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1번 방향, 이상 없습니다.]
싸늘한 찬바람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간다. 무전기에서는 강 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그 무전은 각각 김혜정, 박대박의 목소리를 이끌었다. 무전을 받은 나는 노인과 용팔이 형제에게 조용히 손짓했다. 우리는 마치 공명하는 유기체처럼 뜨거운 입김을 동시에 내뱉었고, 눈앞에 보이는 철문을 있는 힘껏 밀어 열었다.
우리를 제외한 일행들은 전부 팀을 나눠 건물이 보이는 모든 방향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건물에 달린 창문을 통해 혹시나 있을 변종과 우리의 이동 방향에 대해 실시간으로 무전해 줄 것이다. 또한, 낮은 층을 이동하는 동안에 우리에게 위험이 찾아온다면, 밖에서 안을 향해 엄호사격을 해 줄 계획이었다.
문을 열자 보이는 건물 내부는 굉장히 어두컴컴했다. 모든 상황이 좋지 않듯이, 어둠으로 가득한 내부는 우리에게 독소처럼 손을 뻗어왔다. 노인과 용팔이는 황급하게 손전등을 꺼내 앞을 밝혔고, 우리가 1층으로 진입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저 멀리서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문이 깨졌나? 빛들을 가리고 있는 커튼들이 바람에 펄럭이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 폭풍전야, 지금과 가장 어울리는 단어였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다 떨어져 나간 학교 공고문들이 보였고, 종말 후에 남긴 거로 추정되는 아이들의 그림이 시야에 들어왔다. 곧이어 앞으로는 빼곡한 교실 문들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 안에는 한 점의 빛조차 존재하지 않아, 마치 두려움으로 구성된 범의 아가리 같았다. 우리는 침착하게 사방을 경계하며 4층 교무실 목적지로 잡고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커튼이 있는 창문이 있었고, 없는 창문도 있었다. 아마 새어나가는 빛을 막기 위해 이렇게 설치해 둔 것 같은데, 간혹 보이는 깨진 창문들과 찢긴 커튼은 이곳에 어떤 변종이 들어왔는지 짐작하게 해 주었다. 가뜩이나 날씨가 흐리다. 그 흐린 날씨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빛마저 흐리게 만들어 주었고, 눈앞에는 손전등 불빛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노인과 용팔이 형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간의 경험과 반복되는 훈련은 우리를 이 상황에 완벽히 적응하게 했다. 시각과 청각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심지어 피부를 핥는 공기의 분위기까지 미세하게 반응한다. 저 복도 저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싸늘한 바람 소리는 고막을 스치고 지나간다. 똑, 똑, 똑. 물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심장도 천천히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칙, 무전기가 울린다.
[진입했습니까? 일단 모든 창문은 이상 없습니다. 하지만 4층 교무실에 도착하면 이쪽에서는 보이지 않으니까 조심하세요.]
나는 볼륨을 줄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옅게 울려오는 무전기 소음이 사방을 향해 천천히 메아리친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2층 끝을 잠시 살피고 그대로 계단을 올라, 3층 그리고 4층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층을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햇빛을 막고 있는 커튼이 두꺼워졌으며, 깨진 창문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후으으으……. 강한 바람이 깨진 창문 사이를 스치고 지나가자 마치 여자의 울음소리 같은 바람 소리가 들려온다. 용팔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총을 견착했고, 노인은 표정을 굳히며 우리가 올라갈 4층 계단을 향해 서둘러 손짓했다. 지체해선 안 된다.
타박, 타박, 타박. 우리가 바닥을 밟는 소리와 함께 칠흑과 같은 공간을 손전등 하나에 의지해 그사이를 파고들어 간다. 몇 개 되지 않는 4층 계단은 꼭 보이지 않는 암흑을 타고 오르는 지옥의 편도와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구도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익숙한 기분, 내 옆에 있는 동료가 나의 발을 이끈다. 아마 모두가 같은 기분일 것이다.
난 간이지도를 펼쳐 우리가 가야 하는 교무실의 위치를 확인했다.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은 변종들의 공격을 피해 안으로, 계속해서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러다 결국 학교에서 제일 구석진 곳까지 숨어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4층에 있는 교무실이었다. ㅁ자로 생긴 학교 건물에서 제일 안쪽에 있는 그곳은 밖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장 후미진 곳이었다.
급박한 순간이 생긴다면 지도를 펼쳐 볼 시간도 없을 것이다. 난 손전등을 한동안 지도 위에 비춰 보이며, 그 복잡해 보이는 지리를 한순간에 머릿속으로 구겨 넣었다.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살려면 외워야 한다. 그 강제성이 내 뇌를 채찍질하고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난 그렇게 모두 외운 지리를 머릿속에 구겨 넣고 지도는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준비.’
이제부터 우리가 가야 할 길에는 앞에 무엇을 대비해야 하는지에 대한 정보나 엄호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난 내 뒤에 일행들에게 마지막으로 장비와 마음을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우리는 저 멀리 어둠으로 흐릿해진 복도를 가로질러 교무실로 향해야 한다. 거리는 불과 80m. 하지만 그 거리에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몰랐다. 난 조정간을 움직여 잠금장치를 풀었고, 숨을 내뱉으며 근육 다발에 힘을 주었다.
