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71화 (171/313)

[171]

차가운 생수가 피부에 닿자 남자는 눈가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뒤 그는 온몸을 버둥거리며 생소한 감촉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비록 그 대응이 단순히 기겁하며 구석으로 몸을 숨기는 정도지만 말이다.

우스꽝스러운 그 모습에 웃음이 나기도 하면서, 얼마나 무서웠으면 저러냔 걱정도 들었다. 그는 내가 사람인 것을 확인했음에도 경계를 풀지 않았고, 우리를 두려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해한다, 그가 밤사이 무슨 일을 겪었을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그의 트라우마를 건들지 않게 노력하며 최대한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제 목소리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통화를 했었다. 내가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듯, 그도 내 목소리를 기억하기 바랄 뿐이었다. 남자의 돌발행동을 우려한 내 질문에 남자는 뿔테 안경을 황급히 고쳐 쓰며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일부로 총까지 치워 주고 일행들 대부분이 멀찍이 물러난 상태. 나는 그가 온전히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 그분이십니까? 어제 저랑 통화하신 분, 정말 맞으세요?’

남자는 처음에는 횡설수설하더니 곧 긴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눈을 깜빡이며 나의 존재를 재차 확인했다. 그래, 다행히 미치지는 않았구나. 나는 그 질문에 어김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당신을 구조하러 왔고, 이 건물을 장악했던 놈을 처리했다는 답을 해 줬다. 그러자 남자는 거칠게 숨을 내뱉었으며 꺼억 울음을 터트렸고, 노인은 저쪽에 물러나 있는 용팔이를 부르며 우리가 챙겨온 물품을 가져오라 일렀다.

‘용팔아! 생수 한 병이랑 요기할 것 좀 가져와라!’

노인은 눈물을 터트리는 남자를 보며 혀를 짧게 찬다. 하지만 남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한심함과 부정이 아닌 남자를 동정하는 따뜻한 감정이 엿보이고 있었다. 노인은 아마 남자의 울음을 통해 불과 몇 달 전 우리의 모습을 회상하고 있는 듯했다. 물론 잠시 상념에 빠져 있던 나도 마찬가지였고.

나는 남자를 향해 마지막으로 말을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전합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나중에 이야기해요.’

비록 대가라는 이유로 움직이긴 했지만, 이 지옥을 잘 버텨 준 남자가 대견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일행들도 순전히 생존자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 작은 기쁨을 느꼈으며, 연신 감사함을 표하는 남자를 통해 뿌듯함을 느꼈다. 비록 내 생각과 마음은 다른 곳에 있었지만, 이 좋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일행들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 * *

‘하아…….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남자는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정신을 추슬렀고, 곧 우리가 권하는 대화를 받아들였다. 두려움과 눈물이 많이 가신 얼굴, 처음에는 몰랐는데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준수했다. 그리고 예의 바른 태도와 싹싹한 말투 때문인지 그를 상대하는 노인과 나의 태도는 갈수록 유해지고 있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척하면 척 알아듣고 착하면 착 행동하니 그 방송국 여자를 대할 때랑은 차원이 달랐다.

‘강 형사님, 일행들 이끌고 먼저 내려가세요. 1층에서 잠시 자리 잡으시고, 간단하게 식사하셔도 좋습니다. 변종 시체 챙기는 거 잊지 마시고요.’

남자와 할 이야기도 길고, 방송국에서 찾아야 할 것도 많았다. 나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강 형사에게 부탁하며 이후 행동은 브리핑 때 정해 둔 동선을 그대로 진행했다. 내 지시를 들은 강 형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들 쪽으로 걸어갔고, 곧 웅성거리는 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옥상에는 이제 나와 노인, 그리고 옷으로 안경알을 닦고 있는 남자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말없이 일행들이 나가는 모습을 보다, 남자에게 물었다.

‘궁금하신 것 있습니까?’

비록 1시간이라는 시간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조급하게 행동하지 않았고, 가장 먼저 혼란을 느끼고 있을 그에게 질문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그는 다급하게, 서 선배라 부르던 여자의 안부를 물어봤고, 우리는 괜찮다는 대답을 해 주었다.

긴 안도의 한숨이 들려온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는 과정에서 처참하게 죽었을 동료들을 생각하는지 남자는 표정을 일그러트린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질문들은 꼭 알아야 하면서도 의외로 형식적인 질문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 폐쇄 구역에 어째서 생존자가 있는 것인지. 남자는 언론인답게 또박또박 필요한 정보만을 물어보며 서서히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폐쇄 구역 안쪽에서 있었던 진실이 서서히 맞물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끝에 가서는 허망한 한숨을 내뱉으며 창백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려 버렸다. 남자가 조용히 읊조린다.

