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동윤아.’
누군가 속삭인다. 그 속삭임을 들은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훑어 무기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나를 깨운 노인은 내 어깨를 잡으며, 자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댄다. 아, 내 옆에는 채연이가 있다. 정신을 차린 나는 혹시나 아이가 깰까 조심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고개를 들어 노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노인이 숙소 밖을 가리키며 나에게 손짓한다.
해가 아직 뜨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자 시간은 새벽 5시, 해가 뜨려면 몇 시간이나 더 지나야 하는 이른 시간에 나를 깨우다니.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인의 표정이 생각보다 침착했기에 난 위급의 정도를 대략 가늠하며 천천히 방문을 열고 나갔다.
다른 일행들은 모두 잠에 빠져 있다. 하지만 노인만은 총기를 제외한 모든 것들을 챙겨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옆방으로 넘어가 재빨리 임무복으로 갈아입었고, 노인이 나간 현관문으로 걸어 나갔다.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공기가 얼굴을 훅 치고 지나간다. 내가 입김을 내뱉으며 나오자 노인이 황급히 말했다.
‘호출받았다. 회의실로 가자.’
‘무슨 일 있습니까?’
당연히 무슨 일 있겠지. 하지만 나는 예의상 물어봤고, 노인은 말해 봐야 뭘 하겠냐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젠 긴급 호출이 놀랍지도 않다. 언제나 찾아오는 버스처럼 익숙한 느낌? 이제는 태연하게 받아들이며, 항상 준비하고 있는 게 일상이 되었다. 난 어깨를 천천히 돌려 굳어 버린 몸을 예열시켰고, 이내 노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인데도 건물 밖은 굉장히 어수선했다. 경비들은 피곤한 얼굴을 감추며 어딘가를 바삐 뛰어갔고, 익숙한 얼굴의 간부들이 우리와 같은 방향을 행해 걸어갔다. 그들은 긴장감과 불안으로 몸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는데, 난 괜스레 눈치가 보여 피곤함이 섞인 하품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잠들었더니 더 졸린 것 같았다.
난 고개를 돌려 몰래 하품을 내뱉었다. 피곤이 섞인 하품은 입김으로 변해 흩어졌고, 내 정신은 조금씩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은 ‘그렇게 졸리냐?’며 웃었고, 난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말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하품을 끝으로 들어갈 준비가 끝났다. 우리는 이젠 익숙한 회의실 문을 열고 안으로 천천히 입장했다.
‘날씨가 많이 춥죠? 이른 시간에 죄송합니다.’
단체장은 본인이 가장 급하게 왔는지 잠옷을 입고 있었고, 그 위에는 꽤 귀여운 모포 하나를 덮고 있었다. 중후한 인상을 가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기에 헛웃음이 튀어나왔지만, 난 애써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최 인내라는 게 없는 노인은 대놓고 웃으며 끅끅거렸다. 단체장은 자신 때문에 웃는 것이라고는 생각 못 하는지 의문 가득한 얼굴로 우리를 바라봤고, 난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며 노인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 회의는 생각보다 인원이 적었다. 의자에는 초면인 간부 두 명이 앉아 있었고, 은테 안경은 언제나 그렇듯 단체장 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앉을 의자 맞은편에는 처음 보는 여성이 있었는데, 그녀는 지금 같은 추위와 어울리지 않는 여성 정장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난 은테 안경의 안내를 받아 그녀의 맞은편에 놓은 의자에 앉았다.
한동안 회의실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단체장을 아직 말을 꺼낼 생각이 없는지 조용히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은테 안경 또한 우리의 커피와 모포를 가져다줄 뿐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이 분위기는 뭐지? 난 주변을 둘러봤지만, 긴급 호출이라고 볼 만큼 위급한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나를 바라보는 저 여성이 굉장히 신경 쓰인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2분 정도가 지났을까? 마치 나를 스캔하는 듯 쳐다보던 여성은 이제야 인사를 건네 왔다. 그녀의 눈빛을 보자니 꼭 내가 어떤 사람인지 관찰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무언가 용건이 있어 보이는 것 같으면서도, 당장은 본심을 꺼내지 않는다?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그 인사를 끝으로 또 말이 없었기에 회의실은 다시 한 번 침묵으로 휩싸였다. 다시금 2분 정도가 지나자 노인이 인내심에 한계가 왔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선봐? 바쁜 사람 데리고 뭐하는데?’
우리가 눈치 볼 입장은 아니다. 더군다나 새벽에 호출을 당해 피곤해 죽겠는데, 상대측에서는 마치 간을 보기라도 하듯 우리를 관찰하고 말을 아낀다. 난 노인의 짜증이 합당하다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노려만 봤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불쾌함보다는 이상한 흥미가 천천히 감돌기 시작했다. 노인과 내 머리에는 이런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쭈?’
