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천천히 먹어, 체할라.’
입안에 음식을 욱여넣고 있는데, 노인이 물병 하나를 내밀어 나를 타이른다. 하지만 난 욱여넣는 음식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씹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내용물을 넘겼다. 한시가 급하다. 오랜만에 맛있는 음식들을 가져왔지만, 그것들을 음미할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그저 체력과 열량을 보존하기 위해 기계적으로 손과 턱을 움직일 뿐이었다.
지금 시각은 오전 12시 10분 전. 12시 정각이 되면 일행들과 모든 주민을 이끌고 저 눈의 도시를 가로질러 에덴으로 갈 것이다. 위험하고, 변수가 많은 행군길이 되겠지만 일행들 전부가 의견을 맞춰 왔기에 망설임 없이 출발 시간을 잡았다. 우리의 소중한 이들이 있는 에덴이 위험하다. 우리에게 오는 그까짓 위험쯤이야 2배, 그리고 3배로 감수할 자신이 있었다.
에덴과는 30분 주기로 연락을 지속하고 있었고, 사무실과 숙소에 있는 인원들에게 혹시 모를 상황을 꼭 대비하라고 일러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아까 전, 나와 직통으로 연락해 자세한 사정을 들은 단체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빠르게 받아들였고, 모든 생산과 개인 활동을 중지시켜 버렸다. 에덴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주거지로 돌아갔으며, 방어를 맡은 경비대는 24시간 비상체제를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에덴으로 도착해야 했다.
난 모든 장비를 착용하고 완전무장 상태를 갖췄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바라보니 모든 일행이 나처럼 완전무장을 마치고 하나의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보호해야 하는 주민들은 자신들의 대열 안쪽으로 넣고 경험이 많은, 혹은 적은 인원들까지 고려해 적절한 포지션을 취한다. 그리고 그 앞에 조용히 다가온 노인이 서자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완벽한 팀 하나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난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이것은 계획적인 함정이었고,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음모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놈들의 목적은 우리가 자리를 비운 에덴, 말 그대로 전력이 빠진 틈을 타 쳐들어오는 빈집털이다. 만약 내가 한발 앞서 그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에덴은 어떻게 되었을까? 채연이는? 아이들은? 수련 씨와 다른 사람들은? 생각만 해도 속이 끓어오른다.
그리고 일행들도 나와 마찬가지인지 아까부터 눈빛들이 심상치 않았다. 적의와 살의가 일행들을 감싸 안았고, 그런데도 묵직한 기운은 몹시 날카롭게 정제되어 있었다. 전의는 타오르는 불꽃이 아닌, 적을 베는 칼이다. 일행들은 그것을 잊지 않았고,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불꽃을 꾹꾹 삼켰다.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강 형사가 입술을 꿈틀거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최태식, 이 개새끼…….’
진작 죽여 버려야 했었는데. 천천히 흐려지는 그 뒷말은 그때 대형마트에 있었던 일행들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날 부랑자들을 죽이고, 그들이 지내고 있던 아지트까지 박살 내 버렸다. 하지만 바보 같은 내 실수로 인해 그들을 이끌었던 뿌리까지는 뽑지 못했다. 그리고 그곳에 남은 후환이 지금에 와서야 우리를 위협하고 있었다.
후회된다. 정말 뼈에 사무치게 후회된다. 하지만 일은 이미 일어났고, 뒤늦은 후회보단 재빠른 행동을 할 때였다. 그간 겪었던 경험이 내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절망과 좌절이 나를 훈련했고, 난 충실하게 응답했다. 보란 듯이 총을 잡고 일행들과 천천히 눈을 마주쳤다. 최악의 기상 상황, 절대 그냥 지나가게 둘 것 같지 않은 폭설의 거리. 그리고 부족한 탄창과 체력이 좋지 않은 주민들. 그런데도 난 두려워하기보다는 가장 먼저 폭풍을 맞을 준비를 했다.
* * *
눈의 바다, 설원의 도시. 모든 수식어를 가져다 심어도 이 흰색 도시는 그런 단어로 설명하지 못할 광활함을 담고 있었다. 꺼져! 이곳에서 나가! 불어오는 칼바람은 눈이라는 무기를 품었고 일행과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절대 물러날 수 없는 우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눈의 안개를 걷고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고, 입김은 눈과 함께 뒤섞여 몸을 무겁게 만든다. 이미 온몸은 눈으로 다 젖어 버렸다.
이동속도가 너무 느리다. 이건 주민들을 탓하려는 말이 아니라, 당최 환경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래도 배려심이 남아 있는 주민들은 매우 급한 우리 사정을 이해해 주었고, 힘든 몸과 정신을 붙잡으며 일행들을 열심히 따라와 주고 있었다. 저 멀리서 김호철에게 업혀 있는 아이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막으려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그래, 속도가 느릴 뿐 우리는 멈춰 있는 게 아니었다. 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한걸음, 한걸음에 모든 걸 집중했다.
