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52화 (152/313)

[152]

나는 마른기침을 하며 입안에 고인 피를 내뱉었다. 그리고 난간에 서서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녀석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죽음이라는 찌꺼기가 여과 없이 몸을 훑고 간 기분이었다.

온몸은 놈들의 공격으로 걸레짝이 되었고, 대검을 들고 있는 손은 비명을 지르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하다. 온 세상이 붉은색으로 보였고, 하늘에서 내리는 흰 눈은 그 시야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하아-.

폐에서 묶은 숨이 빠져나간다.

딱-깍.

목각인형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울리자, 놈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진다. 얼굴을 가리고 있는 머리카락은 흘러내렸으며, 이마 한가운데 박혀 있는 총알 자국이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꺽, 꺽.

놈은 반밖에 남지 않은 입 사이로 숨이 넘어가는 소리를 내었다.

놈은 그때보다 더욱 기괴해진 얼굴을 푸들푸들 떨고 있었다. 괴상한 표정이다. 근데, 그 얼굴은 꼭 웃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찾아서 얼마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을까. 놈은 나를 죽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공간을 헤집고 다녔을까? 그 집요한 증오는 내 피부를 아릿하게 만들고, 눈동자에 핏발이 어리게 한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앞으로 내밀고 있는 대검을 꾹 잡았다. 이마에 고이고 있는 식은땀은 피와 함께 떨어져 코끝에 어렸고, 등골을 타고 흐르는 긴장감은 죽어 있는 내 신경을 깨우기 시작했다.

온몸이 아프다. 숨을 쉬고 있는 이 순간마저 내 육체와 정신은 괴롭혔다. 하지만 나는 살아야 하는 기계처럼 속 안에 꼭꼭 숨겨두고 있는 생존본능을 일깨웠다. 예열이 시작된다. 속안에 무언가가 타오르고, 뒷목이 뻣뻣하게 당겨온다.

나는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며 이 공간을 이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판단과 판단이 겹치고, 모든 생각들이 번개보다 빠르게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시선의 끝이 놈에게 겨누고 있는 칼날로 향한다. 내가 지금 들고 있는 대검은 저놈 앞에서 너무나 연약한 날붙이의 불과했다.

소총은 어디 있지? 난 눈동자를 내려 마지막으로 총을 발사했던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시선이 도착한 그곳에는 놈들에게 치여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소총이 흰 눈을 맞고 있는 게 보였다. 발을 살짝 끌자 바닥에 고인 탄피들이 작은 소리를 내며 굴러간다. 거리는 불과 5m. 하지만 그 짧은 거리에는 내 발목을 붙잡는 시커먼 증오의 늪이 있었다.

놈이 계속해서 웃는다. 고개는 양옆으로 정신없이 움직였고, 딱딱거리는 소리는 숨이 꺽꺽거리는 소리로 바뀌어 있다. 놈은 지금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내 목숨이 여기서 끝난다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 놈은 복수의 순간을 흠뻑 만끽하고 있었다. 도살장 안으로 들어간 가축, 죽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시한부. 하지만 나는 피부를 아릿하게 핥는 죽음의 기운에도 내가 뛰어갈 경로를 허공에 그리고, 선을 그었다.

놈은 총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나를 조롱하고 있지만, 저기 떨어진 소총을 잡는 순간 태도를 한순간 바꾸고 말 것이다. 모든 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도박판. 놈의 악(惡)수는 내 팔목을 노리고 있었고, 난 마지막 카드를 뒤집은 준비를 시작했다. 이대로 얌전히 있어 줄 생각은 없다. 난 놈이 정신없이 웃는 소리를 타며 발을 천천히 끌었다.

지익-.

떨그렁-.

발을 끌자 우물처럼 고여 있는 탄피들이 조용히 흩어졌다. 내 코끝에 고인 식은땀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예민해진 신경은 모든 신체적 정보를 고스란히 전하고 있었다. 손안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내가 꾹 잡고 있는 대검 손잡이는 금방이라도 미끄러질 듯 풀려나가고 있었고, 그 반대쪽 손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탄창을 꾹 잡았다.

그리고 굴러간 탄피가 내 옆에 있는 난간에 도달했을 때, 정신없이 흔들리던 놈의 머리가 멈췄다. 먹잇감을 조롱하던 순간은 사라지고……. 파도 같은 살의가 밀려온다.

