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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118화 (118/313)

[118]

내가 크로스 보우를 내리자마자 어깨를 잡아끄는 노인의 손이 느껴졌다. 난 찰나의 여운을 가슴속에 꼭꼭 숨겨놓으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불타고 있는 지옥을 뒤로하고 그대로 앞으로 달려가 용팔이 형제가 끙끙거리며 열고 있는 문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완전히 부서지고, 문이 힘없이 열렸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나갔으며, 이내 섬광탄처럼 시야를 흐리게 만드는 햇빛 때문에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가늘게 뜬 눈 사이로 어지러운 마트 밖이 보이기 시작했다.

전쟁은 막바지였다. 부랑자들과 에덴의 전투조가 벌인 싸움은 그놈들의 중간 난입으로 개판이 되었고, 이제는 전투조의 이른 후퇴로 상황은 조기 종결되고 있었다. 양쪽 다 피해가 미미한 상황, 그리고 당연해 보이는 부랑자들의 판정승. 예상한 대로 김윤식은 끝까지 싸울 생각이 없었고,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의 비겁함과 겁 많은 성격에 화가 나면서도 일찍이 에덴의 사람들을 후퇴하게 해 준 명령에는 감사함을 보냈다. 의도치 않게 벌어진 상황, 그리고 김윤식의 병신 같은 행동. 이 둘이 톱니바퀴처럼 만나 판세를 역으로 뒤집을 수 있는 작전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작은 내 날갯짓을 시작으로 스노우볼이 폭풍처럼 커지기 시작할 것이다.

‘부랑자 사이를 가로지를 겁니다.’

난 앞뒤로 적이 생겨 막막함을 느끼는 일행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김혜정은 겁먹은 얼굴로 침을 삼켰고, 용팔이는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노인은 무엇을 그리 생각하는지 불 사이를 뛰어오는 변종들을 한 번 바라보다 그냥 말없이 대검을 착검했다. 그리고 노인은 달려나갈 자세를 취하며 나 대신 일행들에게 말했다.

‘망설이지 마. 살길이 있겠지.’

맞다, 누구에겐 이것이 죽음을 의미하는 사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난 그 사선 사이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 하나를 발견했다. 난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길을 봐야 한다. 그것이 일행들을 살리고, 스스로가 살 수 있는 길이라면, 난 무조건……. 그래 무조건.

난 선두다. 항상 앞에 서서 일행들의 바람을 막는다. 그리고 뒤에서 불어오는 순풍을 타고 망설임 없이 나아가야 했다. 난 대검을 착검하며 그대로 마트 현관을 뛰쳐나갔고, 일행들이 내 뒤를 따라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내 심장은 미친 듯이 튀어 오른다.

한참 싸움을 끝내 흥분으로 가득 차 있는 부랑자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우리를 보며 당황했다. 하지만 우리가 빠져나온 곳이 그들의 본거지인 대형마트고, 그 대형마트에서는 검은색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으니 멍청이가 아닌 이상 우리가 자신들의 적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곧바로 놈들은 험악하게 인상을 찡그리며 우리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 찡그린 인상이 경악으로 물들기까지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뛰쳐나오고 정확히 10초 뒤에 지옥에서 빠져나온 악마들이 비명 같은 울음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으니까.

마트 정문은 너무나 쉽게 박살 났으며, 마트 외벽을 차지하고 있던 창문에서는 거미 떼 같은 변종 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떠 있는 해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 변종들도 다수 있어 보였지만, 하나만 있어도 순식간에 무리를 죽여 버리는 살인 기계들에게 그 정도 리스크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난 침을 삼키며 빨리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옆으로!!’

지상 주차장에 들어서고 부랑자들과의 거리가 50m쯤 남았을 때 난 재빨리 일행들에게 외치며 몸을 틀었다. 그러자 일행들은 나와 한 몸이 된 것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내 뒤를 따라붙었다. 30초도 지나지 않아, 대형마트를 기어 나온 변종들이 부랑자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지역을 빠르게 벗어났다.

부랑자들을 미끼로 사용하자는 급조된 작전이 정확히 들어맞은 것이다. 갓 변종으로 태어나 인간의 살점을 갈구하는 그놈들은 총을 쏴대는 우리보단 저 앞에 보이는 손쉬운 먹잇감을 노리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살이 뜯기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사람이 내지르는 고통의 비명이 들려왔고, 밀도 높은 대형을 이루고 있던 부랑자들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총을 들고 있는 우리들도 겨우겨우 상대하는 변종들이다. 아무리 부랑자의 숫자가 많다지만 괴물 같은 신체 능력을 갖추고 있는 그놈들에겐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우리는 자동차 옆으로 몸을 천천히 숨기며 사냥이 시작되는 지옥도를 빙 둘러 뛰어가기 시작했다.

