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12화 (112/313)

[112]

어수선한 분위기가 잠시 이어졌고, 잡담이 섞인 자기소개가 간단히 끝이 났다. 단체장이 회의 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난 간부들은 일주일간 해 온 경과보고를 시작했다. 새로 투입된 간부들은 인수인계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을 터인데, 꼭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를 보여 주겠다는 듯 전문적인 포스를 뽐내며 보고를 시작했다.

나와 노인이 감탄이 나올 만큼 대단한 행정 능력이었다. 기존에 있던 간부들이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했다면, 이번에 들어온 간부들은 꼭 전문적인 행정가처럼 일을 처리했다. 전문용어가 쉴 새 없이 들려왔고, 일을 벌이는 규모와 전문성이 비교가 되지 않았다.

단체장은 이제야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는 듯 흐뭇하게 웃는다. 기존에 있던 간부들이 무능력해 보일 만큼 그들은 폭풍처럼 보고를 읊었다. 그리고 모든 경과보고가 끝이 날 때쯤 우리와 새로운 간부들을 제외한 모든 인원이 표정을 찡그리고 있었다.

그 표정에는 부끄러움도 있었고, 당장 위기가 닥친 것만 같은 불안함도 있었다. 난 천천히 턱을 괴며 그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살폈다. 속사정이야 제대로 모르겠다만, 꼭 에덴의 군벌처럼 군림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굴러온 돌이 한 달도 되지 않아 박힌 돌을 빼냈으니, 자신도 똑같은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특히, 저 한쪽에 앉아 있는 김윤식의 표정은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장벽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그는 한순간 아무것도 아닌 병신이 되었고, 이제는 총마저 빼앗겼다. 그리고 폭풍처럼 솟아오르는 우리의 실적은 그를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노인과 나는 그런 김윤식을 항상 주시하려고 했다. 똑똑한 남자는 아니지만, 폭탄같이 위험한 야망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멍청하게만 보이는 야망이 언제 어디서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 몰랐고, 피아 구분 없이 날아오는 총알은 항상 경계해야 했다.

일을 터트리기 전에 먼저 칠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윤식이 외부에서 활동을 안 한다는 것과 항상 경비들을 대동하며 다닌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도 일단 합법적인 방법으로 팔다리를 잘라놨으니, 한동안 그의 반응을 살필 생각이었다.

구석에 앉아 있는 김윤식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모든 보고가 끝나자 본격적인 회의주제가 나오기 시작했고, 그 주제는 예상했던 대로 121명이 사살당한 부랑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대부분이 우리 팀의 칭찬으로 시작해 계속해서 믿는다는 말로 끝났지만, 오늘만큼을 달랐다.

‘미적지근한 행동은 위험합니다! 먼저 쳐야 합니다!’

노인의 눈치를 보며 찍소리도 못하던 김윤식이 부랑자들의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한순간 간부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여들었고, 김윤식은 자신만이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듯 우리를 몰아세웠다.

‘121명이 죽었는데, 설마 눈치 하나 못 챘겠습니까? 원래부터 에덴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던 부랑자들입니다. 우리가 한 짓이란 걸 아는 순간, 에덴은 끝입니다! 끝!’

노인이 작게 감탄을 내뱉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 감탄은 병신인 줄 알았던 김윤식이 외부의 위협을 핑계로 자신의 지위를 높이려는 시도에 대한 감탄이었고, 나머지는 의외로 정확한 구석을 찌른 그의 말 때문이었다.

김윤식의 의견은 절대 틀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이 사냥 방법에 대해 한계를 느끼며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동안 꼬리를 말고 장벽 뒤에만 숨어 있던 김윤식이 할 말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이다.

내 미간은 천천히 찡그려졌고, 단체장은 나와 노인의 얼굴을 살피며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하지만 김윤식은 이게 마지막으로 남은 기회인 것을 알고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며 기존 간부들에게 무언의 도움을 청했다.

