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손님맞이는 해 줘야지.’
노인이 총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고, 난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향해 걸어오는 꼴을 보자니 딱 봐도 장거리 이동이 서투른 초보자 무리였다. 무질서한 대열과 경계 없는 선두. 어수선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들은 우리가 길가에 남기고 간 변종의 채취가 아니었다면 진즉에 습격을 받고도 남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히 이곳으로 오고 있는 생존자 무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들은 분명히 우리 발자국을 따라오고 있었고, 열심히 주변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미행하는 모습, 그리고 우리와 동선이 겹치는 출발지. 저들은 남자 선생이 말했던 체육관 무리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바퀴벌레 같은 놈들이 접촉이 없는 와중에 자신들이 살길을 기가 막히게 발견한 것이다.
내가 매복 수신호를 보내자 일행들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저들이 체육관 무리라는 걸 눈치챈 남선생이 황급히 내 쪽으로 다가왔지만, 그보다 빠르게 다가온 용팔이 형제에게 강제로 이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지시가 내려진 순간, 내 명령은 절대적이다.
매복은 순식간에 끝이 났고, 3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길 위는 깨끗해졌다. 길 위에는 오직 나와 노인만이 굳건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노인이 길게 하품하며 짙은 입김을 내뱉는다. 난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고, 굼벵이처럼 느리게 걸어오는 그들을 기다렸다. 장갑 너머로 차가운 총기의 한기가 몰려온다.
그리고 잠시 뒤, 그들은 드디어 우리를 발견하고 조심조심 이곳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총인원은 생각보다 많은 20명, 성비는 반반으로 균등했지만, 이상하게 평등하다는 분위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왠지 모르게 느껴지는 불쾌함을 피부로 느끼며 천천히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고 그들이 50m쯤 접근했을 때 난 조용히 손을 들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보쇼! 당신들이 에덴에서 온 구조대요?’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특이하게 깨끗한 양복을 입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양복을 입고 있음에도 그의 얼굴에는 더럽고 천박한 권위의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는 길 위에 우리 둘밖에 없는 것을 수상하게 보면서도 대뜸 반말을 건네오며 이곳으로 걸어오려 했다. 하지만 내가 손을 또다시 들어 앞길을 막자 중년 남성은 인상을 찡그린다.
‘뭐야? 새파랗게 어린놈이……. 책임자 불러, 책임자!’
길 위에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걸 확인한 남성의 표정은 순간 거만함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임무복을 확인한 그는 우리가 에덴에서 온 사람인 걸 확신했는지 단체장을 찾기 시작했다. 내가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려서 그런 걸까?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아랫사람 취급했다. 노인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난 조용히 메마른 입술을 핥았다.
난 섣불리 대응하지 않았다. 남자가 계속해서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더 짖어보라는 듯 조용히 그들을 지켜봤다. 그러자 남자는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붉게 일그러트렸고, 찬바람이 불던 기류는 순식간에 급변하기 시작했다. 저쪽 무리에선 그 바뀐 기류를 눈치챈 건지 장정 몇몇이 거만한 발걸음으로 걸어 나온다.
하나 같이 양아치처럼 생기고 표정도 건방지다. 무력시위라도 하고 싶은 걸까? 약자 앞에선 강하고, 강자 앞에선 약한 전형적인 소인배들 앞에 난 익숙함을 느끼면서도 손가락이 간질거림을 느꼈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어서 일행들을 숨겨두었다. 그런데 내 예상과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상황 속에 난 살며시 손을 들어 올려 총을 장전했다. 다행이다, 혹시나 저들이 인간일까 봐 걱정했다. 난 무거운 죄책감을 한순간 털어 낼 수 있었다.
찰칵, 내가 노리쇠를 당기자 노인이 기다렸다는 듯 장전음으로 화답한다. 그 순간 폭풍처럼 흘러가던 기류 위에는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고, 사방에서 일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물 창문이 열리며 섬뜩한 빛을 발하는 총구가 튀어나오고, 큰 트럭 밑에서는 숨을 죽이고 있던 박대박 무리가 귀신처럼 기어 나온다. 너무나 익숙한 침묵과 날카로움은 동시에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저 온실 속 돼지 풀과는 다른 진짜 잡초들을 볼 시간이다.
딸꾹.
중년 남성이 차가운 총구 앞에 깜짝 놀라 딸꾹질을 한다. 또한, 나를 당장에라도 패 버릴 것만 같던 남성들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몸은 이미 뒷걸음질 친지 오래였다. 모든 게 우습고 귀찮다. 수가 많다고, 총이 있다고 한순간 바뀌는 태도 앞에 난 역겨움과 동시에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난 차가운 장전음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용건이 뭡니까.’
‘책, 책임자…….’
아직도 그 소리인가? 남자는 자기가 겁먹었다는 것에 화가 나는지 얼굴을 붉힌다. 하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거만한 태도로 나를 노려보지는 못했다. 반쯤 벗어진 머리에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함이 가득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조용히 대답했고, 목소리는 근처에 있는 일행들을 모두 끌어안았다.
‘내가 책임자입니다.’
