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일기장에는 그가 그날 생각했을 수많은 내용이 중구난방으로 쓰여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기록해 둔 모든 정보를 감추려고 했는지, 일기장을 찢거나 두꺼운 펜으로 낙서를 하여 내용을 가려 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는 다음날의 일기가 기록되어 있다.]
* * *
‘어차피 저랑 떨어지면 당신도 죽습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세요.’
도망가도 죽고, 떨어져도 죽는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손이 묶인 여자에게 담담히 말했다. 경계와 분노로 일그러져 있던 내 얼굴은 밤이라는 차가움 속에 천천히 진정되었고, 새벽에 와서는 완전한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 해가 뜨기 직전인 여명, 나는 아직도 떨고 있는 그녀에게 존댓말로 요구사항을 밝혔다.
밤사이에 남겨진 물품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하지만 그 외에 다른 진실과 생생한 상황을 알고 있는 이 여자에게서 아직 얻을 게 많다는 판단을 했다.
노인과 함께……. 그리고 내가 믿고 있는 일행들과의 상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전에 앞서 이 여자를 데리고 에덴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지금은 들지 않았다.
‘네, 네…….’
내 바뀐 태도 때문일까? 유약한 모습의 그녀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고, 말을 더듬으며 힘겹게 대답을 한다. 그녀의 표정에는 많이 온화해진 내 태도에 안도를 느끼면서도 많은 것을 포기한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래, 해가 뜰 때까지 그녀는 울음을 삼키며 두려움에 떨었었다. 내가 어둠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처럼, 이 여자도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긴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까지 캐치할 이유가 없었기에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녀가 일어나기를 기다려 주었다. 갈 길이 멀다. 이 여자는 제 발로 걸어 내 뒤를 따라와야 한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는 그녀를 등졌고, 우리가 몸을 숨겼던 건물의 계단을 천천히 밟았다. 찬바람이 숭숭 불어오는 창문에서는 빌딩 사이에 걸린 여명의 빛이 감돈다. 어제 이곳에 있었던 모든 살육과 고함은 회색 도시에게 잡아먹힌 지 오래였고, 어젯밤 스쳐 가는 악몽처럼 그 기색을 감추어 버린다.
나는 문을 나와 주변에 있을지 모르는 놈들을 경계한다. 그리고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오는 그녀에게 손짓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젯밤은 정말 잠이 오지 않았다. 잠자리가 불편한 것과 한쪽에서 들려오는 훌쩍임 때문인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내 속에 감돌고 있는 허망함과 포기 때문이었다. 싸늘한 복도 바닥에 누워 있으니, 나는 살아 있는 송장과 다를 게 없는 빈껍데기와 같았다.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렇게 뛰어왔고, 흐릿한 미래를 그리며 살아왔는지 모든 게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천천히 식어가고 있는 몸을 느꼈다. 무기력, 아무것도 아니라는 두려움. 이 어둠과 밤이 나의 모든 요소를 파괴하는 암세포와 같았다. 하지만 그 순간 너무나 자연스럽게 찾아온 빛은 창문 사이로 여명이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 빛을 마주한 나는 이상하게 마음이 진정됨을 느낄 수 있었다. 피부를 핥는 따뜻함, 언제나 같은 곳에서 같은 이유로 뜨는 그 빛들은 아무런 방해 없이 어둠과 밤을 몰아내었다. 어둠이 도망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나는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자각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노력과 결실이 조용히 귓가를 속삭였다. 바보야, 왜 또 풀이 죽어 있어? 너는 알을 깨부수고 나간 적이 있잖아. 기억이 별처럼 눈앞을 떠돈다. 아직 기다리고 있을 아이, 그리고 그날 한강과 함께 떠내려 보낸 모든 것들이 기억났다. 그리고 나는 오늘 새벽, 다시 살아난 사람처럼 눈을 뜨고 자리에 앉았었다.
그리고 걸음을 걷는 지금, 나는 새벽 내내 준비해 둔 지역지도를 펼치며 힘찬 발걸음을 밟았다. 앞으로는 놈들이 없는지 살피고, 뒤로는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는 여자에게 계속해서 눈치를 가한다. 일행들과 가장 처음 도시를 나섰던 때가 생각난다. 그리고 저 멀리 장관처럼 펼쳐지던 회색 도시의 모습도 여전했다.
