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24화 (124/313)

[124]

‘놀아 줘!’

채연이가 내 다리에 붙어 처량하게 위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놀아달라는 말과는 다르게 아이는 굉장히 슬퍼 보이는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내가 나가지 않고 자기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단순한 어리광, 하지만 나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기에 말없이 채연이를 안아 주었다. 항상 미안했다. 옆에 있어 주지 못하고 놀아 주지 못 하고, 가르쳐 주지 못하는 것이.

‘채연아, 그러면 못써!’

오늘 임무는 위험한 변수가 많았기에 정문으로 향하는 일행들의 분위기는 사뭇 비장했다. 그리고 그 분위기 때문인지 숙소의 분위기도 덩달아 심각해지고 말았다. 저 멀리서 일행들의 도시락을 챙기던 강수련은 깜짝 놀라며 뛰어왔고, 재빨리 채연이를 끌어당겨 내 품에서 아이를 떼어냈다. 난 속이 씁쓸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현실에 채연이를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채연이는 떨어지기 싫은지 나에게 팔을 뻗으며 울먹인다. 난 차마 그 손마저 놓을 수는 없었기에 애써 웃으며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조용히 엮었다. 그리고 매번 그렇듯 아이를 달래 주고 또 달래 주며 오는 길에 맛있는 간식을 사 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채연이는 고개를 도라질 치며 나에게 말했다.

‘아빠만…….’

아빠만 있으면 돼. 그 말이 내 심장을 뜨겁게 담금질했다. 그래, 채연이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생각이 깊은 아이였다. 난 달콤한 거짓말보다는 아이에게 진실 된 약속을 해 주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엮고 약속하며 나는 굳은 결심을 매듭지었다.

이상하게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아마 채연이가 나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 아닌가 싶다.

* * *

에덴은 불과 일주일 사이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뭔가 분위기가 끈적하고 볼 때마다 기분이 껄끄럽던 정문의 분위기는 전투조가 재편된 이후로 꼭 우리 집 정문처럼 친근하게 바뀌어 있었다.

장벽에 서 있는 경비들은 우리를 발견하자 손을 흔들어 주었고, 곧 환하게 웃으며 구조대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그리고 우리가 정문에 도착하자마자 전투조는 출발 전 브리핑을 할 수 있도록 간이천막을 빠르게 준비해 줬다.

대외적으로 에덴을 나가는 인원은 우리가 유일하다. 그렇기에 구조대가 에덴을 나설 시간이 되면 모든 구역은 조용해지고, 오직 우리의 출발을 도와주기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난 그런 과분한 배려를 받으며 구형 난로가 돌아가는 천막 내부로 들어왔다.

뜨거운 훈풍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곳에는 오늘 출발할 모든 인원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오직 나만을 바라보며 모든 신경을 브리핑에 집중하고 있었다. 난 입술을 살며시 핥고 숨을 훅 들이켠다. 이들의 목숨은 이제부터 내가 책임지고 이끌어야 했다. 난 긴장감과 함께 무거운 부담감을 느끼며 이제는 익숙해져 갈 시선과 마주했다.

일행들에게는 어젯밤 미리 통보했었다. 우리는 오늘 오전 9시 출발을 시작으로 쉘터의 합병을 위해 생존자들을 인솔한 뒤 에덴으로 복귀할 것이다. 말이 인솔이지 사실상 구조를 기다리는 생존자들을 이곳까지 데려오는 게 오늘 임무였다. 한 곳은 이미 연락이 두절되었고, 그나마 제일 가능성이 있는 쉘터를 먼저 가 보라는 단체장의 지시가 있었다.

난 전투조가 준비해 준 칠판에 지도를 붙이고 오늘 가야 할 쉘터에 대해 설명을 시작했다. 종말 전 명칭은 시림 고등학교, 그리고 지금은 딱히 정해진 이름이 없었다. 그곳을 다니던 학생들과 선생들, 그리고 주변에서 합류한 생존자들의 집합체이고, 이곳에서는 도보로 1시간 30분 정도가 걸릴 예정이다.

경사가 높고 폐쇄적인 지형에 위치했기에 지금까지 그놈들과 부랑자들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쉘터다. 하지만 최근 변종들의 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빈약한 전투력 때문인지 전멸 위기에 놓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도 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사람들이 살아 있다는 게 단체장의 판단이었다. 모든 설명을 마치자 노인이 손을 들어 질문했다.

‘변종들은 어쩔 생각이냐?’

변종들의 습격을 받았다는 구체적인 진술이 있는 이상 그놈들과의 전투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동 중에, 혹은 도착하고 나서 있을 전투에는 난 망설임 없이 총기를 써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규격 외 존재라고는 하지만 소음기를 달고 있는 총 앞에서는 생각보다 약한 모습을 보여주던 변종들이었다. 내 대답을 들은 노인은 만족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1차 목표는 전원귀환, 그리고 2차 목표가 구조입니다. 그 점 명심하고 절대 무리하지 마세요. 장비 점검 뒤 출발합니다.’

