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저 여자, 분명 간부 회의에서 김혜정을 옹호하던 여자다. 정확하게 무슨 부서, 무슨 직위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간부 회의에 올 정도면 꽤 높은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부랑자랑 붙어먹은 현장을 발견한 이상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뒤에선 덜덜 떠는 인질들이 돼지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는데, 앞에선 까르르 웃으며 잘도 놀고 있다. 마치 중간에 보이지 않는 유리막이라도 생긴 듯 그 장면이 너무나 대비되었다. 난 노인에게 손짓하며 그놈들이 영역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공격하자는 신호를 보냈다.
노인이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볼트를 장전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들고 온 크로스 보우를 장전하고, 노인이 연속으로 쏠 수 있게 옆에 준비해 놓는다. 노인이 사격을 가하면, 나는 저놈들이 도망갈 퇴로를 막기 위해 뒤를 점거할 것이다. 판단이 끝난 순간 난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계단 아래를 빠르게 내려갔다.
놈들은 결국 바리케이드를 치우고 지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걷는 것을 잠시 멈추고 시간을 지체하게 될 것이고, 난 그것을 노려 기습을 가할 생각이다. 조심히 현관을 열고, 바리케이드를 끙끙거리며 치우는 그놈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다행이다, 인질들이 뒤에 있다. 1명은 여자였고, 나머지 2명은 남자였는데 이곳으로 끌려오는 동안 심한 매질을 당했는지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그들은 세세하게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온갖 상처들이 많았다. 그중에 중년 남성의 상처가 제일 심각해 보였다.
분명 피가 질질 흐르는 출혈 상태다. 가운데 있는 여자가 눈물을 흘리며 지혈을 하고는 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하지 못 하면 곧 죽고 말 것이다. 난 시간이 촉박함을 느끼며 노인이 있는 창문을 향해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노인이 소리 없는 귀신처럼 크로스 보우를 빼 들고 선두의 있는 남자를 노리고 있었다.
난 총을 들고 대검을 조용히 착검했다. 그리고 숨을 아껴 쉬며 노인이 공격을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체감상 한 시간 같은 1분이 흐르고, 바리케이드가 반쯤 치워질 때쯤 고막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려왔다.
퉁.
덧없다.
방금까지만 해도 더럽게 웃어 재끼던 부랑자의 머리가 볼트로 곤죽이 된다. 그 옆에 있던 배신자 여자는 깜짝 놀라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고, 나머지 부랑자들은 허겁지겁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짧은 간격으로 발사되는 볼트는 그놈들을 놓치지 않았다.
난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일단 인질들을 내 뒤로 세우고, 반대로 도망치는 그놈들을 처리해야 한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기습에 우왕좌왕하던 부랑자 3마리는 뒤로 돌아 뛰어오기 시작했고, 곧 착검을 앞으로 세우며 퇴로를 가로막은 나를 발견한다.
‘뭐, 뭐야!’
거의 바뀌지 않는 지겨운 대사를 들으며 난 침착하게 총검을 내질렀다. 떨림 없이 내지르는 총검은 정확하게 놈의 목으로 향했고, 순식간에 목숨을 앗아간다. 이젠 찌르르 울리는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을 때쯤, 난 생명을 너무나 쉽게 취하고 있었다.
목을 부여잡고 떠는 놈의 복부를 발로 차 바닥에 넘어트린다. 그리고 제일 뒤에서 달려오던 한 놈이 머리에 볼트를 맞는 걸 확인하고, 난 손 돌려 대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속에선 뜨겁게 달궈진 스팀이 훅하고 빠져나온다.
나머지 한 놈이 회칼을 떨어트리고 재빠르게 손을 든다. 항복? 난 그 녀석을 조용히 내려다보며 바닥에 씁쓸함이 묻은 침을 뱉어냈다. 입안으로 무언가 튀겼나? 그건 아마 불쾌함과 경멸이 아니었나 싶다. 놈의 뒤쪽에선 묵직한 소리와 함께 눈이 휘날렸다.
쿵.
노인이 2층에서 그대로 뛰어내렸다. 항복하며 바닥에 넙죽 엎드린 놈은 어? 하는 소리와 함께 뒤를 돌아봤고. 그대로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머리를 바닥에 떨어트린다. 노인은 가볍게 머리를 박살 내고 나처럼 침을 퉤 뱉었다.
