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74화 (174/313)

[174]

매일 해 뜨기 전 일어나 병원에서 피를 뽑는다. 물론 주위 사람들에겐 건강을 위한 체크라고 둘러댔고, 내 피를 뽑아주는 김 철도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그 피를 매일매일 챙겨가는 연구소 남자를 보고 있노라면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기분이었다. 검은색 호수를 혼자 헤엄치는 이 기분, 한없이 바닥을 치면서도 아무렇지 않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김 철이 주는 커피를 받아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컨디션은 괜찮으시죠?’

가뜩이나 바쁜 병원 일과. 매일 새벽에 피를 뽑으러 오는 나 때문에 김 철도 일찍 출근을 한다. 하지만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시지 않았으며, 항시 나에게 내미는 믹스 커피는 달기만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 잔에 남아 있는 커피를 모두 들이켰다. 이제 속이 좀 든든해지는 기분이었다.

‘네, 덕분에요.’

내 몸에서 변종과 비슷한 성분이 검출된 뒤로, 현장에서 일을 하는 구조대 전원이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특히 나처럼 놈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적이 있는 용팔이 형제와 노인이 걱정이 많았었는데, 다행히도 작은 질병 말고는 발견된 이상은 없었다.

건강검진이라는 탈을 쓴 감염검사. 그날 구조팀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의료진들이 준 가벼운 처방전만 들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 철이 내 앞에 앉으며 말한다.

‘식사 꾸준하게 챙겨 드시고,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무리하지 말라, 굉장히 어려운 주문이다. 물론 김 철은 나를 진료하는 의사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장 임무 출정을 하루 남긴 나에게 어울리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예의상 고개를 끄덕이며 꼭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이제야 해가 뜨기 시작한 도시, 난 병원 밖을 나오며 그 해를 천천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병원 문 한쪽에서 노인이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아침의 여명처럼 어렴풋이 들려왔다.

‘밥 먹자.’

불만, 걱정, 침묵. 그 세 가지 단어가 혼재된 것이 일주일간 노인이 나에게 보여 준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노인은 여태껏 보여 준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화가 풀린 것일까? 괜히 내색을 냈다가는 상황이 더 어색해질 것 같아서 나는 아무 말 없이 노인에게 다가가 들고 있는 도시락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련이가 사무실 가서 먹으라고 싸 줬다.’

꽃무늬 케이스에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 비록 재료는 부실했지만, 수련 씨의 손을 지나가면 뭐든지 맛있는 음식으로 바뀐다. 갑자기 허기를 느낀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은 동네 마실 나온 할아버지처럼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지는 언제나 그렇듯 바쁘게 돌아가는 단체장실. 오늘은 내일 있을 임무를 위해 마지막 점검을 하는 날이었다.

차가운 바람은 많이 따뜻해져 있었다. 시기상 이제 입춘이 지나 봄이 오는 시기. 그동안 내렸던 눈들은 서서히 녹기 시작했고, 차갑게 굳어 있는 우리 마음도 불어오는 봄바람이 위로해 주었다.

해가 짧아진 시기는 뒤로 가고 이제는 아침 해가 한발 빨리 우리를 반겨준다. 그리고 에덴의 주민들은 언제나 그렇듯 아침 일찍 일어나 자신이 맡은 직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사람들을 볼 때면 나는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죽은 송장이 아닌, 움직이는 사람.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이 원할 때 움직인다. 그것이 모든 것을 죽이는 회색 도시 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기지개였던 것이다. 주민들 인사를 해 온다, 나와 노인도 익숙한 듯 인사를 한다.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우리는 그것을 익숙한 듯 바라봤다.

구조팀이 가져온 소식을 들은 에덴의 주민들은 생각보다 혼란스러워하지 않았다. 물론 정부를 향해 분노하긴 했지만, 그 분노는 결코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하지는 않았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생존자의 노련함은 이성이라는 보석을 심장에 품게 했고, 그 누구보다 빠르게 현실을 마주 보게 만들어 준 것이다.

대중이 우매하다고 누가 그랬을까? 내 편지 한 통에 에덴의 주민들은 조용해졌고, 치안 대책까지 마련해 둔 계획은 하루가 지나지 않아 필요 없다고 판단되어 폐기되고 말았다. 우리를 향한 믿음과 그 믿음을 다 같이 따라가는 신뢰. 마치 생존자들의 이상향을 모아 둔 것 같은 에덴은 더 이상 과거의 온실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너를 많이 존경해.’