바뀐 게 없다, 그래 너도 이곳도 바뀐 게 없는 것이다. 그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받아들인 순간, 내 심장과 몸은 더 단단해진다. 숨이 시원하게 내뱉어진다. 내 어깨 위에는 많은 것이 달려 있었지만, 이상하게 너무나 가벼웠다.
* * *
‘힘, 힘들어요. 잠시만……. 조금만 쉬다가요…….’
어젯밤에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여자가 지금은 나를 따라오며 칭얼거린다. 아까 전 편의점을 털어 음식을 나눠 먹던 게 원인이었을까? 어젯밤과 비교하면 제법 온화해진 내 태도 앞에 완전히 경계를 푼 모습을 보여 주는 여자를 보며, 나는 허탈한 웃음을 머금었다.
보통 두려움이라는 게 이렇게 빨리 끝날 수가 있는 건지 의문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여자 어제 일로 미쳐 버렸거나 원래 이런 성격을 가지고 사는 것 같았다.
‘시끄럽고.’
하지만 그 부탁을 들어줄 내가 아니었다. 나는 말을 단번에 끊으며 그녀의 부탁을 무시했고, 이제는 익숙해 보이는 길을 능숙하게 가로지르며 에덴을 향해 발걸음을 지속했다. 하지만 여자는 내내 힘이 드는지 뒤처졌고, 결국 잠깐의 점심시간을 갖고는 그녀의 보폭에 속도를 맞추었다. 말 그대로 여자의 편의를 봐준 것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이런 강행군이 익숙지 않은 여자는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연신 거친 숨을 내뱉었다.
‘조금만 더 가면 됩니다.’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여자에게 마지막 힘을 내줄 것을 부탁했다. 물론 윽박지르며 강제로 끌고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오늘 에덴으로 도착할 예정인 지금은 괜히 더러운 기분을 남기기 싫었다.
물론 쉬어가도 좋다. 행군의 능률을 위해서라면 적절한 휴식은 꼭 필요했다. 하지만 지역 지도 위에서 천천히 사라져 가는 경로들은 에덴의 정문이 곧 보일 것이라고 말해 주고 있었다. 조급하다, 꼭 내일 소풍에 가는 아이처럼 설렘과 함께 조급함을 느낀다.
나는 펼쳐 든 지역 지도를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고. 뒤에서 비틀비틀 따라오고 있는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가방을 고쳐 매며 앞으로 힘차게 발을 구른다. 앞으로 더 걷기를 30분. 여자가 완전히 지쳐 내 뒤를 끌려오다시피 할 때가 되니, 저 멀리서 너무나 익숙한 길과 함께 거대한 에덴의 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나는 숨을 훅 내뱉었고 여자는 꽤 거대한 규모의 요새를 보고 헛숨과 함께 침을 꿀꺽 삼킨다.
‘도착했습니다.’
나는 내쉬었던 숨을 다시 삼키며 조금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날 습격을 받은 에덴은 그 짧은 시간 동안 복구에 전념했는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장벽에 빼곡하게 매달려 있던 놈들은 전부 사라져 있었고, 남기고 간 시체와 검은색 피들도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외관으로 보기만 했을 뿐인데 느껴지는 삼엄한 경계와 날 선 분위기는 수많은 실패 끝에 드디어 완성한 경비 체제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었다.
잠깐 쉬다 가는 곳, 그리고 일을 하는 곳이라 생각했던 에덴은 어느새 내 아이들과 일행들이 몸을 맡기고 있는 내 집과 둥지로 바뀐 지 오래였다. 악몽을 떨쳐내고 다시 제 모습을 찾은 에덴을 보면서……. 나는 뿌듯함과 함께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넋 놓고 에덴을 바라보는 여자를 끌어당겨 구속을 완전히 풀어주고 정문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근방은 조용했다. 그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보이는 시체 더미들은 모두 놈들로 만들어진 육편의 산이었다. 대대적인 토벌이라도 한 것일까? 에덴 반경 500m로는 돌아다니는 놈들이 보이지 않았으며, 바닥 곳곳에는 전투의 현장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탄피와 검은색 피로 이루어진 바닥을 가로지르며 연신 눈치를 살피는 여자를 이끌었다. 그리고 에덴의 정문이 완전히 시야에 들어올 때쯤, 경비 탑에서도 나를 발견했는지 분주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철컥-.