‘한 놈 따라붙었다!’

일행 맨 뒤쪽에서 후방을 담당하던 노인이 다급하게 외쳤다. 다수의 변종들이 부랑자들을 노리긴 했지만, 우리에게 눈을 떼지 않은 변종도 아직 존재했다. 뒤를 돌아보자 80m쯤에 처음 보는 남성형 변종이 이쪽을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오고 있었다.

남성형 변종의 팔다리는 의외로 멀쩡했고, 얼굴도 회색 피부를 제외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다만, 길게 내밀고 있는 혀는 절대 정상이 아니었다. 마치 목을 매고 죽은 사람처럼 혀는 뿌리 끝까지 뽑혀 있었으며, 그사이로는 검은색 액체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남은 탄창 있습니까?!’

내가 황급히 후방으로 빠지며 다급하게 외쳤지만, 일행들은 전부 창백한 얼굴을 흔들었다. 아마 대형마트를 빠져나올 때 마지막 탄창과 볼트까지 전부 소비한 모양이었다. 난 입술을 꽉 깨물며 점점 좁혀오는 저 변종 놈을 상대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총알도 없고 볼트도 전부 떨어졌다. 그럼 근접전을 해 봐야 할까? 아니, 저 멀리서 학살을 당하고 있는 부랑자들을 보고 있자니 저놈과 맨몸으로 싸울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렇게 도망만 다니다가는 무조건 잡힌다. 방법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놈이 간격이 점점 좁혀오는 그 순간 앞에서 뛰고 있는 용팔이가 다급히 나를 불렀다. 용팔이의 손에는 자신이 챙겨 온 무전기가 잡혀 있었는데 그곳에선 누군지 모를 음성이 잡음과 함께 끊임없이 울려왔다.

용팔이는 숨을 거칠게 내뱉으며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려 했지만, 숨이 넘어가기 직전이라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일단 난 손을 뻗어 용팔이의 무전기를 낚아챘다.

불어오는 찬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고, 무전기에서는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직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는, 휙 휙 바뀌는 시야와 더불어 내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난 무전기를 들어 귀를 기울였다.

[젊은 친구, 지금 43길 지나쳤나?]

처음 듣는 목소리다. 우리 무전기 채널은 어떻게 안 거지? 그리고 43길이라고?

난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주변에 있는 표지판을 찾기 시작했고, 가로수 옆으로 보이는 표지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로 43길. 남자의 말대로 한 블록만 지나치면 43길을 통과하게 된다. 난 비처럼 내리는 땀을 훔쳐내며 제대로 대답하기 위해 숨을 거칠게 내쉬었지만, 완전히 지쳐 버린 폐는 그 작은 틈조차 내주지 않았다.

후욱, 후욱-. 입에선 끊임없이 입김이 솟아 나왔고, 대답을 듣지 못한 상대 쪽에서는 끌끌 웃고 있는 남성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43길 지나치면 바로 갈림길이 보일 거야. 거기서 왼쪽으로 돌아.]

별다른 설명이 없는 완벽한 통보였다. 당신이 도대체 누군데?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상대에게 하는 말보다 급한 것은 끊임없이 내뱉고 삼키는 산소 한 줌이었다. 난 내 몸이 끊임없이 갈구하는 숨 때문에 결국 무전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놈과의 거리는 50m. 아무리 빨리 달려 봐도 가공할 속도로 따라오는 저놈에게 붙잡히고 말 것이다. 일행들도 이제 한계가 오기 시작했는지 속도는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고, 얼굴은 창백해서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난 거친 호흡을 내쉬며 이를 악물었다.

돌파구가 없다. 이제껏 운 좋게 위기를 넘긴 능력에도 한계가 오고 만 것이다. 난 내 한계를 빠르게 인정하고 최대한 일행들을 살릴 방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뇌에 산소가 부족해서 오는 무의식. 나는 마치 물속에 빠진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몸은 어느새 43길을 빠져나와 왼쪽 갈림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무의식에서 나온 결정. 난 내 본능과 몸이 이끄는 방향으로 한없이 뜀박질을 시작했다. 그 남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한 선택이 무슨 결과를 만들지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내 강한 생존 욕구와 오늘을 무사히 넘겼으면 하는 바람이 내 몸을 이끌 뿐이었다.