구조 활동이 중요하긴 하지만 나에게 있어 작전보다 중요한 건 내 일행들의 안위였다. 작전 중 사망은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고 외치던 한 여자 간부의 목소리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작전보다 중요한 건 목숨이었다. 그리고 만약 목숨을 걸어야 하는 작전이라면, 그때는 내 목숨부터 먼저 걸어야 한다.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 귀환할 것이다. 나에게 채연이가 기다리고 있듯이, 각자의 일행들을 기다리는 소중한 이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잊지 말고……. 실수 없이, 낙오 없이 오늘 있을 임무를 완벽하게 해낼 것이다. 난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펴본다.

난 털보가 정성껏 관리해 준 소음기를 착용하고, 탄창을 넉넉하게 챙겼다. 소형화시킨 크로스 보우는 등에 둘러메고 총은 두 손으로 꽉 잡는다. 곧이어 간이 천막을 나서자 20명이 넘는 인원이 내 뒤를 따라 정문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우리가 천막을 열고 나오자 장벽에 있던 전투조는 문을 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각자가 들고 있는 무전기가 시끄럽게 울려왔다. 난 모든 일행들과 똑같이 맞춘 검은색 모자를 꾹 눌러쓰고 주머니에 넣어 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팀 채연, 출발합니다.’

팀 채연 출발합니다! 장벽에 있는 전투조가 복창했고, 경비 탑 위에 있는 신호수가 미친 듯이 팔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러자 정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고, 일행들은 미리 준비해 둔 포지션을 잡았다. 그리고 그 앞에 동떨어져 서 있는 나. 선두, 그리고 배를 이끄는 등대.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내 뒤에는 모든 게 있었다.

나는 발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 * *

변종들이 부랑자들을 덮쳤던 구역은 방사능 지역처럼 빼곡하게 기록해 두었다. 일부러 그 방향을 피해 우회하기는 했지만, 변종들의 위협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난 좁은 골목이 아닌 조금 위험하더라도 주변이 완전히 보이는 개활지나 넓은 도로를 위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렇게 우리는 마치 한 마리 뱀처럼 능숙하게 장애물을 넘고 도로를 달렸다.

그간 체력훈련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지 지쳐 보이는 일행들은 없었다. 심지어 큰 짐을 들고 있는 박다혜조차 무리 없이 우리 뒤를 따라왔고, 박대박 무리는 말할 것도 없는 철인들이었다.

완전히 숙련된 베테랑들. 시림 고등학교로 향하는 이동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으며, 목적지는 벌써부터 보이기 시작했다. 난 우리 앞을 막고 있는 그놈 대가리에 볼트를 박아 넣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이내 이동시간을 20분이나 단축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목적지와 300m 남은 지금, 나는 뒤를 향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이동 포지션이 순식간에 해체되고, 다들 자세를 낮추며 사방을 경계한다. 그리고 그 순간 대열 뒤에서 일행들을 서포터 하던 노인이 이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와 차 뒤를 향해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는 거친 숨과 함께 긴장이 섞인 침을 삼키며 말했다.

‘시발, 이것들이 간 보나…….’

이곳까지 이동하면서 발견된 변종의 숫자는 두 마리다. 그놈들과는 다르게 능동적인 움직임을 취하는 변종들은 생각보다 발견하기 쉬웠는데, 우리를 노리는 건지 아니면 살펴만 보는 건지 모를 만큼 이상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섣불리 공격하지 않는 모습. 혹시 우리가 총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것일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지만 난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결과적으로 관측만 되었을 뿐 직접적인 공격은 없었다. 이 수상한 움직임에도 변종들과 싸운 기억이 있는 일행들의 동요는 생각보다 적었고, 차라리 먼저 치자는 사람까지 나올 만큼 예열된 분위기가 유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별다른 교전 없이 시림 고등학교 근처까지 도착한 우리는 잠시 숨을 고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난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아직도 구조신호가 옵니까?’

난 사무실에서 무전기를 잡고 있을 할머니와 최성수를 조용히 호출했다. 그러자 곧이어 잡음과 함께 힘 있는 앳된 최성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전 보내는 사람이 아까부터 횡설수설해요. 그냥 조금 겁에 질린 것 같은데, 그래도 정확한 위치를 받아 적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난 알겠다는 소리와 함께 정확한 위치를 받았고, 무전기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멀리서 보이는 시림 고등학교는 울창한 가로수로 담이 전부 가려져 있었으며, 그 뒤로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는 숲 하나가 존재했다. 확실히 완벽한 은신처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겉으로 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존자들은 전부 안쪽으로 대피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4층에 존재하는 교무실이라고 전해 들었다. 하지만 저곳 지형을 모르는 이상 직접 들어가 봐야 그들의 위치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노인을 향해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접근해 봅시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를 대신해 일행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말없이 사방을 경계하던 일행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마지막으로 장비를 점검하며, 내 뒤를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불자 학교 담을 가리고 있는 가로수들이 사방으로 휘날리기 시작했다. 하늘도 흐린 게, 무언가 분위가 좋지 않았다.