주민들이 바쁘게 걸어 다니는 길을 지나가자 한적한 골목이 눈앞에 보였다. 그리고 앞서 걸어가던 노인은 밝은 아침 햇살을 만끽하며 조용히 나에게 읊조렸다. 너를 많이 존경한다, 무척이나 부끄럽고 낯을 붉히게 하는 소리였다.

나는 사실 은테 안경이 읽어보라고 권해 준 간이 신문을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읽었다. 그리고 내가 읽지 못했던 지난 호들에는 나와 일행들이 에덴으로 와서 겪었던 이야기와 과정들이 아주 자세하게 쓰여 있었다.

오늘은 사람을 몇 명이나 구하고, 어제는 악독한 부랑자들을 몇 놈이나 죽였는지. 그리고 수없이 많은 위험을 거치며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생생한 증언과 함께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있자니, 나도 사람인지라 오랜만에 보람과 뿌듯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행동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보다 앞서 걷고 있던 노인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느 샌가부터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빛에는 언제 이렇게 컸냐는 흐뭇함이 담겨 있었다. 그래, 항상 무표정으로 주변을 대하던 나는 노인 앞에서만큼은 그의 아들처럼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집부려서 미안해요.’

나는 바닥을 바라보며 노인에게 말했다. 이례적으로 나와 노인이 다툼을 했던 그날은 초창기 일행들조차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었다. 하지만 결국은 최종 결정자인 내 의견에 따라 일이 진행되었고, 노인은 아무런 말 없이 내 일을 도와주며 묘한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계선이 시간이 흘러 희미해질 때쯤 노인은 나에게 답해 주었다.

‘괜찮다.’

참 노인답다고 생각이 드는 짧은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 답변 속에 얼마나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 나는 조용히 노인의 뒤를 따르며 걸었다. 괜찮다, 이해한다, 걱정돼서 그런 것이다. 우리는 서로 말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것을 주고받았다. 그날 수련 씨가 싸 준 도시락은 늦은 발걸음으로 인해 식어 있었지만 정말 맛있었다.

* * *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합니까?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나는 캠코더로 이쪽을 찍고 있는 김창식에게 말했다. 하지만 김창식은 내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업의식을 불태우며 더 좋은 각도를 찾기 위해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그는 우리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싶다고 했다. 물론 나는 이 영상이 우리가 살아 있다는 생생한 증거가 될지도 몰랐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수락한 지 일주일 만에 후회하고 말았다. 이 남자, 사람을 꽤나 귀찮게 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분들이 하나같이 단체장님을 찍으라고 하는데, 그럼 어떡합니까?’

김창식도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는지 캠코더로 내 모습을 담으며 조용히 투덜거린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아무리 생각해도 떠넘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미간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뱉었고, 곧 그가 하는 질문을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줄 수밖에 없었다.

내가 처음 일행들을 만나게 된 이야기, 그리고 에덴으로 도착해 벌어진 위험들. 그는 수없이 많은 질문을 했고, 나는 최대한 짧게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오가는 질문과 답변이 모래성처럼 쌓여갈 때쯤 그는 마지막 질문이라 말하며 나에게 물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있으세요?’

이제 정말 끝인가 보다. 나는 정신없이 살펴보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김창식이 한 마지막 질문을 조용히 곱씹었다. 이 길고 길었던 방황과 고난의 길. 이제 그 길은 끝을 보이고 있었고, 살고 죽느냐에 대한 결말만을 남기고 있었다. 생존이라는 유대감으로 묶인 사람들에게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봐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아마 하고 싶었던 말은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내가 밟아온 길과 수없이 많은 슬픔이 내 말문을 틀어막았다. 흐르지 않는 눈물로 목이 메고, 많은 사람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었다. 죽이고 죽여야만 했던 지옥도. 그 비정한 현실은 단 한마디 말로 정의하지 못할 많은 과정을 담고 있었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이 절망스러운 순간에도 살아가고 있었고, 그 어떤 위로의 말로는 보상받지 못한 비장함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는 서류를 정리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인터뷰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 * *

[김창식은 그날 듣지 못했던 대답을 그가 주민들에게 쓴 편지에서 가져와 다큐멘터리에 삽입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주민들에게 남긴 편지의 제목은 이렇듯 소박하면서 조용했다.]

* * *

때가 왔고 일상은 격변을 맞이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을 하고 있는 직원들의 눈에는 비장함이 서렸고, 구조대 팀원들은 오늘 있을 중요한 임무를 위해 애써 긴장감을 삼켰다. 에덴이라는 거대한 시계, 그 속에 톱니바퀴는 운명의 시침을 움직일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람들하고는 언제 마지막으로 연락했습니까?’

