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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살아있다-117화 (117/313)

[117]

최태식이 의도한 타이밍은 무리들 한가운데 던져진 무형의 폭탄과 같았다. 시간을 계산하기라도 한 듯 사람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내가 그토록 의심하던 이질감의 정체를 드러냈다. 이 사람들, 이미 피를 주입 당했다. 우리는 발뺌 틈도 없이 최태식이 만든 함정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검은색 피를 주입 당한 아이는 다른 놈들과는 달리 변형이 빨랐다. 아이는 온몸을 꺾으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고, 깨끗한 하얀색 원피스는 아이가 각혈한 피로 물들었다. 입에서는 인간이 낼 수 없는 음성이 튀어나왔으며, 기형적으로 꺾인 목과 시선은 오로지 나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그 회색 눈동자와 마주칠 때쯤 나는 이미 대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린 일행이 있나? 난 그 짧은 순간에 사방을 둘러보며 흩어져 있는 일행을 찾았다. 노인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빠져 있었고, 다른 일행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일행들은 내가 외친 고함과 함께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식은땀이 등을 축축하게 적신다. 얼떨결에 뽑아 든 대검은 너무나 알량하게 보일 뿐이다. 그 순간 발작을 시작한 사람들 중 변이가 빠른 변종들이 고개를 기형적으로 돌려 유일하게 숨이란 걸 쉬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변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변태를 실패했는지 바닥에 꿈틀거리며 움직임을 멈추었고, 중간중간 내가 도망갈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임을 포착한 나는 그놈들의 눈치를 보다가 이내 옆에 있는 한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익숙한 모습으로 변형 중이었다.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눈알이 바닥에 뚝 떨어지는 모습을 본 나는 이 절망스러운 순간을 가슴 한구석에 구겨 넣고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리고 그 여자가 아히이 라는 울부짖음을 내뱉기 전에 번쩍 뜨이는 눈과 함께 대검을 앞으로 내질러 관자놀이에 쑤셔 넣었다.

‘끼에에에엑!!!’

그 비명은 기폭제였다. 놈은 내 공격과 함께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고 이내 바닥에 쓰러져 힘없이 즉사했다. 대검 손잡이를 놓은 나는 재빨리 총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힘껏 노리쇠를 당겼다.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일행들을 향해 재빨리 지시를 내리며 이를 악물었다.

‘총!!’

소음기가 달려 있다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리스크 때문에 그동안 함부로 사용하지 못했던 총이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우리를 위기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무기였다. 난 내 옆으로 달려드는 변종을 향해 총을 발사하고 미친 듯이 일행들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0.4초의 간격으로 내 뒤에서는 변종들이 날아왔으며 나아가려는 방향에선 놈들이 내뻗는 손이 천천히 시야를 수놓았다. 아,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어깨를 낚아채며 달려온 것은 언제나 그렇듯 노인이었다. 노인은 내 어깨를 낚아채자마자 날아오는 변종들에 총알을 긁어 넣었다. 조정간을 연사로 바꿔놨는지 노인의 총구는 정신없이 총알을 내뿜기 시작했다.

난 그런 노인에게 질질 끌려오면서 변종의 아우라 앞에 굳어 있는 일행들에게 소리를 질렀다.

‘빨리!’

그동안 내 지시와 목소리를 수없이 들은 일행들이다. 그 숙달된 본능은 오금이 뻣뻣하게 굳는 순간에도 발휘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용팔이 형제와 두식이가 무기를 꺼내 들었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강 형사와 김혜정이 이를 악물고 총을 꺼내 들었다.

따닥 딱 딱! 어두운 실내를 총구에서 나오는 빛이 수놓기 시작했다. 집중된 포화 앞에 미친 듯이 달려오는 변종들이 주춤거렸지만, 워낙 빠른 속도라 머리를 맞추는 치명적인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나는 총알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변종들을 확인하며 일행들을 황급히 무빙워크 쪽으로 이끌었다.

거의 끝이라고 생각한 전투였다. 체력은 급격히 내려간 상태였고 정신적으로도 많은 타격을 입었다. 한없이 숨이 들어왔다 나가는 입에서는 썩어가는 단내가 났으며 한순간 찾아온 스트레스는 내 머리를 끊임없이 자극했다. 하지만 나는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싹을 피우는 새싹처럼 마지막으로 남아있는 힘을 긁고 또 긁어 발을 움직였다.

