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23화 (123/313)

[123]

내부적인 혼란이 대충 수습이 되었다면, 이제는 외부적인 문제가 남았다. 사실, 이틀 동안 워낙 바쁘게 뛰어다녔기에 전후처리에 대해선 당장은 전해 들은 이야기가 없었다. 하지만 꼼꼼한 단체장은 외부문제도 잊지 않았는지 모든 문제를 깔끔하게 계획하고 그 뒤의 대책도 벌써 실행되고 있다고 했다. 제대로 된 지도자가 이제야 지휘봉을 잡으니 대외적인 혼란은 점점 수습되고 있었다.

에덴은 가끔 감탄이 나올 만큼 계획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어진 장소다. 높은 건물들은 성벽처럼 길을 막았고, 골목은 좁디좁아 시멘트로 만들어진 방벽을 넘지 못하면 절대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리고 굳건한 정문은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만들었는지 꼼꼼한 철골과 시멘트들로 지어져 있었다. 말 그대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안전지대, 그것이 에덴이었다.

간혹 이런 시설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가 궁금해서 은테 안경에게 살짝 물어볼 때가 있었다. 그러면 안경은 내 물음을 들을 때마다 안경을 쓱 올리며 ‘단체장님은 다 예견하고 계셨으니까요.’ 같은 사이비 발언을 하고는 했다.

평소에는 종교인 같지 않은 사람인데, 이럴 때만큼은 내 주위에 봐 왔던 절실한 신도들을 닮아 있었다. 난 은테 안경과 조심히 거리를 벌리고 채연이에게 학교에서 이상한 것을 가리키면 당장 말하라고 두 번, 세 번, 당부해 뒀다. 하지만 채연이는 뭐가 뭔지 모른다는 듯 환하게 웃을 뿐이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채연이를 따라 웃고 있었다.

전투조는 재편되었다. 워낙 정신적 후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에 인원은 조금 줄어들었지만, 주민들 중 지원자를 받아 빠르게 인력을 늘리고 있었다. 조장으로는 단체장이 신임하는 어떤 신도가 지정되었는데, 소문으로는 퇴역한 군인 출신이라는 소리가 있다. 물론 아직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지금, 우리도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부랑자 전담팀 해산, 그리고 새로 창립된 팀의 이름은 구조대였다. 한 두어 시간을 일행들과 조 이름에 대해서 고민해 봤지만 구조대만큼 이펙트가 있는 이름이 없었다. 구해 올 생존자들에게 말해 줄 이름으로도 적합했고, 일행들이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을 충실히 대변해 줄 단어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사무실로 전부 모여 재정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우리와 합류를 원했던 박대박과 그의 무리들이 우리 사무실을 찾아왔다. 비전투 인원은 다른 팀으로 들어갔고, 오직 박대박을 포함한 전투 인원만이 팀에 합류하기로 결정이 났다. 워낙 넓게 만들어진 장소였기에 박대박을 포함한 10명을 받기에는 무리가 없었고, 기존 팀과 새롭게 들어 온 박대박 무리들은 살갑게 인사를 나누며 산뜻한 출발을 시작했다.

‘왜 저였습니까?’

변종 좀비까지 무리 없이 사냥하는 베테랑들이다. 어딜 가도 대접받을 것이고, 아니면 독자적인 팀을 꾸려 영향력을 행사해도 무리가 없었다. 하지만 박대박은 그날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심했는지 오직 우리 팀을 바라보며 이곳까지 따라왔다. 결코, 긴 인연은 아니었기에 난 고마움과 동시에 의문이 들어 그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박대박은 이렇게 대답했다.

‘반했거든.’

김혜정은 새된 비명을 지르고, 용팔이는 물을 먹다 말고 딸꾹질을 한다. 노인은 역정을 내며 강수련을 찾았고, 나는 이상하게도 욕을 먹어야 했다. 하지만 박대박은 호탕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오해하지 말라며 자신의 가족사진을 보여 주었고, 사진에는 환하게 웃고 있는 박대박과 그의 가족들이 담겨 있었다.

박대박은 나에게 사람으로서 반했다고 말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본 적이 없었다고, 멍청하고 미련하며 어떤 바보들이 이런 짓을 벌이냐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리고 어차피 쉘터가 없어지는 이상 이런 바보들과 같이 다니고 싶었다고 내 가슴팍을 치며 말했다.

