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회색 도시는 항상 죽음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생존자들은 비정한 현실을 어느 샌가부터 인정하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이가 죽고, 많은 이가 삶을 포기한다. 어쩌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도시 위에 숨 쉬는 생명체는 전부 사라져 버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철을 담금질하면 할수록 단단해지듯, 아직도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생존자들은 더 노력하고, 이 지옥 속에서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바퀴벌레처럼 숨어들어 놈들을 피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 오늘도 목숨을 건다. 이 잔혹한 현실을 인정하고 바뀌기 위해 노력할 때, 인간은 비로소 생존하는 개체가 되는 것이다.
‘자, 한 무더기 더!’
노인은 경쾌한 걸음으로 내 책상까지 다가왔으며, 아까보다 많은 서류를 책상 위에 올려 주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압도적인 업무량, 하지만 나와 같이 일을 해야 하는 노인의 얼굴은 생각보다 상쾌해 보였다.
왜냐하면……, 노인이 처리해야 할 업무는 아까 전부 끝나 버렸으니까.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해가 지기 시작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노인을 향해 단체장의 근엄함을 담은 얼굴로 부탁했다.
‘좀 도와줘요.’
하지만 노인의 대답은 여전히 똑같았다.
‘까고 있네.’
이런 날이 지속한 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일기를 쓰지 않음에도 시간은 노도와 같이 흘러갔고, 내가 처리해야 할 업무도 배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수용해야 할 유입 인원들이 점점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피난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에는 도시에 남아 있는 한정적인 물자와 식량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에 있었다.
나는 장담할 수 있었다. 생존자들이 길게 살아남을수록 한정된 식량은 바닥을 들어낼 것이고, 심지어 마시는 물마저 걱정해야 할 상황이 오게 될 것이다. 그리고 물자의 부족함은 결국 사람들을 서로 싸우게 하고, 제이의 제삼의 부랑자들이 등장시킬지도 모른다.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갈 단초는 이미 새장의 문이 닫힌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빠듯한 살림에도 유입 인원들을 막지 않았다. 그것은 또 다른 재앙을 막기 위한 발버둥임과 동시에, 내 가슴속에 지향점처럼 박힌 목표를 향한 디딤발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며 조용히 생각했다.
생존자 집결.
묵직한 문장임과 동시에 오만하고 섣부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태 우리를 살아남게 해준 스스로의 판단과 직감을 믿었고, 곧 이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물론 바깥 상황을 모르는 에덴의 내부에서 사소한 잡음이 생기기는 했지만, 나를 향한 신뢰와 믿음은 그 혼란을 한순간에 수습하기 충분해 보인다.
우리는 버려졌다. 구조는 기대할 수 없다. 그 두 가지 생각은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나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하지만 오뚝이처럼 일어나고, 또 일어났던 나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빠져나갈 돌파구를 찾기 위해 현실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 짧은 문장은 혼란스러운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을 만했다.
* * *
“이 지옥을 빠져나가자.”
[그는 이 문장을 적는 그 순간까지도 고민했는지 글자가 흔들렸다.]
* * *
막연하다. 이 결론을 듣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를 미친 자라고 욕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결코 빵과 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배가 불러도 불안했고, 죽음을 피해도 무서웠다. 왜냐하면, 굶주린 내일과 도망가야 하는 미래는 억겁의 악몽처럼 계속 반복될 테니까.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내일이 필요했다. 내가 고시원을 빠져나올 때 스스로에게 했던 맹세처럼. 그리고 아이를 구하고 목숨을 이어가자는 삶의 목적처럼. 저 먼바다를 항해하기 위해선 우리에게 그런 희망이 필요한 것이다.
더 나아질 수 있다. 행복한 내일은 올 것이다. 사람들과 나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짧은 문장이었고, 그러기 위해선 더 많은 목소리와 더 많은 손이 필요했다. 우리는 생존이라는 유대감을 가지고 모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하는 현실과 진실을 숨기는 어둠을 향해 여태 그래왔듯 삶의 발버둥을 쳐야 한다.
우리는 아직 살아 있다고.
* * *
‘그 여자 덕이 컸어. 봉쇄 반경이 어디까지인지 나오니까, 수색도 더 쉽고 말이야.’
노인이 나에게 말했다. 아까 전 분명 일을 도와줄 생각이 없다고 말하던 노인은 어느새 책상 근처에 앉아 내 업무를 도와주고 있었다.
투덜투덜, 구시렁구시렁.