삼엄한 경계. 내가 에덴의 정문을 20보 남기고 있을 때쯤, 경비탑에서는 모든 준비를 마친 인원들이 전부 총기로 무장한 채 나를 겨누기 시작했다. 아직 습격의 여운이 가시지 않는 날 선 분위기, 나는 그곳에서 괜한 부스럼을 만들기 싫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양손을 번쩍 들며 싸우고 싶지 않다는 몸짓을 보여 주었고, 경비 중에 내가 아는 얼굴이 있는지 부지런히 눈동자를 돌렸다. 하지만 총 10명의 인원 중 익숙한 얼굴의 경비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아……. 내 이마에서 곤란함으로 물든 식은땀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뭐라고 해야 하지?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에덴 소속이었고, 나름 중요한 요직을 맡았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법이 없다면 말로 해야 할까? 내가 에덴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소! 개풀 뜯어먹는 소리. 당장 수상한 움직임을 취하면 벌집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은 저 분위기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아주 큰 일이 난다.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저, 제가요…….’
하지만 그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온 말을 막은 건 총구를 나에게 겨누고 있던 한 경비였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이쪽을 향해 크게 외쳤는데, 그 목소리에는 의외로 살의와 경계가 아닌 사무적인 일을 처리하는 무감정이 담겨 있었다.
‘혹시 피난민이십니까?’
피난? 에덴으로 오는 피난민? 나는 그 순간 고개를 내려 내 꼴이 어떤지를 자각했다. 곳곳에 감긴 더러운 붕대와 놈들의 피.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벌였던 사투가 그대로 드러나는 검은색 임무복은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지가 오래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눈물 자국이 자욱하고 머리는 산발이 된 여자가 넋 놓고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지금 온몸으로 구조요청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피난민이면 에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게 맞겠지? 지금은 자존심 이런 걸 챙길 때가 아니다.
‘네, 맞습니다.’
나는 멍하니 있는 여자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순순히 피난민인 것을 밝혔고, 곧 여자도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자 순식간에 총구는 치워졌다. 그리고 나에게 피난민이냐고 물어봤던 경비는 아까보다 더 온화해진 태도로 한쪽 방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면 피난민 출입 사무소가 있습니다. 그쪽으로 가셔서 조사랑 함께 정당한 절차를 밟으세요.’
주먹구구식이 아니다. 그는 새롭게 만들어진 매뉴얼이라도 읊듯이 우리가 가야 할 길과 절차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나는 고개를 휙 돌려 경비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유난히 북적거리는 장벽 하나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피난민 출입 사무소, 유입 인원들을 작정하고 분별하기로 한 것인지 처음 보는 기관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그래,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그동안 유입 인원들에게 많은 진통을 겪은 에덴은 이제야 올바른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단체장과 간부들이 모두 죽고 나서야 체계적인 분류 작업을 시행했다. 조금 늦은 감이 있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한다. 거대한 코끼리, 하지만 세세한 것을 살피지 못했던 에덴은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나는 경비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여자를 이끌었다. 그리고 내가 걸음을 떼고 출입국 사무소로 걸어가는 그 순간, 아까 나에게 친절한 안내를 해 준 그 경비가 나를 불러 세운다.
내 고개는 본능적으로 위로 향했고, 혹시나 시비를 당하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 걱정과는 다르게 경비는 시비 대신 무언가를 휙 던져 주었다. 나는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그 무언가를 받아들었고, 곧 그것이 달콤한 초코바인 것을 눈치챘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저씨.’