‘영감님.’
그런 와중에도 난 시간 체크와 에덴과의 통신을 잊지 않았다. 귀찮을 법도 하지만 노인은 군소리 없이 무전기를 꺼내 들어 내 지시를 따라주었다. 에덴과의 통신은 매번 똑같았다. 무슨 일은 없는지,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된 사람은 없는지.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그 정보를 우리는 30분마다 받아 들으면서 불안한 마음을 삭여야 했다. 내 예상이 맞는 걸까? 그런데도 초조함은 가시지 않았다. 난 모자에 쌓인 눈을 손으로 치우며 입술을 핥았다.
100m를 걸어가는데, 평소보다 4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내가 선두로 걸으며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길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는 하지만, 내리는 눈이 워낙 많았고 정면에서 부는 칼바람은 우리의 발걸음을 늦추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구소에서 받은 변종 액체가 아직 넉넉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끼고 또 아꼈던 변종 액체를 망설임 없이 꺼냈고, 나부터 시작해 일행들, 그리고 모든 주민들과 아이들에게도 아낌없이 뿌려 주었다. 덕분에 행군 중 우리를 습격하는 그놈들은 없었으며, 그 외에 위협적인 외부요인 또한 발견되지 않았다.
괜찮으세요? 조금만 더 힘냅시다. 일행들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온다. 이 악조건 속에서도 분위기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대열 중간 중간에 껴있는 일행들은 비틀거리는 주민들을 부축해 주기도 하고, 발이 눈 속에 빠지는 아이들을 둘러업기도 했다. 그리고 두식이는 오랜만에 힘을 쓰기로 작정했는지 우리가 나눠 들고 가야 할 모든 짐을 자신이 뺏어 들어주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투덜거리고 주저앉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침을 삼키고 다시 앞을 바라봤다. 모두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팔과 다리를 열심히 휘저으며 길이 조금이라도 더 보일 수 있게 열심 움직였다.
콜록콜록.
마른 기침 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 소리도 매섭게 불어오는 눈보라에 파묻히고 이내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난 고개를 들어 우리가 지나가야 할 눈의 도시를 쳐다보았다. 눈이 부시면서도, 너무나 어둡다.
저 앞에 보이지 않는 미련이 내 발걸음을 잡아당겼다.
* * *
[너무 걱정 마세요. 단체장님 못 믿으시는 거 아니잖아요? 그죠?]
믿는다. 내 둥지를 책임지는 사람인데, 왜 못 믿겠는가. 우리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도 에덴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우리 팀보단 덜하겠지만, 그래도 훈련을 받은 전투조가 있었고, 그들은 대부분 무장시킬 수 있는 총기도 보유하고 있다. 당장 그놈들 수백 마리가 몰려와도 거뜬히 방어할 수 있는 게 바로 에덴이었다.
하지만 당장 눈앞에 에덴이 보이지 않는 이상 나는 안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아는지, 조급해 보이는 나를 무전기 너머에 있는 강수련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달래 주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얼어붙어 있는 마음과 긴장감이 조금씩 풀려가는 게 느껴진다.
난 불안함과 함께 흘러나오는 한숨을 조용히 내뱉었다.
지금 시각은 오후 5시, 에덴까지 향하는 행군은 중단되었다. 해는 벌써 지는 기색을 보여 왔으며, 흐린 하늘에 가린 황혼이 빌딩 사이에 걸친다. 우리가 걸어온 거리는 딱 중간지점. 그 오랜 시간을 쉬지 않고 걸어왔는데 여기까지밖에 도착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내리기 시작한 폭설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급히 은신처를 찾아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해가 지고 나면 움직이지 못한다. 행군은 사실상……. 내일 아침으로 미뤄지고 만 것이다.
‘무슨 일 있으면 꼭 연락해요.’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무전기에서는 알겠다는 대답이 아닌 수줍음이 섞인 강수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평상시 많이 했던 말인데, 그녀가 저러고 웃으니 괜히 낯부끄럽다. 난 헛기침을 몇 번 하고 그녀와 5분가량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있는 곳은 차가운 오피스텔 복도였지만, 이상하게 난로 앞에 앉아있듯 따뜻하기만 했다. 나는 걱정과 불안함을 담아 그녀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고, 그녀는 나에게 보고 싶다는 말을 끝으로 무전을 종료했다.
‘이 상황에서 연애를 하고 싶냐? 응?’
