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어젯밤 서렸던 긴장과 두려움이 모두 하얀 눈이 되어 버렸다. 나는 창문 밖으로 천천히 손을 뻗어 손바닥 위에 떨어지는 큼지막한 함박눈을 받아 내본다. 눈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고, 난 그 장면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흐린 하늘을 눈을 내뿜었으며, 세상은 점점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옆에서 녹초가 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밥 안 먹어?’
노인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피곤함을 애써 떨쳐 내보려 하는지, 컵에 담긴 믹스커피를 조용히 입으로 가져간다. 난 쓴맛과 건조함이 느껴지는 입안을 연신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분명 허기는 느껴졌지만, 음식을 먹을 힘이 나지 않았다. 어제 놈과의 전투 때문일까? 한참 과열되고 터져 버린 엔진처럼 나는 잠시 힘을 잃었다.
해가 뜬 지금 시각은 오전 9시. 한 시간 전에 출발했어야 하는 우리는 아직도 경로당이었다. 왜냐하면, 새벽부터 내리기 시작한 이 지긋지긋한 눈이 폭설로 바뀌어 우리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꼭 우리에게 이곳을 벗어나지 말라고 하는 것 같은 이 도시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내가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는데, 노인이 이거라도 마시라는 듯 믹스커피를 내민다.
‘너무 기죽지 마라. 조급해하지도 말고.’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있는 노인의 표정 또한 좋지 않았다. 어젯밤 놈을 잡기는 했지만, 시기적절하게 내리는 눈 때문에 일행들의 사기가 많이 내려갔다. 고생하고 나니 집 생각도 나고, 에덴에 있을 가족들 생각도 나겠지. 물론 나도 그 심정을 이해했기에 죽상을 쓰고 있는 일행들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도 문제는 많았다.
‘탄창이랑 식량은요?’
‘두당 한 탄창씩, 그리고 식량은 오늘 오후 딱 한 끼.’
탄창을 넉넉하게 챙겨왔지만, 격렬했던 어젯밤 전투로 인해 대부분 소실되었다. 두당 탄창 하나? 또 변종과 마주치게 된다면 무조건 도망쳐야 할 암담한 상태였다. 게다가 식량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넉넉하게 챙겨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이 들고 다닐 수 있는 선에서의 넉넉함을 말하는 거지, 이정도의 대 인원을 이틀 이상 먹여 살릴 양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져 오기 시작했다.
‘탄창은 몇몇 사람들에게 모아 주라고 해요.’
사격이 특출한 몇몇 사람에게 탄창을 모아 주고, 정확한 조준 사격을 시키는 게 현명했다. 물론 화망을 구성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저지력을 길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난 어느새 식어 버린 커피를 원샷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실망하고 기죽어 있으면, 다른 일행들은 내 눈치를 본다. 난 어쩔 수 없이 몸을 움직이기로 했고, 식량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도 하나를 입 밖으로 꺼냈다.
‘관리사무소 좀 다녀올게요.’
‘같이 갈까?’
‘좀 주무시고 계세요.’
언제나 내 뒤를 지켜주는 든든한 노인이었지만, 그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평범한 사람이었다. 체력의 한계가 온 듯 창백한 얼굴과 힘이 없는 몸. 노인은 잠시만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했다. 난 같이 가자는 노인에게 고개를 흔들고, 마지막으로 남은 탄창을 총에 끼워 넣었다. 100m도 되지 않는 관리사무소는 변종이 죽은 지금, 혼자 다녀와도 별문제 없었다.
웬만하면 내 거절을 거절하는 노인이었지만, 지금만큼은 한계가 있다는 걸 아는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어차피 눈이 오는 지금,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정말 쉬는 것이 나를 도와주는 일이었다. 난 노인이 쪽잠이라도 잘 수 있게 자리를 피해 줬다. 그리고 경로당 문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데, 저 앞쪽에서 그릇을 치우던 용팔이가 나를 부른다.
‘형님! 어디 가세요?’
‘조용히 말해. 사람들 자잖아.’
남은 건빵을 탈탈 털어 죽을 해 먹었는지, 사방에선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식사를 방금 끝낸 사람들은 한쪽에 펭귄처럼 뭉쳐 잠이 들어 있었다. 일행들도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그사이에 들어가 있었는데, 다들 피곤했는지 작게 코까지 골아 가며 자고 있다. 천연 난방시설, 위험과 위기를 같이 넘긴 주민과 일행들은 어느새 체온도 거리낌 없이 나누고 있었다.
내 농담 섞인 꾸중에 용팔이는 헤프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바보 같고 어수룩한 모습. 하지만 어젯밤에는 제 역할을 멋있게 해내며 한 명의 생존자로서 진화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모습과 예전의 모습이 비교되어 난 괜히 가슴이 먹먹해진다.
