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눈앞이 정신없이 새어 나오는 입김으로 어지럽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묵직한 소음기 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고, 그와 맞춰 두근거리는 내 심장은 미친 듯이 공명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매캐한 냄새. 재빨리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검은색 연기들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한두 개가 아닌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치는 여러 개의 연기들은 아니길 빌었던 현실도피를 깨부수고, 나에게 악몽과 같은 현실을 자각하게 해 주었다.
‘-------!!’
인간이 만든 최후의 방파제 무너트리기 위해 모인 개미 떼들. 우리가 항상 지나가고 들어왔던 에덴의 정문에는 수없이 많은 그놈들이 붙어 있었다. 놈들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그 벽을 넘기 위해 서로를 밟고 밀치며 하나의 파도를 만들기 시작한다. 넘실거리는 검은 늪, 하나의 목표를 향해 넘실거리는 육편의 파도. 난 그 모습을 보며 경악을 느끼다가도 씻을 수 없는 증오와 분노 앞에 치를 떨었다.
‘아직 안 늦었어!’
노인이 내 귀를 향해 짧은 고함을 내질렀다. 그 고함은 다시 한 번 내 무의식을 일깨웠고, 노리쇠를 당겨 총을 장전하게 했다. 맞다, 노인의 말이 맞다. 에덴은 함락이 아닌 분명 습격을 가한 적과 싸우고 있었다. 장벽에는 총을 들고 있는 전투조부터 시작해, 민간인 복장을 한 일반 시민까지 몰려온 놈들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래, 우리는 늦지 않았다.
‘소리를 듣고 몰려왔겠지. 분명 내부에서 일이 터진 거야.’
노인은 그 급박한 순간에도 살벌한 눈빛으로 사방을 살피며 판단을 내렸다. 그 말을 들은 나의 시선은 하늘을 향해 솟구치는 검은색 연기에 꽂혔고, 그 연기들이 에덴의 장벽이 아닌, 저 깊숙한 내부에서 솟아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이렇게 몰려올 정도의 소음? 그것은 최소한 큰 폭발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폭발은 누가 일으켰는가? 그것은 머리를 굴려볼 필요도 없는 단순한 논제였다.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했다. 장벽은 나름 준수한 상태였고, 전투조와 시민들은 놈들을 성공적으로 저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전이 끊기고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검은색 연기는 내부에서 변고가 일어났음을 말해 줄뿐 안쪽 상황이 어떤지는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장벽에서 싸우는 저들도……. 내부를 돌아볼 틈이 없겠지.
혼돈, 그리고 혼돈. 하늘에서 모든 것을 보지 않는 이상,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고민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짙은 후회뿐이다. 나는 에덴으로 들어갈 길을 찾아 숙소와 사무실에 있을 일행들의 안위를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 순간, 피부가 찌릿하게 울리고, 고막을 두들기는 노인의 고함이 내 신경을 일깨웠다.
‘동윤아!’
‘-----!!!’
놈이다.
노인의 고함이 놈의 괴음과 함께 나를 일깨운다. 그리고 찰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놈이 나를 공격하나? 시야에서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려온다. 하지만 내가 공격받는다는 자각보다 빠른 반사 신경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놈의 위치를 파악한다. 소리가 들려온 즉시 내 손은 권총 홀더로 향했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기도 전에 총구는 놈의 머리를 정조준한다.
딱-!
고기에 총알이 박히는 소리와 함께 뇌수가 후드득 떨어진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자 놈이 꼬꾸라지며 형편없이 몸을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다. 난 기계적으로 권총을 홀더에 놓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따닥, 따닥!
노인은 근방에서 달려오는 몇 놈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있었고, 나도 소총을 들고 지원사격을 가한다.
순식간에 여덟 놈이 바닥에 나자빠진다. 그런데도 수없이 많은 후발주자들이 저 멀리서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 것이다. 노인과 나는 한순간 눈을 마주쳤고, 수없이 많은 감정과 의중을 교환한다. 그리고 총을 내려놓은 노인은 자신이 챙겨온 가방에서 튼튼한 등산용 밧줄을 하나 꺼내 장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끝에 대검이 매달린 밧줄은 허공을 가로질러 장벽을 넘어간다. 그것을 3번 정도 반복하기를 계속, 노인이 던진 밧줄 끝에 무언가가 걸렸는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아무리 당겨도 밧줄은 빠지지 않았다. 난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며 달려오는 놈들을 향해 남아 있는 잔탄을 모조리 비어 버렸다. 눈앞에서 입김과 함께 화약 연기가 아른거린다.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찌르르 울리고, 내 심장과 신경이 총성과 함께 움찔거렸다.
