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장면이 끊긴다. 그렇게 나는 언제 정신을 잃었는지 자각조차 못 했다. 눈을 뜨자 모든 건물과 땅은 불타고 있었으며, 그 가운데에는 울부짖는 인간들이 화염과 괴물들에게 뜯어 먹히고 있었다.
고통, 절망. 불어오는 바람은 재와 먼지로 가득했으며, 얼굴을 핥는 대기에는 두려움이 묻어 있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꼭 심연 속에 갇혀 있는 사람처럼 나는 끊임없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자 붉은색으로 변한 하늘이 보인다. 그 하늘에는 별도, 태양도 없었으며 오직 붉은 화염만이 구름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인간들이 비명을 지르고, 그들을 뜯어먹는 괴물들은 소리를 지른다. 들리는 모든 울음소리는 공명했고, 뛰지 않는 내 심장에 잔잔한 떨림을 선사했다.
그 순간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중력을 거부하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전환되는 화면에는 그동안 스쳐왔던 인연들이 보였고, 죽기 직전 주마등처럼 모든 내 인생을 돌아보게 한다.
불타는 복도, 채연이를 차 밑에서 구했던 도로.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고 살아온 이 날까지. 저 멀리서는 내가 죽인 이들이 재처럼 흩날렸고, 그 빈자리를 내 기억들이 차지한다.
그리고 주마등 사이로 모든 기억들이 빨려 들어가고, 장면이 끝이 난다. 나는 아마 눈을 뜨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꿈인 것을 자각한 순간 현실의 눈은 번쩍 뜨였다.
허억-.
숨을 쉰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입과 코를 열어 황급히 숨을 마셨고, 꿀처럼 달콤한 산소를 폐 깊숙이 쑤셔 넣었다. 그리고 눈앞에 빛을 마주한 순간 머리는 띵 울려왔으며, 시야와 소리는 한순간 차단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곳이 낯선 시간과 공간이라는 걸 깨달은 내 몸은 본능적으로 움직이며 내가 누워 있다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뭐지? 흐린 시야 사이로 낡은 커튼과 낯선 천장이 들어온다. 이명이 울리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저씨!! 움직이지 마세요!’
아저씨? 낯선 목소리다.
‘선생님!! 선생님!! 이 사람 일어났어요!’
난 본능적으로 내가 깔고 누워 있는 시트를 꾹 잡았다. 그러자 온몸에 잠들어 있던 신경이 깨어나기 시작했고, 모습을 감추었던 고통이 뒤늦게 몰려왔다. 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위험에 학습된 정신과 신체는 재빨리 주위를 살피라고 윽박을 지른다.
나는 힘겹게 뜬 눈을 다시 번쩍 뜨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그리고 시야가 회복되기도 전에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대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허리춤이 가볍다. 내가 차고 있던 대검 집은 사라져 있었고, 그 속에 있던 대검도 사라져 있었다. 어? 대검이 어디 갔지?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최태식의 목을 향해 던졌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놀랄 만큼의 완벽한 투척. 아마 노인이 봤다면, 그 자리에서 박수를 쳤을 만큼의 완벽한 궤적이었다. 나는 일단 허공을 훑은 오른손을 멍하니 내려놓고 피부로 느껴지는 까칠한 옷에 시선을 옮겼다.
밤의 침투하는 것을 고려해 새까만 임무복을 입고 있었다. 물론 임무복은 놈들의 공격으로 걸레짝이 되었겠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내가 임무복이 아닌 처음 보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누군가가 나에게 입혀 둔 환자복은 몹시 허름하고 시큼한 냄새까지 났다. 하지만 그 안으로는 분명 옅은 소독약 냄새를 풍기는 붕대가 꼼꼼하게 감겨 있었다. 그래, 누군가가 나를 치료해 준 것이다. 짧은 상념이 끝나자 자연스레 경계가 풀렸고, 내 시선은 방 안을 살피기 시작했다. 뻑뻑한 눈을 비비며 상반신을 들어 올린다.
처음에는 에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혹시 정신을 잃은 나를 노인이나 에덴의 사람들이 데려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 하지만 그 생각과는 다르게 내가 있는 이곳은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낡은 병실이었고, 주변에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힘없이 앉아 있었다.
병원? 아니, 에덴의 병원처럼 큰 곳이 아니었다. 시설이 허름하고 장소도 좁은 이곳은 동네에서 흔하게 보이는 개인 병원처럼 보였다. 난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바닥을 짚었다.
‘아직 움직이시면 안 돼요!’