그리고 그 침묵은 단체장이 탁자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끝이 났다. 단체장은 우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은은한 웃음을 머금었고, 이내 여자를 향해 충고하듯 말했다.
‘지영 씨,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호락호락하신 분들 아니니, 괜히 건들지 마세요.’
역시 다른 의도가 있었나? 여자는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마치 이걸 원한 게 아닌데……. 라는 얼굴로 한숨을 훅 내뱉었다. 그녀는 아까와는 다르게 내 눈을 피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모습이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길고양이의 모습과 같았다.
‘네, 확실히 수작 같은 게 통할 분들은 아닐 것 같네요. 실례했었습니다.’
노인은 자세를 풀고 책상 위에 손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톡 치며 조용히 미간을 찡그린다. 그 소리에 맞춰 내 머리는 팽팽 돌아가기 시작했으며, 수작이라는 단어를 꺼낸 그녀의 의중을 읽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는 더는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 거침없이 나에게 말했다.
‘혹시 원하시는 게 있으신가요? 우리 거래할래요?’
원하는 게 있냐고? 뜬금없이 들어오는 제안에 나는 순간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대답을 내뱉기도 전에 단체장이 벌떡 일어났고, 그답지 않은 무서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는 마치 우리를 변호하듯 노기가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대가를 받고 움직이시는 분들 아닙니다, 지영 씨!’
‘당신은 여전히 순진한 소리만 하네요? 그러니까 맨날 당하는 거죠.’
여자는 같잖은 소리 하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친다. 그 코웃음을 끝으로 그녀의 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아, 깔끔한 정장과 꼭 사회 초년생 같은 얼굴은 다 가면이었나? 난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음에도 지영이라는 여자를 대충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여자는 종말한 세상의 정수를 맛본 진정한 도시의 주민이었다.
‘제 앞에서까지 위선 떨 필요 없어요. 사람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요? 자, 말해 봐요. 뭘 드릴까요? 식량? 여자? 이 기회에 한몫 챙기는 건 어때요?’
난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속적인 그녀가 나쁘다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녀를 변화시킨 건 이 망해 버린 세상 때문일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내 입에서 튀어나온 웃음은 그 세상을 향한 비웃음이었고, 나를 자신과 똑같이 취급한 그녀를 향해 보내는 불쾌함이었다. 여자는 내가 웃음을 터트리자 바보 취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인상을 찡그린다.
‘우리한테 바라는 건?’
난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다. 얼마나 많은 식량과 사람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걸까? 그리고 그 많은 걸 가지고 있는 여자가 무엇을 원하기에 이곳까지 찾아와 교섭을 하려고 하는 거지? 하지만 그녀는 이제야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찡그린 인상을 풀었다. 그리고 너무나 사무적인 미소를 띠우며 우리를 향해 말한다.
‘소문이 자자해요. 당신들이 그렇게 잘 싸운다면서요? 요즘 우리 쉘터에서 찝쩍거리는 변종 한 마리가 있는데, 그것만 좀 잡아줘요. 어때요? 당신들은 좋은 거 챙겨서 좋고, 우리는 안전해져서 좋고. 혹시 여자 취향 있으신가? 말만 해요, 다 드릴게.’
그녀가 다 알고 있는데, 왜 그래? 라는 얼굴로 호호 웃었다. 그리고 앙탈과 애교라는 가면을 쓴 교만을 나에게 거침없이 내뿜었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참 꼴값이다. 내가 대가를 물어본 것만으로 교섭이 성공했다고 생각하는지, 여자는 자신만만해 있었고, 이내 나에게 손을 내밀며 수줍게 웃는다. 수줍어? 아니, 저 뒤로는 어떤 웃음을 하고 있을까. 난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악수를 하지 않았다.
그녀가 악수를 청한 지 30초가 지났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기 손을 잡지 않는 나를 보며 그녀의 가면은 서서히 깨지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아, 많은 물자와 사람을 가지게 되었다. 아마 머리가 똑똑하고 유능한 여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들은 자기 마음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지금과 같은 반응을 보여 준다.
‘안 잡고 뭐 해요?’
모든 일이 자기 뜻대로 흘러갈 거라는 그 확신. 그리고 그 확신이 깨지게 되었을 때, 이 잘난 이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짜증을 내고 화를 낸다. 난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그녀가 내민 손은 천천히 떨리기 시작한다.
1분이 더 지났다. 그녀는 자존심 때문이지, 아니면 고집 때문인지 여전히 손을 내리지 않고 있었으며, 얼굴은 붉어지다 못해 터질 듯이 달아오른다. 적당히 뜸을 들였다고 생각한 나는 그녀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그쪽이 제시한 것들은 우리도 다 가지고 있는 건데.’