갈림길을 가로지르자 저 멀리, 길 한가운데를 틀어막고 있는 촘촘한 바리케이드가 보였다. 가로수를 잘라 연결하고, 그 위에 철조망을 입힌 바리케이드는 사람은 물론이고 우리 뒤를 따라오는 저 변종조차 넘지 못할 만큼 견고해 보였다.

그 순간 내 위로 보이는 높은 건물에서 어떤 남자가 내뱉는 고함이 들려왔다.

‘온다아아!!!!!!’

마치 우주 공간을 뛰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시야가 좁아지고, 어느새 길옆에 존재하는 건물들이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직 내가 뛰어가야 할 길만이 보였고, 내 귀에는 일행들이 내뱉는 숨소리와 거친 심장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정면을 바라보자 바리케이드 옆으로 우리를 향해 손을 휘저으며 손짓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리치고 있었다. 뭐라고 하는 거지? 일단 입 모양을 보자. 아, 그들은 우리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외치고 있었다. 난 마치 배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물처럼 그곳을 향해 방향을 틀었고, 일행들의 숨소리와 발걸음을 이끌었다. 난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곳이 우리의 종착점이라는 걸.

바리케이드가 우리를 위해 열렸다. 100m도 되지 않는 거리를 뛰었을 뿐인데, 그 짧은 순간이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난 바리케이드를 통과하고 재빨리 뒤로 돌아서 안으로 들어오는 일행들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곧이어 모든 일행들이 무사히 통과했음을 깨달은 순간 마지막 숨을 훅 내뱉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내 뒤로는 무전기에서 들었던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듣고 온 찌꺼기들까지 싹 다 정리해.’

그 명령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무전기가 잡음을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리케이드 너머로 뛰어오던 변종은 갑자기 많아진 사람들 때문에 흥분하기 시작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꼬았고, 이내 이쪽으로 향해 미친 듯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건물 위에서 날아온 화염병이 녀석의 발아래로 떨어져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만들어 냈다.

끼긱! 끽!!

놈은 마치 불 속에 지져지는 개구리처럼 온몸을 꼬며, 그 화염에서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놈이 이곳으로 들어오길 기다렸던 사람들은 재빨리 바리케이드를 끌며 놈이 도망칠 후방을 막았고, 높은 건물들 위에서는 불이 점화된 화염병들이 끊임없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사냥을 당하는 놈은 발광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준비된 사람들은 무기를 들고 능숙하게 놈의 접근을 막았으며 마치 매머드를 사냥하듯 꾸준한 상처를 내게 했다. 비록 치명적인 공격수단은 없었지만, 사방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는 공격 때문인지 놈은 제대로 힘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내 옆에서 거칠게 숨을 내뱉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능숙해. 그것도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야.’

맞다, 정작 도움을 받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었지만 난 이들이 누구인지 아직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펼치는 변종 사냥은 우리만큼, 아니 어쩌면 우리보다 더 능숙하고 체계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한쪽에서 명령을 내리던 중년 남성이 선글라스를 벗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선글라스를 보고 있자니 꽁지 빠지게 도망간 김윤식이 생각났다. 하지만 그 병신이 겉멋으로 쓰고 다니는 선글라스와는 달리, 이 사람이 쓰고 있는 선글라스는 노련한 베테랑의 이미지를 풍기게 했다. 그는 선글라스를 벗고 조용히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그 사람이 하도 부탁을 해서 말이야, 우리 초면이지?’

그 사람? 그 사람이 누구지? 중년 남성은 거친 이미지와는 다르게 친근하게 다가와 주저앉아 있는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난 그의 정체를 알기 전까지 이 손을 함부로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연신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을 경계하자 중년 남성은 멋쩍게 볼을 긁으며 말했다.

‘그……. 무전으로 다 말했는데? 못 들었어?’

무전? 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며 용팔이를 급히 불렀다. 그러자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센 토악질을 하고 있던 용팔이가 퀭한 얼굴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 단체장님이 아는 분이라고 하셔서…….’

내가 허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 그걸 지금 말해…….’

그러자 용팔이가 억울한 듯 소리를 빼액 질렀다.

‘아, 형님도 숨차서 대답 못 했잖아요!’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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