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50화 (150/313)

[150]

나가야 한다.

나는 먼저 비닐로 밀봉이 되어 있는 가방을 황급히 열어 점퍼와 핫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차갑게 식어 있는 그녀의 체온을 보온하며, 전체적인 몸 상태를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사방을 감도는 어두움은 나의 이성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빨리 나가야 한다는 조급함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점퍼만을 입혀주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쪽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가 내 발목을 붙잡는다.

난 헛숨을 들이키며 황급히 손전등을 들었다. 이 방에는 그녀를 포함해 실종된 간부진들이 잡혀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시체가 되어 있었고, 이 방에는 죽음의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들려온 거친 기침 소리는 이 시체 중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난 소리를 쫓아 손에든 손전등을 움직였다. 그렇게 손전등 빛이 도착한 그곳에는 한 남자가 몸을 떨고 있었다.

그 남자는 말을 더듬으며 미약한 목소리로 말한다.

‘누, 누구 있습니까?’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얼굴. 손전등 불빛이 향한 그곳에는 단체장이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누워 있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불빛을 쬐고 있음에도 어떠한 시각적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자세히 보니 단체장의 눈은 감겨 있었으며……. 그곳은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모를 만큼 참혹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눈이 멀게 된 것이다.

‘……단체장님.’

난 그에게 어떠한 위로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앞이 보이지 않아 겁에 질린 단체장에게 내 육성을 내뱉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대답을 들은 단체장은 입술을 파들파들 떨더니, 이내 고통과 안도가 섞인 숨을 내뱉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무언가를 내려놓은 듯 나에게 조용히 말을 읊조렸다. 그 읊조림에는 포기와 반가움이 섞인 미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동윤 씨죠? 그, 그렇죠? 하하……. 정말 여기까지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문밖에서 소음기를 뚫고 나오는 발사음이 묵직하게 울려왔다. 복도 끝에서 들리는 것으로 보아, 노인이 경고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급하게 문밖을 살피며 어깨 위로 그녀를 들쳐 매었다. 그리고 어정쩡한 자세로 상반신을 일으키는 단체장에게 다가가 손과 어깨를 잡아주었다.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다. 당연히 잡혀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살아서 만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나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과 함께 입을 열었다.

‘서둘러야 해요, 같이 갑시다.’

하지만 단체장은 내 팔을 밀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나온 말은 감사 인사와 울음이 아닌, 자신을 버리고 가라는 포기선언이었다.

갑작스럽다. 그에게 밀린 팔은 갈 길을 잃고 허공을 훑었으며, 내 말문은 순간 턱하고 막혀 버렸다. 침묵으로 물든 시간이 짧게 지나간다.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단체장이 마른침을 삼키며 중얼거린다.

‘전 얼마 못 가요. 짐입니다.’

단체장은 손을 떨었다. 그리고 어둠 사이로 자신의 손을 치우며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상처를 보여 주었다. 단체장의 상의가 붉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다. 누군가 다급히 지혈을 한 듯 더러운 천으로 감겨 있는 그 상처는 이 칠흑만큼이나 검붉은 피를 꾸덕꾸덕 내뱉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숨이 튀어나왔고, 단체장의 입에서는 꺼져가는 삶의 촛불이 모습을 드러낸다. 입김이 허공으로 흩어져 검붉은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빨리……. 빨리 도망가세요.’

그가 내뱉는 입김에는 망설임과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단체장은 분명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인간이기에 살고 싶고, 삶이 있기에 유지 하고 싶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며, 그 끝이 다가올 때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을 믿으며 무의미한 발악을 시작하게 된다. 내가 보았던 모든 이가 그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당연한 추악이었다.

하지만 단체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았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희망을 남에게 짊어지게 하지도 않았다. 그는 인간이 가지는 본능보다 더 고귀한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너무나 쉽게. 너무나 가볍게 자신의 욕망을 포기했다.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구나. 그래, 이제 끝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후련한 미소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서 묵직한 소음기 소리가 들리고 내 이마에 고인 식은땀들은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빠져나갈 시간은 줄어들고 있었으며, 한시가 급한 경로가 머릿속에서 미친 듯이 그려진다. 빠져나가자, 지금 나가야 한다! 하지만 내 이성과 맞부딪힌 본능은 이곳에서 나를 묶어놓고 말았다.

