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놈들인가? 아니다, 만약 이 소리가 놈들이 내는 거였다면 소음을 동반했던 나는 진즉에 습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인가? 그래, 그럴 가능성이 컸다. 이 소리는 분명히 무전기에서 나는 잡음 소리였다. 난 침을 천천히 삼켰고, 한쪽에 내려놓은 소총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전등으로 손을 가져가 대며 사방을 밝히고 있는 불을 꺼 버렸다. 커튼이 쳐져 있는 복도와 방에는 다시 한 번 어둠이 찾아왔고, 총 손잡이를 잡고 있는 손은 서서히 진동했다.
후-.
숨을 내뱉고 귀를 기울인다.
치지직, 치직.
난 그 소리를 감각으로 쫓으며 천천히 문 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양옆을 살펴 복도와 입구 끝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했다. 나는 천천히 기어 소리가 들리는 문 앞으로 다가갔고, 가깝게 귀를 가져다 대 보았다. 소리에 변화는 없었다. 사람이 내는 숨소리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곳은 차가운 바람만이 새어 나오고 있었을 뿐이다.
쾅!
난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단단히 잠겨 있는 문을 발로 차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총구를 앞으로 내밀어 눈앞으로 튀어나올 적의 습격을 대비했다. 하지만 나를 습격한 것은 괴물이나 인간이 아닌, 역겨운 피비린내와 신경 한곳을 강하게 찌르는 음습한 죽음의 기운이었다. 난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를 빠르게 돌려 방안을 둘러봤다. 그리고 잡음을 내뱉는 무전기와 무전기가 있는 책상 앞에 쓰러져 있는 한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가득했고, 그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난 일단 꺼두었던 손전등을 꺼내 들고 살며시 시체 쪽으로 접근했다. 그리고 죽어 있는 시체를 향해 손전등을 비춰보니 드러난 얼굴이 나와 안면이 있는 상대임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오른쪽 얼굴 가죽이 뜯겨 나갔지만, 이 사체는 분명 김지영, 그녀였다.
그녀는 배를 움켜잡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깊은 자상이 있었으며, 생채기라고 부르기 힘든 상처들이 몸 이곳저곳에 있었다. 하지만 즉사할 만한 치명적인 상처는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방으로 도망치다가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던 롱패딩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 내용물은 형편없이 빠져나와 방바닥을 휘날리고 있었다.
사람을 우습게 깔아뭉개는 권력도, 어떤 악행도 정의가 되던 식량도. 결국, 압도적인 죽음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난 그녀의 시체에서 관심을 끄고 손전등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시선을 돌리자 책상 위에서 거슬리는 잡음을 내고 있는 무전기가 보였다. 그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일까? 난 무심결에 움직여 무전기를 끄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어?
하지만 손을 들어 올린 그 순간 무언가 내 머리를 강하게 치고 가는 착각에 빠진다. 넋이 빠지고 머리가 멍해진다. 그리고 마음속 한구석에서 검은색으로 만들어진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불안하다. 왜지? 왜 불안하지?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강한 생각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불러왔고, 내 손끝을 미세하게 떨게 했다.
내가 놓치고 있던 게 있다. 그리고 고된 전투와 피곤함 때문에 잠깐이나마 멀어졌던 본능이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한 번 나에게로 다가왔다. 로직이 흩어진다. 머리가 팽팽 돌기 시작했다. 난 천천히 손을 내렸고 이내 눈을 꾹 감았다.
내가 그날의 김지영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변종이 난입하고, 사람들은 죽는다. 대항할 능력이 없는 그녀는 분명 도망쳤을 것이고, 숨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밖이 아닌 2층 무전실로 향했고, 지금은 이렇게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에 무슨 생각으로 이 무전기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 것일까? 혹시 에덴을 향해 지원을 요청하려고 한 걸까? 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의문에 황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영감님, 주무십니까?’
내가 무전을 보내고 30초 정도가 지났지만, 답신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아까 무전 이후로 진짜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다. 난 초조함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고, 그 자리에 서서 발을 동동 굴렀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겠다. 모든 경우의 수와 혹시나 생겨날지 모르는 상황들이 계속해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1분 정도가 흐르자 무전기에서는 노인이 아닌, 김혜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윤 씨, 무슨 일 있어요? 할아버님은 지금 주무시고 계세요.]
아! 다행이다. 그래도 최소한의 경계 인원은 세우고 잠이 들었는지 김혜정이 노인 대신 답변을 보내왔다. 난 그녀가 무전기를 놓을세라 재빨리 물었다.
‘혜정 씨, 에덴에 연락해서 어젯밤에 무전 온 사람이 있냐고 물어봐 주실래요.’
내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그 끝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몰려오는 불안감과 실바람에 흩날리는 경종이 아까부터 내 본능을 조금씩 찔러댄다. 아닌 척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 앞에 나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무전을 들은 김혜정은 알겠다고 짧게 대답하며 그 부탁을 들어주었다. 2분 정도가 지나자……. 답변이 온다.
