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손목시계를 확인하자 하교 시간까지 1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정적이 감도는 허름한 교문에서 채연이와 아이들이 하교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고, 손안에는 언제나 아이들이 먹을 간식들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수염과 머리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리고 허름한 임무복을 벗고 은테 안경이 마련해 준 깔끔한 정장을 챙겨 입었다. 언제 입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정장, 나는 그 어색한 옷감을 만지며 한참 동안 몸을 뒤척여야 했다.
바람이 부는 운동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상념에 빠진다. 앞으로 받아야 할 인수인계도 많았고, 복잡한 절차도 수십 가지였다. 하지만 모든 설명을 건너뛰고 결과만을 말하자면……. 나는 죽은 단체장의 뒤를 이어 에덴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다.
물론 지금 이 작은 종이에는 써 내려갈 수 없는 긴 이야기였지만, 이 글을 읽는 나와 당신이라면 이 여정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냥 스스로가 대단한 자리에 올랐다는 자랑이 아닌, 감회가 새롭다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불어오는 찬 바람에 입고 온 정장이 펄럭인다. 신고 있는 고급구두는 불편하기만 했고, 온몸은 자세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모를 만큼 어색했다. 하지만 그만큼 새로운 공간과 사람들 사이에 도달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다.
무겁다. 부담스럽다. 언제나 단체장이 강조했던 숭고함과 사명감이라는 게 어떤 기분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 사이에 천천히 눈을 뜨며 문이 열리는 학교를 바라보았다.
딸랑-, 딸랑.
학교 건물 문에는 누가 설치했는지 모르는 작은 종들이 달려 있었다. 바람이 불거나 문이 열릴 때면 항상 깨끗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울리고는 했는데, 매번 방문할 때마다 정말 좋은 종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 종소리를 조용히 쫓으며 바닥에 한가득 싸 온 간식을 내려놓았고, 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오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나는 쏟아져 나오는 인파 속에서 내 아이들을 금방 발견했고, 아이들도 많이 변한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심장이 천천히 뛴다. 그리고 차가운 바람에 식었던 내 피부가 점점 따뜻해졌다. 저쪽에서 채연이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빠!!!!!!!!!!!!!!’
채연이는 뭐가 그리 급한지 신발 주머니를 꼭 부여잡고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그 주변에 있던 우리 아이들도 급하게 뜀박질을 시작했고, 에덴으로 귀환한 나를 환한 미소로 맞이해 주었다. 종소리가 딸랑거린다. 그리고 너무나 밝은 햇볕이 나와 아이들을 쬐기 시작했다. 난 아이들과 똑같이 양팔을 펼치며 오랜만에 환하게 웃어 보인다.
‘아빠!’
가장 앞에서 뛰고 있던 채연이가 날다람쥐처럼 날아와 내 품에 쏙하고 안겼다. 언제부터 이렇게 빨라지고 씩씩해진 거지? 나는 예전보다 더 무거워진 채연이를 받으며 어이쿠 소리를 냈고, 품속에 안긴 아이를 꼭 안았다.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구나. 비록 짧은 시간의 불과했지만, 채연이는 모든 고통과 아픔을 털어 내며 평범한 여자아이로 성장하고 있었다.
‘밥은 잘 챙겨 먹었고? 친구들하고는 안 싸우지?’
한참 직장 생활을 할 때 딸들이 있는 주위 팔불출 선배들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있는 채연이를 볼 때마다, 그 선배들이 이제야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채연이는 내가 하는 물음에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내 품에서 얼굴을 떼지 않았다. 팔과 가슴팍에서 나를 꼭 끌어안는 아이의 힘이 느껴졌다.
‘걱정 많이 했어?’
내 상체에 가해지는 작은 힘만큼이나 아이가 걱정했을 시간이 느껴졌다. 나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고, 아이는 잔 떨림과 함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 지나고 내 품에서 채연이가 조용히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래, 걱정을 안 했을 리가 없다. 항상 출장이라는 핑계로 진실을 숨겨서 그렇지, 내 몸에 남아있는 상처를 눈치 못 챌 아이가 아니다. 소문,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 채연이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 주며 남몰래 눈물을 흘릴 때가 많았을 것이다. 나는 그 마음을 알기에 지금은 아무 말 없이 있으며 아이의 생각과 배려를 존중해 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가 불어오는 찬 바람에 문득 고개를 들었다. 주변에는 우리 아이들이 모여 나와 채연이의 모습을 똘똘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재회의 순간을 기다릴 줄도 아는 착한 아이들. 나는 저절로 웃음이 나오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채연이를 안아 올렸다.
