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55화 (155/313)

[155]

놈들의 머리통을 꿰뚫을 날붙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니고 있던 대검은 내 손을 떠난 지 오래였고, 일단 아쉬운 대로 마대자루를 이용해 나무창을 만들었다. 난 조잡하게 부러진 창끝을 만지며 천천히 주변 분위기를 살피기 시작했다.

병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를 제외한 모두가 두려움이 감도는 눈동자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두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짧은 순간에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눈동자에는 원망이라는 이기적인 요소가 함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조용히 손을 쥐었다가 핀다. 그래, 왜 하필 이곳으로 도망 오냐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인간이기에 당연하면서, 인간이기에 추악하다고 생각하는 그 본능. 나는 그 생존 본능 앞에서 역겨움과 동시에 익숙함을 느꼈다. 이젠 감흥도 없었고, 감정의 동요조차 생기지 않았다. 그저 그 무신경 안에……, 작은 아쉬움을 담을 뿐이었다.

아마 아까 보았던 평화로운 분위기를 보고서 작은 기대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눈빛들을 보아라. 저들은 순진한 양이 아닌, 사료를 처먹는 개돼지였다. 물론 그들을 탓할 수는 없었지만, 그런 그들의 삶을 옳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혹시나 했던 기대도 같이 털어 내었다.

바뀌어야 살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세상을 저주해 봐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그것이 허튼 발버둥일지언정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 나는 온몸에 느껴지는 고통을 훌훌 털어 내고,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서서히 벌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피부가 뜯어지고, 그 사이를 짙은 피가 새어 나온다. 하지만 나는 몸을 멈추지 않았다.

‘구해야 해요!! 네?!’

계단을 밟고 1층으로 내려오니, 강유미가 울먹이며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려왔다. 그리고 건물 앞에는 강유미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조잡한 무기들을 들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도망 다니는 저 무리를 구하기 위해 모여 있는 거냐고? 아니, 저들은 바리케이드를 보강하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모든 무리들을 막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저 인원 정도면 충분하다. 아마 피해를 감수하고 싸운다면 도망치는 무리들을 훌륭하게 구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무리 중에 사람들을 구하자고 말하는 사람은 강유미, 그녀가 유일했다. 학습된 공포가 이 생존자들을 보이지 않는 족쇄로 묶어두고 만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를 천천히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바람이 갈대 사이를 지나가듯, 내가 뻗은 손은 사람들을 밀치고 걸음을 옮기게 한다. 뭐야? 저 사람은 누구야?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은 내 무신경을 스쳐 갔으며,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바람처럼 귀를 닫게 했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바리케이드를 막으려는 남자의 손을 턱 하고 잡았다. 그러자 모든 시선은 나에게로 향했고 웅성거림은 멎었다.

‘뭐, 뭡니까?’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나는 길을 막은 남자에게 정중히 물었다. 하지만 내 정중한 부탁에도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표정을 굳힌다. 시간이 지난다. 나는 그에게 대답을 강요하지도, 신체적인 제약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저 속으로 1, 2, 3을 세며 남자의 대답을 기다려줄 뿐이었다.

‘그…….’

하지만 남자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는 자리를 비켜줄 것인지, 아니면 나를 막을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 깃들어 있었다.

크아아아-!

그리고 그 순간 저 멀리서 놈들이 내는 울부짖음과 놈들을 피해 도망치는 사람들의 소리가 동시에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남자는 몸을 움츠렸고, 나는 고개를 들어 100m 앞까지 접근한 두 무리를 바라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어……?’

입구를 막고 있던 남자가 멍청한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남자를 그대로 밀친 나는 마대자루 창을 앞으로 잡았고, 아직 남아 있는 상처의 여운을 느끼며 깊은 숨을 내뱉었다.

아, 환자복이 많이 얇다. 피부를 저미는 추위와 칼바람이 내 몸에 남아 있는 찌꺼기를 하나둘 가져가는 기분이었다. 익숙한 감촉, 너무나 반가운 두려움. 나는 짧은 시간을 지나 또다시 회색 도시와 마주 섰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노인과 강수련은 잘 도착했을까? 이 회색 도시를 다시 한 번 마주하자 뜬금없이 일행들 생각이 났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도 살아 있는데, 그 둘도 분명 살아 있을 것이다. 악착같이 살아남은 노인이 그녀를 데리고 에덴으로 도착했겠지? 그리고 어쩌면 나를 찾아 모든 게 불타오른 놈들의 본거지를 찾아갔을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걸음을 옮기는데, 어느새 뛰어온 사람들의 무리가 10m 앞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분명 이 중에 나를 구해 준 진순이라는 여자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쁘게 옮기는 눈동자에는 여자가 보이지 않았다.

‘저……! 저, 저, 저! 저건 뭐야! 야! 빨리 도망가!’