[해가 지고 나서 온 무전은 없었다고 그러는데요?]
난 황급히 통신을 끄고, 김지영이 쓰러져 있는 무전기 앞으로 달려갔다. 처음 들어왔을 때랑 다르지 않게 아직도 잡음을 뿜어내는 무전기는 어젯밤에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무전기가 올라가 있는 책상 곳곳에는 피들이 묻어 있었고, 무전기에는 한동안 사용했다는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난 떨리는 손으로 그 무전기를 잡고 들어 올렸다.
---칙, ----칙.
무전기에 귀를 기울이자 노이즈와 함께 가래를 끓는 듯한 잡음이 연달아 울려온다. 분명 잡음 사이로 들려오는 노이즈……. 이것은 상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일 것이다. 확실치 않다. 하지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동안 칼날처럼 날카롭게 갈린 본능이 분명히 이 무전기 너머로 누군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무전기를 잡은 내 손은 천천히 떨렸고, 마른 목은 씁쓸한 침을 부른다.
김지영, 그녀는 과연 누구에게 연락하려고 한 것일까. 모든 쉘터는 이곳을 마지막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녀가 에덴을 향해 무전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이 무전을 받는 상대는 내가 모르는 제삼자거나……. 아니면 알고 있는 제삼자일지도 몰랐다.
뚝, 뚝, 뚝, 뚝.
노이즈와 잡음이 일정한 주기로 끊겼다 이어진다. 그리고 그것은 내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찬바람에 말라 버린 목구멍 사이로 건조한 음성이 뚫고 나왔다.
‘누구냐, 넌.’
툭, 노이즈가 사라졌다. 그리고 분명 반대편에 있을 거로 생각한 상대가 사라졌다는 기분이 강하게 든다. 내 목소리를 들었다. 누군지 모르는 미지의 상대가 분명 내 목소리를 들었다. 난 그대로 무전기를 내려놓았고, 재빨리 뒤로 돌아 식량이 담긴 가방을 챙겨 들었다. 그리고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경로당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 * *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망을 보고 있던 용팔이 형제가 나를 향해 반갑다고 손을 흔든다. 하지만 급히 뜀박질하고 있던 나는 그 인사를 대꾸할 힘조차 없었다. 바지는 이미 눈으로 인해 다 젖었고, 얼굴과 모자는 땀과 눈으로 범벅이 되었다. 난 문을 통과하자마자 들고 있는 식량 가방을 내려놓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왔다는 건 먹을 게 도착했다는 소리. 두식이는 히히 웃으며 내 가방을 받아들었고, 용팔이는 빠르게 뛰어와 마른 수건을 내밀었다. 음식이 왔다! 모든 일행의 이목은 집중되었고, 오랜만에 웃음기가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팔이만큼은 나의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는지 땀이 가득한 얼굴을 바라보며 걱정스레 묻는다.
‘형님? 무슨 일 있어요? 얼굴이 창백한데…….’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얼굴과 머리를 닦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창백하게 질린 피부는 파르르 떨려왔다. 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손을 흔들며, 용팔이에게 괜찮다는 몸짓을 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아직 확신이 선 게 아니다. 괜한 말로 일행들의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나마저 가만히 있을 사항은 아니었다. 나는 땀과 눈을 닦는 와중에도 눈동자만은 바삐 움직이며 가방을 향해 걸어오는 일행들과 저 한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주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 시선은 정확히 그 사이에서 멈췄다.
‘……김호철 씨.’
나는 조용히 그쪽으로 다가가 이 단서에 대한 확신을 가져다줄 사람을 불렀다. 그러자 아이와 같이 휴식을 취하고 있던 김호철은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봤고, 조용히 따라 나오라는 내 손짓을 따라 건물 밖을 향해 걸음을 옮긴다.
오랜만에 맛보는 제대로 된 음식 때문일까? 주민들은 티는 안내지만 굉장히 기뻐 보였고, 제대로 된 식사가 필요했던 일행들의 시선 또한 내가 들고 온 가방에 꽂혀 있었다. 덕분에 나와 김호철은 아무런 방해 없이 경로당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문을 나오자 칼바람이 피부를 스치고 지나간다. 난 창백한 피부와 함께 아려오는 얼굴을 만지며 그에게 물었다.
‘호철 씨, 혹시 부랑자라고 아십니까?’
오랜만에 나오는 단어였다. 내가 이 단어를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던가? 그만큼 말도 안 되는 추측이기도 했고, 더는 언급하기 싫은 사항이기도 했다. 하지만 위험은 내가 싫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하여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알아야 했다. 한시라도 빨리, 조금이라도 서둘러 대처할 수 있도록 나만큼은 미리 움직이고 있어야 했다.
‘부랑자요…….?’