해가 황혼으로 가는 시간이 되자 바람이 생각보다 쌀쌀하다. 이곳에 계속 있으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주변에 있는 우리 아이들을 하나하나 챙기며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그래, 커튼콜은 내렸고, 행복했다는 결말이 쓰였다. 지금만큼은 고통스러웠던 과정을 다 잊어버리고 결국 다시 만났다는 결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 * *
[이다음 장부터는 채연이와 아이들이 그린 낙서들이 가득했다. 아마 그가 잠이든 사이에 그린 것 같은데, 그는 굳이 낙서들을 지우지 않았고 고스란히 흔적을 남겨두었다.]
* * *
‘아이고, 젊은 단체장님 눈 좀 떠봐.’
나는 내 뺨을 당기는 고통에 작은 신음을 내뱉었고, 완전히 꺼져 있던 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당긴다. 아, 의식이 드는 순간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머리가 부서질 듯 몰려오는 두통과 속이 아픈 숙취였다.
나는 무거운 눈을 억지로 뜨며 빛이 들어오는 정면을 바라봤고, 그곳에는 심통이 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노인이 있었다. 악 소리가 나올 만큼 머리가 아팠고, 목구멍과 혀는 심한 갈증을 느끼며 물을 갈구했다. 노인이 혀를 차며 나에게 말한다.
‘평소에는 술이라고는 쳐다보지도 않던 놈이 어제는 왜 그렇게 마셨어?’
어김없이 들려오는 잔소리. 하지만 노인은 내가 깨어나자마자 무엇을 찾을지 알고 있다는 듯 시원한 생수 한 병을 건넸다. 주변을 둘러보며 물을 찾던 나는 허겁지겁 그 병을 받아들었고, 재빨리 입으로 가져간다.
꿀꺽, 꿀꺽.
밖에 내다 놨는지 몹시 차가운 생수는 갈증과 함께 끓어오르는 속을 진정시켜준다. 그리고 생수가 반쯤 비워지자 흐릿했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했다. 아, 도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필름이 끊긴 거지? 갑자기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다른 사람들은요?’
나는 입가에 묻은 침을 닦으며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네가 직접 보라는 듯 주위를 한 번 둘러본다. 그러자 내 짧은 시야는 돌아오는 정신과 함께 넓어지기 시작했고, 곧 주변을 둘러보며 내 주위 상황을 살펴보게 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말 그대로 개판. 애, 어른 할 것 없이 어제 파티의 여파를 고스란히 맞은 일행들은 이곳저곳에 너부러져 사이좋게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다리를 꼭 붙잡는 압박감이 느껴진다.
‘…….’
시선을 내리자 용팔이가 보였다. 다리 밑에서 뻗어있던 놈이 잠결에 여기까지 굴러온 모양이다. 멍청하게 헤헤 웃으며 내 다리를 꼭 끌어안는 용팔이를 보고 있자니……. 어제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하-.
입에서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고, 나는 그대로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용팔이의 입안에 넣어 주었다. 이 까불이 놈. 어제 나를 이렇게 취하게 했던 원흉이 이제야 기억이 났다. 냄새나는 양말을 입에 문 용팔이는 인상을 찡그리며 컥컥거렸고, 나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노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인파의 밭을 천천히 지나간다.
‘수련이는 좀 어때요?’
뒤풀이 파티에 유일하게 참가 못 한 인원이다. 어젯밤 내내 생각이 나던 그녀의 얼굴. 나는 현관문을 열며 아침 해를 맞이했고, 곧 병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노인은 밝은 미소를 지으며 긍정적인 대답을 해 주었다.
‘회복이 빠르다고 하더라. 아마 내일쯤에는 만날 수 있을 거니까, 너무 조급해 하지 마.’
잘 회복되고 있다, 이 짧은 문장만큼 나를 안심시키는 단어는 없었다. 나는 해가 들어오는 현관 앞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그녀의 웃음을 회상했다. 조급해하고 있다? 그래,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노인의 눈에는 그게 다 보이는 모양. 나는 엉큼한 노인의 시선을 애써 피했고,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생수를 단숨에 마셔 버렸다.
‘해장국이라도 끓여 주랴?’
‘됐네요.’
그래, 나도 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를 재촉하는 노인의 농담을 새침하게 받아내며 빈 생수통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잠깐의 여유는 충분히 즐겼다. 이제 술기운을 떨쳐 내고 바쁜 아침을 맞아야 할 시간이었다.
나는 노인과 함께 뒤돌아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갔고, 너무나 익숙한 중앙건물의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일해야 할 곳은 큰 사무실이 아닌 단체장과 간부들이 근무하던 이 건물이었다. 그날 있었던 습격의 여파는 과거의 아픔처럼 전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깔끔하고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복도를 걸을 때마다 내 기분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다. 나는 복도에 서서 경계를 해 주는 경비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해 주며 단체장실의 문을 열었다.