‘동윤아!’
뒤에서 노인이 나를 부른다. 난 고개를 돌릴 겨를도 없이 총을 한 손에 들고 미친 듯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노인은 이미 날다람쥐처럼 밧줄을 타고 올라가 장벽 위에 서 있었고, 나에게 접근하는 놈들에게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내 손은 밧줄로 향했다. 그리고 발을 지체 없이 장벽을 밟는다.
하나, 둘. 하나, 둘.
신속정확하게 딛고, 잡고, 딛고, 잡는다.
허억-, 허억.
높은 장벽을 넘어 올라오자 거친 숨과 함께 쿵쾅쿵쾅 뛰는 심장이 내 눈동자와 뒷목을 바짝 당기기 시작했다. 높은 장벽에서 한눈의 보이기 시작하는 에덴은 이미 혼란과 거친 조류의 한복판이었다. 곳곳에서 치솟아 오르는 화염과 정신없이 도망가는 사람들. 난 그때쯤 생각하기를 멈추고, 장벽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미친 듯이 밟았다.
나를 따라오던 노인은 크게 외쳤다.
‘숙소로 가 봐! 난 학교랑 사무실로 가 보마!’
통신이 끊겨 버렸기 때문에 아이들과 일행들의 위치가 정확하지 않았다. 이때는 가까운 거리임을 감안해, 하나씩 찢어져 일행들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가장 먼저였다. 나는 노인과 시선을 교환하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다. 가방은 던져 버린 지 오래였고, 내 몸에는 최소한의 무장밖에 달려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큼 가벼워진 내 몸은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최고의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휘몰아치는 조류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평화롭고 조용하기만 하던 에덴의 거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건물 곳곳에는 연기와 화염, 그리고 피와 시체가 보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지나가는 거리에는 도망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부랑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드문드문 싸우는 전투조와 시민들이 보였지만, 어디까지나 소수, 장벽에 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조차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꺄아아악!!’
더러운 복장과 더러운 얼굴, 그만큼이나 더러운 욕망이 대기를 가득 채우고 내 코끝을 아리게 만들었다. 비명이 들리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부랑자 3마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살벌한 냉병기와 총기를 지니고 있는 놈들은 얼굴에 검붉은 피를 묻히고 있었다. 욕망과 살의에서 오는 기쁨. 놈들은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고, 검붉은 화장을 한 얼굴에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놈들이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놈들은 한창 사냥을 하고 있었는지, 방금 내 눈앞에서 남자의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끌며 황급히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끌려가는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는 남자에게 기어가려 했지만, 부랑자들은 동정조차 느끼지 못하는지 히히덕 웃으며 바동거리는 여자를 짐승처럼 끌고 갔다. 난 숨을 후욱 내뱉었다.
검지가 움찔거린다. 눈에서 불꽃이 튄다. 난 지체 없이 소총을 들어 올려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놈의 머리통을 쏴 버렸다. 총알은 타협이 없었다. 맞는 상대가 누구건, 어떤 인생을 살아왔건 한 조각 납덩어리는 대화조차 시도하지 않는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통이 터지고, 그 뒤를 희고 붉은 뇌수가 흘러내린다.
여자는 자기 얼굴에 쏟아진 피 앞에 비명을 지르고, 시시덕거리던 나머지 두 놈이 놀라서 나를 바라보는 게 시야에 닿았다. 하지만 놈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반응하는 것보다 내 총구가 옮겨지는 속도가 더 빨랐다.
딱! 딱!
한 마리당 한발씩. 내 기계적인 움직임은 조준간 사이에 놈들 머리를 담았고, 누구나 공평하게 머리를 터트렸다.
여자는 이 지옥 같은 광경 사이에서 넋을 잃었다. 눈동자는 이미 비어 있었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얼굴을 감싼 손은 바들바들 떨린다. 하지만 나는 이름조차 모르는 그녀를 달래줄 시간이 없었다. 그녀를 지나 바닥에 흐르는 피와 뇌수를 밟고 다시 한 번 앞을 향해 뜀박질을 시작했다. 상황이 좋지 않다. 내 머리에는 온통 채연이와 일행들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야가 정신없이 바뀌고 시선은 사방에 있는 건물과 화염으로 향했다.