위기가 또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우스울 만큼 학습이 되었다. 난 팽팽 돌아가는 눈알을 굴리며 내가 나가야 할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곧이어 나는, 지하주차장이 아닌 당당히 정문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

텅-. 텅-. 텅-. 텅-.

일행들이 정신없이 무빙워크를 통과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마치 벌레들처럼 이곳을 향해 기어오는 변종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놈들은 하나같이 입꼬리를 올려 섬뜩하게 웃고 있었고, 눈알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거나 스스로 파내 없어진 지 오래였다.

오직 삶을 위해 신경을 일깨웠다. 그러자 모든 게 느려지기 시작했고, 멀리 있는 사물도 코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놈들의 회색 피부 위로 섬뜩하게 솟아오른 검은색 핏줄은 내 두려움과 그런데도 솟구쳐 오르는 생존본능을 자극했다.

따닥! 탁탁탁!

가장 뒤에서 뛰어오는 노인이 놈들의 접근을 막기 위해 쉴 새 없이 사격을 가했다. 뛰어난 사격 실력, 정신없이 쏘고 있음에도 무섭게 접근하는 놈들의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나도 그 뒤로 사격을 가하며 알량한 화망을 구축하기 위해 애썼다. 곧이어 노인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 우리를 향해 외쳤다.

‘탄창!’

멍청했었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탄창을 넉넉하게 챙겨 왔어야 했다. 각 개인에게 지급된 탄창은 고작 두 개였기에 아까부터 총을 발사하던 노인의 탄창은 벌써 떨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빠르게 판단을 마친 김혜정과 강 형사는 노인에게 자신의 탄창을 던졌고, 볼트가 아직 넉넉하게 남은 크로스 보우를 꺼내 들었다.

우리는 빠르게 뒷걸음칠 치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점점 줄어드는 총알 앞에 불안함을 느끼며 마지막 투지를 불살랐다. 난 빈 탄창을 바닥에 던지며 주머니에 넣어 둔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밑에서 대기하고 있을 직속 경비대에게 무전을 보냈다.

‘빨리 후퇴해요!’

[네?]

무전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경비가 갑작스러운 나의 요구에 깜짝 놀라며 반문했지만, 자세한 설명을 해 줄 시간이 없었다. 노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변종의 머리통을 날려 버린 나는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무전을 꺼 버렸다.

‘여기서 빠져나가라고!’

전등이 없는 대형마트 내부는 그렇게 밝은 곳이 아니었다. 총알을 피해 옅은 어둠 속으로 숨어든 변종은 시시각각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뛰어난 지능을 가진 놈들답게 우리가 예상 못 한 방향에서 치고 들어오기도 했다. 그렇게 난 내 위에서 날아오는 한 놈을 발견하지 못하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놈이 내 머리 위로 아가리를 벌려 끔찍한 비명을 내지른다. 악의와 식욕이 진창처럼 섞인 감정 앞에 난 이를 악물었다. 대검을 꺼내 들 시간도 없이 이빨을 딱딱거리는 놈의 목을 잡은 나는 공격을 피해 보려 거칠게 몸을 뒤틀었고, 이내 손에 들린 무전기로 놈의 머리를 내려찍기 시작했다.

하지만 놈에게 그런 반항은 어린아이의 장난과 같았다. 무전기는 너무나 쉽게 부서졌고, 그놈은 아무런 피해 없이 내 얼굴을 물어뜯기 위해 아가리를 벌렸다. 그 순간 내 눈앞으로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큰손이 놈의 머리채와 목을 잡았다. 그리고 놈의 몸은 무빙워크 옆으로 휙 날려 버렸다. 큰 고함과 익숙한 얼굴, 나를 구한 건 두식이였다.

‘아으! 어아아!’

두식이는 정신 빼놓고 뭐하냐는 듯 의미 모를 고함을 나에게 내뱉었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지체했구나. 두식이는 그대로 내 옷을 잡았고 넘어져 있는 나를 질질 끌고 뛰기 시작했다. 일어나기 위한 잠깐의 틈조차 없는 상황. 나는 끌려가는 그 자세 그대로 떨어져 있는 총을 낚아챘으며, 총알이 꽉 차 있는 탄창을 끼워 넣었다.

‘동윤아! 어디로!’

