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살아 숨 쉬는 존재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고요한 도시. 나는 그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길 위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불어오는 찬 바람과 정적이 감도는 길가. 긴장과 경계로 버무려진 감정을 삼키며 나는 행동을 개시한다.
가장 먼저 수없이 많은 선들이 그어져 있는 지도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건물을 향해 고개를 들어 익숙한 방송국 로고가 적힌 큰 건물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속보로 이동하길 대략 2시간, 약품의 효과로 놈들과 마주하지 않으니 초행길도 이렇게 순조로웠다.
나는 여자가 표시해 준 위치에 정확히 도착했다는 것을 확인하며 에덴에서 우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사무실에 무전을 전달했다. 주고받은 짧은 무전이 끝나고, 나는 칼바람에 말라 버린 입술을 핥으며 조용히 휘파람을 불었다.
‘----.’
방금까지만 해도 이 큰 길가에는 버려진 차들과 나밖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내가 휘파람을 불자 근처에서 모습을 숨기고 있던 일행들이 우수수 빠져나와 총과 함께 살벌한 눈을 빛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일사분란한지, 내 주위를 장악하고 있던 고요한 분위기는 물에 젖은 휴지처럼 순식간에 긴장감으로 물들어 버렸다.
무슨 일이 터질 것만 같은 폭풍전야, 하지만 그 폭풍의 도화선을 붙잡은 건 우리 스스로였기에 두려움과 공포는 없었다. 일행들은 주변을 경계하며 긴장을 놓지 않았고, 곧 다음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귀신처럼 은밀한 이동을 보여 준 노인은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귓가에 속삭였다.
‘확실히 뭐가 있긴 했나 보네.’
노인의 눈동자에는 만신창이가 된 방송국 건물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노인과 마찬가지로 건물을 지켜보던 나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는 한마디에 동의를 보냈다.
노인의 말대로 방송국 본사는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불의 탄 그을림이 있었고, 큰 폭발로 인해 생긴 구간이 존재했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괴물 놈들의 짓이 아닌……, 인위적인 파괴의 흔적이었다.
나는 꾹 쥐고 있던 손을 앞으로 펼쳐 짧은 수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진입, 나는 조용히 들려오는 발소리조차 주의하며 인위적으로 반파되어 있는 방송국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일행들은 기다렸다는 듯 총을 앞으로 들었고, 내 뒤를 따라오며 주변에 보이는 위험을 경계했다. 장면은 순식간에 바뀌고 우리는 곧 정문을 지나친다.
나는 걸어가는 와중에 손을 뻗어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들과 그을림을 손으로 만졌다. 하지만 생생함이 사라진 흔적들은 덧없이 흘러간 시간들을 가리키고 있었다. 상당히 시간이 흐른 현장. 그리고 내가 정문을 지나 본사 건물로 들어가자 일행들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 손전등을 꺼내 앞을 밝혔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날씨가 좋았다. 하지만 에덴을 출발하자마자 태양은 기다렸다는 듯 구름 속에 모습을 감췄고, 맑기만 하던 하늘은 먹색 구름들로 가득해졌다.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한 축축한 공기와 분위기. 그 때문인지 본사 건물 내부는 상당히 어두웠으며, 사람이 본능적으로 가기를 꺼리게 되는 을씨년스러움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현장을 수십 번이고 넘어온 나와 일행들은 익숙한 듯 그 두려움을 몰아냈고, 곧 1층 로비를 돌아다니며 다른 위험이 없는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나는 노인과 함께 아무도 없는 안내 데스크로 걸어가 그을림이 묻어 있는 건물 지도를 살펴보았다. 총 12층으로 되어 있는 넓은 본사 건물, 꼭대기까지 올라가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이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며 나에게 말했다.
‘11층이라고 했던가?’
마지막으로 전원이 나가기 전 들었던 그의 위치는 대략 11층, 하지만 두려움에 찌들어 있는 남자가 어떤 방향으로 도망갔을지는 예상하기 힘들었고, 결국 다소의 시간이 필요한 수색 임무를 통해 남자의 신병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섣부르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원을 나눌 것도 없이 가장 안전한 포지션으로 취하며 아래층부터 꼭대기까지 전부 확인해야 한다. 나는 총기의 안전장치를 풀며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최대한 빨리 놈부터 처리하는 거로 합시다.’
변종 놈이 사냥감을 포기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마 어젯밤 내내 건물 근처 길가와 내부를 돌아다니며 보지 못했던 사냥감을 찾아다녔을 것이다. 피부를 간지럽히는 분위기와 포식자의 향기. 그동안 수없이 많은 변종들을 죽여 왔던 나는 이 건물에 놈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일행들 전원은 내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고, 오직 용팔이만이 초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사람은 살아 있을까요?’
시간이 꽤 흐른 뒤 온 구조다. 다른 일행들도 그 점을 걱정하고 있는지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창식이라는 남자에게 살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은 알려 줬었다. 아마 잘못된 판단에서 오는 돌발행동만 아니라면, 그가 살아 있을 확률은 몹시 높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구조하기에 앞서, 남자와 우리에게 위협이 되는 변종을 처리하고 구역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일행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남자를 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일행들의 안위였으니까.