식량은 부족하지 않게 받고 있었고, 나를 언제나 믿어 주는 일행들도 건재하다. 내 속은 이미 꽉 찬 식량창고처럼 든든했으며, 더는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욕심과 욕망은 저 멀리 사라진 지 오래, 난 그런 물질적인 것에 집착하는 그녀가 너무나 우스웠다.
‘교섭이 성립하지 않네?’
노인이 내 옆에서 이죽거린다. 교섭이란 서로가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 거래와 같은 것. 하지만 한쪽에서 동등한 가치를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교섭이 아니게 되어 버린다. 노인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난 것일까? 그녀는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까득 물며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우리를 죽일 듯이 노려보기 시작한다.
그런 거로 종이나 베겠어? 그녀 딴에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노려보는 거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모든 게 같잖고 어설퍼 보였다. 학교에서 만났던 그놈이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여자나 전부 똑같았다. 온실 속에서 어설프게 큰 욕망의 덩어리들. 꼴에 가시라고 달고 있는 그 도구는 너무나 알량하고 형편없어 보인다. 난 그녀를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줄 게 없으면 부탁을 해.’
작은 부탁. 교섭이 아니라 그냥 부탁이다.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책상물림을 하지 않고, 입으로 들어갈 음식을 가지고 거래를 논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모두 부질없는 것들이니 대가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다만 그녀가 사람을 구해달라고, 변종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면, 난 기꺼이 총을 잡을 생각이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무거운 것은 사람의 목숨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자기 쉘터 사람들의 목숨보다는 자존심이 더 무거운 모양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지 어깨는 부들부들 떨렸으며, 얼굴은 악귀처럼 일그러진다. 치욕과 증오로 얼룩진 표정은 무시를 처음 당해 보는지 굉장히 짙고 어두워 보였다. 결국, 그녀는 책상 위에 주먹을 올려놓고 부들부들 떨었다.
‘뭐……? 부탁? 이 시발……. 칼 밥 먹은 새끼들은 이래서 안 돼. 싸울 줄만 알지, 고상하게 놀 줄을 몰라요……. 어디서 착한 척이야?’
가면은 벗겨지고, 악귀 같은 그녀의 본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욕을 정면에서 듣고 있는 나와 노인의 얼굴은 생각보다 태연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이런 사람이라는 건 진작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단체장과 그 주위 사람들은 그녀가 이런 모습과 폭언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는 듯 황당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저 여자,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하시는 모양이지?
하지만 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쪽에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단체장은 이제 한계가 왔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지른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경비!!! 이 여자 당장 내보내세요!’
교섭이고 뭐고 다 파탄 났다. 하지만 전혀 아쉬울 게 없는 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고, 노인도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편다. 이곳에서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오직 단체장과 얼굴이 터질 듯이 달아오른 지영라는 여자뿐이었다.
‘시발, 못 나가! 내가 왜 나가야 되는데!’
고상하게만 보이던 그녀의 인상은 어느새 달라져 있었다. 깔끔하던 정장은 흐트러진 지 오래였고, 순진하고 착하게 생긴 얼굴은 유리가면처럼 깨져 버린다. 경비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녀는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버티며 우리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보아하니, 여기서 교섭에 실패하는 시나리오는 짜놓지 못한 모양이다.
‘등신.’
욕설을 듣고 그냥 넘어갈 노인이 아니었다. 노인은 뒤끝 가득한 침을 바닥에 뱉으며 그녀를 향해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자, 이제 다시 숙소로 돌아가 늦은 잠을 청할 시간이었다. 우리가 의자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해 걸어가는데, 뒤쪽에서 히스테리가 섞인 비명이 들려왔다. 짜증과 치욕이 뒤섞인 비명은 분명 우리를 향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자, 말로는 이기지 못하니 행동이 나올 시간이다. 분명 그녀는 욕설을 내뱉은 노인에게 달려들고 있겠지. 언제나 그렇듯 똑같은 패턴에 난 지겨움을 느끼면서도 허벅지에 꽂힌 대검집을 향해 손을 뻗는 걸 잊지 않았다. 근육이 꿈틀거리고, 오른쪽밖에 보이지 않는 시신경이 번쩍거리며 점멸한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며, 그 속에서 나는 대검을 투척했다.
팅-.
파르르.
그녀가 달려오던 벽 옆에 정확하게 꽂힌 대검은 파르르 울리며 그 여운을 대기 속에 진동시킨다. 모든 것이 정지한 것처럼 멈췄고, 그녀도 달려오는 그 자세 그대로 정지한다. 시침 사이로 던진 비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사람 사이에서 오직 노인과 나만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노인과 나는 복도에서 이런 대화를 했다.
‘야, 너 던지는 게 많이 늘었다? 나 몰래 연습했냐?’
‘청출어람이죠.’
‘지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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