바닥을 박찬다.

깍-까가가가각!!!

바닥을 박차는 순간, 다시 한 번 시야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난 마치 우주 한복판을 걷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공간을 갈랐고, 내 발목을 붙잡는 공포를 떨쳐내었다. 저 옆에서는 놈이 격하게 울부짖으며 바닥을 기어오기 시작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들은 피부 위에 떨어지며 식은땀으로 변해 버린다. 눈동자가 떨리고, 모든 공간이 줄어든다. 내 눈에는 오직 내가 가야 할 길과 흰 눈을 맞고 있는 소총밖에 보이지 않았다.

잡고 있는 탄창을 쭉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던 대검은 놈에게 던지며 조금의 시간이라도 벌기 위해 애썼다. 바로 앞이다. 소총은 바로 내 눈앞에 있었고, 격하게 울부짖는 놈도 바로 내 옆에 있었다. 내가 던진 대검은 허공을 가르고, 내 손끝은 총을 잡는다.

시간이 멈춘다.

내 손의 열기 때문인지 총 위에 얹어진 눈이 사르르 녹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모든 힘을 다해 총을 잡자 한순간 신경이 뭉개지고 시야가 사라지고 말았다.

뚝-.

머리에 있는 필라멘트가 팍하고 터져 버렸다. 소총과 내 손을 보고 있던 시야는 뚝 하고 사라지고, 팔다리의 신경을 이루고 있던 다발들은 모두 강제로 뽑혀 버린다. 그리고 체감상 영원할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몸에서 부유감이 느껴진다. 난 하늘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처럼 공중을 날아가는 착각에 빠진다. 착각인가? 정말? 이것은 현실이 맞을 텐데? 머리에 벼락이 친다. 살고자 하는 본능이 죽어 버린 뇌를 강제로 깨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들어오는 전기신호. 나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며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멀어지기 시작한 옥상이었다. 아, 온몸에서는 격한 고통이 느껴졌다.

컥-!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며 고통을 온몸으로 감내했다. 입에서는 격한 단말마와 함께 침이 흘러나왔고, 상상할 수 없었던 통증이 신경을 짓뭉개고, 뇌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쇼크, 그래 쇼크로 인한 죽음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등판에 느껴지는 2차 고통과 함께 다시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쿵 하는 소리가 귀를 울린다. 그래, 내가 어디에 처박히기라도 한 모양이다. 부유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2차, 3차로 찾아오는 고통은 내 몸과 신경을 찢고 집어삼킨다. 죽고 싶다,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내 머리를 이루는 또 다른 요소들이 눈을 뜨고, 소리를 들으라고 윽박지른다. 이명이 울리고, 손이 덜덜 떨렸다. 힘겹게 한쪽 눈을 뜨자 나는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온몸을 돌덩이가 짓누른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빠르게 돌아오기 시작한 정신은 고통을 온전히 느끼면서도 내 상황을 판단하게 해 주었다. 나는 놈에게 공격을 당해 벽에 처박힌 것이다. 그렇다면 놈은 어디 있지? 소리를 들으려 했지만, 짙은 이명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욱한 먼지, 그리고 그것을 감싸는 칠흑. 내 눈앞에 있는 옥상 문 앞에서 무언가 몸을 흔들며 서 있었다.

깍-까각.

그림자. 그리고 놈이다. 놈은 내 숨통을 끊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렇다면 총은? 내가 목숨을 걸고 잡으려고 했던 소총은 어디 있지? 온몸에 감각이 사라지고 팔다리가 내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어떤 자세로 처박혀 있고, 무엇을 잡고 있는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나는 떨리는 눈동자를 옮겨 내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선이 닿은 그 끝에는 내 손이 굳건하게 잡고 있는 소총의 손잡이가 보였다.

눈이 번쩍 뜨인다.

대기가 진동하고, 파도 같은 꿀렁거림이 내 살과 피. 그리고 신경을 일깨웠다. 정신이 돌아온다. 정신이 돌아옴과 동시에 온몸에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총은 내가 가지고 있다. 탄창도 반대쪽 손에 온전히 들고 있었다. 놈은 아직 나에게 오지 않았고, 모든 상황을 인지한 순간 몸은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탄창이 눈앞을 수놓고, 총을 들고 있는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소리가 울리기 전에 보이는 빛. 난 천둥이 오기 전 번개처럼 한 발짝 빠르게 반응했다.