비록 입으로는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지만, 업무를 보는 손만큼은 빠르게 그지없다. 나는 노인이 보지 못하게 살며시 웃었고, 곧 시선을 피해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는 해가 물러나고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에덴의 주민들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하루를 마무리할 준비를 한다. 나는 완전히 지기 시작하는 황혼을 아련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다가 책상 앞에 있는 전등에 스위치를 누르고 오늘도 밤샌 철야를 준비한다.
‘형님! 밥 먹고 하세요!’
그 순간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촐싹거리는 용팔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를 들은 나는 때맞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일행들이 숙소에서 저녁을 먹을 시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수련이가 우리를 잊지 않고 저녁밥을 챙겨 준 모양이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인은 문을 왜 그렇게 세게 여냐며 용팔이를 향한 잔소리를 잊지 않는다.
용팔이는 히히 웃었고, 곧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며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용팔이의 손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의문이 드는 철 배달통을 들려 있었다. 중화 반점? 어디 가서 또 쓸데없는 걸 주워온 모양이다.
‘너는 먹었어?’
나는 매번 밥을 배달해 주는 용팔이에게 물었다. 그러자 용팔이는 철 배달통을 드르륵 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당당히 자기 밥그릇을 책상 위에 턱 하고 올려놓는다. 대놓고 같이 먹겠다는 모습, 뻔뻔하면서도 용팔이 특유의 천연덕스러움이 느껴진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과 나는 그간의 피곤을 잊으며 소리 내서 웃었고, 곧 식사가 시작되었다. 메뉴는 삶은 감자 3알과 묽은 된장국. 물론 좋은 식사는 아니었지만, 따뜻하고 충분히 맛있었다.
식량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였다. 물론 단체장이 죽기 전 비축해 둔 식량이 아직 상당수 남아 있었지만, 점점 늘어나는 인원들과 앞으로 걸어가야 할 미래를 위해서는 지금부터라도 식량을 아껴 먹을 필요가 있었다. 하루 3식에서 하루 2식으로. 물론 영양분 부족이 없게 하려고 일주일 단위로 2부제를 선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단체장인 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뭐……. 가끔 강수련이 내 감자에 삶은 달걀을 넣어두는 꼼수를 부리기도 하지만.
‘어제 보다 유입되는 인원이 2배 정도 늘었어요. 점점 더 많아질 것 같은데, 어디 소문이라도 도는 걸까요?’
일기를 읽는 당신도 믿기지 않겠지만, 이 촐싹이 용팔이가 피난민 출입국 사무소를 총괄하고 있는 팀장이다. 물론 사람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 강 형사가 같이 일하고는 있지만, 과거를 생각해 보면 조금 걱정되는 것은 사실. 하지만 내 걱정과는 다르게 사람들을 유하고 호의적으로 대해 주는 용팔이는 출입 사무소에서 빠지기 힘든 유능한 팀장이었다.
‘숫자는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받아.’
나는 씹은 감자를 된장국으로 넘기며 대답했다. 그래, 아마 입에서 입으로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봉쇄 지역 곳곳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것이다. 도시 정중앙에 마지막으로 남은 요새를 알아? 도시 전설처럼 작은 문명을 보존하고 있는 에덴.
그 낙원은 생존자들이 마지막으로 가지는 꿈의 이상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집결하고, 하나의 힘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용팔이를 바라보며 이 말을 잊지 않았다.
‘신상 조사만 철저하게 해.’
내가 부랑자들의 씨를 말려놨다지만, 도시에 나쁜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분란을 일으킬 수 있는 범죄자부터, 악질 범행을 한 적이 있는 전과자까지,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만, 적어도 1차 필터가 되어 걸러줘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책임지고 하고 있는 용팔이는 굳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강수련이 따로 싸 준 삶은 달걀을 노인과 용팔이에게 반반씩 잘라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부턴가 식사를 급하게 하는 게 버릇이 돼서 그런지 남들보다 빨리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물론 노인과 용팔이는 그 모습이 익숙한 듯 아무런 말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서류를 펼쳐 들었다.
‘엥?’
그리고 그 순간, 쩝쩝거림과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이 들려오던 사무실에 바보 같은 의문문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된장국을 후루룩 마시던 노인도, 한참 업무에 집중하던 나도 얼떨결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용팔이가 무언가를 든 채 바보 같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그리고 용팔이가 들고 있는 것은 방송국 여자가 가지고 있던 위성 전화기였다.