하지만 내 움직임을 막은 것은 아까 전 들었던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자 저 멀리에서 한 여자가 이곳으로 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흰색 의사 가운, 아니 거의 노란색으로 변한 가운을 걸친 할아버지 한 분이 힘겹게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결에 행동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여자는 2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는데, 분홍색 빛을 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고, 가슴팍에는 노란색 명찰을 달고 있었다. 이름과 병원명,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의 상태를 확인하는 이 여성은 개인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오는 할아버지? 아니, 의사인가? 영감님보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그분은 연신 숨을 헉헉거리며 정신을 차린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째, 정신이 드누?’
아, 그 순간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긴장이 탁하고 풀려 버렸다. 치료된 몸과 안전한 병실. 그리고 내 눈앞에 서 있는 간호조무사와 의사 선생님. 이들이 정신을 잃은 나를 끌고 와 치료해 줬다는 건 아무리 바보 멍청이라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물에 몸을 던지고 정신없이 헤엄친 기억밖에 없다. 그 뒤부터 기억이 사라진 나를 그들이 어디서 발견했는지, 그리고 노인과 강수련을 본적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일단 전후 사정을 묻기 전에 내 생명을 구해 준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는 짧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분명 중상이었을 것이다. 피부와 살은 상처투성이였고, 근육과 뼈는 움직일 때마다 고통을 동반했었다. 체력이 한계까지 도달한 완전한 탈진 상태, 아마 이들이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기억이 끊어진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동안 겪었던 고통과 시련을 보상해 주기라도 하듯, 나는 또다시 살아남았고, 이제 채연이와 일행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항상 경계하기 바빴던 낯선 사람에게…… 뜻하지 않은 도움을 받게 된 것이다.
‘내가 뭐 한 게 있나? 진순이한테 고마워 해야지.’
나이가 지긋하신 의사 선생님이 이가 다 빠진 입술을 오물거리며 말했다. 그리고 앞주머니에서 돋보기안경을 꺼내 쓰더니 이쪽으로 다가와 내 몸 상태를 확인하기 시작한다. 진료를 해 주는 걸까? 나는 군말 없이 팔을 들어 올려 할아버지가 내 몸 상태를 확인해 주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1분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안경을 벗으며 나에게 말했다.
‘그려, 이제 쉬어.’
할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에구구 소리를 내며 허리를 숙이더니, 이내 느린 걸음으로 병실을 나가 버린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무언가 오묘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여태 지옥에서 발버둥 치다가 힘들게 사람 사는 곳에 도달한 기분이랄까? 친숙한 분위기의 개인 병원. 그리고 일상과 다르지 않던 의사 선생님에 태도. 이질감을 느낌과 편안해지는 기분을 느낀다. 그만큼 평화라는 단어는 나에게 생소한 단어였다.
‘요즘 세상에서 보기 힘든 분이세요. 그래서 다들 존경하고 따르고 있어요.’
내가 넋을 놓고 있자, 아직 옆에 있던 조무사 여성이 반쯤 찬 생수통을 내밀었다. 나는 아, 하는 소리를 내뱉으며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고, 조용히 웃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 병실에는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밖에서 들리는 다른 인기척들은 이 개인 병원을 본거지 삼아 생존자들이 모여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저 인자해 보이는 의사 할아버지가 이들을 이끄는 사람인 걸까? 나는 생수를 마시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이름이 진순 씨입니까?’
아까 의사 할아버지가 분명 진순이라는 이름을 거론했었다. 자신이 아닌, 진순이에게 고마워하라는 말. 그렇다는 것은 상처를 입은 나를 발견해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진순이라고 불리는 여자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손사래를 쳤고, 자신의 명찰을 보란 듯이 흔들었다. 노란색 명찰……. 그리고 그곳에 쓰여 있는 이름은 진순이가 아니라, 강유미였다.
‘밖에서 식량을 가져오는 동생이 하나 있어요. 그 아이가 한강 공원 근처에서 아저씨를 데려왔고요. 곧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봐요.’
자급자족이라는 말은 생존자 캠프와 어울리지 않았다. 그리고 이곳도 역시 다른 쉘터들처럼 밖에서 식량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존자 중 하나인 진순이, 아마 한강 물살에 쓸려 기절한 나를 운 좋게 발견하고 데려와 준 모양이었다.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는 나에게 필요한 정보를 물어보았다.
‘저……. 실례지만, 여기가 어디 지역입니까? 그리고 제 근처에 다른 생존자는 없었나요?’
상태파악이 끝나자 나는 조금씩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과연 이곳이 에덴과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그리고 혹시 노인과 강수련을 본적은 없는지. 나는 빠르게 정보를 정리하고 하루빨리 에덴으로 복귀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대답을 갈구했다. 그러자 그녀는 어머, 하는 소리와 함께 조금 당황하더니 이내 설명을 해 주었다.