‘사, 살려 주세요! 저도, 저도 잡혀 왔어요!’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다리가 풀렸었는지, 배신자 여자가 도망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뻔뻔하게 눈물을 흘리며, 이곳으로 비틀비틀 달려온다. 내 얼굴을 기억하는 모양이지? 연기했으면 여우주연상, 사람으로 치면 금수보다 못한 년이 되지도 않을 어이없는 수작을 부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배신자 여자는 우리가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제대로 속였다고 판단했는지 신나게 이쪽을 향해 뛰어오기 시작했다. 유난히 깨끗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옷 때문인지 시궁창 같던 내 기분은 더욱 나락으로 빠져든다.
‘왜 그랬어?’
하지만 다가오는 여자를 조용히 바라보던 노인은 비통함과 분노가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가증스럽게 눈물을 흘리던 배신자 여자는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추고 당황한 듯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네, 네?’
‘왜 그랬냐고.’
노인은 이를 씹으며 물었다. 아, 분노 때문에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난 황급하게 인질들을 향해 달려갔고, 가방을 꺼내 핫팩을 미친 듯이 쏟아냈다. 인질들은 이미 정신이 반쯤 나갔는지 넋 놓고 바닥에 앉아 빈 눈동자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중년 남성의 상태가 좋지 않다. 여자가 덜덜 떨면서 중년 남성을 연신 흔들어 봤지만, 그는 이미 차갑게 굳어 눈을 감고 있었다. 난 황급히 붕대를 꺼내 남자의 상처 부위를 틀어막았다. 회칼이 꽂힌 듯 처참한 상처 부위는……. 아, 남자의 몸이 마네킹처럼 딱딱해지고 있었다.
‘삼촌……. 삼촌, 일어나요. 삼촌…….’
인질로 잡혀 온 여자는 눈물과 콧물을 질질 흘리며 중년 남자를 연신 흔들었다. 하지만 남자의 몸은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고, 차가운 겨울 날씨에 싸늘한 얼음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드라마와 영화 같은 죽음은 없었다. 고귀하지도, 심지어 축축하지도 않았다. 한 남자의 끝은 너무나 건조했다.
‘끅! 끅…….’
고개를 돌리자 배신자 여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머리를 처박는다. 입에는 천이 물려 있었고, 얼굴을 가격당해 이빨이 빠졌는지 입술 사이로 피가 질질 흘러내렸다. 노인은 악귀 같은 얼굴을 유지하며 너무나 가차 없이 개머리판을 휘두르고 있었다.
‘죽이지 마요.’
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노인은 한이 섞인 숨을 훅 내뱉으며 화를 삼켰다. 절대로 죽이면 안 된다. 사람을 팔아먹는 꼬리의 진상을 확인한 이상, 피해자를 확인하고 부랑자들에 관한 정보. 그리고 또 다른 끄나풀에 대한 정보까지 들어야 했다.
난 빠르게 겉옷을 벗어 울고 있는 여자와 한쪽에 주저앉아 있는 또 다른 남자에게 입혀 주었다. 하지만 여자는 내가 건네준 옷을 벗어 이미 죽어 버린 남성에게 입혀주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난 그런 그녀의 손을 막고 또 막으며 현실을 인식시켰다.
‘삼촌이 추워요……. 삼촌이…….’
‘죽었어요.’
현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체온이 더 떨어지면 여자마저 죽고 만다. 그런데도 여자는 아직 힘이 남아 있는지 내 손을 뿌리치고 내 팔과 가슴팍을 밀어낸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그 자리에 서서 살아남은 그녀에게 현실을 받아들이게 했다.
남자가 죽은 싸늘한 골목에는 피가 난자된 눈과 불어오는 찬 바람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랑자들이 입고 있는 옷 중에 그나마 깨끗한 것들을 모조리 벗겨 남자와 여자에게 입혀 주었다. 다량의 핫팩과 빠른 응급처치로 위급한 상황은 면했지만,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했다. 난 기절한 여자를 둘러업고, 정신이 나간 남자의 팔을 꾹 잡았다.
배신자 여자는 정신을 잃었고, 팔다리가 전깃줄로 묶였다. 노인은 정말 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배신자 여자를 어깨 위로 둘러업었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을 피해자와 공범을 찾기 위해선 꼭 살려 데려가야 했다.
이제 에덴으로 복귀할 시간이다. 우리는 시체들을 눈 사이로 파묻고 에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문 열어! 의료진! 의료진도!’