탁-.

탄창을 끼워 넣는다. 그 순간 문 앞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녀석이 나의 죽음을 확정하고 몸을 날린다. 이번 공격은 단순한 타격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사지가 찢겨 그때 죽었던 부랑자 놈들과 같은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끝? 죽음? 아니다. 매번 느껴왔던 순간이지만, 나는 이번만큼은 알 수 있었다. 확신이 선다. 내 손놀림에는 거침이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 반복했던 삶의 발버둥. 내가 노리쇠를 당기자 모든 요소가 속삭였다.

내가 놈보다 빠르다.

그리고 놈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탕! 탕탕탕탕!!!

놈이 코앞에 뛰어오던 그 순간, 내 검지는 방아쇠를 당겼고, 총구는 정신없이 흔들린다. 좁은 공간에서 퍼지는 불꽃과 옆으로 사정없이 떨어지는 탄피들! 모든 장면이 뇌리에 박히고, 내 몸에 낙인을 새긴다. 날아간 총알은 그대로 놈의 몸체를 찢어발겼으며, 기세등등한 놈의 살기를 한순간 폭풍 속에 욱여넣는다. 귀가 먹먹한 총성과 이명은 이 싸움의 타협은 없었다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철의 폭풍 사이에 들어온 놈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깍-까가각각깍!

놈의 사지가 뒤틀리고, 바닥은 검은색 피로 물들었다. 남은 총알은? 대부분 소모했다. 아마 남아 있는 총알은 10발 남짓일 것이다. 이 총알로 모든 상황을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급박한 상황과는 반대로 내 심장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숨을 내뱉자 찌꺼기가 걸려 나가고, 내 몸을 붙잡고 있던 덩어리들이 하나하나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투명한 물속에 몸을 집어 던지듯 정신을 시선 끝에 몰아넣었다.

난 그대로 사격을 멈추고 조준 사격을 위해 개머리판을 견착했다. 하지만 놈은 죽음의 공포 앞에 울부짖으며, 발악을 하기 시작했고 그대로 계단 난간을 뛰어넘어 아래층으로 떨어져 버렸다. 온몸을 버둥거리며 기는 꼴이, 죽기 전 가축처럼 너무나 처절하고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나는 동정심보다는 종을 역전해야 한다는 기묘한 사명감에 사로잡혔다.

못 보낸다. 오늘 밤 이후로 놈이 도시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끄으으으아아아!!!

바닥에 손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입에서는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꼭 일어나야 하는 사람처럼 몸을 축내며 생명을 깎아 먹었다. 온몸이 아프다. 뼈가 맞물리듯 끄드득 거리가 소리가 울려 퍼졌고, 속에서는 피가 솟구쳐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나는 이를 악물고 피를 삼켰다. 그리고 정면을 노려보며 붉은 시야의 모든 것을 집중했다.

저 앞에 보이는 복도에서 새하얀 몸체를 가진 녀석이 필사적으로 기어가고 있었다. 처음에 가지고 있던 그 기세는 어디 갔는지, 꼭 벌레 한 마리가 살충제를 피해 도망가는 것 같았다. 난 그대로 총을 들어 올려 조준간 사이에 놈을 담았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겨 총알 한 발을 놈의 등판에 박아 넣었다. 그러자 들려오는 울음소리.

끼이이이-.

총알을 맞은 놈은 꼭 동물 같은 소리를 내뱉으며 낑낑거렸다.

후욱 후욱.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밟으며 아래로 내려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나는 조금이라도 가깝게 접근하기 위해 힘겨운 발걸음을 지속했다. 정면에 보이는 놈이 몸을 뒤틀며 바닥을 꿈틀거린다. 그리고 이 이상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붉게 변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접근하는 나를 노려보았다.

깍-까가가각! 꺽, 컥.

놈이 울음소리를 내뱉자 검은색 피가 앞으로 팍 튀겨져 나왔다. 하지만 나는 그 찰나의 순간조차 주지 않기 위해 개머리판을 견착하고 다시 한 번 방아쇠를 당긴다.

탕!