그리고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가장 선두에서 뛰어오는 한 청년이었다. 거친 숨을 연신 몰아쉬며 같이 뛰어오는 일행들을 챙기던 그 남자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황급히 도망가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남성을 바라보았다. 후줄근한 츄리닝과 다 뜯어진 운동화를 신은 남성. 그리고 그 남성은 이상하게도 분홍색 털모자를 꾹 눌러쓰고 있었다. 분홍색과 더러운 남자라. 참 기묘한 조합이다.

으아아아!

도망치는 무리들은 내가 앞에 있건 말건 그대로 지나쳐 개인병원 건물을 향해 뛰어가 버렸다. 하지만 선두에서 그들을 이끌던 남성만이 내 팔을 붙잡으며 같이 가자고 외치기 시작했다. 내 팔을 붙잡은 두툼한 손, 그리고 남성에게서 나는 역한 땀 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하지만 나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을 챙기고 처음 보는 나까지 도와주는 그가 호감 있게 보였기 때문이다.

‘------!!!’

히익!

하지만 그런 감동적인 장면을 보며 박수를 칠 놈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빠르게 거리를 좁힌 놈들은 나와 남성에게 달려들었고, 나 때문에 도망칠 시간을 놓친 그는 형편없이 바닥에 주저앉는다. 들려오는 외마디 비명. 그 새된 비명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후우-.

바람이 불고 심장이 차분해진다. 나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머리카락, 그리고 모든 요소가 내뱉는 현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싸움을 하기 직전 머리를 비우기 시작한 게. 나는 마치 잠을 자기 위해 준비를 하는 아이처럼 온몸에 힘을 빼기 시작했다. 하지만 늘어지는 근육 속에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수 있는 힘이 내포되어 있었고, 나는 증기 같은 입김을 내뱉으며 느려지는 시간 속에 뚜렷함을 담았다.

나에게 손을 뻗는 놈이 너무나 작아 보였다. 놈의 행동 하나하나, 그리고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까지 느껴진다. 발에 힘을 주자 장딴지가 부풀어 오른다. 마대자루를 잡은 내 팔은 앞으로 올려졌으며, 조잡한 창날은 정면을 정조준했다. 힘을 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항상 그래왔듯 방향성 없이 날아오는 과한 힘을 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줄 것이다.

앞으로 정조준된 날은 망설임이 없었으며, 물러나겠다는 두려움 또한 없었다. 몸에 힘을 주고 창을 앞으로 뻗는다. 그러자 앞으로 나아간 창날은 그대로 놈의 오른쪽 눈을 꿰뚫었다. 중간과정이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꼭 놈을 죽이는 기계처럼 마지막 순간만을 뇌 속에 각인시켰다.

그리고 내가 놈의 복부를 발로 차자 몸이 경직된 놈이 바닥에 쓰러졌고 더 이상 비명도, 시끄러운 웅성거림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정적 속에서 모든 요소가 속삭인다.

너의 시간이다.

마대자루를 빼낸다. 그러자 더러운 눈알과 함께 검은색 피가 쏟아진다. 나는 그것을 휘두름 한 번으로 털어내고, 뒤따라 달려오는 놈의 목을 관통시켰다. 물론 목을 관통당한 놈은 즉사하지 않았고, 어김없는 살의를 보여주며 몸을 버둥거린다. 하지만 나는 그 버둥거림조차 익숙하게 넘기며 0.5초 차로 뒤따라 달려오는 놈의 발을 걸어 버렸다. 순식간에 두 놈을 제압했다. 하지만 이 회색 도시에는 제압이라는 단어가 허용되지 않는다.

난 목을 꿰뚫은 창날을 그대로 빼내고, 버둥거리는 놈의 왼쪽 눈을 찔러 넣었다. 게거품을 물며 눈을 번뜩이던 놈의 눈은 그대로 짓뭉개지고 타협 없이 진입한 창날은 눈 뒤에 있는 더러운 뇌를 진창으로 만들어 버린다.

마대자루를 꾹 잡고 굴리자, 뿌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놈이 그대로 움직임을 멈춘다. 하지만 그 파괴의 여운을 느끼기도 전에 뒤쪽 바리케이드에서 여자들이 지르는 비명과 놈의 울부짖음이 들려온다.

쟤는 왜 저기에 가 있지? 나는 마대자루를 그대로 놓고 뒤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엉성한 바리케이드에 몸을 던지며 사람을 물기 위해 버둥거리는 마지막 한 놈이 시야에 들어왔다. 분명 내가 발을 걸어 무게중심을 흩트려 놓은 놈이다.

당연히 나에게 오겠거니 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놈은 처음 보는 행동을 보이며 빠르게 목표를 바꾸어 버렸다. 그냥 우연인 걸까? 나는 꺼림칙함을 느끼며 뚜벅뚜벅 뒤돌아 걸어갔다. 하지만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 잠시 관심을 끄고 있던 남성이 나를 황급히 불렀다.

‘이거! 이거, 가져가요!’

듣다 보니 참 친숙한 목소리다.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내렸고, 남성이 나에게 건네주는 한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꼭 농촌에서 사용할 법한 녹슨 칼날이었는데, 정글도라 부르기에는 너무 짧았고, 도끼라고 부르기에는 날이 꽤 길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무게가 꽤 묵직해 놈의 두개골을 깨부수기 충분해 보였다는 것이다.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날붙이를 받아들었다.