내가 뛰쳐나가자 일행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내 뒤를 따라왔다. 고요하기만 했던 발걸음은 이제 급박한 뜀박질로 바뀌어 복도에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안개 같은 어둠에 숨이 턱턱 막혀오고 이 선명한 어둠과 흐릿한 빛들이 마치 물속에 있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눈앞에선 손전등이 쉼 없이 점멸하며, 그것이 밝히는 풍경들은 뚝뚝 끊기는 프레임들처럼 나를 옥죄여 온다. 아, 숨이 막힌다.
4반, 3반, 2반! 노인이 손전등을 들어 올려 각 교실 문 위에 붙어있는 표를 비춰 보였다. 마치 지하통로를 지나가는 열차처럼 한순간 보였다가 사라지는 벽들은 우리의 두려움과 조급함을 증폭시켰다. 거친 숨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숨과 피부에서 흘러내리는 식은땀은 한순간 심장 끝에 고여 내 신경을 긁어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복도 중앙에 도착했을 때쯤, 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파도가 물밀 듯 올라오는 이 기분, 무전기가 정신없이 울리기 시작했다.
[1층!! 1층에서 뭐가 올라가고 있어요!!! 속도가 너무 빨라! 사람이 아니야!]
2번 방향을 보고 있을 김혜정의 목소리였다. 처음에는 침착하게 상황을 보고하더니 마지막에 들어서는 비명과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변종의 출현을 알렸다. 놈이 뜀박질 소리를 듣고 우리의 존재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함정에 제 발로 들어왔다는 기쁨과 우리를 죽일 수 있다는 희열이 내 피부 모든 곳에 짜릿짜릿 울리기 시작했다.
‘저기!’
노인이 40m 근처에 있는 교무실을 가리키며 손전등 빛을 그곳으로 뻗었다. 놈의 위치가 1층이라고 했던가? 변종들의 가공할 속도를 생각해 본다면, 그렇게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생존자들을 구하고, 데려와 1층까지 내려가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변종과 한 번 더 충돌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신에는 노이즈가 끼었고, 무전기에는 잡음과 함께 또다시 김혜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라졌어요! 동윤 씨, 놈이 사라졌다고!]
사라졌다고? 창문에서 관측되어야 할 놈이 도대체 어디로? 난 교무실까지 10m를 남겨두고 자리에 멈춰 섰다. 일행들은 달리는 관성에 이기지 못하며 나를 지나쳐서 갔고, 나는 이상하게도 심장이 느리게 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우리가 올라온 계단을 살펴보았다. 놈이 사라졌다면 빠른 속도로 이곳까지 올라온 것일까?
하지만 계단에는 펄럭이는 커튼과 옅은 빛밖에 보이지 않았다. 복도 끝에서 시작한 바람은 나를 스치고 지나갔고, 꼭 열차가 창문 밖을 지나간 것처럼 창가에 붙어 있는 모든 커튼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시 앞을 바라보자 흩날리는 커튼 사이로 학교 밖의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흐릿한 날씨, 다시 내리기 시작한 싸라기눈은 위험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커튼이 휘날리는 창문 앞에는 머리가 치렁치렁한 변종이 거미처럼 매달려 있었다.
왜 나는 놈이 계단으로만 올 것으로 생각한 거지? 놈들은 변종이다. 규격 외의 존재인 그놈들은 어떤 곳이든 기어 올라갈 수 있고, 어디서든 우리를 공격할 수 있었다. 창문에 얼굴을 붙이고 나를 바라보고 있는 놈은 꼭 동물원에 갇힌 작은 생명체를 보듯 역겹게 눈을 굴리고 있었다.
아니, 눈동자를 굴린 것이 아니다. 놈은 눈이 없었으니까.
아이히-. 아히이이-. 아히이-.
수백 번이고 들었을 울음소리였다. 놈은 슬프게 울고 있는데, 얼굴은 기쁘게 웃고 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되어 바람에 치렁치렁 흔들렸고, 찢긴 입은 더러운 혀에 얽혀 탁한 액체를 뚝 뚝 흘린다. 우리를 사냥하려 했고, 결국 사냥감에게 목숨이 끊긴 녀석. 그것은 단순히 한 존재가 아닌 새로운 종이였다. 다시 한 번 마주하는 놈 앞에 난 본능적으로 총을 빼들었다.
따다닥!!
내가 총을 발사함과 동시에 총구에선 밝은 빛이 터져 나온다. 놈은 인상을 찡그리더니 한순간 시야에서 사라졌고, 총알이 관통한 창문은 형편없이 깨져 바닥에 떨어진다. 명중탄은 단 한 발도 없었다. 가공할 속도로 사라진 빈자리에는 싸라기눈이 칼바람을 타고 흘러들어올 뿐이었다. 시간이 없음을 느꼈다. 난 이제야 상황파악을 마친 일행들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교무실로 가!!’