난 뒷머리를 긁적이며 노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나름 고심해서 짠 작전들이 남들 눈에는 바보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우리가 정말 그랬어요? 라고 물었고, 노인은 나를 외면하며 모르는 척을 했다.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끝이 났다. 박대박 무리들은, 아니 박대박과 다른 팀원들은 이미 구면이었고, 워낙 격 없는 사람들이었기에 빠르게 팀 속에 녹아들었다. 곧이어 나는 박대박에게 팀 안에 조를 2개로 나누자는 제안을 했다.

나는 그렇게 능력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간 인원을 늘리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지원자가 없었다는 것도 한몫했지만, 그다음 문제는 바로 내 지휘능력이었다. 그간 일행들을 이끌고 다녀 본 경험상 나는 지휘관 성향이 아닌 걸 알 수 있었다. 좋게 말해 봐야 야전사령관? 난 지금 있는 인원들을 이끄는 것에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박대박은 달랐다. 그는 무려 30명이 넘는 인원을 이끌고, 괴물들이 득실거리던 도시를 살아가던 능력 있는 지휘관이었다. 물론 1차 명령권은 나에게 있지만, 손발이 맞고 팀워크가 뛰어난 박대박 무리에게 행동권을 줘서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박대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고, 꼭 지휘 체계를 확고하게 하겠다는 듯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 대장.’

그 대답을 끝으로 오늘 처음 구조대가 만들어졌다. 임무는 당장 내일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털보는 바쁘게 움직이며 새롭게 들어온 팀원을 위해 장비를 만들기 시작했고, 일행들과 박대박 무리는 손발을 맞추기 위해 한동안 책상에 앉아 시끄럽게 회의를 시작했다.

사무실이 오랜만에 시끌벅적해졌다. 총원 20명, 처음 탐색조 때부터 시작한 인원과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대우도 달라지고, 장비도 달라졌다. 그리고 그만큼 내 어깨 위에 들어앉은 부담감 또한 커졌다. 하지만 난 그 부담감만큼이나 속이 든든해지는 걸 느꼈다.

* * *

날이 어두워졌고, 나는 단체장의 방을 방문했다. 채연이가 또 그 아저씨 만나러 가냐고 방방 뛰기에 어쩔 수 없이 해가 지고 나서야 올 수 있었다. 곧이어 나는 당장 내일 있을 임무의 브리핑을 듣기 위해 단체장과 마주 앉았다. 단체장은 나에게 차를 대접하며 간단한 안부를 물었고, 가장 중요한 사항을 처음부터 꺼내 들었다.

‘역시나 변종들이 문제입니다.’

단체장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고, 은테 안경은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덴은 부랑자라는 적들을 물리친 대신 변종이라는 또 다른 위협과 마주하게 되었다. 물론 단체장의 빠른 대처로 방어시설이 보충되고 경비인력도 늘어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소의 방어였고 행동의 제약이 생긴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의도치 않게 많은 변종들이 풀려났다. 그 수를 대략적으로 잡아보면 20마리. 통계적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숫자였지만, 그놈들이 규격 외의 능력을 가진 변수라는 게 문제였다. 당장 한 마리만 나타나도 비상이 걸릴 판인데 20마리라니, 에덴은 그렇다 쳐도 유일하게 외부활동을 하는 우리 팀이 문제였다. 단체장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말했다.

‘혹시 전투조가 도움이 되겠습니까?’

변종들과의 싸움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다. 인간의 영역을 지켜야 하는 우리와 우리의 살점을 원하는 변종.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마음속으로 이곳이 언제 사상자가 생길지 모르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겼다. 단체장은 그것을 알기에 지금 막 재편된 전투조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부정적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사상자만 생길 뿐입니다.’

이것은 초식동물을 잡느냐 육식동물을 사냥하느냐에 대한 차이였다. 그만큼 격이 달랐고, 싸워야 하는 난이도 자체가 어려워진다. 나도 그렇고, 우리 일행들도 겪었듯이 강력한 변종을 처음 마주하게 된다면 오금이 저리고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다. 나보다 육체적 상위존재에게 사냥당한다는 공포는, 이제 막 훈련을 시작한 전투조가 감당할 게 아니었다.

결국, 우리뿐이었다. 외부를 돌아다닐 수 있는 유일한 팀인 구조대. 우리가 이 인원을 가지고 변종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것일까? 난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어떤 작전과 어떤 방법으로 그놈들을 사냥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내 고충을 아는 단체장은 씁쓸하게 웃으며 빨리 전투 조를 훈련시키겠다는 말을 해 줬고, 이내 다른 화두를 꺼냈다.