내가 이들 모두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외면하지도, 회피하지도 못하는 자리. 난 허리를 펴고 어깨 위에 덕지덕지 묻은 부담감을 인정했다. 그리고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한 자리 위에 굳건하게 서서 그를 내려다봤다. 그는 내려다보는 내 시선 아래 자존심이 상하는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듯 꾸역꾸역 존댓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저……. 우리도 데려가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역시나 그것이었나? 남자는 치욕 속에 거만함과 분노를 숨겼다. 그리고 애써 비굴한 척 자세를 숙이고, 한순간 태도를 바꾸기 시작한다. 아마 변종들이 아니었다면, 계속 그 자리에서 왕 노릇을 했겠지. 그래, 변종들이 아니었다면 자기보다 아래라고 판단되는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난 남성의 얼굴에서 짜증과 검은 속내를 읽었다.
난 무심결에 시선을 멀리 돌렸고, 뒤에 있는 무리들이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가방에는 묵직한 식량들이 가득했는데, 얼마나 많이 담았는지 지퍼조차 제대로 잠기지 않는다. 그것은 분명 식량일 터인데 왜 내 눈에는 더럽고, 추악한 욕망으로 보이는 것일까? 난 입안에 있는 씁쓸한 침을 망설임 없이 뱉었다.
내가 침을 뱉자 분위기는 더 싸늘하게 변한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과 마트가 털렸었던 이유가 다 이들 때문이었나? 분명 자기들이 들고 올 수 있을 만큼 챙겼을 텐데도 그 양이 상당했다. 아마 체육관에는 가져오지 못한 식량이 남아 있을 것이다.
‘식량이 많군요.’
애들은 개 사료를 먹고 있었는데, 너희들은 다 처먹지도 못하는 걸 그렇게나 많이 가지고 있었구나. 나는 과연 이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뒷말을 내뱉지 않고 눈을 조용히 마주했다. 하지만 내 말을 들은 남자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재수 없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식량 가방을 황급히 꺼내 든다.
‘원하시는 게 있는 거죠?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시지……. 담배도 있고 술도 있습니다.’
식량이 곧 재화고, 힘인 세상이다. 이 남자는 그 변화를 충실하게 받아들였는지 자신의 방식대로 내 말을 이해하고 대응했다. 하지만 그것을 마주한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내 피는 싸늘하게 식었으며, 피부는 불쾌함으로 일어나기 시작한다.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확정을 내린 상태다. 내 오른손은 일행들을 향해 흔들렸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임을 알렸다. 일행들은 재빠르게 매복 포지션에서 벗어나 이동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남자는 갑자기 변한 분위기 앞에 적응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다.
‘왜, 왜 그러십니까? 부족하신가요? 조금만 기다려주십쇼! 더 있습니다!’
역시 꿍쳐놓은 게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난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단 한 줌 남아 있던 자비와 동정마저 차가운 바람에 흩날려 버렸다. 내 표정과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으며 총을 잡고 있는 손에는 천근 같은 힘이 들어갔다.
내가 몸을 돌리자 노인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우리 일행들은 보이지 않은 벽을 넘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기다려!! 기다리라고!!!’
완전히 끝난 분위기다. 아까 거만한 분위기를 풍기던 양아치들은 총 때문에 차마 다가오지 못했고, 오직 양복의 남자만이 나를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을 향해 뻗어오는 그 손에는 더러운 삶의 욕망과 추악한 찌꺼기가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노인의 손이 벼락처럼 움직였고, 천둥 같은 활시위가 허공을 때린다.
빛과 함께 천둥이 따라온다. 그 벼락같은 볼트는 남자가 달려오려는 길에 그대로 꽂혔다. 그리고 내 눈조차 따라가지 못한 그 공격은 한순간 남자의 몸을 멈추게 했고, 초라한 엉덩방아를 찍게 만든다. 털썩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남자는 자기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 정확히 4초 뒤에 자각한다. 흰 눈 위로 노란색 오줌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노인이 말한다.
‘따라오면 뒤진다.’
굉장히 직설적이다. 따라오면 죽는다, 그것이 허언이 아니라는 것은 방금 자기 머리에 꽂힐 뻔한 볼트를 보며 알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벽과 처음 마주해 본 남자는 멍하니 볼트와 우리를 바라봤고, 다시 걸어가는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이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버리고 이곳까지 따라온 것에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누가 낙원에서 벗어나고 싶겠는가? 변종들은 생존자를 찾아 모든 곳을 돌아다니고, 저들도 곧 그들에게 잡혀 죽을 운명이었다. 낙원이 사라지고 지옥이 도래할 때, 여태 살아남아 온 생존 욕구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도 이겨내게 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임을 그는 알고 있는 것이다.
‘저, 정 선생!!! 정 선생, 우리 좀 살려 주게!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 다 죽어!’
바닥에 엎어진 남성은 필사적으로 사방을 둘러봤고, 이내 용팔이 옆에 있는 남자 선생을 발견했다. 그리고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지르며, 그 안경 쓴 남성을 필사적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볼 때랑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 거만함은 사라지고 양복은 오줌과 눈으로 더럽혀진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정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완전히 죽어 버린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썩어 버린 동태 눈깔이었다.