그래, 내가 일행들을 이끌고 가 박살 내 버린 그 부랑자들. 하지만 김호철은 단번에 대답하지 못하며 미간을 조용히 찡그렸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기억을 끄집어내는 기색이 역력하다. 꼭……. 기억을 더듬어야만 생각이 나는 사람처럼 말이다.
그 표정을 본 나는 머리에 벼락이 친 듯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시대를, 아니 이 구역을 살아가는 생존자들이라면 누구나 부랑자들의 위협에 시달렸다. 더군다나 이곳은 부랑자들의 구역이 에덴보다 가까운 곳이 아닌가? 활동반경이 넓은 부랑자들을…….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겪어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김호철은 마치 그 단어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내 이마에 고인 식은땀이 콧잔등을 타고 흘러내린다.
‘잘 모르겠는데……. 혹시 밖에서 생긴 일인가요? 제가 아파트에만 콕 박혀 있어서 주변 소문은 잘 몰라요. 다른 사람들은 알지도 모르는데, 불러드려요?’
내가 결코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므로 물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부탁했고, 김호철은 주민들을 한두 명씩 데려오며 나와 면담할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한 명, 두 명, 세 명, 심지어 어린아이들에게도 물어봤다. 그런데도 들려오는 대답은……. 모른다, 혹은 소문으로 들어는 보았다였다.
그럴 리가 없다. 이것은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다. 부랑자, 그놈들이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쓰레기들인가? 김연경이 속해 있던 소율여상은 놈들 때문에 망했고, 박대박의 쉘터또한 부랑자들과의 전투로 파괴되었다. 쉘터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치를 떠는 단어. 하지만 아파트 단지 주민들은 잘 모르겠다는 말만 해 올 뿐 부랑자 놈들에게 피해를 입었다거나 잡혀갔다는 사례는 나오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분명 진실을 말하고 있었고, 당장 죽고 사는 게 문제인 그들이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부랑자들이 한참 창궐하는 사이 피해를 입지 않는 유일한 쉘터, 그리고 김지영이 붙잡고 있던 피 묻은 무전기와 대답 없는 상대. 복잡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많은 생각과 수들이 허공을 떠다닌다. 왜지? 왜 공격을 받지 않은 거지? 보호를 받았나? 아니, 보호를 받았다면 도대체 누구한테?
쿵, 쿵, 쿵.
심장 소리가 커지고 짙은 이명이 내 고막을 때리기 시작했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니, 누군가 송곳으로 쿡쿡 찌르기라도 하듯 따갑기까지 하다. 위험 속에 노출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은 나에게 겨눠진 칼날이 아닌 흐릿하고 아지랑이 같은 무형의 칼날이었다.
외부에서 온 사람. 그리고 파벌과 식량 독점. 그날 했던 대화들이 노이즈가 낀 듯 지지직거렸고 그 소음은 기억이라는 물결 위에서 정신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김지영이 어디서 왔고,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것이 본명인지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여자. 그리고 그 여자가 가지고 온 출처 모를 술과 유사마약들. 또, 기다렸다는 듯 시작된 성매매와 고리대금까지. 마치……. 계획했던 것처럼 척척 들어맞는 톱니바퀴는 내가 생각한 추측을 완성하고 있었다.
단순한 생존자 쉘터인 줄 알았다. 그저 에덴과 합치기 싫어하는 평범한 쉘터인 줄 알았다. 하지만 속을 파보면 파볼수록 의문과 알지 못했던 술수로 가득했고, 내가 서류에서 봤던 정보는 모두 거짓말에 불과했었다. 왜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지? 그리고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오려고 한 거지? 그 순간 머리에서 번개가 치고 눈이 번쩍 뜨였다.
‘동윤아!’
노인이 소리치는 소리에 내 고개는 빠르게 돌아갔다. 고개를 돌린 그곳에는 일행들이 전부 서 있었고 모두가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언제 주저앉아 있었지? 난 엉덩이와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 넋을 놓았던 모양이다. 그만큼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고, 한순간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강 형사님, 에덴이랑 마지막으로 무전한 게 언제입니까?’
하지만 심장이 말한다. 침착해, 그리고 침착해. 분노는 차갑게 판단은 냉철하게 내려라. 그 순간 내 손에는 떨림이 멎었고, 입에서는 단호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강 형사는 바짝 굳은 얼굴로 다가오며 대답했다.
‘10분 전에 사무실과 무전했습니다.’
다행이다. 아직 아무런 일도 없었던 모양이다. 난 한 발자국 먼저 함정을 발견한 것에 안도를 느꼈고, 그와 동시에 조급함을 느꼈다. 아니다, 동윤아. 침착하자, 또 침착하자. 김지영은 계획한 날에 우리를 끌어내지 못했다. 분명 하루라는 간격이 있었던 만큼 함정을 판 그쪽에서도 우리가 복귀할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놈들이 노리는 건 빈집. 나는 가만히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다시 무전 보내서 경계 강화하라고 해요. 그리고 장비 챙기고……. 사람들 이동할 준비 시켜요.’
일행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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