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익숙한 느낌이다. 모든 신경이 비명을 지르며 나에게 보내는 위험경고. 소리가 들리나? 아니,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혹시 시야는? 하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정면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 신경을 서서히 갉아 먹은 경종은 뻣뻣하게 굳은 내 몸을 움직이게 했다.
손을 뻗어 총을 잡는다. 묵직한 소리가 들리는 순간, 고요했던 침묵을 깨지고 지구대 내부에서 쉬고 있던 모든 인원이 나를 바라본다. 노인은 내 행동이 익숙한지 벌써 일어나 허겁지겁 무장을 하고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움찔거리는 귀를 집중했다.
‘형님……?’
용팔이가 조용히 나를 부른다. 난 그 순간 손을 뻗어 용팔이의 입을 다물게 하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바람 소리, 바람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그 좁은 틈새 하나로 실낱같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박다혜랑 김혜정은? 아직 오지 않았다. 분명 지구대 옆이라고 했는데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화장실을 간지 얼마나 지났지? 2분? 3분?
난 총을 앞으로 들었고, 황급히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사람. 내 눈빛만 봐도 행동해 주는 사람. 다른 일행들은 넋이 빠져 있고, 오직 노인만이 나와 눈을 마주치며 빠른 교감을 나눴다. 영감님, 높은 곳으로!
노인은 크로스 보우를 황급히 잡고, 볼트를 들고 있는 용팔이를 끌어당겼다. 노인은 항상 그렇듯 지구대 2층으로 올라가 나를 엄호할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문을 넘어 지구대 정면으로. 난 앞으로 세운 총에 재빠르게 착검을 마친다. 그 순간이 5초도 지나지 않았지만 내 눈앞에 대검은 천천히 춤을 추고 있었다.
탁. 탁. 탁.
지구대 바닥을 박차는 소리가 고요하게 울린다. 내 몸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움직이고 있었고, 위험을 감지한 신경은 터질 듯 팽창하기 시작한다. 지구대 유리문이 보였고, 난 그것을 몸으로 밀친다. 그리고 박다혜와 김혜정이 갔던 방향을 향해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보인다.
나는 지구대 옆에 위치한 흡연구역에 많은 인원이 모여 있는걸 발견했다. 5명? 6명? 저 많은 인원이 움직이는데 왜 소리를 듣지 못한 거지?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내 눈알은 또르르 굴러갔고, 그놈들 신발 위에 시선이 멈췄다.
그들의 신발은 더러운 천들로 칭칭 감겨 있었고, 설피 같은 장치가 발아래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한 장비가 분명했다.
‘읍……! 읍!’
그리고 그놈들 사이로 강제로 억눌린 김혜정의 비명이 들려왔다. 김혜정이 들고 나갔던 빈총은 바닥에 형편없이 떨어져 있었고, 그녀의 입안에는 비명을 막기 위한 더러운 천들이 꽉꽉 막혀 있었다.
볼일을 마치고 걸어오는 사이에 습격을 당한 것이다. 미행당한 건가? 아니다, 우리 일행을 공격할 목적으로 따라온 것이라면 김혜정과 박다혜는 이미 죽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아직 멀쩡했고, 저놈들은 우리가 있는 지구대 쪽으로 시선을 주지 않고 있다.
분명 우리가 있다는 걸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무리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그녀들의 모습을 본 순간 내 손끝은 움찔거렸고, 홍채와 근육은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거세게 반항하고 있었지만, 사방에서 몰아치는 폭력 앞에 피와 눈물을 흩뿌렸다. 그리고 드문드문 들려오는 음침한 남자들의 웃음소리는 내 귀를 간지럽혔다.
지금 상황을 이해했다.
나는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저런 광경을 수없이 봐 왔고, 이제는 온 세상에서 벌어질 참극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는 화가 난 것이 아니다. 이 감정은 그저 평화로운 일상에 젖어 한순간 상황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나에 대한 경멸일 뿐이었다.
왜 방심했지? 왜 그녀들만 보냈지? 넌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안일하게 행동한 거지? 내 정신을 끊임없이 자학하고 채찍질한다. 평화로운 시간 속에서 잔뜩 물렁물렁해진 내 정신은 다시 한 번 악귀처럼 물들기 시작했다. 긴장감과 사선 사이를 줄타기하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인원이 많고 흡연구역은 좁다. 내가 저곳으로 난입한다면 근접에서 치고받는 육탄전이 될 것이다. 난 총에 착검 된 대검을 재빨리 빼 들고, 공격 리치를 좁혔다.
박다혜는 머리채를 잡혀 울음을 터트렸고, 김혜정은 사방에서 다가오는 더러운 손길을 피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철저한 계획? 방심한 적을 박살 내는 습격? 어떤 것이든 좋았다. 무조건 우리가 유리했고, 심지어 원거리 무기를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절대 성급하게 공격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내 판단 속에 그런 요구는 없었다. 내 머리가 외친다. 저곳에 난입해서 숨통을 끊어라. 마치 살코기가 목적인 그놈들처럼 난 내 본능과 살의 앞에 몸을 맡겼다. 생각은 사라지고 대검을 꾹 잡고 있는 손안의 감촉만이 느껴져 왔다.