‘교감 선생님…….’
산송장 같은 자가 묻고 산송장보다 못한 자가 대답한다.
‘미안하네! 미안해!! 사람은 살아야 될 것 아닌가……. 제발 말 좀 해 줘!’
추악하다. 더럽다. 그 모든 찐득한 감정이 내 심장을 노크하고 지나갔다. 난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바닥에 엎어진 남성에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려 버렸다. 하지만 노인만은 걸음을 멈췄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남자 선생의 선택을 지켜봤다. 아마 이것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던 그를 데려갈지, 혹은 놓고 갈지에 대한 선택의 순간일지도 모른다.
‘그때, 왜……. 체육관 문, 왜 닫으셨어요? 애들 다 죽었잖아요, 기억나요?’
남자 선생은 고개를 푹 숙이고 묻는다. 스스로 내뱉은 악몽 같은 그때를 떠올리는지, 마치 발작하는 사람처럼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눈물이 피눈물처럼 떨어지고, 그동안 묵혀 뒀던 한은 타오르는 숯처럼 조용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울고, 여자는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바닥에 넘어진 교감은 한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1시간 같은 찰나가 지나고, 교감은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미안하네……. 내가! 내가 미안해! 살고 싶어서 그랬어! 정말 미안해!’
비겁한 사과다.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고 입으로만 떠드는 업보다. 나는 그것을 의미 없다고 생각했고, 왜 문을 닫았냐고 물어본 정 선생도 똑같이 생각했다.
인간의 탈을 쓴 금수, 괴물보다 더한 괴물. 난 그런 남자에게 혐오감과 더불어 허무함마저 느꼈다. 인간이 얼마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곳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을까. 정 선생은 손을 꽉 쥐고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고함을 내질렀다.
‘다 살고 싶었어!!! 거기 있는 사람들, 다 살고 싶었다고!!! 왜 당신들만 살아야 했는데? 이유가 뭔데? 당신들 그냥 죽어, 제발 거기서 다 죽어 버려!’
그는 쉬어 버린 목소리로 살벌한 저주를 내뱉었다. 이제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살려달라는 말을 내뱉는 바보는 없었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사탕발림도 더는 없었다. 왼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때려 주고, 오른 배를 찔리면 오른 배를 찔러 준다. 생명은 추악함 앞에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정 선생은 모든 죽음을 지켜보았고, 이제는 허망함마저 느꼈다. 그리고 그 허망함은 회색으로 만들어진 정글의 법칙을 온몸으로 깨닫게 해 주었다. 하늘을 올려다보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흰색으로 내리는 눈인데, 이상하게 회색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선도 악도 아닌 회색은 우리의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정 선생은 힘없이 몸을 돌려 울고 있는 아이들을 챙겼고, 그것을 시작으로 일행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기들이 갈 길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무사히 임무를 마친 것이다. 기억하지도 말고, 더는 나락의 냄새를 맡지 말자. 하지만 그 순간 내 뒤에서 교감 선생이 마지막으로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단체장을 불러!!! 나는 엘리트야, 엘리트! 저런 애새끼들 보다……. 저런 버러지, 쓰레기들보다 내가 더 쓸모 있다고 이 개새끼들아!!’
이성을 잃었나? 바닥에 넘어져 모든 것을 포기한 것만 같은 남자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오고 나서야 자신의 검은 속내와 본심을 내뱉었다. 그 본심을 들은 순간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내 손은 다시 한 번 노리쇠를 향했고, 방아쇠 위에는 검지가 조용히 올라갔다. 아직도 포기하지 못한 집착과 더러운 욕구가 느껴진다. 난 그것을 끊어 내줘야 했다.
따다다닥.
총구가 춤을 추고 불꽃이 반짝인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며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자들은 황급히 도망가고, 교감은 미친 듯이 뒤로 기어 이 자리를 벗어나려 꿈틀거린다. 총을 쏠 줄은 몰랐다는 경악이 사방에서 날아오며, 대치되고 있던 기류가 이제야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총알을 맞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날아간 총알은 그들과 우리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었고, 더는 접근하지 말라는 탄피의 철조망을 조성했다. 바닥에 튀긴 눈들과 하늘에서 내린 눈들의 경계가 희미해질 때쯤 난 손을 한 번 휘저어 화약 연기를 훑어내었다. 그리고 내 입에서는 쉬어빠진 목소리가 기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제가 눈이 이래서 사격을 잘 못 해요.’
빈 탄창이 눈 위에 떨어지고, 그 자리를 묵직한 탄창이 대신한다. 노리쇠를 당기는 차가운 소리가 울려 퍼지며 난 그들에게 마지막 양해를 구했다.
‘그래도 노력은 해 보겠습니다.’
교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친 듯이 도망갔고, 아직 남아 있는 나머지 사람들도 본능적인 뜀박질을 시작하며 이곳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난 조용히 몸을 돌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총을 둘러멨다. 내 시선과 기억은 녹아 버린 눈처럼 덧없이 사라졌다.
채연이가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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