조급해 하지 말자. 차근차근…… 나의 영역을 만드는 것이다. 그동안 경험이 주었던 교훈을 곱씹으며, 난 일행들에게 조용히 외쳤다.
‘이동.’
일행들은 360도를 모두 경계할 수 있는 포지션을 취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싸늘한 바람이 분다. 우리는 그 바람을 가로질러 1층을 한 바퀴 돌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올라가는 계단에 그을림과 먼지에서 위층으로 향한 남자의 발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남겨진 흔적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가 흔적을 향해 손을 뻗자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발자국 옆에 찍힌, 또 다른 발자국. 그곳에는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거대한 흔적이 비교적 최근에 찍힌 듯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으으.’
용팔이 뒤에서 걷고 있던 박다혜는 그 기괴한 흔적을 발견하고 피부에 소름이 돋았는지 천천히 피부를 쓸어내린다. 그것으로 우리는 놈이 건물 안에 있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놈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하지만 공포감보다는 사냥감을 쫓는다는 생각으로 우리는 걸음을 옮겼고, 곧 각 층을 확인하며 위로 더 위로 향했다.
* * *
시간은 노도와 같이 흘러갔다. 1시간이 걸려 올라온 10층. 놈과 남자의 흔적은 5층에서부터 사라져 있었기에 특정한 위치를 단정 지을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남아 있는 층에 놈과 남자가 있다는 것. 우리는 올라가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며 짧은 재정비를 했다. 그리고 노인은 10층 마지막 방에서 나오며 바닥에 침을 뱉는다.
‘똑똑한 녀석이야. 보통 놈들이라면 진즉에 소리를 듣고 나왔어야 했는데.’
일행들에게 소리와 기척을 숨기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았었다. 왜냐하면, 놈이 포식자의 자만심을 가지고 우리를 먼저 공격하길 기다렸으니까. 하지만 놈은 대놓고 소리를 내며 올라오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심지어 내가 감지할 수 있는 살의조차 공기 속에 꽁꽁 감춰 버렸다.
그래, 간혹 이런 녀석이 있긴 했다. 적어도 수십 마리의 사람을 잡아먹어 본 능숙한 포식자. 아마 나와 노인은 5층을 지나는 시점부터 그 사실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놈은 분명 우리의 존재를 자각했고, 심지어 위치까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놈은 자신이 가장 유리한 상황을 기다리며 계속해서 올라오는 우리를 기다릴 뿐이었다.
‘바로 올라갑니다.’
다만 놈은 착각을 하고 있었다. 여태 자신이 죽이고 먹었던 인간들과는 다른 사냥꾼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난 감정의 떨림을 그대로 마음속에 묻었고, 두려움과 공포를 기억과 경험으로 이겨 내었다.
종의 역전. 피라미드의 역주행. 이 순간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무런 동요 없는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리자, 사방에서 노리쇠가 당겨지는 소리가 순식간에 울려 퍼졌다.
나는 선두, 그리고 뒤로는 경험이 가장 많은 일행들이 뒤따라 온다. 총구와 손전등은 정면을 향했고, 놈이 보이길 기다리는 날 선 감각이 피부를 핥고 지나간다. 저 앞에는 아마 거미줄을 치고 사냥감을 기다리고 있을 거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 놈의 거미줄을 건드렸을 하루살이들과는 다른 우리는 그 공간을 가로지른다.
왼쪽 이상무 오른쪽 이상무, 나와 일행들은 순식간에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고, 남자와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11층에 당도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손전등으로 사방을 밝히며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분위기와 공기가 급류를 탄 듯 뒤바뀐다. 전에는 없었던 긴장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타박, 타박, 타박.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들이 휘날리고, 그 사이로 차가운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눈앞에선 손전등이 정신없이 점멸했다. 어둠이 쌓인 공간에는 어김없이 빛들이 밝아왔고, 무언가 있을 것만 같은 창문에는 우리의 모습이 조용히 비친다.
한걸음, 한걸음.
나는 이동할 때마다 주변에 있는 공간을 모두 이해하고 관찰했다. 그리고 곧 어둠과 정적이 익숙해지고 있을 때쯤, 갑자기 용팔이가 자리에 멈추며 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냈다.
‘--주 - 세요…….’
평소 미어캣처럼 소리를 잘 듣던 용팔이다. 그리고 지금 들려오는 이 소리 또한 우리보다 먼저 들었는지 용팔이는 일찍이 걸음을 멈추며 나를 불러 세웠다. 그래, 분명 환청이 아닌 실제로 들려온 소리였다. 나는 그대로 오른쪽 손을 올려 전진을 막았고, 곧 일행들은 복도 양쪽으로 흩어지며 주변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나는 가장 앞에 서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숨소리를 죽였다. 그러자 저 복도 끝에서 용팔이가 들었던 소리가 서서히 울려오기 시작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미약한 소리였다. 주-세요……. 주세요? 내가 소리를 듣고 곱씹는 그 순간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기다렸다는 듯 커지기 시작한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사람이 내는 소리, 거기다 남자 목소리였다. 순간 내 몸은 움찔거렸고, 노인은 조용히 미간을 찡그린다. 하지만 우리 뒤에 있는 일행들은 놈을 처리하기 전 남자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는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나에게 시선을 보냈다. 일이 수월하게 풀려서 다행이죠?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음에도 일행들의 생각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내 뒤에 있던 용팔이가 기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복도 끝에 숨어 있었나 봐요.’