난 정문이 보이자 다급하게 뛰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러자 정문 쪽에선 알겠다는 무전과 함께 예전과는 다른 분주한 움직임을 보여 줬고, 내가 중간쯤 도달하자 정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난 그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신이 나간 남자는 이곳까지 걸어오면서 두 번인가를 주저앉았다. 발을 살펴보니 심각한 동상과 함께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양말을 벗어 남자에게 신겨 주었고, 나중에는 신발마저 내 것으로 바꿔 주었다.
내가 업고 있는 여자는 심장 박동이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에덴으로 가는 내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인질들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난 조급함을 느끼며 모든 힘을 뛰는 것에 쏟아부었다. 이미 온몸은 땀투성이였고, 시야는 흐릿해졌다.
저 멀리 정문을 통과하고 이곳으로 달려오는 김 철을 발견하자 온몸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고, 노인은 거칠게 배신자 여자를 내려놓았다. 김 철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여자와 남자의 상태를 확인했고, 이내 빠르게 병원으로 호송시켰다.
난 그제야 거친 숨을 내뱉었으며 덜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아, 정말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 내가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갑자기 따뜻한 무언가가 나를 끌어안는 걸 느꼈다. 누구지? 알싸한 알코올 향이 솔솔 풍겼다.
‘동윤 씨! 동윤 씨가 두 사람 살린 겁니다.’
나를 끌어안은 사람은 어느새 다가온 김 철이었다. 내가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자 김 철은 흐뭇하게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칭찬? 다 큰 성인 남성에게 칭찬을 받자니 기분이 참 묘했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감정이었기에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김 철은 그것을 끝으로 호송되는 환자를 다급하게 따라갔다. 이 추운 날씨에도 땀으로 푹 젖은 의사 가운을 팔랑거리는 그를 보고 있자니, 옛날 생각도 나고 그리운 기분이 물밀 듯 몰려왔다. 난 천천히 멀어지는 그를 바라보며 주머니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이곳으로 좀 와 주십쇼.’
난 조용히 은테 안경을 호출했다.
* * *
에덴은 다시 한 번 발칵 뒤집혔다. 단체장은 불같이 화를 내며 배신자 여자의 사무실과 집을 압수 수색을 했고, 직속 경비들은 완전무장한 채 에덴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그동안 우리는 은테 안경과 함께 배신자 여자를 이끌고 우리 사무실로 들어왔다.
우리는 사무실 한가운데에 배신자 여자를 묶어놓고, 경과보고와 임무 일지를 빠르게 제출했다. 그렇게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단체장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구석에서 무전을 확인하던 은테 안경은 서류들을 챙기며 나에게 말했다.
‘부랑자 탐색조에게 모든 권한을 일임하셨습니다. 그리고 뒷일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 뭐든지 하라고 그러시는군요.’
‘당연히 그래야지.’
노인은 한쪽 입술을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아까부터 저 여자를 노려보는 게,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참고 또 참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 여자, 생각보다 여기저기에 뻗은 줄이 많았다. 여자가 잡혔다는 소식과 함께 일부 간부들이 반발하며 단체장을 찾아갔고, 제대로 된 재판을 열자고 항의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쳐 날뛰는 단체장은 무장한 경비들을 동원해 간부들을 모두 내쫓았고, 순식간에 계엄령 비슷한 조처를 했다. 모든 인원들은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으며, 에덴 내부는 해가 지기도 전에 모든 움직임이 사라졌다.
은테 안경은 서류를 뒤적이다가 가방에 조용히 챙겼고, 까먹은 게 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 그리고 저 여자의 집에서 대량의 마약이 나왔습니다. 출처는 조사하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럼 저녁 드시고 회의할 때 뵙겠습니다.’
이런 순간에도 한 치 흐트러짐을 허락하지 않는 은테 안경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사무실에서 재빠르게 나가 버렸다. 그것은 사형선고와 같았고, 우리에게 마음대로 하라는 무언의 허락이었다. 그 순간 배신자 여자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렸고, 막힌 입에서는 연신 읍읍 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현장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 주던 여자였다. 자신에게 힘이 되어 줄 다른 간부들을 믿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은테 안경의 보고가 이어질수록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졌었고, 지금은 열렬하게 목을 흔들며 자기변호를 하기 위해 읍읍 거렸다.
노인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숨을 훅 내뱉었고, 이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를 꼭 나쁜 사람 만들어요. 그치?’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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