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눈 속에 파묻힌 회색 눈동자, 난 그 눈동자와 마주하며 피와 심장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 감각, 피부를 핥는 감촉,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위험을 말하고 있었다. 찰나가 영원처럼 느껴지고, 내 눈동자와 숨은 한순간 추위에 얼어붙는다. 그리고 뻑뻑하게 아려오는 눈을 한번 감고 뜨자, 그 회색 아귀는 사라지고 눈앞에는 빈 공간밖에 남지 않았다. 아, 난 그것을 시야에서 놓치고 만 것이다
난 재빨리 총을 꺼내 들고 일행들을 향해 미친 듯이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달이 난 걸 짐작한 노인은 얼이 빠져있는 일행들을 걷어차며 주변을 경계하게 했고, 우리는 서로가 등과 등을 맡기며 둥글게 뭉치게 했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미친 듯이 시선을 옮겼다. 눈, 눈, 눈, 흰색 눈과 회색 눈동자. 무엇이 눈이고, 무엇이 놈인가? 난 신경을 채찍질하며 놈을 찾아내라고 재촉했다.
‘형, 형님! 뭐가 있는 거죠? 그쵸?’
용팔이가 다급하게 총을 들어 올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총을 써본 경험이 적은 용팔이는 총을 잡고 있는 자세가 엉성했고, 총구는 위험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총구만큼이나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이 본 것이 맞냐는 듯 나를 다그친다. 그러자 용팔이 옆에 있던 노인은 입술을 꽉 깨물며 내 옆으로 다가왔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에게 물었다.
‘새로운 놈이냐?’
난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종은 한 종류가 아니다. 그간 경험이 말해 주듯 놈들은 새로 만들어진 종처럼 다양한 종류가 존재했다. 그리고 방금 내가 발견한 것은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새로운 놈이다.
눈과 같은 흰색 피부는 보호색처럼 몸체를 감춰 주었고, 소름 끼치는 회색 눈동자는 어떠한 감정과 생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우리를 향한 공격이 오지 않는다, 놈은 우리 근처로 오지 않았다. 도대체 무엇을 노리고 있는 거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나?
침을 삼키자 등판에 고인 식은땀이 엉덩이골까지 또르르 흘러내린다. 난 지나친 긴장감으로 인해 흥건하게 젖은 손을 쥐어 본다. 그렇게 땀을 닦을 여유도 없이 주변을 계속해서 살필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지쳐간다. 뇌는 긴장과 피곤으로 절여지고, 심지어 환청과 환각까지 보이는 착각에 빠져든다.
공포는 신기루가 되어 아지랑이처럼 우리 눈앞을 스치고 지나간다. 눈 속에 공포, 무언가 있는 거처럼 두려움은 유형화가 되어 일렁인다. 목이 서늘하다. 수많은 경우의 수와 목이 뜯길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내 심장과 감각을 칼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두려움이 나에게 속삭인다. 쏴, 쏴! 눈앞에 두려움을 모두 쏴 버리는 거야.
아니다, 동윤아.
이성이 나를 붙잡는다. 난 숨을 훅 내뱉으며 방아쇠를 잡고 있는 손가락을 살며시 떼어 냈다. 땀은 흘러내렸고, 마치 조각상처럼 굳은 몸은 비명을 지른다. 그리고 두려움으로 젖은 머리 사이로 이성이라는 단 한 줄기 빛이 흘러내렸다. 생각하자, 그래 침착하자. 방법이 있을 거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도대체 놈이 노리는 것이 무엇이고, 왜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걸까.
난 눈 속을 눈으로 살피며 정신없이 머리를 굴렸다. 팽팽 돌아가는 뇌는 과부하가 된 듯 비명을 질렀지만, 난 애써 그 비명을 무시하며 눈을 연신 감았다 뜬다. 눈앞은 눈들이 점멸되듯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고, 흰색으로 가득한 숲은 점점 흐릿해져 간다. 로직이 점점 확장되기 시작한다. 왜 우리가 이곳에 왔으며, 놈들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나.
여태 만난 놈들은 우리를 공격하지 않았다. 무언가 순조롭게 돌아간다는 것처럼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놈들이 사람과 같이 생각한다고 가정하자. 무엇을 의도하고 우리를 그냥 보내 준 걸까? 그리고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지?
난 침을 삼키며 찬바람으로 쩍쩍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굳어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겨우겨우 들어 저 멀리 보이는 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향하려는 목적지는 저 건물. 그것을 놈들이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혹시, 혹시 이 모든 게 놈들이 노린 몰이가 아니었을까? 가정이 결론을 도출하자 발끝에서 시작한 소름이 머리끝으로 치솟는다.
그래, 너희들은 우리가 저곳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구나. 저곳이 토끼를 잡는 그물이자, 몰이의 종착점. 그리고 놈들이 우리에게 칼을 꽂을 장소였다. 난 본능처럼 손을 움직여 총의 조정간을 바꾸었고, 노인에게 후퇴 수신호를 보냈다.