‘저를 구하러 오시는 것만이……, 목적은 아니셨군요.’

‘똑똑한 친구네.’

그 짧은 순간에 상황을 파악한 남자를 보며 노인은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래, 확실히 상황파악이 빠르긴 했다. 그는 우리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본사 자료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피곤한 듯 마른세수를 하는 그에게 오해는 하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조곤조곤 대답해 주었다.

‘다른 일행들은 아직 진실을 모릅니다. 저는 그렇다고 쳐도, 나머지 사람들은 사명감을 가지고 구조 활동을 하고 있는 거니까, 너무 실망하지 마세요.’

나 자신을 대가만을 바라보는 속물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순수하게 생존자 구출이라는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일행들의 숭고함은 곡해되지 말았으면 했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남자는 깜짝 놀라더니 이내 고개를 들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그의 얼굴에는 당황함과 함께 그게 무슨 소리냐는 짙은 미안함이 담겨 있었다.

‘아, 아닙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이게 전부 다 다른 분들을 위해 그러시는 거 아닙니까? 충분히 대단한 일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말 존경해야 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깜짝이야. 그 남자는 오해하지 말라는 소리와 함께 양손으로 나의 오른손을 덥석 잡았다. 그리고 굉장히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서슴없이 존경한다는 말을 해온다. 원래 이런 캐릭터였나? 오늘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시선과 말을 들으니, 기분이 좋기보단 얼떨떨한 마음이 컸다.

그리고 나는 일단 어색하게 웃으며 재빨리 손을 빼냈다. 그래, 간혹 이런 사람이 있기는 했다. 착한 건 참 좋은데, 상대하기 어색한 사람이. 그런데도 분위기는 생각보다 괜찮았고, 조용히 타이밍을 재던 나는 드디어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아, 예……. 괜찮습니다. 대화가 잘돼서 기쁘네요. 그럼 혹시 협조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우리는 그가 본사에서 챙긴 중요한 자료들은 물론이고, 폐쇄지역 바깥에 관한 개인적인 협조도 구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이 방송국 직원들의 만남이 우리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임과 동시에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할 방법일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내 부탁을 들은 남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그건 제가 부탁드려야 하는 일 같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서 선배랑 제 목숨까지 구해 주셨는데, 그 정도도 못 하겠습니까?’

그는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듯 환하게 웃으며 악수를 권해 왔다. 비록 이해관계에서 시작하는 단계지만, 자신이 받은 도움을 결코 잊지 않던 남자를 보며 나는 흡족함을 느낀다.

처음 만났던 여자와는 다르게 순조롭게 흘러가는 이야기, 나는 여태 잘하지도 못하는 협상과 줄다리기를 했던 보상을 지금에서야 받는 기분이 들었다. 마음이 후련해졌고, 눈앞에 있는 작은 벽 하나를 넘어선 성취감이 몰려온다.

손을 맞잡자 그의 목에 걸린 사원증이 조용히 흔들린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쓰지 않았으면 했던 강 형사의 수갑이 품속에서 조용히 잘그락거렸다. 옥상에는 차가운 바람과 함께 생각보다 따뜻한 햇볕이 우리를 밝혀 주었다.

* * *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우리는 바삐 움직이며 떠날 채비를 했다. 꼭 챙겨야 할 본사 자료들은 남자가 옷 속에 꼭꼭 숨겨놓은 상태였고, 우리는 그것을 안전한 서류 가방에 인계받아 짐 속에 소중히 포함시켰다. 그리고 남자는 방송국에서 쓸 만한 것을 더 챙겨야 한다는 소리와 함께 부지런히 층들을 오가며 곧 우리가 들고 갈 짐들을 추가시켜 주었다.

물론 중요한 장비들은 대부분 손실된 지 오래였지만, 나는 에덴에 있을 털보를 생각하며 일단 전부 챙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우리는 늘어나는 짐들 때문에 결국 리어카까지 동원하며 가져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챙겨 넣었다. 이사 준비를 하듯 바쁜 시간이 흐른다. 우리는 1시간 정도가 더 지나서야 방송국 본사에서 출발할 수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짐들이 잔뜩 쌓여 있는 리어카는 두식이가 전담해서 끌고 있었고, 용팔이는 그 뒤에서 리어카를 밀며 작은 힘이나마 보태고 있었다. 모두가 고된 임무로 힘들어 보였지만, 집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얼굴만큼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선두에 서 있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동윤 씨, 매번 사람들을 구하고 나면 이런 식으로 집에 돌아갑니까?’