‘이번에 박대박 씨가 에덴으로 합류하신 이유 아시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강수련이 챙겨온 점심을 먹을 때였다. 박대박은 워낙 수다를 떨기 좋아하는 사람들이었기에 우리가 궁금했던 모든 점을 쉴 새 없이 말해 주었고, 그가 운영하던 쉘터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총원은 30명이었지만, 원래는 60명이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부랑자들과의 전투와 지속적인 그놈들의 공격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가기 시작했고, 결국 원래 있던 은신처를 벗어나 한동안 떠돌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결국 남은 사람들은 30명,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그는 절망했다.

식량은 떨어져 가고 너무나 매서운 추위에 모두가 지쳐갈 때쯤, 절묘하게 찾아온 단체장의 무전과 운 좋게 성립된 만남은 박대박에게 찾아온 유일한 돌파구였다. 변종들이 풀려나는 것을 본 박대박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합류해야 했고, 에덴은 베테랑 생존자들을 안 받을 이유가 없는 상황. 서로가 윈윈인 상태에서 결국 좋게 합병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는지, 단체장이 고민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다른 쉘터들도 동시다발적으로 구조신호와 합류 의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간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에덴과 교류만을 하며 독자적인 쉘터들을 구축한 사람들이 많았다. 듣기로는 대략 3곳이 더 있다고 하는데, 에덴과 비교하면 중, 소형으로 나뉠 만큼 작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그간의 침묵을 깨고 어젯밤 격한 구조신호를 보내왔다고 한다. 그들이 구조신호를 보내온 이유? 그래, 당연히 변종들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전멸한 쉘터가 있을지도 몰랐다. 난 어두워 보이는 단체장의 얼굴을 보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고,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단체장과 그 옆에 서 있는 은테 안경을 보며 말했다.

‘아직 연락이 되는 쉘터가 있습니까?’

당장 내일 있을 임무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변종들과는 부딪혀야 하는 상황이었고, 방어시설이 취약한 쉘터들은 하루가 급한 상황이었다. 내 대답에 얼굴이 밝아진 단체장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고, 은테 안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책상 한쪽을 향해 바쁘게 뛰어가 그간 모아온 자료들을 나에게 보여 주었다.

‘한 곳은 어젯밤에 연락이 끊겼고, 다른 두 곳은 오늘 저녁때까지 무전이 유지되었습니다. 상황이 매우 안 좋다고 하는데, 무전 신호도 갈수록 약해지는 게 문제입니다.’

난 그 자료들을 보며 조용히 침을 삼켰다. 내가 여태 봐 왔던 변종의 종류는 3개. 보편적으로 다 그런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낮에 활동을 할 수 있는 변종들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위험한 임무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난 그 생각보다 먼저 안전하게 그들을 구출할 작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겠습니까?’

단체장이 걱정스럽게 물었고, 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괜찮지 않습니다. 변수가 많고 상황도 좋지 않아요. 아마 총을 쏠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털보가 밤을 새워가며 열심히 소음기를 만들고 있었다. 아마 내일 아침쯤이면 총을 쏠 수 있는 인원이 모두 가지게 될 것이다. 변종들이 강하다고는 하나, 총 앞에서는 그 완력과 스피드도 무용지물이다. 물론 소음기를 착용했음에도 발생하는 소리가 문제였지만, 그것을 고려하기에는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아마 속도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내가 하겠다는 몸짓을 취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단체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에게 고개를 숙였고, 은테 안경 또한 안경을 조심히 벗으며 나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다. 난 그들을 향해 마주 보며 고개를 숙이고 서로의 안전을 기원했다.

* * *

밖을 나와 아무도 없는 길가를 걸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골목은 어둡고 추웠다. 하지만 저 하늘에 널린 별들 때문에 나는 걸음을 서두를 수가 없었다. 인간이 사라진 이 도시는 빛들의 침묵을 맞이했지만, 그와 교환하듯 너무나 맑은 하늘과 별들을 가져다주었다. 언제 한 번 최전방에서 본 기억이 있는 이 하늘을 나는 두 눈 가득 담았다.

별들이 내 위로 쏟아지고 은하수는 강을 이룬다.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하늘에 난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저 별들의 강에서 채연이가 고래를 타고 헤엄치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는 웃고 있었고, 그 뒤로는 반짝이는 유성이 따라간다. 내가 손을 흔들자 별들이 빛의 숨을 내뱉었다.

난 종종걸음으로 뛰어 따뜻한 숙소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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