절대 의도한 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노인은 내 후퇴 신호를 확인하자 일행들을 천천히 숲속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3분 정도를 걸어 이미 숲 한가운데로 진입한 지 오래.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감에도 그 시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일행들은 긴장이 가득한 얼굴로 엉거주춤 뒷걸음질을 쳤고, 내 얼굴로 차가운 바람과 칼날 같은 눈들이 몰아쳐 왔다.
미친 듯이 휘날리기 시작하는 나무들은 마치 우리에게 나가라는 듯 경고하는 것 같았다. 바닥에 쌓인 가벼운 눈들은 바람에 휘날리고, 마치 모래폭풍처럼 눈 폭풍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 사이로 놈이 내는 소리 같은 바람이 훅 훅 불어온다. 일행들은 그 소리가 이곳을 향해 다가오는 변종의 소리인지 아니면 두려움이 내는 환청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사각, 사각.
하지만 나는 걸음을 멈춘다. 두려움은 웃기게도 학습이 되었고, 어둠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방법도 뇌가 기억하고 있다. 귀를 쫑긋거리고 피부를 핥는 위험신호는 나에게 모든 정보를 전달한다. 일행들은 듣지 못했나? 그래, 분명 나만 들은 거다. 아지랑이 같은 환청도, 환각도 아닌 진정으로 다가오는 위험을.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눈을 파헤치는 소리가 격렬해진다. 그리고 그 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혀 내 귀를 날카롭게 파고든다. 놈은 화가 났다. 우리가 덫에서 빠져나가려 하자 화가 난 것이다. 내 후퇴 신호가 결정적이었다면, 이제는 놈이 우리를 공격할 차례였다.
보호색이다. 놈의 몸체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난 시각으로 놈을 찾는 걸 포기하고,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그리고 언제든지 총을 발사할 수 있도록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리며 청각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공격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은 꼭 낭떠러지 끝에서 눈을 감고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한다. 떠라, 눈을 떠라. 본능이 말하지만 난 본능을 억눌렀다.
사각, 사각, 사각, 사각.
오른쪽? 왼쪽? 아니면 앞? 뒤? 놈은 우리 주위를 뱅뱅 돌고 있었다. 뒷걸음칠 치면 칠수록 그 원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내 신경과 피부는 미친 듯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가 초입 부근을 바라보고 있을 때쯤, 발끝부터 시작한 전기신호가 머리로 치솟아 올랐다. 놈은 더 이상 발소리를 내지 않았고, 내 손가락은 움찔움찔 떨려왔다.
그리고 내 눈은 떠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점멸하듯 쏟아져 내리는 눈들은 내 눈앞에서 천천히 춤을 추었고, 일행들 전부의 얼굴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간다. 난 경직된 근육에게 비명을 지르며 움직임을 재촉한다. 뻑뻑한 눈알이 마모되도록 굴려 놈이 오는 방향을 포착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박다혜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내 손은 움직였다.
박다혜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본다. 내 두 눈동자엔 그녀의 뒤로 하얀색 물체가 입을 쩍 벌리고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벌려진 입은 귀 옆까지 찢겨 있었고, 놈의 온몸은 하얀색 털들로 가득했다. 눈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무미한 감정이 아닌 살육을 맞이할 희열로 가득하다. 놈은 확신하고 있었다. 박다혜를 죽이고, 우리 일행들을 전부 죽일 수 있다는 확신을.
난 그 확신에 침을 뱉었다. 천근만근처럼 무거운 총구를 들어 올리고, 놈이 벌리고 있는 아가리를 조준한다. 하염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방아쇠를 잡고 있는 손가락에게 채찍질을 가한다. 오므려지고, 강하게 당겨져라. 내 총구가 자신에게로 향하자 놈은 경악한다. 쫙 벌려진 입은 불쾌함으로 물들고, 총구를 피하고자 공중에서 몸을 비튼다.
따다다닥.
소음기가 부착된 총구가 불을 내뿜기 시작했다. 놈에게 발사된 3점사는 맹렬하게 날아갔지만 아쉽게도 허공을 갈랐고, 놈은 다시 한 번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난 빗나간 총알에 절대 실망하지 않았다. 지금은 놈에게 우리가 사냥감이 아니라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했다. 두려움을 떨쳐내라, 우리는 사냥을 당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움직이지 마!’
잔뜩 억눌린 총성은 유지되고 있던 긴장감과 침묵을 깨 버린다. 일행들은 잔뜩 당황해서 허둥지둥 총을 들었고, 난 그런 일행들을 향해 갈라진 목소리로 고함을 내뱉었다. 어디서 어떤 공격이 올지 모른다. 단체로 패닉상태가 되었다간 아군사격이 나올 수 있었다.