남자를 찾았다. 일행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 내가 이동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 끝을 향해 손전등을 비췄다. 손전등이 어둠을 뚫고 향한 그곳에는 화장실이 있었고, 살려달라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그 목소리는 떨리고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구조를 원하고, 자신을 살려주길 원한다. 꼭 죽음을 앞둔 듯한 그 애절함에 일행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계속해서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왜 지시를 내리지 않지? 왜 가만히 있는 거지? 일행들은 구조해야 할 사람 앞에서 조급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결국 박다혜가 입을 열어 시키지도 않은 말을 내뱉으려고 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저희가 구하…….’
읍, 하지만 그 입을 틀어막은 건 다혜 뒤에서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던 두식이었다. 우리 두식이, 시키지 않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며, 항상 나의 입만을 보고 움직인다. 그리고 내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은 이유를 노인 다음으로 눈치챘는지 다혜의 돌발행동을 재빨리 막아 주었다.
다혜는 버둥거렸지만, 곧 심각한 분위기에 눈동자를 떨었다. 그리고 노인이 한숨을 내뱉으며 일행들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내가 말했지, 닥치고 동윤이 말 들으라고.’
많은 뜻이 함축된 말이었다. 일행들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눈치를 살폈고, 나는 총을 천천히 들어 총구를 남자 화장실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기를 1분, 하염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서서히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세요-.살려주살려주세요?’
아까는 분명 사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꼭 고장 난 라디오처럼 살려달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남자 목소리, 여자 목소리, 늙은 노인의 목소리와 앳된 아이의 목소리.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쉴 새 없이 바뀌며 살려달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꼭 주파수를 조정하는 라디오처럼 듣기 싫은 노이즈가 끼어 있었다.
굉장한 이질감이 느껴진다. 그래, 이쯤 되면 저 앞으로 가야 한다는 일행들도 상황을 이해했을 것이다. 나는 남자 화장실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로 들어온 남자는 못 잡은 모양이지?’
뚝, 그 순간 화장실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끊긴다.
놈은 앵무새처럼 사람 목소리를 따라 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따라 하는 목소리들은 그간 자신이 죽여 왔던 희생자들의 목소리일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였는지, 놈의 소름 끼치는 목소리는 수백 명이 넘는 희생자들의 넋을 담고 있었다.
놈은 살려 달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마지막으로 죽였던 사람이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 걸까?
아마 남자는 무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놈이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사용한 목소리는 분명,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목소리와는 다른 목소리였으니까. 나는 일행들에게 수신호를 보냈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대검을 총기에 장착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남자 화장실 입구에서 머리 하나가 빼꼼 모습을 드러내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마치 수줍은 아이처럼 눈과 이마만을 내민 그놈은 기괴하게 목을 꺾으며, 나와 일행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꿈틀거리는 눈동자와 돌아가면 안 되는 방향으로 흔들리는 목, 마주한 눈동자는 너무나 붉으면서 순수한 살의를 담고 있어 소름이 끼쳤다.
‘여기로들어온남자는못잡은모양이지여기로들어온남자는못잡은모양이지여기로들어온남자는못잡은모양이지여기로들어온남자는못잡은모양이지?’
정신없이 일행들을 돌아보던 놈의 눈동자가 멈췄다. 멈춘 그 눈동자는 오로지 나에게 꽂혔고, 놈은 다시 한 번 시끄럽게 떠들며 아까 내가 했던 말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스윽-.
그리고 눈과 이마만을 내밀고 있던 놈의 머리가 천천히 남자 화장실 쪽으로 들어갔고, 나는 지체 없이 몸을 움직여 굳어 있는 일행들의 생각을 깨웠다.
‘김혜정, 용팔이! 계단 틀어막아.’
유일한 퇴로를 차단하고, 놈이 도망갈 기회를 주지 않는다. 내 지시가 시작되자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혜정과 용팔이는 허둥지둥 계단으로 달려갔다.
반짝, 반짝 눈앞에서 점멸하는 손전등이 놈이 들어가 있는 화장실 표지판을 밝혔다. 그리고 나는 그 손전등을 지표 삼아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방아쇠를 잡은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 눈앞에는 살의가 번뜩거렸고, 분비된 아드레날린은 싸워도 상관없다는 의미를 확실하게 전달해 온다. 심장에서 시작한 박동 소리, 혈액들은 정신없이 산소를 날랐고, 입에서는 증기처럼 입김이 새어 나온다.
나는 놈이 재생해 준 희생자들의 단말마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건 우리밖에 없어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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