경비는 선글라스를 다시 쓰며 그렇게 말했다. 내 손에 들린 초코바, 그것을 오랜만에 보는 달콤한 것임과 동시에 손때가 많이 묻은 누군가의 소중한 간식이기도 했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는지 초코바는 많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포장지에 가득 묻어있는 온기는 이상하게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매개체처럼 느껴졌다. ‘고생 많으셨어요, 아저씨.’ 그는 단순하게 피난 오느라 고생했다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다른 의미로 찾아오는 친절이었다.
나는 초코바를 주머니 깊숙한 곳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씨익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드는 경비에게 고개를 숙였고, 곧 출입국 사무소가 보이는 방향을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숨이 흘러나오고 입김이 아지랑이처럼 흩어진다. 내 생각이 맞았다. 많은 고통을 겪은 에덴은 확실히 좋은 방향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 * *
출입국 사무소. 사실 이름만 거창하다 생각했지, 기대는 크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르게 장벽 앞에 붙어있는 이 건물은 정문보다 더 삼엄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배는 많은 경비들이 파견 나와 있었다. 날 선 눈빛과 번쩍거리는 총구들. 그 어디에서 볼 수 없었던 군기라는 것이 이상하게 경비들의 몸짓과 눈빛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대기 줄을 향해 걸어갔다.
수많은 쉘터들이 망했다. 그리고 그 쉘터 중에 살아남은 것은 에덴이 유일했다. 마지막 낙원, 이 도시의 남아 있는 마지막 요새. 에덴은 그 이름값을 하기라도 하는지, 오후 3시가 다 돼가는 지금도 몰려오는 피난민들을 바쁘게 받고 있었다.
시끌벅적, 수군수군. 저 앞에서는 수많은 직원들이 분별 작업을 하고 있었고, 그보다 배는 많은 피난민들이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중의 한 명이 되어 천천히 줄어드는 줄을 따라 걸어간다.
무언가 들키기라도 했는지 경비들에게 쫓겨나는 사람들부터, 무사히 분별 작업을 통과했는지 안으로 들어가는 가족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이곳은 오랜만에 보는 사람 냄새를 맡게 해 주었다.
내가 없는 에덴, 새가 없는 둥지. 나는 미묘한 감정이 몰려옴을 느꼈다. 이 감정은 대견함일까? 아니면 섭섭함일까? 나는 오늘따라 환하게 웃어 주는 채연이와 일행들이 몹시 그리웠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차례가 찾아왔다.
‘다음.’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 나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심장이 짜르르 울림을 느꼈고, 곧 내 뒤를 따라오는 여자를 붙잡으며 많은 인파 사이를 뚫고 들어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리고 내 귀를 괴롭히는 수군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떨리는 눈동자를 굴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든다. 그러자 저 멀리 사람들 사이에 파묻혀 무언가를 바쁘게 쓰고 있는……. 용팔이가 시야에 들어왔다.
눈앞이 뿌옇게 변한다. 하지만 나는 애써 그 눈물을 닦으며 데스크를 향해 걸어갔고, 수많은 인파 사이에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잡한 나무로 만든 데스크, 그곳에 앉아 있는 용팔이는 수심과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사무 일을 하고 있었다.
너 도대체 여기서 뭐 하니? 우리 용팔이가 이젠 이런 일을 할 정도로 인정을 받았구나. 아, 키가 큰 걸까? 살이 좀 빠졌나? 얼굴도 사내다운 모습이 엿보이는 게 심적으로도 외적으로 많이 큰 것 같았다. 우리 용팔이, 그래……. 용팔이.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나는 떨리는 손을 데스크 위에 올려두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다음 사람 없습니까?’
용팔이는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고개를 들지 않은 상태에서 짜증을 부린다. 그리고 다음 사람을 부르며 나를 재촉한다. 하지만 난 그리움과 기쁨에 목이 막혀 대답을 하지 못했고, 말없이 용팔이가 서류를 작성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 다음 사람! 없냐고……. 어?’
어?
용팔이는 연신 다음 사람을 부르다가 결국 펜을 내려놓았고, 짜증이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데스크 앞에서 넋 놓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친다.
시간이 멈춘다. 시끄럽던 주위는 어느새 조용해진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많이 수척해진 용팔이의 얼굴 사이로 한줄기 눈물이 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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