물론 이렇게 변한 용팔이가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눈동자 너머로 보이는 독기와 다부짐은 비현실 같은 현실에 적응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용팔이는 그럼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신이 쓰고 있던 목도리를 풀어 준다. 내가 관리사무소를 다녀온다고 하니, 식량을 구하러 간다는 걸 용케 눈치챈 모양이다.
‘다녀오세요!
‘그래,’
난 짧게 대답하고 따뜻한 온기가 남아있는 목도리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총과 대검, 마지막으로 모자까지 챙기고 긴 숨을 내뱉었다. 입김이 하늘로 솟구치고, 때 묻지 않는 하얀 눈 바닥에 지나갔다는 족적을 남긴다. 내리는 폭설 사이로 하얀 아파트 단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 * *
우리는 안전 불감증이 아니다. 그렇다고 집요할 정도로 안전만을 고집해 필요한 효율을 낭비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나 혼자 관리사무소로 향한다는 게 어찌 보면 위험해 보일지 모르지만, 내 입장에선 그 이상의 인원을 투입하는 게 더 용납하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주변 정찰을 끝마친 상태기 때문이다.
뜬눈으로 밤을 보낸 우리는 눈이 오는 걸 확인하자마자 주변을 정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시간에 걸쳐 내린 결론은 아파트 단지는 안전하다는 거였다. 이 근방을 지배하던 놈이 살았건 죽었건, 그 영역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놈들의 접근을 불가하게 만들었다. 산속을 지배하는 산군이 죽었으니, 이제 그 영역은 산군을 사냥한 사냥꾼이 가져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려는 관리사무소 내부……. 노인이 말하길 들어가자마자 토한 사람이 3명이고, 뛰쳐나간 사람이 2명이라 했다. 물론 노인과 강 형사가 꿋꿋이 내부정찰을 완료했지만, 그 둘도 한동안 할 말을 잃고 창백한 얼굴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만큼 심하고 참혹한 광경이었기에, 그 둘은 무언가를 챙겨서 나올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눈이 얼마나 더 오게 될지는 모르지만, 최소 하루 정도는 고립될 각오를 해야 했다. 체력과 건강을 보존하기 위해선 따뜻한 난방과 식량이 필수요소였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이 부족한 지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에서 그것들을 조달해 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 안전한 조달지라고 판단되는 관리사무소를 나는 코앞에 두고 있었다.
반쯤 부서진 관리사무소 문을 열자 비릿한 피비린내와 내장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내 심장은 거칠게 뛰기보다는 차가운 얼음처럼 싸늘하게 식어갔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얼어 버린 선혈들이 발자국에 묻어 나왔고, 캡슐이 깨지기라도 하듯 비릿한 냄새들이 바닥에서 풍겨 나온다. 난 홀더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관리사무소 내부는 사방에 커튼을 치고 있어서 그런지 몹시 어둡고 을씨년스러웠다. 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커튼을 뜯어내 내부를 밝혔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방향에서는 손전등 빛을 비춰 안전한지를 확인했다. 물론 노인과 강 형사가 1차 정찰을 했다고는 하지만, 이런 작은 조심성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난 바닥에 조용히 침을 뱉으며 역겨움을 털어 냈다.
바닥에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살 조각들이 굴러다녔고, 발에는 기다란 내장들이 앞길을 막는다. 난 무감각하게 그것들을 발로 밀며 앞으로 천천히 전진했다. 문을 열 때마다 시체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으며, 공통으로 머리가 전부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난 이곳에서 벌어졌을 지옥도를 생생한 현장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식량은 어디 있지? 하지만 내 머리를 차지한 것은 그들을 향한 명복도, 슬픔도 아닌 너무나 현실적인 식량 걱정이었다. 분명 김지영이라는 여자가 물품 독점을 통해 주민들을 괴롭히고, 학대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관리사무소에는 상당량의 물자들이 남아 있어야 했다. 난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보이는 시체를 지나쳐 내부수색을 시작했다.
수박 겉핥기식 정찰을 했던 노인은 식량이 모여 있는 장소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렇다는 건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 장소에 숨겨 두었다는 건데, 난 그 점을 충분히 고려해 아주 꼼꼼하고 또 침착하게 식량이 있을법한 장소를 찾아다녔다.
찰박, 찰박.
살짝 얼어 버린 피들을 밟으며 수색하기를 20분. 난 꽤 넓은 1층을 지나쳐 2층으로 걸어 올라갔다.
칙-.
[왜 이렇게 늦어? 무슨 일 있어?]
무전을 보내온 건 목소리에 피곤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노인이었다. 분명 쉬고 있으라고 말했건만, 그새를 못 참고 또 나에게 무전을 걸어오고 있었다. 참 주책에 잔소리 대마왕이다. 난 손목시계를 들어 30분 정도가 지났다는 걸 확인했고, 조용히 투덜거렸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닌데……. 한 손으로 무전기를 꺼내 들고 모자를 눌러쓴다.