[동윤 씨, 식사는 하셨습니까?]
문을 열자 향긋한 유자 냄새가 확 풍겨왔고, 다시는 들리지 않을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흘러나온다. 흐릿한 형체, 그 무형의 형체는 이제 과거로 사라진 한 사람의 흔적이었다. 나는 눈을 천천히 뜨며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그의 빈자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그곳을 향해 걸어가며 바뀐 기류와 공기를 피부와 정신으로 느꼈다. 모든 게 바뀌었다. 과거의 시간은 몰려오는 조류에 너무나 손쉽게 쓸려지나가 버렸다.
단체장이 항상 앉아 있던 자리에 앉자, 그가 봤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간부들이 줄줄이 앉아 있던 회의실 의자, 그리고 저쪽 끝에서 앉아 있던 한 남자. 나는 아지랑이처럼 사라지는 그 남자를 보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짙은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내 책상 근처로 다가온 노인이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라마 찍냐, 지금? 일해야지, 뭐해?’
하여튼 낭만이 없다. 하지만 잔소리가 무서운 웃으며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네,’
* * *
‘어제 말한 곳은 박대박, 그 사람이 출발했다.’
노인이 나를 향해 말했다. 눈앞에서 정신없이 서류가 날아다니고 책상 앞에 있는 큰 지도에는 노인이 긋는 선이 굵게 그어진다. 박대박? 어제, 같이 술을 퍼마셨을 텐데, 나보다 일찍 일어나 먼저 출발해 버린 모양이다.
원래는 내가 갔어야 할 곳이지만, 박대박은 절대 일선에 서지 말라며 나를 뜯어말렸다. 그리고 진순이와 한 약속을 위해 나 대신 그쪽으로 출발했다.
‘문제없겠죠?’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류를 뒤적거리는 노인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코웃음을 피식 치며 지금 나랑 농담하냐는 얼굴로 대답한다.
‘다들 총기에 소음기까지 지참한 중무장이야. 그리고 박대박하고 그쪽 사람들, 우리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한 놈들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라.’
박대박과 그 무리들. 사실상 우리 일행들을 제외하고도 충분히 한 팀을 이룰 수 있는 베테랑들이다. 그리고 단체장이 된 지금은 구조팀에 포함되면서도 또 다른 임무에 투입할 수 있는 준비된 무장 인원이기도 했다.
유난히 나를 신뢰하는 박대박, 그런 박대박을 믿는 나. 어디서 오는지 모를 묘한 유대감은 사람들을 구하는 임무쯤이야 충분히 그들에게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을 불러왔다. 물론 노인도 이 인선에는 불만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단체장실에는 한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이 넓은 단체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은 나와 노인밖에 없었으며, 내부에는 서류를 넘기는 소리와 작은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마른 입술을 조용히 핥으며 마지막 서류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눈치를 계속 보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집중하고 있는 노인에게 말했다.
‘어제 제가 준 거 봤어요?’
‘어.’
하지만 노인은 내 심정과는 다르게 너무나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제 내가 준 것, 그것은 거리에서 잡은 방송국 여자의 개인 물품들이었다. 물론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만큼 한정되어 있는 적은 정보였지만, 그 정보들이 어떤 진실들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단편만으로 충분히 유추가 가능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어땠어요?’
노인이 다시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섭더라.’
담담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노인의 대답은 너무나 담백하고 솔직했다. 그래, 노인의 말이 맞다. 나도 그 정보와 진실을 발견하자마자 든 기분이 바로 두려움이었으니까. 진실은 옳다. 진실은 항상 올바르다. 하지만 너무나 뜻밖에 찾아온 거대한 진실은 사람을 공포와 두려움에 질리게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과 미래. 어느 순간부터 파면 팔수록 나올 정보들이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고, 노인은 서류를 덮으며 나에게 말했다.
‘확신이 설 때까지 절대 다른 사람 귀에 들어가면 안 돼.’
진실을 은폐할 생각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소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반가운 희소식일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확신이 서고, 완벽하게 정리가 될 때 밝혀야 할 사실이었다. 노인이 걱정하는 것……. 그것은 아마 사람들의 단체 패닉과 정부를 향한 극심한 배신감일지도 모른다.
‘적당한 장소를 구했어. 외곽이라 순찰하는 경비들도 적고, 해가 지면 사람들도 안 지나다니는 구역이야. 오늘 밤에 거기서 만나자.’
은밀하고 또 은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정적 속에 모습을 숨기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서류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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