고개를 돌리자 통성명을 마친 김창식이 내 이름을 부르며 친근하게 질문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아까 못 보던 캠코더가 들려 있었는데, 그 캠코더에는 분명 붉은 빛이 작게 들어오며 나와 일행들의 모습을 찍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뭐 하고 있냐고 묻자, 그는 뿔테 안경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기록을 남기려고 합니다.’

기록? 우리가 집에 돌아가는 걸 찍어서 뭐 하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진지한 모습으로 우리를 촬영하는 그에게 뭐라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저 오랜만에 마주 보는 카메라 앞에서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김창식은 그 외에도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며 캠코더로 인터뷰를 청해 왔다. 가만히 걷기 심심했던 나는 그냥 대화를 한다는 생각으로 꽤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고, 그는 만족한 얼굴로 다른 일행들에게 뛰어갔다.

까불거리는 용팔이도 찍고, 괜히 카메라 앞이라고 수줍어하는 다혜도 찍고, 힘자랑을 하는 두식이도 찍었다. 우리 일행들은 오랜만에 느껴보는 일상 앞에서 기쁘다는 듯 웃었고, 그들의 모습을 찍고 있던 김창식도 얼굴에 웃음을 매달려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고 있었다.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배경 삼아 대열 앞에서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맨 뒤에서 걸어오던 노인이 어느새 내 옆까지 걸어와 조용히 속삭였다. 그 속삭임은 행복한 광경과는 반대로 미래를 걱정하는 우려가 담겨있었다.

‘앞으로 어쩔 생각이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려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일행들을 바라봤다. 일행들은 오랜만에 등장한 카메라 앞에 정신이 팔려 이곳에 신경조차 쓰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고, 걱정이 짙게 묻어나오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곧 노인을 향해 솔직한 대답을 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다 계획이 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했겠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노인이었기에 솔직한 생각을 말해 주었다. 사실 나도……, 정말 모르겠다. 일단 정부가 은폐한 사실들이 기록으로 남은 것들은 전부 우리 수중으로 가져왔다. 하지만 이 행동은 일단 구해 보고 생각하자는 방편이었지, 그 뒤에 계획이 구체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될 수도 있었고, 또는 스스로의 목을 조를 시한폭탄이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들고 있는 서류 가방을 힘없이 흔들며 가방의 무게가 아닌, 그 진실이 가지는 무거움을 느꼈다.

아마 이 서류들이 에덴으로 도착하게 될 때쯤에는 모든 사람들이 숨겨진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표정이 어둡게 변하자 노인은 작게 혀를 차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혼자 끙끙 앓지 마라. 나도 있고, 저기 일행들도 있어. 그리고 이제 에덴의 단체장님이신데 혼자가 아닌 것 정도는 알고 있잖아? 사람들한테 전부 알려 주고 다 같이 방도를 찾아보자. 사람이 몇 명인데? 좋은 계획이 하나 정도는 나오겠지.’

노인은 내 어깨를 꾹꾹 주물러 주며 인간 곽동윤이 가지는 짐을 덜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표현은 안 했지만, 그 속에 담긴 절실한 감정이 내 마음을 천천히 울렸다.

그래, 더 이상 안개 낀 바다를 표류하는 고독함은 없었다. 비록 저 앞이 죽음일지라도 내 뒤에 누군가 존재한다는 것이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형님! 할아버지! 이쪽으로 와서 사진 한 번만 찍어요!’

그리고 그 순간 터벅터벅 걸어가던 우리를 부르는 용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과 나는 얼떨결에 뒤를 바라봤고, 우리 일행들이 길 근처에 멈춰 리어카에 사이좋게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사진기로 찍는 것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김창식이었다. 리어카 위에서 용팔이랑 일행들이 어서 오라는 듯 반갑게 손을 흔든다.

‘가자.’

노인이 웃으며 내 등을 툭 친다. 그리고 빨리 따라오라는 듯 일행들을 향해 걸어갔고, 곧 그들과 같이 소란스럽게 사진을 찍을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침을 묻혀 머리를 정리하는 용팔이, 멍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두식이, 예쁘게 자세를 잡는 김혜정과 박다혜. 그리고 어깨동무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강 형사와 노인.

그리고 나는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내 자리를 향해 뛰어갔다.

* * *

[사진 밑에는 ‘가족들과 함께’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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