비록 비즈니스와 이득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관계지만, 그간의 시간은 그를 신뢰하고 선함이라는 이념을 돌아보게 해 주었다. 그는 분명 좋은 사람이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 난 조금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를 데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단체장은 내 그런 망설임을 읽기라도 했는지 천천히 나를 밀며 말했다.

‘에덴으로 가세요. 그리고 사람들을 부탁해요.’

한 가닥 줄이 끊어진다. 꺼져가는 불꽃의 목소리였다. 바닥에는 이미 많은 피가 고여 있었고, 나를 밀고 있는 단체장의 손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힘이 마치 천근이라도 되는 것처럼 형편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가볍다. 아니, 무겁다. 나를 밀고 있는 것은 단체장의 손이 아닌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나의 망설임은 굳어 버렸고, 떨리는 입술은 녹아내린 촛농에 다물어진다. 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 앞에서 가지고 있는 생각조차 가볍게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무거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결심을 바꿀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윤 씨한테 매번 신세만 지네요…….’

매번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난 그가 매번 해 주는 말이 가식적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속에 녹아 있는 깊은 본심을 매번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속에 담겨 있는 그의 주마등을 엿볼 수 있었다. 눈으로 느껴진다. 떨리는 피부로 느껴졌다. 그리고 애절하게 울리는 가슴으로도 느껴진다. 단체장은 지금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무나 조급하고 건조한 죽음이었다.

눈물이 흐르지 않았고, 울음도 없었다. 많은 사람을 보호하고 이끌었던 사람의 죽음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최후였다. 바닥에는 늪과 같은 피가 고여 있었으며, 사방에선 죽음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어둡고 차갑다. 모든 빛이 붉은 불꽃에 타올라 재가 되어 버렸고, 어둠과 그림자 말고는 남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을 위로할 시간이 있을까? 아니, 우리는 손을 맞잡은 짧은 순간 침묵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나는 일기에 이야기를 적으며, 그날 하고 싶었던 말을 조용히 적어보았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단체장은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당신이랑 같아요.

나는 단체장의 손을 놓았다. 그리고 그도 내 손을 놓았다. 동시에 놓았기에 미련도 없었고, 원망도 없었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우리는 그 신념을 가치로 삼았었으니까. 과연 나중에 내 일기를 읽게 된 사람은 그를 무엇이라고 말해 줄까?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해 줄까? 아니, 적어도 일기를 적고 있는 나는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빛이 형체가 없는 것처럼, 우리가 가지는 희망에도 형체는 없었을 테니까.

나는 강수련을 둘러업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발이 떨어진다. 미련이 남지만, 미련이 남지 않았다. 그래, 나는 그때를 그렇게 기억했다.

처음 그의 방에서 맡았던 유자 향기가 천천히 멀어졌다.

* * *

따다다다닥!

따다닥-!

복도는 이미 탄피로 도배되어 있었고, 그 옆에 달려 있는 창문은 전부 깨져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복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계단으로 올라오는 놈들의 접근을 능숙하게 막고 있었다. 우리는 총을 쏠 수 있고, 저쪽에서는 총을 쏘지 못한다. 그 이점은 침입이 발각당한 지금도 유리한 상황을 유지하게 해 주었다. 노인은 바닥에 침을 뱉고 빈 탄창을 탄피 사이로 집어 던진다. 그리고 방에서 나온 나를 발견하고 크게 외쳤다.

‘수련이는?!’

그녀는 이 시끄러운 상황에서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핫팩과 점퍼 때문인지 아까보다 혈색이 많이 좋아져 있었고, 체온도 많이 올라가 있었다.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과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를 업은 상태에서 노끈과 가방을 이용해 서로의 몸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이동할 준비가 되었다. 나는 노인을 향해 외쳤다.

‘무사해요!!!!’

그녀는 무사해요. 저기서 싸우고 있었을 노인이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말일 것이다. 노인은 아까보다 경쾌해진 몸놀림으로 계단을 봉쇄하고 총을 발사했다. 놈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살이 터지는 소리가 하모니를 이룬다. 하지만 노인은 그 소리마저 압살시키며 단 한 명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소총을 꺼내 들며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반대쪽에 보이는 유일한 비상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가자.’

하지만 그것도 잠시, 노인은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남은 잔탄을 비워 버린다. 그리고 복도를 미친 듯이 달려와 나를 지나치고 비상구가 보이는 곳을 향해 재빨리 달려갔다.

‘따라와!’