나는 사람들이 가져다주는 장비를 입으며 옆에서 대기 중인 은테 안경에게 물었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여자가 가져온 위성 전화기를 살며시 들어 올리며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리고 아까 전 당부했던 내 지시를 잊지 않았는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김창식 씨가 10분 전에 다시 한 번 통화했습니다. 저번보다 3배는 많은 돈을 요구하길래, 일단 전부 현물로 준비해 뒀어요. 그때 마지막으로 만났던 자리에서 접선하자고 하는군요.’

밀수업자가 거래를 대가로 요구한 것은 상당히 많은 액수의 돈이었다. 물론 2명을 내보내는 것 치고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액수였지만, 돈에 얽매이지 않는 우리는 5배든 10배든 말만 하라며 배짱 거래를 했다.

물론 쓸데없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우리의 정체는 꼼꼼히 숨겼고, 오직 김창식과 방송국 여자만을 통해 통화를 했었다. 그리고 정해진 날짜는 오늘 저녁. 4시간 거리에 있는 봉쇄지역 외곽에서 야밤을 틈타 탈출을 시도할 것이다.

‘아마 오늘 내로 돌아오지는 못할 겁니다. 그동안 에덴을 잘 부탁드려요.’

그곳을 왔다 갔다 하는 왕복 거리만 계산해도 8시간이 걸린다. 거기다 약속 시간이 저녁인지라, 오늘 에덴으로 복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오랜만에 하는 1박 임무. 나는 채연이와 숙소 일행들에게도 걱정하지 말라며 단단히 일러두었고, 은테 안경에게도 에덴 경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단체장님, 저희 왔습니다.’

사람들로 북적북적한 에덴의 정문. 저쪽에서 살갑게 나를 부르는 김창식이 보였다. 오늘 중대한 임무를 가지고 밖으로 나서게 될 방송국 소속 두 명이 제때 시간을 맞춰 에덴의 정문으로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김창식이 준비가 다 되었다는 말을 내뱉은 순간, 총기를 손질하고 있던 모든 일행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탈선과 브레이크는 용납할 수 없다. 우리는 이해관계와 맞물려 절대 내릴 수 없는 열차에 탑승한 것이다. 에덴의 사람들은 그들이 탈출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고, 도움을 받은 그들은 최선을 다해 우리의 진실을 세상 밖으로 내보내 줄 것이다. 내가 밖을 향해 쏘는 마지막 화살, 나는 그 두 명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알려 준 것 절대 잊지 마십쇼.’

일주일이라는 기간을 정신없이 보내며 세세한 계획을 작성했었다. 혹시 있을지 돌발 상황과 그에 맞는 행동 매뉴얼. 우리 일행들은 물론이고 동행하게 될 이 두 명에게도 그 매뉴얼을 달달 외우게 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 한 속성교육이지만, 임무복을 입고 있는 김창식과 여자는 나름 어리숙한 태를 벗어던지고 어엿한 생존자들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 정말 괜찮을까요? 무사히 나갈 수 있는 거 맞겠죠?’

이제 출발하기만 하는 상황에서 아까부터 불안해 보이던 방송국 여자가 찬물을 끼얹는다. 이 비장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 여자가 실수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김창식은 연신 주변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쿡 찔렀고, 방송국 여자도 깜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꾹 틀어막는다. 하지만 엎어진 물처럼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가 없었다. 주변에서 불만이 어린 눈빛들이 이곳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만.’

하지만 내가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리자 그 수군거림과 눈빛은 한순간 멎고 만다. 나는 마지막으로 점검을 마친 총기를 앞으로 들고 내 옆에 있는 일행들과 정성스레 출정을 도와준 에덴의 사람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이젠 숙명처럼 다가온 일이다. 꺾일지언정 넘어질 수는 없었고, 죽는 한이 있어도 먼저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명, 영웅, 희망, 희생. 그런 단어들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삶이 가지는 숭고함은 때론 제대로 알지 못함에도 사람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무전기를 들어 올려 출발신호를 보냈다.

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읊조림은 곧 전염이라도 되듯 사람들에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짧은 문장, 그것은 신을 향해 보내는 기도가 아니라 지금 걸음을 옮기는 우리에게 보내는 무사 귀환의 메시지였다. 차가운 겨울바람은 사라지고, 따뜻한 봄바람이 우리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에덴의 정문이 열리고 발아래 눈들은 녹아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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