘게 움직이는 일행들에게 외쳤다.

‘다친 사람 있습니까?’

그러자 장비를 내려놓던 일행들이 내 목소리에 반응하며 힘차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다친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다. 비록 임무는 실패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적으로 돌변한 놈들 탓이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분명한 상황. 우리는 모든 상황이 끝난 뒤에 괜한 피해자를 탓하며 쪼아대는 그런 병신들이 아니었다.

넘어지면 일어나고, 실패하면 또 시도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작전 실패란 깃발을 놓치는 것이 아닌 일행들의 손실이었다.

다 괜찮다.

그러면 그걸로 된 것이다.

‘괜찮으니까, 식사부터 합시다.’

내 따뜻한 말 한마디에 김창식은 습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고, 불안해하고 있던 여자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시간은 흘러가 지금은 오후 8시, 우리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나는 일행들이 정신이 팔린 틈을 타 조용히 노인을 부른다.

‘영감님.’

이곳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조금은 엄습한 공간, 나와 노인의 시선은 정확히 두식이가 들고 온 밀수업자 한 놈에게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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