총성이 터지고, 눈앞의 불꽃이 팍 튀긴다. 총알이 많지 않다. 한 발, 한 발의 모든 것을 집중하고 최대한 많은 데미지를 주어야 했다. 하지만 황급히 몸을 피한 놈 때문에 내가 발사한 총알이 바닥에 박히고 말았다. 내가 최후를 각오했듯이, 놈도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놈은 기둥에 몸을 숨기고 꺽꺽 울음을 내뱉었다. 총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었던 놈은 엄폐라는 개념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몸을 숨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내 집요함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곁눈질 치고 있는 녀석을 그대로 노려봤고, 엄폐가 완전히 되지 않는 다리를 노리며 총을 발사했다.

탕!

불꽃이 튀기고, 총구에서 날아간 총알이 놈의 다리가 끊어 버렸다. 두 다리로 서 있던 놈은 그대로 바닥에 넘어져 꼴사납게 죽어가는 시늉을 했다. 시늉, 그래 내가 보기엔 저것은 시늉이다. 영악하고 지능이 높은 변종은 인간을 속일 줄 알았다. 그리고 기꺼이 죽어가는 연기를 하며 마지막 기회를 노릴 줄 아는 놈들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놈의 모습을 믿지 않았다.

분명 총알은 남아 있었지만, 정확한 개수는 알지 못한다. 몇 발을 발사할 수 있을지, 그리고 놈을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기회를 잡은 이 순간에 모든 것을 끝낼 선택을 해야 했다. 놈이 나를 속이려 하고 있다. 머리에 총알을 맞아도 즉사하지 않는 놈은 내가 총알을 소모할 때까지 분명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나도 놈을 한 번……. 속여 보자고.

달칵-.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조정간을 안전으로 이동시켰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지막 카운터 다운은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견착하는 모습을 대놓고 보여 주며 놈을 조준했다. 안전장치가 걸려 있다. 지금만큼은 아무리 방아쇠를 당겨도 총알이 나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검지를 거세게 움직여 방아쇠를 쳤다.

탁-.

탁-.

방아쇠가 뒤로 당겨지지 않는다. 총알이 없는 것과는 다른 소리겠지만 놈이 그것까지 알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속을 것이다, 분명 놈은 속을 것이다. 이마에 고인 식은땀은 또르르 떨어지고, 거세게 뛰던 심장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실바람, 피부를 핥는 긴장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 환경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

순간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한다. 바닥에 쓰러져 몸을 뒤틀던 놈의 움직임은 멈췄고, 처량하게 낑낑거리던 울음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그래, 시늉을 멈춘 놈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총알이 나가지 않는다. 그렇지?

총알이 다 떨어 졌나 봐?

녀석은 그대로 고개를 들어 바닥을 긁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울려오는 꺽꺽거림은 나를 속였다는 기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놈의 얼굴 근육이 뒤틀린다.

까가가가가가가각!!!!!!!!

죽어가던 놈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리가 하나 떨어져 나간 상태지만, 놈은 아까보다 빨라진 속도로 나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했다. 치렁거리는 머리카락, 정신없이 움직이는 팔과 다리. 180도로 꺾으며 부들부들 떨리는 얼굴은 놈이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엄지를 움직여 조정간을 돌렸다.

달칵-.

‘끼이-?’

속였다.

검지를 당기자 방아쇠가 뒤로 들어간다. 총구에선 불이 터져 나왔고, 그 불빛은 경악이 묻어나오는 놈의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방심의 대가는 머리통을 관통하는 여러 개의 총알이 되어줄 것이다. 바닥을 기어오던 놈은 그대로 머리를 관통당했다.

총성을 끝으로 무거운 정적이 흐르기 시작했다. 기어오던 놈의 몸체는 서서히 무너졌으며, 나를 잡으려고 뻗은 손은 갈 길을 잃고 허공을 훑는다. 나는 쓰러지는 놈과 눈을 마주쳤다. 흐리다고 생각한 회색빛 눈동자는 주위를 잠식한 칠흑처럼 어두워진다.

‘아.’

입에선 탄식 같은 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왔다.

반동의 여파가 몰려온다. 그리고 놈을 죽였다는 감각이 뒤늦게 찾아와 내 손끝을 진동시켰다. 힘겹게 들고 있던 총구를 내리자 증기와 같은 김이 입에서 새어 나온다.

놈이 죽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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