난 이를 악물고 노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등에서는 그녀의 묵직한 무게와 함께 진한 체향이 풍겨왔고, 내 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그녀의 팔과 다리를 꾹 잡았다.

깡!

깡!

쾅!

노인이 개머리판을 휘두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날아갔고, 노인의 거센 발차기는 비상구 문짝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다. 내가 들고 있는 손전등 불빛이 정신없이 앞을 밝힌다.

그리고 저 뒤에 있는 복도에선 놈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가 미친 듯이 울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발소리는 반대쪽에서만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놈들은 우리가 빠져나가려는 비상구를 찾았는지, 계단 밑에서는 격한 고함과 함께 부산스러운 그림자들이 감지되었다.

‘넌 수련이만 책임지고 옮겨!’

내가 권총을 뽑아 들자, 노인은 어림도 없다는 듯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강수련을 지키라는 말과 함께 나에게서 소총 탄창을 뺏어 들었다. 손이 움직인다. 탄이 가득 들어 있는 탄창을 소총에 끼워 넣는다. 노리쇠가 당겨진다. 차가운 장전음이 귓가를 노크하고, 점멸하는 손전등 불빛들은 눈앞을 어지럽게 돌아다닌다. 그리고 그 불빛 사이로 계단을 올라오는 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총구는 옮겨진다.

‘여, 여기다!!! 여, 컥-!’

놈들은 계단 사이로 우리를 발견하고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도 찰나, 노인의 귀신같은 사격은 그대로 놈의 목을 꿰뚫었고, 치솟은 피는 계단을 어지럽힌다. 나는 그것을 신호탄 삼아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뛰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온몸으로 강수련을 보호했으며, 노인은 우리가 지나갈 길을 만들어 주었다.

따닥!

울리는 총성과 번쩍임, 그리고 쓰러지는 놈들. 우리는 마치 수많은 갈대숲을 가로지르는 한줄기의 바람과 같았다.

3층, 2층, 그리고 1층.

창문 밖을 통해 보이는 밖은 이미 난리가 난 상태였고, 수많은 빛줄기들이 우리가 지나가는 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노인은 그럴 때마다 총을 난사해 놈들에게 총알로 답해 주었고, 놈들은 황급히 엄폐물을 찾으며 흩어지기 바빴다.

하아-. 하아-.

나는 입에서 단내가 진동하는 숨을 내뱉었고, 잠시 문 옆에 앉아 숨을 골랐다. 이제 1층이다. 우리가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젠장!’

하지만 그 순간 노인이 욕설을 내뱉으며 사격을 중지했다. 노인의 엄호를 순풍 삼아 뛰쳐나가려고 했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멈췄고, 사격을 중단한 노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그곳에는 시뻘겋게 변한 소음기를 보며 욕설을 내뱉는 노인이 보였다. 아, 잊고 있었다. 소음기가 영구적인 부착물이 아닌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재빨리 들고 있는 소총을 노인에게 던져 주고 앞을 향해 권총을 발사했다.

컥-! 으악!

권총이 불을 뿜자 외마디 비명이 터진다. 바퀴벌레 같은 새끼들, 노인의 공격을 피해 사방에 숨어 있던 놈들이 사격이 멈추자마자 이쪽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조준 사격할 시간조차 없었다. 사방에서 개떼처럼 몰려오는 놈들은 권총의 화망으로 저지하기에는 부족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소총을 받아 든 노인 쪽에서 장전을 끝낸 신호가 들려왔다.

‘물가로 뛰어, 동윤아!!’

따다다다다닥-.

다시 한 번 노인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손전등과 무기를 들고 이쪽으로 달려오던 놈들은 바닥에 픽픽 넘어지기 시작했고,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숫자만이 엄폐물로 숨어들었다. 놈들도 이제 한계가 온 것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거친 심장 소리에 묻어 보냈다. 그리고 성공했다는 짐작과 함께 우리가 침입한 부두로 미친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성공했다, 됐다! 저 멀리서 한강 물이 보일수록 나는 소리 없는 고함을 내지르며 경쾌한 발걸음을 더했다.

‘----아!’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내 뒤에서 들려온 소리는 내 발걸음에 제동을 가하고 말았다.

‘아아악!!’

덜컥.

