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는 아직 살아있다-110화 (110/313)

[110]

뜨거운 증기 사이로 얼굴과 몸이 드러난다. 상처가 가득한 내 얼굴은 낯설기 그지없었고, 온몸에 새겨진 흉터는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난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뜨거운 물을 머리에 부었다. 그리고 노인이 빌려준 면도기와 면도크림을 이용해 수염을 깎기 시작했다.

수염이 정말 많이 자랐다. 면도기가 움직일 때마다 털들이 바닥에 흘러내렸고, 그 털들 사이로 민얼굴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닥에 떨어진 거품 뭉치를 보고 있자니 여태 묻혀 왔던 검은색 찌꺼기를 털어 내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간 겪었던 고통과 아픔을 쏟아 내리는 물줄기에 흘려보내며 조용히 눈을 감는다. 따뜻한 물과 평화가 너무나 어색했다.

‘옷 여기 있다.’

노인이 샤워실 문을 열며 오늘 임무에 입고갈 옷을 휙 던져 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닦기 시작했고, 노인이 던져 준 옷을 받아들었다.

하루 간 훈련을 마친 일행들은 숙소로 돌아가지 못한 채 모두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그리고 새벽에 눈이 떠진 나와 노인은 오랜만에 하는 목욕을 위해 공용 샤워장을 찾았다. 물론 샤워장이 문을 열 시간은 아니지만, 은테 안경의 배려로 이 넓은 공간을 개인이 사용할 수 있었다.

한 번 사용하는데 무려 식권 5장. 하지만 사무실 한구석에 쌓여 있는 식권이기에 그냥 대충 주먹으로 집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비록 한 사람당 5분도 사용하지 못하는 샤워장이지만, 난 깔끔하게 수염도 깎고 더러운 땀들도 닦아내 새사람이 되었다.

난 마지막으로 깨끗한 옷을 입으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일행들이 일어나기까지 1시간. 에덴으로 온 이후로 수면시간이 줄어들었고, 기상 시간도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컨디션은 갈수록 좋아졌고, 온몸에는 근육과 체력이 붙기 시작했다. 아마 현역 때보다 더 오래 뛸 수 있지 않을까?

문을 열고 나가자 노인이 탈의실 한구석에 삐딱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리 오래 걸려? 하고 타박하기에 나는 그냥 웃으며 노인을 지나치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열자 차가운 새벽공기와 함께 너무나 신선한 산소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진작 자르고 다니지 그랬냐. 깔끔해서 보기 좋네.’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노인이 무심하게 칭찬을 내뱉는다. 턱수염이 없으니 왠지 얼굴이 더 추운 기분이었다. 난 맨손으로 턱을 매만지며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고, 우리는 그렇게 해가 떠가는 길을 지나쳐 사무실로 향했다.

* * *

하루 훈련, 하루 임무. 새로 유입된 인원들을 위해 결정한 스케줄이다. 어제 훈련을 했으니 오늘은 임무에 투입되는 날이다. 난 아직 잠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행들을 깨우고 옷을 갈아입혔다. 어정쩡한 자세로 임무복을 입은 일행들은 졸린 얼굴로 나와 노인을 따라나선다.

좋다. 아침밥도 든든하게 먹었고, 점심으로 먹을 간식도 챙겼다. 채연이와 아이들도 오랜만에 학교까지 데려다줬으니 모든 일정이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가기 시작했다. 난 아침에 채연이가 넘겨 준 체온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숨을 크게 들이킨다.

내가 선두로 걷고, 그 뒤를 일행들이 일렬로 따라온다. 길이 그렇게 넓은 편이 아니기도 하고, 이젠 일렬로 걷는 게 버릇처럼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우린 어제와 같이 일상을 시작한 에덴의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기 시작했지만, 오늘은 이상하게 주위에서 쏟아지는 시선들이 이상했다.

우리는 굴러 들어온 돌이다. 그것도 박혀 있는 돌을 밀쳐 낸 게 아니라 완전히 산산조각낸 불청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은 항상 완전무장한 우리들은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거나 두려움이 어린 얼굴로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길을 걸으며 마주치는 주민들은 우리를 바라보며 웃어주거나 고개를 숙여 인사해 주기도 했다. 난 어정쩡한 걸음으로 걷다가 어떤 아줌마가 주는 따뜻한 우엉차 한 잔을 얼떨결에 받아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 우엉차 한 잔이 시작이었다. 우리는 정문까지 걸어가는 내내 총 10번 동안 음식을 받을 수 있었고, 심지어 어떤 아저씨는 꼬깃꼬깃한 식권 한 장을 내 주머니에 찔러 넣어 주시기도 했다. 내 뒤를 따라오던 일행들도 갑작스러운 환대 앞에 당황한 듯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오직 노인만이 여유롭게 우엉차를 받아 마시며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자리에 멈춘 일행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노인에게 향했고, 노인은 그 시선을 의식했는지 김이 솔솔 오르는 우엉차를 단숨에 들이켠다. 그리고 우리에게 입을 열어 말했다.