긴장감에 목이 바싹바싹 마른다. 위험한 조짐이 있다면 바로 후퇴하면 되겠지만,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상태. 그냥 머릿속에 있는 감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보낼 뿐 직접적인 위험은 보이지 않았다. 200m, 100m. 그리고 우리는 학교 정문이 보이는 담까지 접근했고, 이내 굳게 닫힌 정문 앞까지 도착했다.

하지만 정문은 쇠사슬과 바리케이드로 굳게 닫혀 있었고, 담을 넘자니 이미 설치된 철조망과 날카로운 못들이 우리의 앞길을 막았다. 미리 열어 두라는 지시를 못 들은 걸까? 하긴 교무실에 갇혀 있는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극히 적었을 것이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이상하게 피부가 민감하고, 머리가 아픈 게 꼭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시간이 촉박함을 직감한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쩔 수 없이 학교와 붙어 있는 숲을 가로질러 학교 내부로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별다른 수가 없는 일행들은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는 걸음을 돌려 낮은 담이 있는 사무소들을 지나 나무가 듬성듬성 존재하는 숲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숲 초입에 들어서 저 멀리 시림 고등학교의 건물이 보일 때쯤 하늘이 흐려지며 기분 나쁜 진눈깨비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난 모자에 떨어진 눈을 털어 내며 총을 들어 올렸다.

분명 거리는 가까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걸음이 느려지고, 주변을 경계하는 시선이 더욱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변종들이 가할 공격을 대비해 일행들의 간격을 좁혔고, 일렬로 이동하던 대열도 둥글게 뭉쳐 서로가 서로를 볼 수 있게 해 두었다. 다행히 내 판단은 적절하게 들어맞았고, 일행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이 분다. 나무가 빽빽하지 않은 숲은 마치 산책로처럼 길이 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우리는 얼어붙은 눈을 사각사각 밟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학교로 접근했다. 바람이 부는 소리와 함께 숲속에 있는 나무들이 정신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고, 그것은 꼭 귀신이 춤을 추는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침묵과 조용함이 주는 스트레스는 내 머리를 자극하고 침을 연신 삼키게 했다. 주변에는 일행들이 눈을 밟는 사각거림과 거친 숨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이질적인 소리가 내 귀를 스쳐 지나갔다. 사각사각, 우리 일행들 중 빠르게 뛰는 사람이 있었나?

그리고 소리와 함께 내 뒤에서 용팔이가 어!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찍었다.

모든 일행들이 총기를 들고 자세를 낮춘다. 그리고 용팔이가 넘어진 방향을 향해 총구를 들어 올렸지만, 그곳에는 차가운 바람이 지나가는 빈 공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기겁하며 넘어진 용팔이를 노인이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왜 그래! 뭐라도 본 거야?’

용팔이는 그간 겪었던 경험 덕인지 생각보다 침착한 모습을 보여주며 금세 제정신을 찾았다. 그리고 긴가민가한 얼굴로 한참을 서 있다가 이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무것도 없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 아무것도 없자 당황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적인다.

‘뭔가 휙 지나갔는데…….’

하지만 용팔이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던 박다혜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못 봤어요. 그냥 눈밖에 없는데…….’

용팔이는 봤는데, 박다혜는 못 봤다? 보통 상황이면 긴장감과 두려움 때문에 용팔이가 헛것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은 절대 아니었다. 단 한 가지 흔적이라도 그냥 넘길 수 없는 지금, 난 천천히 용팔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눈, 나무, 눈, 나무. 일행들이 아무것도 보지 못할 만했다. 주변은 반복되는 영상처럼 같은 풍경과 같은 지형밖에 보이지 않았고, 그 악조건은 내 시야를 흐리게 만들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싸늘한 바람 소리가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과해 내 앞으로 불어온다.

그 순간 그 바람 소리를 타고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 하나. 무언가를 비비고 헤치는 소리는 바람 소리에 절묘하게 묻혀 환청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흐릿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경종을 울리는 신경과 소름이 돋는 피부는 우리가 당장 위험에 직면했다는 것을 알려 준다.

본능적으로 시선이 나도 모르게 한쪽으로 향했다.

내 시야가 닿은 그곳에는 눈처럼 하얀 피부를 가진 무언가가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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