‘1층 다 확인하고 2층 올라가고 있어요. 잘 숨겨놔서 찾지를 못하겠네요. 금방 들어갈 테니 걱정하지 마요. 에덴 쪽이랑은 통신했어요?’
[어, 단체장한테 말해 뒀다. 그리고 채연이가 빨리 오라고 전해달래.]
에덴뿐만 아니라, 나머지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는 숙소에도 연락한 모양이다. 내 입가에는 저절로 웃음이 맺혔고,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피곤과 부담감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눈앞에선 쫄래쫄래 나를 따라와 안기는 채연이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다. 가슴 한쪽이 히터를 켠 듯 따뜻해졌고, 뻑뻑한 눈동자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러워진다.
‘금방 들어갈게요.’
칙-.
무전기는 마지막 잡음을 끝으로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무전기를 원래 있었던 자리에 꽂아 넣으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2층은 1층과 다르게 구조가 상당히 복잡했는데, 그만큼 방도 많고 숨겨진 공간도 많았다. 저걸 언제 다 확인하지? 분명 피곤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방금 무전으로 인해 조금은 덜어진 느낌이었다. 내 입에선 저절로 노랫소리가 나오고, 힘이 없던 몸에는 활기가 차기 시작했다.
채연이가 하도 부르고 다녀서 그런지 입에서는 아기상어 동요가 저절로 흘러나온다. 나는 복도를 가로지르고 2층에 있는 방 하나하나를 전부 확인했다. 그리고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 문을 발로 차며 재빨리 권총을 들이밀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시체가 튀어나오고 피가 튀겼지만, 난 기계적으로 권총을 움직이며 그 어두움을 몰아낼 뿐이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동요, 그런데도 무표정한 내 얼굴. 그 둘은 양면의 서 있는 흑과 백처럼 짙은 이질감을 선사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이질감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래, 나는 마치 노동요를 부르는 농사꾼처럼 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쾅!
어? 복도 중앙에 존재하는 방문을 발로 차는데, 그간 지나쳐 왔던 문과는 달리 쉽게 열리지 않았다. 발을 내리고 문 상태를 잘 확인해 보니 3중으로 되어 있는 잠금장치가 문에 장착되어 있었다.
튼튼한 문과 잠금장치.
난 이곳이 식량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메고 있던 소총을 꺼내 들었고, 개머리판을 이용해 사정없이 잠금장치를 때렸다. 둔탁한 소리와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크게 울려온다.
덜컹-.
마지막으로 발에 힘을 줘 문을 힘껏 밀었다. 그러자 문짝은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렸고, 꿉꿉한 냄새와 함께 안쪽에 공기가 훅 쏟아져 나왔다. 난 재빨리 소총을 앞으로 들이밀며 손전등으로 앞을 비춰보았다. 그리고 창고처럼 생긴 방에 수없이 많은 식량이 쌓여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천천히 소총을 내리고 마른 입술을 핥는다.
* * *
그들이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기 싫어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어디 근처에 있는 대형마트라도 털었는지 식량창고에는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보존식품들이 다양하게 쌓여 있었고, 심지어 정부미라고 쓰여 있는 쌀부대까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 우리 인원을 다 합쳐도 몇 달은 거뜬하게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냥 내버려 두고 가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옮길 사람은 나 혼자고, 욕심을 부려봤자 내 몸만 힘들 뿐이었다. 난 망설임 없이 미련을 버리고, 챙겨온 빈 가방에 식량들을 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 가져간다는 미련만 버렸을 뿐이지, 맛있는 걸 먹어보자는 욕망마저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다양하게 모여 있는 보존식품들 사이에서 난 오랜만에 쇼핑하는 기분을 만끽했다.
이것도 먹어보고 저것도 먹어보자, 아, 이건 채연이랑 아이들 가져다줄까? 칼로리가 높고, 공간을 적게 차지하는 식품이 물론 최고였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 효율과 가성비를 전부 버리고, 오로지 나와 일행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들 위주로 담기 시작했다. 알래스카 연어? 종말 전에는 비싸서 살 엄두도 못 내던 비싼 치즈? 얼굴에는 오랜만에 미소가 담긴다.
‘-----칙.’
그 순간 내 귀가 움찔거렸고, 바쁘게 음식을 담는 손이 멈춘다. 시선은 천천히 내려가 앞주머니에 있는 무전기로 향했지만, 내 무전기 화면에는 그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들렸던 무전기 잡음, 난 가방을 천천히 내려놓고 홀더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이건 착각이나 환청이 아니다. 분명 내 귀가 무전기 잡음을 들었다.
‘-----칙---칙.’
아직 확인 못 했던 맞은편 문, 그곳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