‘사람이 말이야, 좋은 일을 했으면 칭찬받을 줄도 알아야지.’

좋은 일? 아, 우리가 좋은 일은 하는 거였나? 일행들 표정에 떠오른 의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에게는 사람을 구해야 하고, 나쁜 이를 처단한다는 정의로운 사명감이 없었다. 물론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그저 나의 이득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다른 일행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이곳으로 들어오게 된 인원이 대다수였다. 왜 이 힘든 일을 할까? 그냥 조금 부족하더라도 안전한 곳에서 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까?

하지만 치열한 삶은 그 생각을 잠시 동안 잊게 했고, 인간이 가지는 목적의식을 희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여파는 언젠간 회의감으로 찾아오게 될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고생한 모든 것을 보상이라도 해 주듯 다가오는 주민들의 태도와 노인의 말은 그 회의감을 한순간에 날아가게 만들기 충분했다.

우리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 아닐까? 위대한 영웅은 아닐지언정 이 종말한 세상 앞에 그래도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 일행들에게 필요한 건 그런 자부심이었다. 뒤를 돌아보자 일행들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 잔뜩 상기된 얼굴들은 당장이라도 뜀박질을 시작할 듯 생기 넘쳤다. 노인이 그 종지부를 찍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희들은 잘하고 있어.’

그 짧은 말이 그동안 겪었던 고통과 노고를 전부 씻어 내렸다. 그리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추운 날씨에 식어 버린 우엉차를 단숨에 들이켜며 정문을 향해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걷는 내내 옛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 머리를 두드리며 항상 해 줬던 굵직한 목소리.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 그 목소리는 기억 속에서 아련하게 흩어진다.

그래, 넌 잘하고 있어.

* * *

노인은 부랑자들은 사냥하는 데 있어 절대 싸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사냥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우리에게 머리를 쓰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우리는 숫자가 적다. 그런데도 부랑자들을 처리해야 했고, 그 방법은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부랑자들에게는 공통된 머리가 없었고, 조직적인 체계도 없었다. 마치 야생에 거주하는 짐승들처럼 이리저리 원하는 방향으로 날뛸 뿐이었다. 노인은 그 점을 정확하게 짚었고, 정면승부가 아닌 게릴라전과 같은 사냥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

용의 아가리가 아닌, 이빨이 닿지 않는 역린을 노려라. 순식간에 회의를 끝낸 우리는 부랑자들 기지 근처로 걸음을 옮겨 우리만의 영역을 넓히기 시작했다. 제각기 빠져나가는 부랑자들의 숫자와 진행 방향을 확인하고, 우리들의 머리가 되어 줄 중앙본부로 보고한다. 그렇게 메모리가 쌓이고 쌓여 갱신된 정보들은 본격적인 함정을 설치하게 해 주었다.

부랑자들이 나간 방향에 송곳 함정을 드문드문 설치했다. 겉으로만 봐도 너무나 쉽게 보일 만큼 어정쩡한 함정이었지만, 바닥에 쌓인 눈은 그 어설픈 함정을 베스트로 만들어 주기 충분했다. 눈 사이로 파묻힌 송곳들은 이빨을 숨긴 독사처럼 누군가 자신을 밟아 주길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구축한 영역 모든 곳에 그 함정들을 설치했다.

일단 시험 삼아 한 무리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한 10명쯤 되는 부랑자 무리가 나간 것을 확인한 우리는 그 골목 건물에 숨어 매복을 준비했다. 물론 이곳으로 똑같은 무리가 지나갈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지만 원래 사냥이란 기다림의 연속이라고 노인이 말했다.

매복하는 동안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추위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펭귄처럼 뭉쳐 체온을 나눌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체온을 나눈다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짧은 시간에 적응을 마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뭉쳐 따뜻한 살을 비비고 유대감을 나눴다.

처음에 칠색 팔색을 하던 박다혜도 어느새 용팔이와 김혜정 사이에 붙어 작게 웃고 있었고, 김혜정과 강 형사는 털털하게 웃으며 우리에게 밀착했다. 우리는 그 좁은 공간에서 가끔 초콜릿을 까먹기도 하고,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형님.’