딱!
한 놈.
따닥-!
그리고 두 놈.
나는 앞길을 막는 부랑자 놈들을 죽이고, 또 죽였다. 얼굴에 피가 튀기고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짐승들의 얼굴이 지나가는 바람처럼 금방 잊혀 버린다. 방아쇠를 당기면 총구가 불을 뿜는다. 총구가 불을 뿜으면 사람이 죽는다. 변하지 않는 공식과 피가 튀기는 현실. 난 허벅지에 총을 맞아 쓰러진 부랑자 머리에 대검을 꽂아 넣고, 두개골 부숴 버리는 것을 끝으로 고개를 들었다.
입에선 거친 숨과 함께 끓어오른 분노에서 나오는 증기가 새어 나온다. 피, 그리고 피! 내 온몸은 어느새 피로 가득했고, 시선은 오로지 저 멀리 보이는 중앙 건물에 꽂혀 있었다. 기다려, 조금만 더 기다려. 입에선 읊조림이 흘러나온다. 나에게 이성이 남아 있는 걸까? 시야는 붉었고, 내 손도 붉었다. 난 마치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향해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서 보이던 중앙건물은 어느새 50m까지 다가와 있었다.
[동윤아! 곽동윤!]
그 순간 내 앞주머니에 꽂혀있는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목소리? 영감님? 아, 난 무의식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고, 황급히 무전기를 뽑아 들었다. 아까 나랑 다른 길을 통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와 사무실로 갔던 노인이다. 분명 나보다 빠르게 그곳에 도착해 파악한 상황을 알려 주려고 무전을 했을 것이다. 나는 피와 땀으로 젖은 손을 바지에 황급히 닦고 노인에게 답했다.
‘영감님!’
[애들, 애들 거기 있어! 수련이랑 애들 다 거기 있어!!]
노인의 처절한 외침. 그 짧은 외침을 끝으로 노인의 말은 더는 들려오지 않았고, 그 빈자리를 고함과 처절한 총소리가 차지했다. 난 무전기를 놓았다. 아니, 떨어트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무전기가 닿기도 전에 50m 앞에 보이는 중앙건물을 향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손이 덜덜 떨리고, 분노로 인해 신경과 정신이 비명을 지른다. 적의와 살의가 미쳐 날뛰며 내 심장은 오직 한가지만을 말하고 있었다.
중앙 본부의 외부는 주변 건물들과는 달리 멀쩡했다. 하지만 겉만 멀쩡했을 뿐, 창문을 통해 보이는 분주한 그림자들이 중앙 본부 내부에 누군가 침입했음을 말해 주고 있었다. 발끝에서 시작한 무언가가 머리까지 솟구치자 더는 다른 풍경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항상 드나들던 중앙 본부의 문을 몸으로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복도를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분주하게 찾기 시작하는 부랑자들이었다.
‘시발, 독한 년! 어디다 숨겨 놓은 거야!’
‘시간 없어! 전투조 새끼들 오기 전에 빠져나가야 된다고!’
기습? 습격? 완벽한 공격 타이밍? 아니, 그것을 판단할 이성보다 앞선 건, 놈들을 죽이고 말겠다는 본능이었다. 오른쪽 손이 움직인다. 그 움직인 손은 권총 홀더로 향했고, 총구는 번개처럼 치솟아 앞으로 튀어나온다. 놈들과의 거리는 2m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 하지만 빠르게 뛰쳐나간 내 몸은 놈을 조준하기보단 왼쪽 손을 뻗어 한 마리를 잡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컥!
나는 그대로 한 명의 목을 움켜잡고 벽으로 밀었다. 그리고 뽑은 총구를 놈의 복부로 향하게 하며 연신 방아쇠를 당긴다. 이를 악물었다. 고기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총을 잡은 손가락에 따뜻한 액체가 팍 팍 터져온다.
딱, 딱, 딱, 딱.
손이 움켜잡은 울대에서 울컥하고 피가 지나간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이 느낌, 감촉, 감정. 모든 어둡고 칙칙한 야성이 나를 옭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감성을 느끼기도 전에 난 죽어가는 놈을 나머지 한 놈에게 밀쳐 버렸다.