일단 내가 발견된 자리에는 노인과 강수련이 없었다고 한다. 물론 특별히 발견된 시체나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전기도 사라지고, 지도도 사라지고……. 말 그대로 완전히 소식이 끊긴 상황이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노인을 믿는다. 적어도 그 둘은 나보다 안전한 곳에 상륙했을 것이다. 그리고 몸만 회복된다면, 언제든지 에덴으로 돌아가 다시 재회할 수 있다. 나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 조급했지만, 애써 힘을 빼며 스스로를 달래었다.
‘나중에 지역 지도를 드릴게요. 일단 쉬고 계세요.’
그녀는 내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왜 이렇게 친절하세요? 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티 없이 맑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 말도 쏙 들어가 버린다. 이곳은 에덴이 있는 지역과 한 뼘 떨어져 있는 xx구. 한강 물살에 휩쓸려 처음 와보는 옆 동네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올 만큼 먼 거리였지만, 일단 나는 몸을 뉘며 회복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내 잔 상처들을 소독하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 순간, 눈을 감은 내 귀를 어지럽힐 만큼의 소음이 창문 밖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병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반응할 만큼의 소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빛이 새어오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창문 밖이 시끄럽게 변했으며, 조용한 인기척만이 들려오던 복도는 어느새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소란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나는 누워 있던 몸을 잠시 일으켰고, 그 순간 병실 문이 덜컹 열리며 강유미와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한 여자가 다급히 소리쳤다.
‘유, 유미야! 밖에! 밖에!’
밖에? 밖이 왜? 문을 열고 소리친 여자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제대로 설명조차 못 하고 있었다. 하지만 흐트러진 머리와 창백해진 얼굴은 밖에 무언가 변고가 생겼다는 걸 온몸으로 말해 주고 있었다.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기 시작한다. 병실을 정리하던 강유미는 사색이 되어 그녀를 따라나섰고, 나는 누워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웅성웅성. 나와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을 본 나는 어쩔 수 없이 침대를 손으로 짚었고,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아파져 왔지만, 통증에 학습된 내 몸은 그것마저 참아내며 몸을 일으키게 도와주었다.
숨을 훅 내쉬자 단내가 입에서 풍겨 나왔다. 그리고 나는 숨을 몰아쉬며 창문을 향해 걸어갔고, 그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치워 버렸다. 커튼을 치우자 찬바람이 불어온다. 찬바람과 함께 밖에 풍경이 고스란히 보이기 시작했으며, 익숙한 감각이 신경을 핥는다.
‘-------!!!’
‘--아 ---!!!’
들려오는 놈들의 울부짖음. 병실 안에 있는 생존자들이 깜짝 놀라며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저 멀리서 뛰어오고 있는 한 무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을 완전히 가로막고 있는 자동차들. 하지만 그사이를 황급하게 뛰어오는 무리는 사람들로 보이는 생존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정신없이 뒤따라오는 또 다른 무리. 인간 같지 않은 속도와 기괴하게 들리는 울음소리는 저 무리가 나에게 너무나 익숙한 괴물 놈들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꺄악!
내 옆에서 한 아줌마가 비명을 질렀고, 내 팔 근육에는 저절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장 앞에서 뛰어오는 남자가 이곳을 향해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그 수신호가 자신들을 도와달라는 건지, 아니면 도망가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다급하고 처절한 몸짓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으로 보아, 저들은 외부인이 아닌 이 개인 병원에서 나간 생존자들로 보인다. 아까 강유미가 말했던 그……, 진순이라는 사람인가? 식량을 찾기 위해 밖을 돌아다니다 놈들과 마주한 모양이었다.
싸우지도 못한 채 도망쳤을 것이다. 그리고 멍청하게도 자신이 출발한 개인 병원으로 도망쳐 다른 사람들의 위험을 자초하고 있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아무런 대처조차 못 하는 사람들과 그저 도망가기만 하는 저 생존자 무리들이 너무나 생소하게 느껴졌다.
꼭 치열한 투기장에 있다가 양들이 사는 울타리에 들어선 기분이랄까?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나는 천운을 타고난 그들에게 작은 부러움을 느끼며 병실 주변을 둘러봤다.
일단 무기로 쓸게 필요하다.
나는 병실 한구석에 서 있는 마대자루를 발견하고, 그곳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마대자루를 잡고 밑동을 힘껏 밟자, 옛날 생각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다.
진료비와 치료비를 낼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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