심장에서 시작된 증기는 머리에 남아 있는 냉기와 만나 액체를 만든다. 농축되고, 또 한 번 농축된 액체는 한곳에 모여 바닥을 향해 똑 똑 하고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뜨거운 분노도 아니고, 차가운 철혈도 아니었다.
이것은 그저 날카롭게 갈린 나의 정수였다.
뛰어오는 발소리가 들리자 그놈들의 시선이 한순간 나에게 꽂힌다. 그놈들은 상황판단이 안 되는지 당황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지척에 온 나를 보며 어? 어? 하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직도 모르는 걸까? 너희가 그랬던 것처럼 나도 똑같이 왔다.
나에게 어설프게 날아오는 쇠파이프를 피해내고, 대검 손잡이를 꽉 잡는다. 그리고 당황한 상태로 가만히 서 있는 놈의 머리채를 잡았다. 세상이 느려지고, 심장 소리에 맞춰 세상이 점멸한다. 하지만 내 몸은 충실하게 명령을 받으며 하나를 앗아간다.
복부에 대검을 조준해 그대로 찔러 넣는다. 하지만 아래가 아닌 위로 추켜올린 날은 갈비뼈를 통과해 횡격막을 찢는다. 섬뜩한 소리가 울리고, 내 손끝으로 찌르르 울리는 감촉이 전해져 온다.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고, 오직 분노만이 내 머리를 채운다.
‘너, 너 뭐야!!’
이제야 세상이 빠르게 흘러갔다. 그놈들은 자신의 동료가 죽자 대가리가 돌아가는 모양이다. 무언가 나사 하나 빠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그놈들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고, 이내 각자의 무기를 들고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내가 찌른 놈이 피를 꾸역꾸역 내뱉으며 마지막 숨을 훅 내뱉는다. 그 눈동자에는 후회와 고통. 그리고 미련이 줄줄 흘러내렸고, 입김에선 역겨운 구린내와 본드 냄새가 풀풀 풍겨왔다. 하지만 나는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그놈의 눈동자를 매몰차게 무시했다. 아니, 도리어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며 그의 죽음을 빠르게 지켜보았다.
여기서 다 죽는다.
칼을 빼내자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리고 회칼을 뽑아 들고 나에게 달려오는 놈을 향해 죽어 버린 시체를 밀쳐 버렸다. 그러자 어어 소리와 함께 진형이 무너졌고, 난 재빠르게 다음 목표를 찾았다.
나는 마치 양 떼 속에 파고든 늑대처럼 어지럽게 몸을 비틀었다.
시체와 부딪혀 바닥에 넘어진 놈을 향해 재빠르게 달려가 목을 그어 버린다. 피는 팍 솟구치고, 내 얼굴과 가슴팍을 더럽힌다. 그놈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오르는 목을 꾹 막고 바닥을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근처에 있던 흰 눈은 더러운 피로 붉게 낭자 된다.
하지만 아직도 4명이 남아 있다. 내가 눈을 가린 피를 소매로 닦아 내는 사이에 내 뒤로 접근한 한 놈이 머리를 향해 야구 방망이를 휘두른다. 머리가 쭈뼛 서고, 뒤통수가 뻣뻣하게 아려온다. 피가 터지고 살이 찢기는 현장에서 난 100% 집중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살벌한 둔기가 내 머리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찰나의 순간 갑작스레 움직인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난 이를 악물고 소리 없는 고함을 내뱉었다. 시간과 한계 앞에 온몸으로 저항을 시작했다.
나에게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그놈의 몸이 바닥으로 훅 꺼진다. 그 위에는 어느새 달려온 두식이가 있었다. 분노한 두식이는 마치 난폭한 짐승처럼 그놈을 때려눕히기 시작했다. 육편이 찢기고, 살이 터지는 소리가 살벌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세가 역전된다. 남은 놈들은 함부로 달려들지 못하고 연신 눈치만을 살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새 뒤로 돌아온 강 형사가 도망가려고 뒷걸음질 치는 놈에게 총검을 찔러 넣는다. 등판에 박힌 대검은 가차 없이 심장을 자르고 빠르게 목숨을 앗아간다.
난 피로 절인 대검을 꾹 잡았다. 따뜻한 피는 뚝 뚝 떨어지고, 차가운 흰 눈을 녹인다. 남은 것은 두 놈, 강 형사가 막고 있는 한 도망갈 길은 없다. 남아 있는 두 놈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지 마지막 발악을 하기 시작했다.
박다혜의 머리채가 잡힌다. 그리고 날카로운 회칼이 그녀의 목을 향했다. 인질을 잡게 된 그놈은 떨리는 눈동자로 우리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놈은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하더니 이내 우리를 향해 크게 외친다.
‘오, 오지 마!’