그러자 간부들은 옳다구나 하고 시끄럽게 의견을 내뱉으며 회의장을 개판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터질 듯 말 듯 한 분위기는 드디어 터져 버렸고, 회의장 내부에는 자연스럽게 대결 구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기존 간부들은 김윤식을 옹호했으며 새로 들어온 간부들은 게릴라전을 펼치는 우리의 방식을 옹호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나와 단체장만이 입을 다물고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든 게 한심하고 역겹게 느껴졌다. 단 한 번도 장벽 밖을 밟아 본 적이 없는 자들이 서로가 잘났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싸우고 있었다. 정치적 알력, 단체에서 내가 가지는 지위. 그놈들에게 쫓기며 하루만 굶게 된다면 모두 사라져 버릴 아지랑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시끄럽게 싸우는 이들은 모르는 일이었다. 미친 듯이 우리를 쫓아오는 그놈들은 어떤 놈인지, 인간 같지도 않은 부랑자 놈들은 어떤 놈들인지. 그리고 그들에게서 구출해낸 사람들이 어떤 심정으로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는지! 그저 에덴에서 떨어지는 과일에 취해 입을 벌리고만 있는 이들은 절대로 모르는 일이었다.

오직 단체장만이 나를 이해한다는 듯 동정과 안쓰러움이 담긴 눈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은테 안경을 향해 손짓했고, 은테 안경은 단체장의 말을 대신 전하기라도 하듯 서류를 책상에 내려치며 큰 소리를 내었다. 은테 안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장 한가운데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왜 입 아프게 싸우십니까? 당신들은 권한이 없습니다.’

순간 모두가 입을 다물고 은테 안경과 나를 바라본다.

맞다. 먼저 공격을 가하자는 김윤식도, 그건 절대 안 된다는 신 간부들도 모두 입 아프게 떠들 권리조차 없었다. 그것은 항상 힘들게 훈련하는 내 일행들, 그리고 하루하루 삶을 위해 충실한 내 또 다른 가족들의 권리였다.

‘우, 우리 전투조도 항상 강도 높은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부랑자 탐색조만이 가능하다는 건 섣부른 판단이에요!’

은테 안경이 표정을 찡그리고 단체장조차 한숨을 훅 내뱉는다. 하지만 김윤식은 그 한숨을 한 발짝 물러나는 포기라고 생각했는지 필사적인 어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등은 탄 구 간부들은 신나게 김윤식을 옹호했고, 모든 시선이 결정권을 가진 내 입으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양보냐, 아니면 머리를 들이박는 싸움이냐. 그것을 선택해라.

그 순간 노인이 숨을 훅 내뱉으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린다. 그리고 따뜻한 손의 감촉과 굳센 악력은 나에게 힘을 심어 주듯 든든했다. 하지만 살벌한 시선만큼은 구 간부들과 김윤식에게 고정되어 있었고, 선한 용팔이마저 짐승같이 사납게 눈을 뜨며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인이 나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네 뜻대로 해라.’

무슨 일을 해도 널 믿고 따르겠다. 노인과 용팔이의 강철 같은 신뢰가 내 등을 밀어준다. 그리고 이 자리에는 없었지만, 항상 나를 지지하고 따라 주던 일행들의 따뜻했던 체온이 피부 위에 느껴지기 시작했다. 난 당당히 어깨를 펴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머리에는 많은 고민이 스쳐 지나갔고 사방으로 퍼져 있던 로직들이 미친놈들처럼 날뛰기 시작했다. 저 방법도 좋고, 이 방법도 좋다. 그리고 내 머리에는 이 역겨운 자들에게 목줄을 채울 방법과 효율적으로 부랑자들을 처리할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합시다.’

내 대답이 입 밖으로 튀어나온 순간 회의장은 침묵으로 가득해졌다. 모두가 내 대답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김윤식은 이렇게 쉽게 허락할 줄은 몰랐다는 듯 입을 떡 벌리고 있었고, 단체장은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기운다.

그리고 김윤식을 옹호하던 한 여자 간부가 마치 자동 반사처럼 대답한다.

‘네……?’

이해를 못 한 걸까? 난 책상을 톡톡 치던 손가락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내 말을 전했다.

‘그렇게 합시다. 당신이 무엇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나가서 부랑자들과 싸우세요.’

내 말은 포기선언과 같았다. 신 간부들은 갑작스러운 변화 앞에 인상을 찡그렸고, 구 간부들은 표정을 밝게 피며 얼떨결에 찾아온 승리를 자축했다. 난 그 모습 앞에 조소를 지었고, 이내 용팔이와 노인에게 손짓하며 회의장을 나왔다.