자기 앞으로 달려오는 놈에게 개머리판을 꽂아 넣은 노인이 힘겹게 숨을 내뱉으며 나에게 외쳤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놈들에게 총알을 발사했다. 그리고 앞으로 한층 더 내려가야 하는 무빙워크를 가리켰다.

‘정문으로 나가야 해요!’

노인은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고 얼굴에는 왜 하필 정문이냐는 의문이 담겨 있었다. 맞다, 우리가 일부로 정문을 피해 온 마당에 갑자기 목적지를 수정하니 당황할 법도 했다. 하지만 노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믿는다.’

이유 없는 신뢰. 무조건 내 방법을 따르겠다는 그 믿음이 내 심장 속에 강철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난 두식이에게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고, 이내 남아 있는 총알을 전부 쏟아 냈다. 그리고 1층으로 가는 마지막 무빙워크를 밟았다.

이제 곧이다, 조금만 더 움직이면 이 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변종 놈들은 더욱더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했고 이미 완벽하게 변형을 끝낸 녀석들도 있었다. 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뒤를 따라오는 용팔이 형제에게 가방을 뺏어 들었다.

가방을 열자 노인과 함께 만들어 둔 화염병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수량은 전부 5병, 난 소주병으로 만든 화염병을 들어 올렸고 그 안에 찰랑거리는 휘발유를 두 눈 가득 담았다. 그리고 재빨리 강 형사와 용팔이 형제에게 한 병씩 던져 주며 주머니에서 지포 라이터를 꺼내 들었다.

소주병을 빠르게 흔들어 병을 막고 있는 천에 휘발유를 듬뿍 묻혔다. 곧바로 라이터 불을 점화하고 천에 불을 붙인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과 함께 내 코끝을 알싸한 휘발유향이 점령했다. 난 그 불은 다른 화염병과 나누며 그대로 앞을 향해 던져 버렸다.

병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지옥에서 불이 타오른다. 용팔이와 김혜정은 이전에 내가 내린 지시를 충실하게 따랐는지 사방에 뿌린 휘발유가 그 불길을 더했다. 변종들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다가 불세례를 맞거나 온몸이 그을려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뱉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무기를 사용한 우리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빠르게 뛰어가기 시작했다. 무빙워크를 반쯤 내려왔고, 화염이 저놈들을 막아 줄 동안 정문 문을 열고 빠져나가야 했다. 곧이어 저 멀리서 옅은 햇빛이 들어오는 정문이 보일 때쯤 뒤에서 끔찍한 비명과 울음소리가 공명하듯 울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익!!!’

놓치지 않아! 절대! 놈들은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에서 한순간 지옥의 주민으로 변해 버린 놈들은 그 분노를 온전히 우리에게 뿜어내고 있었다. 구해 주지 못한 그들에게 나는 사과를 해야 했을까? 텅 빈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던 아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나는 미안함과 죄책감 대신 그들에게 볼트를 쏠 수밖에 없었다. 내 손을 기계적으로 움직였고, 볼트는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떠난다. 빠르게 뒷걸음칠 지면서 정신없이 눈앞을 수놓는 볼트들. 당기고 쏘고, 당기고 쏘고, 그럴수록 지옥은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숨을 훅 내뱉자 뜨거운 불길과 어울리는 숨결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우리가 던진 화염병은 화재 위에 불길을 더했고, 대형마트를 태우는 화염은 그 규모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이로 미친 듯이 기어오는 놈들이 이곳은 지옥의 재림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었다.

‘동윤아! 나가자!’

문 앞까지 도착한 노인이 황급히 나를 부른다.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는 문 주위는 이미 두식이가 정리한 지 오래였고, 유리문으로 된 정문도 일행들이 힘을 합쳐 잠금장치를 부수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마지막 볼트를 장전했다.

이명이 울린다. 그리고 그 화염 한가운데에는 최태식이 인질로 잡았던 아이가 괴물로 변해 울부짖고 있었다. 아이의 입은 이미 찢어져 있었고,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늘어난 지 오래였다. 놈이 내뱉는 비명과 회색 얼굴에 선명하게 찍힌 검은 핏줄기들.

난 한쪽 눈을 감고 입술을 악물었다. 곧이어 조준간을 옮겨 이제는 괴물로 변해 버린 아이의 머리를 담았다. 그리고 난 방아쇠를 당기며 볼트 위에 내 죄책감을 쏘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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