우리의 만능 공돌이 털보 아저씨는 고장 난 위성 전화기마저 뚝딱 고친 뒤 우리에게 가져왔었다. 물론 당장 쓸 일은 없었기에 어제 아침부터 책상 구석에 올려두고만 있었다. 하지만 용팔이는 호기심 때문인지 그 전화기를 만지작거렸고, 곧이어 저런 바보 같은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용팔이가 손을 부들부들 떨며 우리에게 말했다.
‘형, 형님……, 이거 전화 왔는데요?’
달그락.
정적이 이어지고, 그 침묵 사이로 노인이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나는 그 소리를 시작으로 서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앞쪽으로 다가가 용팔이가 들고 있는 위성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그러자 위성 전화기 화면에는 옅은 불빛과 함께 정말 전화가 왔다는 신호가 조용히 점멸하고 있었다. 나와 같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노인이 침을 삼키며 용팔이에게 말했다.
‘용팔아, 숙소로 돌아가 있어.’
‘네? 왜요? 왜 저는…….’
용팔이는 아직 진실을 모른다. 그저 세상이 망했다고 생각한 용팔이는 갑자기 걸려온 위성 전화에 많이 놀란 듯하지만, 이 전화기가 울리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우리보다는 덜 혼란스러울 것이다. 용팔이는 처음에 영문을 몰라 하다가 거듭되는 노인의 명령과 내 지시에 풀이 죽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저 한쪽에서 우리가 먹다 남긴 감자와 된장국이 쓸쓸하게 식어 갔고, 우리의 심장도 그와 비슷하게 식어 갔다.
전화 신호는 오래도 간다. 상대측에서는 방송국 여자가 꼭 받았으면 좋겠는지 집요하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위성 전화기를 꾹 붙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처럼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노인을 바라봤다.
‘그 여자……, 그 방송국 여자 빨리 불러와요.’
구금과 동시에 경계도 풀렸다. 일반적인 에덴의 주민처럼 숙소를 배정받은 그녀는 우리와의 협력을 위해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고,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사무실 근처에서 살고 있었다. 아마 지금쯤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재빨리 캐치한 노인은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문을 뛰쳐나갔고, 나는 책상 위에 힘없이 앉아 점멸하는 전화기 화면을 바라보았다.
여자에게서는 딱히 언급이 없었던 내용이다. 왜냐하면, 그 방송국 여자는 자신이 들고 온 위성 전화기가 완전히 고장 난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털보는 전화기를 멀쩡히 고쳐다 주었고 지금과 같은 애매한 상황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혹시 그녀가 처음부터 우리를 속였던 건 아닐까? 아니, 그것은 정황상 말이 되지 않는다. 금지 지역을 몰래 들어온 그녀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부를 적으로 둬야 할 것을 각오했었다. 신뢰와 믿음이 아닌, 상황이 만들어 낸 공동 전선을 우리와 유지할 필요가 있는 여자는 처음부터 나를 속인다는 강수를 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기억이 있었다. 배가 전부 들어나 내장부터 먹히기 시작했던 카메라맨. 끝까지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죽어야 했던 그 카메라맨. 그들은 과연 이 위험한 곳을 둘만 들어왔을까? 나는 재빨리 침을 삼켰고, 마지막으로 남은 경우의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그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본능적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남아 있는 사람이……, 더 있는 것 같다.
틱-.
(서, 서 선배! 무사해요?!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요! 죽은 줄 알았잖아…….)
전화기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이나 여린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남자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헐떡였으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울먹이고 있었다. 서 선배? 분명 우리 측에 있는 여자의 이름은 서민정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선배라고 지칭하는 대상이 올바르다는 소리. 역시나 이 도시에 들어온 기자들은 내가 발견한 그 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상대측 남자는 숨을 죽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우, 우리가 찾던 게 본사 건물에 다 남아 있었어요. 이제 이것만 가지고 나가면 되는데……. 그러면 되는데, 시발……. 여기에 뭔가 있어요. 여기에 사람이 아닌 뭔가가 있다고…….)
발끝부터 시작한 소름이 머리 위까지 솟구쳐 오른다. 나는 온몸에 들어가는 힘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거친 숨을 후욱 내뱉었다. 마치 긴 방황 끝에 돌파구를 찾은 느낌이었다. 나는 손안에 흥건한 식은땀을 닦았다.
여자는 특종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이 도시로 몰래 숨어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 특종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것? 아니, 이곳에 생존자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었다. 그렇다는 것은 목적의 전제부터가 잘못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여자는……. 아니, 이곳으로 숨어든 그 기자들은 분명 다른 것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다.
본사,
그들이 찾던 것.
모든 로직이 한곳으로 모였을 때, 문이 열리며 노인과 여자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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