내가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회의장에는 폭탄이 터진 듯 시끌벅적해졌고, 난 은은한 조명이 피어오르는 복도를 천천히 걸으며 숨을 훅 내뱉었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내 뒤를 다급하게 따라오는 소리가 들리길래 잠시 걸음을 멈췄다.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합니다.’

당연히 은테 안경이었다. 은테 안경은 내가 기분이 상한 거로 보였는지 다급하게 사과하며 고개를 숙인다. 왜 그가 사과해야 하는 걸까?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고개를 숙이는 그를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은테 안경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혹시 동윤 씨가 포기한 건 아닌지……. 단체장님이 걱정이 크십니다.’

물론 회의감을 느끼긴 했다. 우리가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간부들은 모두 똑같았고, 자기들 이득을 위해 나를 이용하려 하거나 배척하려 했다. 그들에게는 인간의 존엄성과 유지보단 자기 밥그릇에 채워질 밥의 양이 더 중요하게 보였다.

나처럼 소소한 행복과 소중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그 행복과 삶을 단순히 욕망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에게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비록 삶이 거친 조류가 되었지만, 그 흐름마저 남에게 기댈 수는 없다. 그렇기에 난 독해지려 한다.

‘포기한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하지만…….’

내가 대답했음에도 은테 안경은 믿지 못하겠는지 수심이 어린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내 두루뭉술한 대답에 불안감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난 우리와 에덴을 위해 항상 뛰어다니는 그를 안심시켜 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세를 바로 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해 주었다.

‘전투조에게 시선이 끌릴 동안 본진을 칠 생각입니다.’

내가 머릿속에 꼭꼭 숨겨놓고 있던 생각을 말하자 은테 안경이 고개를 번쩍 들었고, 내 옆에 서 있던 노인이 입꼬리를 올리며 눈을 빛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역린을 건드려 아둔한 용의 신경을 긁었으니 곧 미친 듯이 발버둥을 칠 차례였다.

그리고 그 위험천만한 발버둥을 김윤식이 받아 주겠다고 자진했으니 우리는 이제 용의 머리를 자르러 가면 되는 것이다. 난 메마른 입술을 핥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고, 은테 안경을 향해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생존자들은 전부 구출할 생각입니다. 인원이 부족할 것 같은데, 혹시 믿을만한 인원들이 더 있을까요?’

은테 안경은 고개를 번쩍 든 상태에서 한동안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은테 안경의 얼굴은 감정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곧 눈가에는 작은 습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은테 안경은 묘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난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한동안 기다렸고, 이내 힘이 넘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직속 경비들을 지원하겠습니다. 부디, 힘내 주세요.’

‘물론입니다.’

난 은테 안경이 내미는 손을 강하게 붙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테 안경은 이 소식을 단체장에게 전하고 싶은지 조금 다급하게 인사를 건네 왔고, 난 그만 가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보니, 곧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영감님, 혹시 휘발유를 구할 수 있을까요?’

내가 복도를 걸으며 묻자 노인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대답했다.

‘무조건 구해 줄게.’

노인은 에덴 모든 곳, 아니 이 동네 모든 곳을 뒤져 휘발유를 구해 올 것이다. 난 눈을 살며시 감으며, 은은한 조명이 들어오는 복도를 말없이 걸었다. 노인도, 용팔이도 그저 말없이 내 옆을 따라올 뿐이었다.

* * *

매번 채연이의 자는 모습만 보다가 오랜만에 깨어 있는 모습을 봤다. 밤늦게 들어오는 나와 놀지 못한 게 한이 된 건지 채연이는 껌딱지처럼 나는 따라다녔다. 어쩔 수 없이 조금 묵직해진 아이를 끌어안고 저녁 내내 달래 줘야 했다.

아이는 이제 말도 잘한다. 그리고 충격으로 잃어버린 것들을 수업과 치료를 통해 서서히 찾아가고 있었다. 아이는 그 나이와는 조금 맞지 않은 한글 공부 책을 꺼내 들고 열심히 바닥에 누워 공부하고 있었다.

난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어려워하는 부분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었다. 채연이는 유난히 신이 나서 자기처럼 앙증맞은 크레용으로 글자를 써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영원했으면 하는 평화로운 밤이 천천히 지나갔다.

[이 아래로는 아이가 남긴 듯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종잇장은 여러 번 펼치고 보았는지 유난히 손때가 남아 있다.]

아빠 조아요. 아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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