모두가 잠깐뿐인 평화를 누리고 있는데 용팔이가 나를 불렀다. 나는 반쯤 감고 있는 눈을 떠 용팔이를 바라봤고,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수염 자르니까 훨씬 보기 좋아요.’

실없는 녀석. 중요한 말을 하려고 했나 싶어 진지하게 받아 주려 했던 나는 한순간이 힘이 풀려 입에 어이없는 웃음을 머금었다.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흐흐 웃고 있는 용팔이의 코를 꽉 잡고 놔 주었다. 하지만 일행들은 용팔이의 말에 동의하는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강 형사가 말을 이어갔다.

‘동윤 씨 처음 봤을 때 정말 무서웠습니다.’

내가? 무서워? 난 처음 들어보는 말 앞에 뒤통수로 손을 가져가 조용히 긁었다. 강 형사를 만났을 때 까칠하게 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막 악의를 품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근 나를 만난 일행들은 그 말에 동의하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자 노인이 내 옆에서 허리를 쿡 찌르며 나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좀 표정 좀 풀고 다녀. 수염도 자주자주 깎고.’

거울을 볼 일이 없으니 간혹 내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는지 망각하고는 한다.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일행들이 그렇다고 하니 천천히 고쳐나갈 생각이었다. 난 멋쩍게 웃으며 콧등을 긁었고, 내가 입을 열려는 그 순간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에 잡음이 끼기 시작했다.

‘…….’

모두가 말을 멈추고 침을 삼킨다. 난 한순간 벽에 찰싹 붙어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정신 빠진 놈들이 내뱉는 무방비한 말소리. 시계를 확인하자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걸 자각했다. 내 뒤로 노인이 조용히 속삭였다.

‘움직여.’

마치 훈련받은 병사들처럼 우리 일행들은 무기와 장비를 재빠르게 챙기고 지정한 포지션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좋아지는 팀워크와 항상 유지되는 긴장감은 우리를 능숙한 부랑자 사냥꾼으로 만들어 주었다. 난 크로스 보우를 잡아들고 건물 맨 위층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거리에 보이는 부랑자들은 이곳을 나갔던 10명에서 한 명이 줄어든 9명이었다. 아니, 그 한 명의 빈자리는 어디선가 잡아 온 생존자가 차지했다. 옷이 모두 찢기고 두꺼운 노끈에 묶여 끌려오는 인질은 부랑자들이 항상 챙기는 전리품과 같았다.

난 아쉬움에 혀를 찼다. 이왕이면 많은 생존자들을 구하길 원했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한 명뿐이다. 난 천천히 볼트를 장전하며 그놈들이 독사의 아가리로 기어들어 오기를 기다렸다. 이 건물에 숨어 매복을 준비하는 일행들의 마음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서 말소리가 들려온다.

‘야! 태식이네 새끼들 안 들어왔다며?’

‘이름까지 기억하냐? 우리 식구 아닌데 무슨 상관이야.’

‘그래도 새끼야! 불안하잖아!’

선두에 서 있는 두 명이 건들건들 걸으며 사정권 안으로 진입한다. 끼기긱. 난 당장이라도 쏴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크로스 보우를 견착하고 살며시 숨을 내뱉었다. 불안하다? 촉이 좋았지만 이미 아가리에 몸을 넣고 할 소리는 아니었다. 너희들도 똑같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못 들어오는 놈이 한둘이야? 호들갑 좀 떨지 마.’

‘십새기가 말을 해도 꼭…….’

덩치 큰 남성이 자신의 말을 무시하자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얍삽해 보이는 부랑자는 그 자리에 멈춰 한동안 혀를 차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들었다. 냄새가 퍼지든 말든 무서울 게 없다 이건가? 그는 담배를 입에 꼬나물고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어? 그는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서 있더니 이내 욕설을 내뱉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마 라이터가 없는 모양이다. 그 순간 걸음이 느려진 무리들은 우리의 사격권 안으로 들어와 완전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꼭 우리에게 쏴달라고 항의하듯 서로가 담배를 꺼내 들며 여유를 부리기 시작한다. 난 찬바람에 메말라버린 입술을 핥으며 방아쇠에 손가락을 올렸다.

‘야! 불 좀 빌려…….’

핑!

얍삽하게 생긴 부랑자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핑! 울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부랑자의 시선이 남자의 발아래로 향했고 그곳에는 붉은색 피가 튀기며 우리가 준비했던 악마의 날개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난 함정을 밟은 부랑자의 머리를 향해 볼트를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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