병신들치고는 판단이 영리하다. 난 그 자리에서 우뚝 멈췄고, 사람을 곤죽으로 만든 두식이도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우리의 얼굴은 평안하기 그지없었다. 그저, 눈물을 질질 흘리며 떨고 있는 박다혜에게 시선을 고정할 뿐이었다.
퉁-.
죽음을 노크하는 건조한 소리가 대기를 찌르르 울린다. 노인이 2층에서 발사한 볼트는 아름다운 선을 그리며 날아갔고, 이내 박다혜의 머리채를 잡고 있는 놈의 대가리를 관통한다. 두개골을 부수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놈은 바닥에 형편없이 쓰러진다.
이제 마지막 한 마리가 남았다.
그놈은 동료가 머리가 깨져 쓰러지자 히익 소리를 내며 자빠졌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업보였던 것처럼 피로 점철된 흰 눈은 그놈을 끌어당기고 더럽혔다. 난 가만히 발버둥 치는 금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놈이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한 그때 두식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두식이는 볼트가 장전된 크로스 보우를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것을 받아들고 살며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개머리판을 견착하자 조준점 사이로 허둥지둥 도망가는 금수 한 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숨을 훅 내뱉자 입김이 화약 연기처럼 눈앞에서 흩어진다.
내 조준점은 도망가는 그놈 허벅지에 고정된다. 숨을 삼킨다. 그리고 내뱉는다. 후욱하는 들숨이 들어가고, 분노로 달궈진 날숨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내린다. 흔들리던 조준점은 마치 영상을 멈춰둔 듯 고정되었고, 이내 내 손가락은 방아쇠를 당겼다.
퉁-.
볼트가 날아가 달리고 있는 그놈 허벅지에 꽂힌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놈은 바닥에 넘어졌고, 이내 허벅지를 잡으며 벌레처럼 꿈틀거린다. 난 크로스 보우를 다시 두식이에게 넘기며, 내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강 형사에게 말했다.
‘저 새끼 살려서 데려와요.’
강 형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빨리 복귀하자.’
노인이 2층 계단을 밟으며 내려왔고. 난 동의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박다혜를 꼭 안고 있는 김혜정을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은 엉망이었고. 머리와 옷은 모두 눈과 피에 더럽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김혜정은 떨고 있는 박다혜를 연신 달래며,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을 그녀에게 입혀 주었다. 용팔이는 가방에서 허둥지둥 치료 도구를 꺼내 왔고, 이내 김혜정과 박다혜의 상처를 살피기 시작했다.
박다혜는 모든 상황이 해결되었음에도 강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꼭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와 몸을 떨었고, 김혜정에게 찰싹 달라붙어 절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난 몰려오는 죄책감과 자기비하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내 잘못이다. 이곳으로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여기까지 온 내가 멍청한 거였다. 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차마 다가갈 용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더 결단력 있게, 더 현명하게 생각했어야 했다.
하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동윤아.’
노인이 옆으로 다가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내가 아직도 잡고 있는 대검을 놓게 했다. 피로 점철된 대검은 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고, 그 칼날을 타고 내려온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네 잘못 아니다.’
난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손에 묻은 피를 바지에 닦으며 눈을 천천히 감았다. 내 팔을 떨려 왔고, 입 밖으로 내뱉은 말 또한 바람을 맞은 잔가지처럼 파르르 떨려 왔다.
‘아니요. 내 잘못 맞아요.’
그동안 쌓아 올렸던 일상이라는 블록들이 우수수 무너져 내린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매듭은 다시 팽팽하게 당겨 왔고, 식어 있던 신경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뜨겁게 달궈졌다. 내가 방심하면 다 죽는다, 내가 실수하면 다 죽는다. 안일했던 생각들은 모조리 버리고, 그사이를 긴장과 악귀가 비집고 들어온다.
덜컹.
‘으……. 으!!’
그놈의 신음과 함께 지구대 문이 열리며, 무서운 표정을 한 강 형사가 들어온다. 그의 뒤로는 허벅지에 볼트가 꽂힌 놈이 피를 질질 흘리며 강제로 끌려오고 있었다. 놈의 입에는 그녀들이 당했던 것처럼 더러운 천들이 꽉 꽉 막혀 있었고, 얼굴은 강 형사의 폭력으로 인해 퉁퉁 불어 있었다.
난 용팔이와 두식이를 향해 말했다.
‘김혜정이랑 박다혜 데리고 2층으로 가 있어.’
그리고 나는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것은 가져간 대검을 다시 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한참 동안 고민하며 대검과 나를 번갈아 바라봤다. 노인의 고민과 나의 고민이 일치한다. 이 대검을 건네준다면 예전에 나를 다시는 못 볼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받아야 했다.
노인과 나는 한참을 마주했고, 소리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잠시 후 내 완고한 태도 앞에 노인은 결국 포기했고, 이내 대검을 돌려 손잡이 부분을 나에게 내밀었다.
난 그것을 건조하게 받아들고, 강 형사 앞에서 지랄발광을 하는 그놈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시간이 많이 없었지만 물어볼 것은 많았다.
그것이 본거지의 위치일지, 아니면 비명일지는 양이 선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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