심장이 바닥을 향해 떨어진다. 안도와 기쁨으로 요동치던 신경은 한순간 죽어 버리고, 익숙한 목소리의 비명은 내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난 그 자리에 멈춰서 손을 떨었다.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목을 억지로 돌려 노인이 있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허벅지에 볼트가 꽂힌 노인이 필사적으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잠깐의 찰나다. 내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이며 볼트를 쏜 놈을 찾기 시작했다. 볼트? 화살? 도대체 그걸 어디서 구한 거지? 노인은 왜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거지? 내 눈동자는 지진이 일어난 듯 떨리기 시작했고, 그 시선의 끝에는 3층에서 무언가를 들고 있는 한 그림자에서 멈췄다. 그곳에 있는 놈은 무언가 길쭉한 것을 들고 있었다. 짙은 어둠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 떨리는 신경은 분명 놈을 향해 있었다.

완벽한 사각지대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그림자는…….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저 멀리서 노인의 처절한 고함이 들려왔다.

‘동윤아!! 그냥 가!! 수련이 데리고 뛰어!!!’

못 간다.

절대 못 간다.

노인은 허벅지를 부여잡으며 접근하는 놈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날아오는 볼트 때문에 자리에 멈춰서 엄폐를 할 수밖에 없었다. 노인은 마치 팔다리를 잃은 사마귀처럼 야금야금 접근하는 개미 떼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을 불태우는 촛불처럼 나에게 도망갈 것을 요구한다. 마지막인가? 이게 정말 끝인가? 아, 숨이 막혀오고, 심장은 정지한 듯 짜릿하게 울렸다.

권총은?

마지막 다섯 발이 전부다.

내가 노인을 구하려 뛰어가면 우리 전부 죽는 것이다. 아무리 경우의 수를 생각해 봐도 다수가 살 방법은 내가 도망가는 길밖에 없었다. 노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에게 도망가라고 외치며 마지막 시간을 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그래야 하는 걸까? 노인을 버리고? 또 누군가를 잃고 살아가라고?

아아-.

입에서는 거친 숨과 함께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싫다, 싫다! 노인은 여기서 죽어선 안 된다.

살려 줘 제발, 내가 또 움직일 기회를 줘.

그리고 내 간절한 물음에 대답한 것은 신도 세상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시간이 느려진다.

생각이 가속한다.

모든 로직이 흩어졌다 겹치기를 반복했다.

생각하자, 또 생각하자.

장면은 느려지고 모든 공간이 흩어진 프레임처럼 흐릿해진다. 그리고 내가 단서를 찾을 곳에는 선명한 빛의 점멸이 지속되었다. 눈이 뻑뻑하고 머리가 지끈거린다. 모든 소리는 이명으로 바뀌어 내 고막을 때리고, 눈앞은 폭죽이 튀기라도 하듯 번쩍거린다. 그리고 나는 머리가 아닌 몸이 시키는 행동을 시작했다.

끼릭끼릭-.

가죽장갑 너머로 뜨거운 소음기의 온기가 느껴진다.

나는 권총에 달린 소음기를 돌려 분리했다.

뜨겁게 가열된 소음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그 처량한 소리는 이명 사이로 조용히 울려 퍼졌다. 난 그대로 한 손으로 권총을 들어 올려 하나 밖에 보이지 않는 시야에 모든 것을 집중했다. 저 멀리 보이는 놈, 그래! 나는 최태식을 향해 마지막 잔탄을 모두 쏟아부었다.

탕! 탕! 타앙-! 탕탕!

놈은 기겁하며 몸을 숨긴다. 하지만 거리가 먼 표적지로 향한 탄환은 당연히 빗나갔고, 애꿎은 벽만을 때리며 콘크리트 가루를 튀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소란으로 만들어진 이명은 사라지고 모든 놈들이 행동을 멈추었다.

놈들도 알고 있다, 총알 5발이 만든 결과는 단순한 탄흔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뱉은 입김이 하늘로 흩어진다. 그리고 내가 쏜 총성은 이곳을 시작으로 저 멀리 보이는 도시를 향해 천천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메아리치고, 그 메아리는 또 소리와 부딪힌다. 이 굉음은 저 멀리 잠들어 있는 제삼자를 불러낼 것이다.

저 멀리서 검은색 물이 넘실거린다.

그것은 한강이 아닌 도시에서 흘러나오는 육편의 파도였다.

난 그것과 동시에 강수련을 꾹 붙잡고, 노인을 향해 뛰어갔다. 판을 뒤집어서 만든 마지막 기회를 나는 놓칠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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