내가 그녀의 마지막 무전을 듣고 멍해 있는데, 앞에 보이는 1층 계단에서 노인이 조용히 올라온다. 입에는 잔소리와 함께 타박을 담고 있었지만, 히죽이는 노인의 얼굴은 그것이 모두 짓궂은 장난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나와 그녀가 하는 무전을 1층에서부터 올라오던 노인이 모두 듣고 만 모양이다. 난 헛기침을 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고, 괜히 화두를 돌리기 위해 물었다.
‘아무 일, 없죠?’
노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조심히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고 한동안 창문 밖에서 내리를 눈을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지도와 함께 자신이 기록하는 일지를 꺼내 들었다. 노인의 손에는 무전기와 함께 손때가 묻은 모나미 볼펜이 있었다.
‘다들 지쳐서 그런지 벌써 곯아떨어졌어. 식량은 챙겨온 게 있으니 걱정 없고……. 문제는 탄약이지. 자, 일단 받아라.’
노인은 가방을 뒤적이며 나에게 소총 탄창 2개와 권총 탄창 1개를 내밀었다. 사격을 잘하는 사람에게 탄약을 몰아 주라고 했는데, 그중에 내가 포함된 모양이다. 난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노인이 내민 탄창을 받아 내 탄창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나에게 넘겨지는 것은 탄창만이 아닌, 익숙한 포장 그림이 그려져 있는 통조림도 포함되어 있었다.
노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미는 음식 앞에 나에 대한 걱정과 따뜻함을 모두 담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통조림을 받아들고 조용히 복도 끝에 등을 기대었다. 그리고 건조한 몸짓으로 통조림을 까고 나니 머리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멍하니 그 내용물을 바라보며 노인에게 물어봤다.
‘영감님……. 제가 잘하고 있는 걸까요?’
무섭다. 모든 게 아지랑이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무서웠다. 내 실수로, 내 잘못된 판단으로 일행과 소중한 사람들을 잃으면 내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이 걱정과 아픔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모두 내 등을 보고 걸어오고, 모두가 나에게 기대고 있다. 난 항상 그 자리에서 빛을 밝히고 있어야 하는 등대였기 때문에……. 한줄기 걱정과 슬픔마저 마음대로 내보일 수 없었다.
나는 어리광 부리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모든 현실을 저주하고 존재하지 않는 상대에게 분노를 보이기도 싫었다. 하지만 속으로 삭이면, 삭힐수록 이 검은색 늪은 나를 더 옭아매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정말 괜찮을까? 그동안 운이 좋아 모든 일을 성공시켜왔다. 하지만 그 운이 당장 내일 끝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실패는 죽음이다, 마지막은 곧……. 모든 것의 끝이었다. 난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그 상황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웠다.
툭.
누군가 팔을 들어서 나와 어깨동무를 했다. 멍하니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인자하게 웃고 있는 노인이 어느새 내 어깨 위에 팔을 올리고 있었다. 고된 상황으로 인해 더 짙어진 주름과 전부 백발이 되어 버린 머리카락. 그리고 얼굴에 덕지덕지 묻은 피곤은 노인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상황에도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냥 미친놈인 줄 알았어.’
‘네?’
‘딸랑 총 한 자루씩 들고, 함께 거길 들어가자고 하던 얼굴이 잊히지 않아. 그래, 애 하나 구하자고…….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애 하나 구하자고…….’
우리가 빠져나왔던 휴게소,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던 노인의 눈빛. 육편의 파도와 수없이 찾아오는 위험의 기억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교도소처럼 느껴지던 고시원의 문을 지나, 난 수없이 많은 죽음의 기로를 빠져나왔다.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사람들은 내 공허한 가슴을 채우고 존재 자체를 그려준다. 내 일기장이 한 장 한 장 쌓이듯, 나의 삶도 어느새 완성되어가고 있었다.
‘힘들지?’
아프고, 고통스럽고.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이다. 어떨 때는 따뜻한 방바닥에 누워 지금 주어지는 행복에 안주하기도 했고 다시는 나가기 싫다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에덴의 문을 빠져나갈 때마다 항상 무서웠다. 가기 싫었다. 언제쯤 이 고통이 끝이 날까? 하지만 그럴 때마다 눈앞에 나타난 빛은 어디서 나오는지 모를 희망이었다.
희망. 묵직한 빛과 같았다. 난 멍하니 고개를 들어 황혼이 가라앉기 시작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곧 어둠이 찾아오고, 내리는 눈은 우리의 흔적과 살아있다는 기척을 가져갈 것이다. 그래, 마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도시는 원래의 형태로 가만히 존재할 뿐이었다.
바뀌지 않는 공간, 그리고 그 가운데 바뀌어 가는 우리.
눈이 많이 내리던 그 날, 노인은 나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고시원에서 나온 거 후회해?’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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