놈은 자신의 동료가 공격받았다는 판단을 한 순간 날아오는 반송장에게 진로가 막혀 버린다. 그것을 노리고 있던 나는 놈이 무기를 꺼내 들기도 전에 총구를 옮겨 그대로 방아쇠를 당겨 버렸다. 잔탄이 비어간다.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방아쇠, 방향성 없이 날아가는 총알. 내가 밀친 놈의 등판이 터지고, 시체와 부딪혀 바닥에 넘어지는 마지막 놈에 머리통까지 깨졌다. 고풍스럽고 깨끗하기 그지없던 중앙 본부의 복도는 피와 뇌수로 물들고 말았다.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찰칵찰칵, 총알을 모두 소비했다. 난 기계적으로 엄지를 움직여 권총에서 빈 탄창을 빼낸다. 피가 고이기 시작한 바닥에 탄피는 끈적끈적한 늪을 머금었고, 그 위로 내가 떨어트린 빈 탄창이 심장과 함께 덜컥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옆에 있던 문 하나가 쾅 열리며 부랑자 한 놈이 고함과 함께 뛰쳐나왔다.
‘뒤져 이 개새끼야!!!!’
놈이 욕설과 함께 찢어지는 고함을 내뱉는다. 숨어 있었나? 기회를 노리고? 난 빨리 권총을 옮겨 놈을 쏘려고 했지만, 방아쇠는 빈공이 만을 때리며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앞에서 번뜩이는 시퍼런 사시미. 놈은 그 길쭉하고 날카로운 날붙이로 내 복부를 찌르려고 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내 복부 앞까지 다가온 사시미는 내게 피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입을 연 것은 내가 아니라 놈이었다.
‘끄으으……. 이……, 이 시발!!’
손이 불로 지지는 것처럼 화끈하다. 시야가 붉어져 세상 모든 것이 증오와 지옥으로 변한 것 같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복부를 노리고 들어온 사시미는 내 손에 잡혀 있었고, 놈은 얼굴이 붉어져서 그 사시미를 빼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시퍼런 날을 잡은 내 손에서는 너무나 선명한 피가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아드레날린이 고통을 잊게 해 주었을까? 아니, 이 선명한 고통은 손이 아닌 가슴에서 흘러나왔다.
‘……채연아.’
입에서 한이 어린 비명이 고요하게 새어 나온다. 채연아, 채연아. 수십 번 불러도 아련하게만 들리는 메아리. 난 그런 메아리를 들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피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이 비정하고 날카롭기만 한 현실이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뭐,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새끼가! 놔!! 놓으라고!!’
놈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린다. 사시미를 빼기 위해 아무리 손을 움직여 봐도 내 미련에 붙잡힌 칼날은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 입에서는 고통의 소리가 아닌 놈을 죽이기 위한 숨이 훅 빠져나왔다. 들고 있는 권총이 손에서 떨어지자 손끝이 짜르르 울렸다. 그것은 놈이 곧 죽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오는 반응이었다. 떨리는 손끝은 그대로 허리춤에 있는 대검으로 향했고, 손가락에 잡힌 대검은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바람처럼 조용히 빠져나왔다.
컥-. 커걱…….
내 허리춤에서 빠져나온 칼날이 살을 가르고 뒤늦게 피는 터진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터져 나오는 피를 외면했다. 그리고 천천히 사시미를 놓으며 감았던 눈을 뜬다. 얼굴에 튀긴 피가 뜨겁다. 그리고 그것은 식어 버린 땀과 함께 고여 바닥에 톡 떨어진다. 목이 베인 놈은 황급히 손을 들어 환부를 막아 보지만,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피를 막을 길은 없었다. 난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놈을 그냥 지나쳤다.
복도를 걷고 있는데, 몸은 계속해서 비틀거렸고, 앞을 보는 시야는 흐리고 붉었다. 입에서는 읊조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으며, 눈가는 뭐에 맞기라도 한 듯 경련이 지속된다. 복도에 있는 방들은 모두 문이 부서지거나 강제로 뜯겨 경첩이 너덜거렸다. 한 부분이 아닌 모든 방! 놈들은 모든 방을 뒤졌는지 성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숙소도 똑같았다.
‘채연아!!!!!!!!!!!!!!’