‘그, 그……. 한강 공원 맞죠? 그죠?’

내가 무기를 받아들자, 남성이 쭈뼛 쭈뼛거리며 조심히 말을 걸어왔다. 눈앞에는 키티 모양을 하고 있는 분홍색 털모자가 아른거렸고, 동시에 쭈뼛거리는 남성이 내 옆으로 다가온다. 그래, 추워서 쓴 건 알겠는데, 이건 좀 안 어울린다. 나는 남성에게 충고를 해 줄까 하다가 한강 공원이라는 단어를 듣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 이 사람이 나를 구해준 진순이라는 여자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남성에게 물었다.

‘진순이라는 분이 혹시 동생이십니까? 아니면 아내분?’

남성은 놈을 처리하러 가는 내 뒤를 졸졸 따라오다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하지만 곧 멍청한 표정을 하며 넋을 놓더니 이런 대답을 해 왔다.

‘내 이름인데…….’

순간 내 걸음이 멈췄다. 한강 물에 휩쓸려 한강공원 아래서 발견된 나. 그리고 그런 나를 구해서 여기까지 데려와 준 장본인이 바로 이 남성이었던 것이다.

아, 어쩐지 사람들을 챙기고 처음 보는 나까지 챙겨주더라. 나는 순간 이전 상황이 납득이 되는 걸 느끼며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그리고 일단 급한 볼일을 처리하고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전에.

‘저기……, 그리고.’

‘네?’

지금 하는 내 권유가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멍청하게 나를 바라보는 남자에게 이 말은 꼭 해 줘야겠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생겼다. 나는 잠시 몸을 돌려 남자를 직시하고 또박또박 한 단어씩 끊어 말해 주었다.

‘이름 꼭 개명하세요.’

남자는 멍청하게 네? 라고 반문했고, 나는 대답을 들을 필요 없다는 듯 다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도 바리케이드에서 버둥거리는 놈과 그 하나를 죽이지 못해 뻘뻘 거리는 사람들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나는 바닥을 박차고 달려가 남자가 건네준 날붙이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버둥거리는 놈의 뒤통수를 향해 그대로 내려 그었다. 수박을 가르는 듯한 통쾌한 소리와 함께 튼튼한 날붙이는 놈을 즉사시킨다.

* * *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누나! 쪼옴!’

모든 놈들을 가뿐하게 처리하고 다시 건물로 들어갔다. 나를 막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쉽게 바리케이드를 치워주었고, 다들 얼굴이 사색이 된 상태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놈들이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나는 손을 살며시 들어주며 안심하라는 듯 그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긴장이 덜 풀렸는지 황급히 도망가 버린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병실로 들어온 상태. 조금 자야겠다는 싶다는 생각으로 침대 위에 누웠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며 찾아온 진순이와 강유미에게 휴식을 방해받고 있었다. 한 사람은 울고, 또 한 사람은 시끄럽고.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나는 강유미라는 여자에게 붙잡혀 한참 동안 눈물이 섞인 감사 인사를 들어야 했다. 친한 동생을 구해야 하는데, 차마 스스로 나서지 못했던 자책감과 안도가 그녀의 눈물을 타고 흘러내린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들 진순이가 위험한데, 도와줄 생각을 안 하셔서…….’

그녀의 코에서 노란색 콧물이 나올 때쯤, 나는 살며시 그녀를 밀어내었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훌쩍이며 한이 섞인 소리를 내뱉었고, 순간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내 입에서는 저절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래, 저 진순이라는 남자가 그동안 사람들을 이끌며 식량들을 구해 온 모양이다. 좋게 말해 총대를 잡았다는 소리고, 좀 나쁘게 말하자면 제대로 호구를 잡혔다는 것이겠지.

협력과 의존은 다르다. 나는 그 차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튼튼하게 굴러가던 우리 일행들이 다시 한 번 생각났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 나는 무언가를 까먹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들었고, 곧 진순이라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동글한 눈과 후덕한 얼굴. 참 정감 가게 생긴 곰돌이 푸를 닮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네?’

‘덕분에 동료들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됐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천운이었다. 이 넓은 도시에서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힘든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더더욱 힘든 일이었다. 윤리가 죽고, 양심이 썩어 버린 세기말. 이 남자는 아무런 요구 없이 나를 구해 주었고, 또다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단순히 운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인간답게,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그에게 감사를 전할 뿐이었다.

‘아…….’

진순이라는 남자는 내 손을 선뜻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간이 내미는 제스쳐는 호의라는 이름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가와 함께 입술을 떨었고, 이내 그 두꺼운 손으로 뻗어 나와 악수했다.

관계라는 건 너무나 어려우면서도 단순하다. 복잡한 죽음으로 끝을 맺을 때도 있으며, 이처럼 가벼운 악수로 시작할 때도 있으니까.

나는 맞잡은 그 손을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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