있다, 역시 무언가가 있는 거다. 상황파악을 한 일행들은 내가 총을 발사하자 표정을 잔뜩 굳혔고, 이내 노인의 빠른 지시를 따랐다. 일행들이 일사불란하게 자세를 숙이자 그제야 주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 어디냐. 내 총구에선 옅은 화약 연기가 새어 나왔고, 코끝으로는 긴장감과 총구에서 나온 향기가 맡아졌다. 알싸하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놈은 더는 소리를 숨기지 않았다. 또한, 자신이 화가 났다고 말하는 것처럼 격렬한 소리를 내며 우리 주위를 뱅뱅 돌기 시작했다.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한 보호색과 그간 만났던 변종들을 압도하는 속도. 절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로 누군가 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일행들의 머리에는 절망이라는 찌꺼기가 끼기 시작했다.
흰색, 흰색, 흰색. 아무리 둘러봐도 흰색밖에 보이지 않는다. 흰색의 공포가 당도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지옥 불처럼 내 피부에 들러붙는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해진 도화선은 생존 욕구를 잡아 뜯고 피를 흘리게 했다. 놈이 하얀색이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 머리가 팽팽 돌아가고 뇌가 아닌 본능이 나를 이끈다.
‘총구 내려요. 놈이 나를 노리게……. 움직이지 마요.’
난 그렇게 말하고 일행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행들은 경악과 당황이 묻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고, 도대체 무엇을 하느냐는 듯 반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직 노인만이 일행들에게 윽박지르며 소리쳤다.
‘움직이지 말라고, 이 새끼들아!’
거친 욕설은 일행들을 짓누르고, 살얼음 같은 눈동자가 그들을 굳힌다. 하지만 난 노인이 보내는 그 날카로운 눈동자에서 강철보다 굳건한 신뢰를 읽었다. 기다리고 있다, 네가 무엇을 하든 내가 그대로 받아 주마. 그 눈빛을 읽은 순간 내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난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버렸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남아 있는 반팔만을 입고 그대로 굳건하게 몸을 세운다. 나는 떨리는 손을 뻗어 허벅지에서 대검을 꺼내 그대로 내 팔을 그어 버렸다. 추위로 창백해진 피부는 칼날이 닿자마자 비명을 내질렀으며 팔뚝은 너무나 새빨간 피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철철 흐르는 피는 마치 놈을 유혹하는 먹이처럼 뜨거운 김을 내뱉는다.
일행들이 자세를 숙인 한가운데 서 있는 나. 그것은 마치 먹어달라는 듯 눈앞에서 흔들리는 미끼와 같았다. 난 놈에게 보란 듯이 손을 올려 철철 흐르기 시작하는 새빨간 피를 보여 주었다. 자, 네가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살점과 피다. 그리고 놈은 그 미끼를 충실하게 물었고, 사각사각 눈 사이를 기어오기 시작했다.
소름이 돋는다. 놈이 나를 노리고 있다는 게 모든 감각에서 느껴지기 시작했다. 옆? 앞? 눈을 돌려 놈이 뛰어오는 그 타이밍만을 노린다. 등골이 서늘하고 목이 뻣뻣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알이 빠질 듯이 뻑뻑해진다. 1, 2, 3. 놈은 너무나 치밀하게도 내 등 뒤를 노리고 날아오고 있었다. 난 그대로 몸을 돌려 바닥에 넘어지듯 공격을 피해 냈다.
끼아아아아아악!!!!!!!!
놈이 처음으로 울음소리를 내뱉는다. 고막을 찢을 듯한 그 울음소리는 눈앞에서 먹이를 놓친 육식동물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난 넘어지는 와중에도 그놈과 눈을 피하지 않았다. 분노, 분노, 분노, 증오, 그리고 살육. 난 그 눈에서 모든 것을 읽었고, 내 의도를 실행했다. 피가 철철 흐르는 내 팔이 휘둘러지자 시뻘건 선혈이 놈을 향해 흩뿌려졌다.
하늘에서 내리는 차가운 눈 사이로 뜨거움을 담고 있는 피가 날아간다. 그것은 눈의 지옥에 뿌리는 비수와 같았고, 반격의 시작을 알리는 붉은색 신호탄이었다. 공격을 실패한 놈은 우리 일행들 사이를 넘어 다시 한 번 눈 사이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놈은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넌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이고, 난 수많은 기회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틀렸다는 건 내가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확신이 섰다.
공격을 가까스로 피한 내 몸은 형편없이 바닥에 넘어졌다. 시간은 느리게 흘러가고, 내 눈동자는 오로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노인의 눈과 마주친다. 그리고 우리는 인사 대신 총구를 들어 올리는 안녕을 나누었다. 그 움직임은 신호탄과 같았다.
흰 눈 위에 내 피는 너무나 붉었다. 그리고 그 피는 놈의 몸체를 더럽혔고, 그것은 흰색 도화지에 떨어진 검은색 잉크와 흡사했다. 저 흰 눈 위에서 기어가고 있는 놈의 몸체는 피로 물들어 너무나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피는 색적을 남겼으며 놈은 이제 과녁이 될 차례였다.
모든 총구가 선명하게 보이는 놈에게 향할 때, 노인은 후련한 숨을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드디어 잡았다, 이 개새끼.
그리고 총구도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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