난 문이 뜯긴 숙소 앞에서 주저앉았다. 아무리 숨 가쁘게 뛰어와 봤자, 아이와 나의 거리는 너무나 멀어져 있었다. 불과 2m를 남기고……. 그 줄어들지 않는 간격은 나를 절망시킨다. 이런 일이 생길 수 없다고, 절대 아닐 거라고 자신을 속이고 위안했었는데. 그 모든 생각이 비현실적인 현실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난……. 이 뜯긴 문을 넘어 저 안으로 들어가기 너무 무서웠다.
‘---.’
하지만 그 순간 내 귀를 연약한 소리가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
소리.
‘----------.’
소리.
분명한 소리.
이명인 줄 알았던 잡음이 내 귀를 간지럽힌다. 환청이라고 착각할 만큼 작은 소리는 분명 아까는 듣지 못했던 작은 소리였다. 절망으로 가라앉았던 고개는 천천히 들리고, 부서진 문 사이로 보이는 방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설마, 설마. 난 무언가에 홀린 듯 바닥을 기어 덜컹거리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실낱처럼 흘러나오는 소리를 부여잡았다.
‘------.’
들린다, 분명히 들린다.
커헉-허억.
내 숨은 울음과 함께 터져 나왔고, 그제야 심장은 급박하게 돌아가며 온몸에 피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좁아졌던 시야는 환해진다. 난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숙소로 들어갔다. 우리의 행복한 공간이었던 숙소는 더러운 발자국과 부서진 가구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부서지고 짓밟혔다. 모든 일이 끝난 것만 같은 이 공간. 하지만 난 그곳에서 마지막 희망을 붙잡았다.
강수련과 나만 알고 있었던 공간이 있다.
‘----------.’
정말 우연치 않게 발견한 그 다용도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빈 공간이었다. 아무도 관심이 없었고, 그 누구도 사용할 생각이 없었던 그 공간. 하지만 그 장소를 발견한 강수련은 유난히 기뻐하며 나에게 말했었다. 식재료를 이곳에 모아 두면 좋겠어요. 날씨가 추워서 상할 염려가 없잖아요?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 날의 기억이 나를 이끌었다.
‘-----기 -----뚜---루.’
그리고 걸음을 옮길수록 노이즈 같던 잡음이 선명한 소리로 바뀌기 시작했다.
거실을 지나 베란다를 건넌다. 그리고 베란다를 지나 옆쪽 방으로 들어가면 아무도 가지 않는 다용도실이 나온다.
다용도실의 문은 큰 상자들로 가로막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쌓아 올려진 상자에는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먼지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그 먼지 위에 선명하게 찍힌 손자국은 아까 있었던 급박한 순간을 이야기해 주고 있었다. 흘러간 시간 속에 남겨진 찰나의 발버둥.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것 같은 그 손자국은 분명……. 강수련의 것이었다.
강수련은 도망갈 시간을 버리고, 이곳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난 상자를 하나씩 치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자를 치우면 치울수록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고 너무나 익숙한 노랫소리가 그 울음 속에 파묻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노랫소리와 울음소리를 듣고 있던 내 손은 바들바들 떨렸고, 움직이는 팔은 힘이 빠져 상자를 떨어트렸다. 그렇게 반복하기를 수십 번, 문 앞을 틀어막고 있던 상자는 전부 치워졌다.
‘아빠 상어……. 힘이 쎈……. 아빠 상어…….’
문을 열자 채연이가 귀를 막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마치 이리오라고, 제발 이곳으로 와달라고 말하는 그 노래는 너무나 애절하게 내 귀를 간지럽힌다. 훌쩍이는 소리는 한두 명이 아니었다. 내가 손전등을 들자 다용도실에는 모든 어린아이들이 모여 숨어있었다. 한 명도 빠짐없이, 그 어떤 낙오자 없이 구석에 몸을 숨기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입에서는 신음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힘이 빠진다. 난 그대로 주저앉았다.
채연이가 꼭 감고 있는 눈을 뜨며 이쪽을 바라본다. 이미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했고, 내 얼굴을 발견한 순간 그 눈물은 눈망울이 되어 볼을 타고 흘렀다. 나는 힘이 빠진 몸을 억지로 움직여 그곳으로 기어갔다. 그러자 채연이는 엉엉 울며 나에게 말했다.
‘어, 엄마가……. 아빠가 부르면 노래를…….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 엄마가…….’
난 채연이에게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저 울고 있는 채연이와 아이들을 품 안 가득 품으며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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