난 발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물속에 빠진 듯 두려움이라는 격류가 내 몸을 뒤로 밀었지만, 난 그 저항 앞에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손을 휘저었다. 창문을 향해 정신없이 총구를 들이미는 용팔이를 걷어차고 앞으로 민다. 우리는 교무실로 들어가야 한다. 절대, 창문 옆에 붙어 있어서는 안 된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모든 게 벅차고 힘들었다.
쨍그랑!
그 순간 노인 앞에 있는 창문이 박살 나면서 길쭉한 팔 하나가 쑤욱 복도로 들어왔다. 난 재빨리 앞으로 달려가 노인의 뒷덜미를 잡았고, 같이 바닥에 넘어지며 그 공격을 피해 냈다. 놈의 손이 지나가는 곳마다 소름이 끼치는 파공성과 함께 콘크리트로 지어진 벽들이 긁히기 시작했다. 놈은 마치 벌레를 잡듯 이곳에 손을 집어넣어 우리를 잡으려고 했다.
따다다다다닥!
하지만 나와 노인은 침착했다. 조정간을 연발로 바꾸고, 넘어진 그 자세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서 나온 빛들은 반짝거리며 폭죽처럼 터졌고, 바닥에는 탄피들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기 시작했다. 총알이 피부를 찢고 들어가 근육 다발을 끊어놓는다. 놈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급하게 손을 빼낸다. 우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고, 입안에 들어간 콘크리트 가루를 서둘러 내뱉으며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무실 앞에 도착했다. 난 넘어진 자세 그대로 교무실 문을 발로 쿵쿵 찼다. 요란한 노크였지만 저 앞에서 놈과 싸우고 있는 용팔이 형제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문을 발로 차는 순간 교무실 안에서는 요란한 비명이 들려왔다. 이곳에 있는 게 맞다, 드디어 생존자와 접촉했다.
‘문 열어! 구하러 왔으니까 빨리 열라고!’
난 완전히 쉬어 버린 목소리로 처절하게 외쳤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몸이 공격당할 것이라는 본능과 함께 신경이 빨리 시선을 돌리라고 경종을 울렸다. 내 고개는 자동적으로 돌아갔고, 그곳에는 용팔이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놈의 왼쪽 손이 있었다. 내가 아니라 용팔이였다. 피할 수 있나? 아니, 두식이랑 용팔이. 그리고 노인까지 놈의 오른쪽 손을 바라보고 있다.
완벽한 사각지대에서 가해지는 공격이다. 마치 강철 같은 손톱과 팔은 그대로 용팔이의 머리를 터트릴 것 같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심장은 미친 듯이 울려온다. 난 고함을 내뱉으며 바닥을 손으로 짚었고, 총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만약 용팔이가 여기서 죽어 버린다면, 난 내 살덩이가 떨어지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낄 것이다. 난 그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불가능한 거리다. 용팔이가 여기서 죽는다. 이성은 그렇게 말했지만, 본능은 그 말을 거부한다. 육체는 한계가 왔다고 말하지만, 또 다른 육체는 할 수 있다고 나를 다독인다. 온몸에 있는 다발이 끊기는 것 같은 아픔이 찾아온다. 나에게 찾아오는 저항을 거부하고 할 수 없다는 한계를 찢어발긴다. 날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난, 난 분명 할 수 있다.
손끝이 용팔이 몸에 닿았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나에게 눈동자를 돌리는 용팔이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인다. 숨이 느껴지고 겁 많던 용팔이가 한 명의 일행이 되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가고, 미친 듯이 울리는 심장 소리와 함께 절박함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널 절대로 죽게 내버려 두지 않겠다.
내 바람을 들은 몸은 한순간 중력을 이겨내고, 불가능할 것만 같은 거리를 뛰어넘었다.
용팔이를 힘껏 밀치며 바닥에 넘어트린다. 놈의 손은 간발의 차로 용팔이의 머리를 스치며, 내 왼쪽 얼굴을 긁고 지나갔다. 피가 팍 터지며 왼쪽 눈의 시야가 한순간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난 비명보다는 고함을, 본능적인 움츠림보다는 대검을 먼저 꺼내 들었다. 힘차게 내 허벅지에서 빠져나온 대검은 그대로 놈의 팔에 박혀 들어갔다.
대검을 꽂은 순간 직감했다. 이건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고 놈의 피부와 근육을 완전히 관통했다. 난 손에 힘을 줘 팔을 빼내려 하는 놈을 절대로 놓아주지 않았다. 놈은 한순간 가해지는 고통 앞에 지랄발광을 시작했지만, 결코 팔을 빼낼 수는 없었다. 난 놈을 향해 형편없이 끌려가면서도 필사적으로 기둥을 붙잡으며 놈을 놓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놈이 당황한 게 여기까지 느껴졌다. 놈은 팔이 빠지지 않자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체를 창문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분노와 함께 끝없는 증오를 나에게 표출했다. 난 얼굴 위로 흐르는 뜨거움을 느끼며 놈을 노려보았다.
‘여기다, 이 새끼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익숙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나는 흘러내리는 피를 애써 무시하며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장전을 마친 노인이 개머리판을 견착하고, 놈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내가 숨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총구가 불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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